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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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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Российская Федерация〉
Russia
러시아
이름
러시아 연방
수도
모스크바
클레이
17,098,246 km²
별명
불곰국, 좆시아
소속
언어
러시아어



1. 개요2. 지도 및 영토
2.1. 지도2.2. 연방주체 목록
3. 역사
3.1. 중세3.2. 근세
3.2.1. 루스 차르국3.2.2. 혼란 시대 후, 로마노프 왕조의 시작3.2.3. 표트르 대제의 개혁
3.3. 근대3.4. 현대
3.4.1. 소련 해체 이후
4. 컨트리볼 만화에서5. 기타



번호
HEX 코드
1
#FFFFFF
2
#0036A7
3
#D62718


1. 개요 [편집]

로쓰까야 연방(россиская федерация). 도길은 루쓸란트 (russland)라고 부른다.

보드카를 좋아한다. 웃음소리는 ХАХАХАХАХА.[1]

소련의 아들이지만 다행히 도길처럼 소련으로 변하는 기믹은 없다. 하지만 가끔 소련에 속했던 국가들과 합쳐져서 소련이 되기도 한다.

호모포비아여서 캐나다스웨덴[2]을 싫어한다.

2. 지도 및 영토 [편집]

2.1. 지도 [편집]

2.2. 연방주체 목록 [편집]

3. 역사 [편집]

3.1. 중세 [편집]

3.1.1. 투르크 제국들의 지배 [편집]

동유럽 국가들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슬라브인들의 기원은 명확치 않으나 우크라이나, 폴란드, 발칸반도 등 동유럽 일대에 퍼져 있던 동게르만족들이 4 ~ 5세기 훈족의 침입으로 서쪽으로 대이동하자, 5 ~ 6세기 동쪽에서 슬라브족들이 이 지역으로 이동해와 현재의 우크라이나 지역을 중심으로 정착, 영역을 확장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슬라브인들은 동유럽으로 진출한 중앙아시아의 아바르족, 하자르족 등 여러 투르크계 유목 민족들에게 차례로 정복을 당해 그들의 노예로 지내야 했다. 3세기부터 스텝을 따라 동유럽에 진출한 투르크족들은 이 지역의 동슬라브인들을 지배했다. 5세기부터는 신흥 투르크계 아바르 카간국에 정복되었다. 이후 하자르 카간국 시절을 거쳤다. 투르크족의 지배는 10세기 키예프 공국이 본격적으로 영역을 확장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오랜 투르크족들의 지배로 인해 그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심지어 일부 동슬라브인들은 투르크어를 사용하며 투르크족에 동화되기도 했다. 동슬라브인들은 특히 하자르족 문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때문에 서유럽에서는 오랫동안 그들을 유럽과 이질적인 존재로 여겼다.

역사학자들은 투르크족, 특히 하자르족의 지배로 인해서 동슬라브족이 이슬람화되지 않았다고 평하고 있다. 하자르는 7세기 이후 파죽지세로 세력을 확장해나가는 이슬람 제국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그들이 동유럽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했기 때문이다.

3.1.2. 루스 카간국 [편집]

이후 8세기 말부터 루스(Rus)족[3](바랑기아인)이 바다를 건너 러시아 땅에 도래했다. 루스족은 스웨덴 쪽에 살던 노르드인(바이킹)의 일파였다. 루스족은 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 라도가 호수[4]에 요새를 건설, 정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북유럽에서 도착했던 루스족/바랑기아인들은 주로 교역에 목적을 두고 왔기 때문에 독립적인 세력을 키우고자 하는 의지는 별로 보이지 않았던 것 같으나 시간이 흐르며 점차 많은 노르드인들이 합류하며 세력이 강해졌고, 이들은 차차 강을 따라 내륙으로 진출하며 현지 토착 슬라브족들을 정복, 혹은 교류하며 정착지를 넓혀나갔다. 이 시기(8세기 말에서 9세기 초 ~ 중반) 현 유럽 러시아 지역에 루스족들의 정체(政體)를 현대 역사학자들은 루스 카간국이라고 한다.

3.1.3. 노브고로드 루스 - 키예프 루스 [편집]

9세기 초중반 루스족의 일파는 러시아 내륙, 벨리키 노브고로드 일대까지 진출하여 정착했는데, 이 루스인들은 현지인(슬라브인, 추드인, 크리비치인, 메레인, 벱스인)들에게 무리하게 공물을 받으려 했고, 현지인들은 이에 반발하여 저항하여 루스인들을 북쪽으로 내쫓았다. 하지만 현지 부족들은 서로 간에 싸움을 멈추지 않았고, 그들(루스인, 바랴기)을 찾아가 자기들 대신 통치하여 질서를 잡아주기를 청하였다.[5]

이에 류리크가 이끄는 루스인들은 노브고로드 지역에 정착촌을 만들어 862년 노브고로드 루스(노브고로드 공국)를 건국했다. 류리크가 죽고 제2대 노브고로드의 올레그가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을 정복한 뒤 중심지를 그쪽으로 옮겨 키예프 루스로 이어졌고, 옛 수도 노브고로드도 계속 중요시되었다. 즉 이 노브고로드 루스가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공동 기원이 되는 나라다. 때문에 러시아 제국에서는 1862년에 건국 1,000주년 기념 행사를 하기도 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의 기원이 되는 국가를 건설한 류리크는 원초연대기에 루스인(즉 노르드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러시아로 치면 단군 할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외국인이라는 건 러시아 입장에서 거부감을 일으키다보니 러시아 학계에서는 이는 오류라고 주장하며 류리크가 동슬라브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3국의 공통 시조가 되는 루스 카간국은 스웨덴에서 건너온 북유럽인(바이킹)[6]들이 세운 나라이다. 다만 이 지역에는 슬라브족의 이동 당시에 이주한 현지 슬라브인 살고 있었고, 이들과 어느 정도 공존했을 가능성이 점쳐지고는 있지만 확실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즉 최초의 노브고로드 루스는 순수 루스인(바이킹)들로만 구성된 나라였을 수도 있고, 루스인들과 이들보다 먼저 현지에 정착해 있었던 슬라브인이 함께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체로 노르드인과 슬라브인들이 어떤 형태로든 공존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후 노브고로드 공국과 그 후신인 키예프 루스는 주변 슬라브인들을 복속하며 적극적인 팽창을 했기 때문에 슬라브인들이 피지배 계층을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분명한 것은 지배계층은 루스인들이었고, 노브고로드 공국과 그 후신인 키예프 루스(키예프 공국)은 노르드인들의 문화가 지배했던 나라였다.

스웨덴계 노르드인의 일파인 루스족이 현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건국 시조라는 이 노르드설은 현재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역사가들을 제외한 세계 역사학계에서 사실상 정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쪽에서는 동슬라브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에서 역사적으로 상당히 민감한 주제다.[7] 역사와 민족주의가 결합된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노브고로드 루스를 세운 류리크는 부하 장군인 아스콜트, 디르를 남쪽으로 파견했고, 이들은 키예프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한편 노브고로드 공국에서는 류리크의 후계자로 올레크 베시가 등극했으며, 882년 올레크 베시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키예프를 지배하고 있던 아스콜트와 디르를 죽이고 일대 부족들을 점령해 나가면서 키예프를 수도로 하는 키예프 루스를 세웠다. 올레크 베시는 이후 키예프를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슬라브족들을 정복해 나가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이후 키예프를 중심으로 하여, 노브고로드 공국, 폴로츠크 공국, 체르니고프, 야로슬라블, 로스토프, 갈리치아-볼히니아 등의 여러 공국들이 성장하였다.

이렇게 초기 러시아사의 중심지는 북쪽의 노브고로드와 서쪽의 키예프 일대였고 현대 러시아의 중심지인 모스크바 쪽은 소공국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황금의 고리) 아직 루스 공국들 사이에서도 변방이었다. 당시 키예프 공국은 '여러 루스 도시의 어머니'로 불리며 대부분의 루스를 영향권 하에 두었고 이곳의 지배자는 대공이라고 불렀다.

10세기, 쿠데타를 일으켜 친형 야로폴크 대공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하여 통치자가 된 블라디미르 대공은 종교를 수용하기로 결정,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로마 가톨릭, 동방 정교회) 등을 탐색한 결과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를 선택하여 국교로 삼았고[8]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형제들을 살해하고 권력을 찬탈한 블라디미르는 동방 정교회의 성인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블라디미르의 아들 야로슬라프 대공은 루스 최초의 고대법전인 <루스카야 프라우다>을 창립했고, 이후 야로슬라프의 종손 야로슬라프 모노마흐 대공까지 황금시대가 10세기를 전후해서 100년 정도 이어졌다. 키예프는 대도시로 번영을 누렸으며, 농민은 농노 신분이 아닌 자유민 신분으로 민회에서 참정권까지 가졌다.

이러한 키예프 루스의 번영은 동로마 제국서유럽 사이의 무역로 덕분에 가능했다. 지중해의 무역이 아랍 해적들에게 방해받은 탓에 흑해에서 드네프르 강을 타고 키예프 지역을 통해 발트 해로 둘러가는 무역이 성행했던 것. 아울러 블라디미르의 손녀 가운데 한 명은 프랑스 왕, 또 한 명은 헝가리 왕, 셋째는 노르웨이 왕과 각각 결혼해 서유럽과 많은 연결선을 유지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을 전후해서 사라센 해적들이 약해지고, 베네치아 등의 지중해 무역국가들이 성장해 직항로를 트게 되면서, 상인들의 발길이 뜸해지며, 아시아 유목 민족인 플로프치족(혹은 쿠만족)이 스뱌토슬라프와 블라디미르가 쳐놓은 방어선을 뚫고 들어와 1095년 키예프를 점령했다. 이로서 루스의 황금시대는 끝나고 키예프도 몰락한다. 이후의 공국들은 끊임없이 갈라지고 쪼개진 상태였으므로 나라다운 나라라고는 노브고로드 공국, 블라디미르-수즈달, 할리히-볼히니아 정도에 불과하였다.

3.1.4. 몽골-타타르의 멍에 [편집]

사실상 본격적으로 전환기에 들어선 것은 몽골 제국의 침략에서 시작되었다. 키예프 공국이 위치했던 드네프르 강 일대의 평원은 토질이 매우 비옥한 평야 지대여서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으나, 특성상 제대로 방비하지 못할 경우 유목민의 침략에 취약했다. 한마디로 키예프 공국의 위치는 양날의 검이었던 셈이고 몽골 제국은 키예프 공국이 제대로 방비할 역량이 부족했던 시점에서 침략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키예프 공국을 위시한 수많은 공국들은 몽골에게 있어서는 불쏘시개나 다름없었다. 사준사구라 불리는 8장군의 일원이던 제베와 수부타이가 돌아가던 중에 살짝 툭 치고 간 것만으로도 빈사 상태에 빠졌고, 제대로 갈아엎으며 지나가자 저항 한 번 못해보고 대부분의 공국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봄이 되자 몽골 기병들이 녹아서 뻘투성이가 된 땅에 질려 철수하면서 운 좋게 침략을 면한 노브고로드 공국과 그 외 살아남은 공국들은 키예프처럼 완전한 멸망은 면한 대신 동시대 고려의 원 간섭기와 비슷하게 몽골에게 상납금을 바치는 속국 신세로 전락했다. 이들 중에서 모스크바 공국은 몽골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다른 공국들과 달리 몽골의 비위를 잘 맞춰 주며 지냈고, 14세기에 킵차크 칸국의 공주와 정략 결혼하는데 성공하며 이후 러시아 지역의 조세(상납금)를 징수하여 몽골에 바치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9] 이후 주변 공국들로부터 상납금을 걷어 몽골에 바치며 주변 공국들에게 갑으로 행세하게 되었고, 동시에 모인 돈을 적당히 떼먹으면서 성장했다. 몽골인들은 직접 러시아를 관리하는 것보다 적당히 공물을 징수하다가 트집을 잡고 쳐들어가서 노예를 잡아오는 편을 선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키예프에 있던 정교회 대주교가 모스크바로 주교좌를 옮기게 되면서 종교적 중심지의 역할까지 수행하게 된다.

러시아의 역사가들은 1480년 모스크바 공국군과 킵차크 칸국이 대치하다 그대로 전투없이 철군한 우그라강 전투 때를 기점으로 러시아가 몽골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본다. 루테니아와 러시아 일대에서 몽골 세력의 위상은 14세기 초부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팽창으로 인하여 급속히 추락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마침내 1483년 이반 3세는 킵차크 칸국과 맺은 조공계약을 불태워 버리면서 전쟁을 걸었고, 러시아 정교회 주교들이 모스크바를 도우라고 열변을 토하자 거의 모든 공국들이 서방의 십자군 비스무리한 연합군을 결성한다. 그리하여 싸움 끝에 몽골군을 몰아내면서, (그리고 말 안 듣는 공국들을 때려 잡으면서) 현재의 러시아가 시작되었다.

모스크바 대공의 경우 프랑스의 카페 왕조처럼 지속적으로 후계자를 낳으며 계승구도를 확실히 했다. 모스크바 공국 발전 초기에는 대공계승에 적장자라는 계승자가 확실히 있었기에 이전 키예프 러시아처럼 형제상속이 아닌 자연스럽게 장자상속으로 옮겨 갈 수 있었다. 모스크바의 지리적 이점과 더불어 이러한 정치적 안정이 있었기에 모스크바 대공국은 다른 루스계 공국과는 달리 힘을 길러서 킵차크 칸국을 물리칠 수 있었다.[10] 이후 이반 3세는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딸과 결혼하면서 자신을 차르, 곧 황제로 호칭한다. 그의 손자가 유명한 이반 뇌제이다. 이후 차르의 전제정치는 오랫동안 쭉 이어진다.

물론 몽골 제국으로 러시아의 권력구조가 대대적으로 바뀌면서 러시아가 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러시아가 대제국이 됐다는 말은 몽골 지배의 장점만을 보고 말하는 것이다. 우선 몽골 제국으로 인해 러시아의 문화는 키예프 시대에 비해 완벽하게 퇴보했다. 러시아가 다른 기독교 국가들과의 교류가 사실상 차단당한 상태에서 이런 퇴보는 더욱 악화되었다. 몽골의 침략으로 인한 문화적 피해를 복구하기까지 러시아는 몇 백 년이 걸렸으며, 러시아 제정 말기까지도 군사적인 면을 제외하고 러시아가 다른 유럽 국가에게 앞서는 것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또한 러시아가 대제국이 됐다는 점은 오직 영토가 커짐을 보고 하는 말이다. 러시아의 동방 개척은 모피 외에는 수출할 게 별로 없었던 그리고 동방 유목민으로부터 적극 영토를 방어해야 했던 러시아로서는 어쩔 수 없는 수 없는 생존 방식이었다.

속령 러시아 시절 러시아의 국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스웨덴 제국을 친다는 것은 말도 안 됐다. 또한, 러시아의 가장 큰 수출품은 모피였는데, 이 모피를 얻을 수 있는 동물 자원이 계속 고갈되면서 어쩔 수 없이 동진을 한 것이다. 당시 러시아에게 이 땅들은 아직은 탐험의 대상이었을 뿐이지, 지나치게 추운 날씨와 농경의 어려움 때문에 자신들의 영토로 생각하는 경우는 적었다. 러시아 제국이 동방의 중요성을 깨달은 시기는 제국주의 시대로, 그때에 이르러서야 러시아는 자국민을 동방으로 이민보내기 시작했다. 또한, 러시아가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하게 된 것은 표트르 대제 시절 지도 제작 때부터이다. 러시아가 위상과 군사력으로 대제국이 된 시기는 몽골 제국 덕이 아닌 표트르 대제의 개혁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표트르대제의 개혁 이전에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별다른 우위를 보이지 못했었다.

3.2. 근세 [편집]

3.2.1. 루스 차르국 [편집]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는 루스계 제후국들을 통합, 복속시키면서 세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고,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이반 뇌제는 기존의 대공이라는 명칭 대신 차르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루스 차르국을 선포한다. 이반 뇌제는 강력한 전제정치를 바탕으로 러시아의 국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한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1552년 카잔 칸국을 정복하고 1556년 아스트라한 칸국을 점령한다. 1583년에는 코사크 부대가 시비르 칸국[11]의 중심지 카실리크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반 뇌제가 정신줄을 놓은 틈을 노리고 크림 칸국모스크바를 불태우고 수만 명을 노예로 잡아갔으며, 뇌제는 일을 이것저것 벌려놓고 죽어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뇌제의 뒤를 이은 표도르와 그의 후계자이자 이반 뇌제의 아들이었던 드미트리와 표도르가 죽으면서 류리크 왕조에서 정식으로 이을 후계자가 아예 없어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물론 방계 가문은 많았지만 이 당시 러시아에서는 방계가 왕위를 계승한다는 개념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다.

3.2.2. 혼란 시대 후, 로마노프 왕조의 시작 [편집]

이때를 기점으로 러시아에는 자신을 차르라 주장하는 이가 여러 명 등장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 제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침범하면서 혼란이 가중되는 '혼란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러한 혼란 시대는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가 귀족회의를 통해 로마노프 왕조를 열면서 끝나게 된다. 비록 류리크 왕조는 사라졌으나 그 가문과 결혼한 사이였다는 이유로 로마노프 왕조가 생길 정도로 류리크 왕조가 만든 차르 전제정권은 강력했다. 귀족회의를 통해 올라왔다고는 하지만 차르의 권위는 여전했으며, 오히려 귀족들이 혼란 시대를 통해 세가 약해지면서 로마노프 왕조는 다시 긴 기간동안 강력한 전제정치를 이어가게 된다.

3.2.3. 표트르 대제의 개혁 [편집]

러시아는 동방 정교회 문화권인 반면 당시 발전하던 서유럽은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 일색이었던 것도 서유럽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많은 제한 상황을 만들었다. 또한 모스크바 대공국이 이반 3세와 4세를 시절 성장한 직후 일어난 동란시대로 러시아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며 큰 위기를 겪었다. 이렇게 여러가지가 맞물려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될 무렵의 러시아는 이웃국가들에 비해 국가 발전이 상당히 미흡했다.

하지만 로마노프 왕조(1613~1917)의 표트르 대제(1672~1725)의 적극적인 서구화 개혁 및 북방전쟁의 승전으로 인한 영토확장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표트르 1세는 1721년 러시아 황제의 명칭을 차르에서 임페라토르로 바꾸고 러시아 제국을 선포하였다.

3.3. 근대 [편집]

3.3.1. 러시아 제국의 팽창: 폴란드 분할, 크림 칸국 병합, 캅카스·핀란드 진출 [편집]

이 시기에 러시아에는 두 가지의 행운이 겹쳤다.

첫 번째 행운은 유럽의 군사력이 급격한 변혁기를 일단락하고 안정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기술을 외부에서 도입하는 것만으로도 그럭저럭 유럽의 군사기술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거대 국가로서의 이점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으므로 빠른 속도로 강대국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다.

두 번째 행운은 때맞춰서 프로이센 왕국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7년전쟁에서 오스트리아와 결정적으로 반목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러시아가 스웨덴 제국을 격파하고 동유럽에서의 세력균형을 무너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견제할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는데, 이는 한 나라가 강성해지면 주위의 다른 나라들이 연합해서 끌어내리는 것이 역사의 기본 패턴인 유럽에서 정말로 드문 현상이었다.[12]

덕분에 러시아는 주변의 여러 지역들을 잇달아 병합하면서 거대한 규모로 팽창할 수 있었다. 군사 기술이 향상되자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 정복과 진출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또한 1773년과 1795년에는 폴란드 분할에서 가장 큰 영역을 차지했고, 1783년에는 크림 칸국을 병합했다.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도 공세를 시작해서 1792년에는 동으로는 캅카스 지방의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서로는 드네스트르 강에 이르렀다. 북으로는 1790년에 스웨덴을 격파하고 핀란드로 진출했다. 결국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사활동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프로이센도 영국도 아닌 러시아였던 셈이다.

이후 러시아의 팽창에 제동이 걸린 것은 프랑스 혁명기에 들어서였다. 혁명으로 인해 프랑스의 군사력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면서 러시아의 확장은 일단 저지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수십만 대군을 털리고 알거지가 되는 바람에 마침내 러시아는 유럽에서도 최강국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프랑스가 균형을 잡아주지 않으면 러시아가 그 앞잡이인 프로이센(적어도 메테르니히의 생각으로는 그랬다)을 앞세워서 독일 지역과 유럽의 패권을 장악할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 이는 빈 체제에서 프랑스를 짓밟지 않고 오히려 프랑스의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적극적으로 인정한 이유 중 하나였다.

3.3.2. 러시아 제국의 쇠퇴 [편집]

그러나 겉보기에는 최신 트렌드를 따라가려는 모습과는 달리 경제수준은 계속 몇 세기 뒤를 달렸고, 여기에 서유럽의 군대가 다시 적극적으로 변혁을 받아들이게 되자 러시아는 또다시 빠른 속도로 뒤떨어지게 되었다. 당대 최강 무능장교들의 집합이었던 크림 전쟁(1853~1856)에서도 한 수 위의 무능함을 자랑하면서 연합군에게 패하여 러시아의 후진성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다 러일전쟁(1904~1905) 당시 일본 제국에 패배하면서 전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물론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고 일본 1년 국가예산의 5배에 달하는 예산을 써가며 전쟁을 치른 탓에 국가파산 직전까지 몰렸고 러시아는 장기전을 치른다면 이길 수 있었지만 피의 일요일 사건 등의 국내 정치 혼란으로 전쟁에서 발을 뺐기에 정작 일본이 승전국임에도 별로 얻은 것은 없다고 하나, 그 모든 점을 고려하더라도 러시아가 일본에 패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또한 실질적인 손익을 무시하고 당시에 만연한 인종주의적 시각으로 볼 때 그래도 '백인 국가'인 러시아가 '황인 국가' 일본에 패했다는 것 역시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그래도 만나기만 하면 펄펄 나는 상대가 있었으니 그것은 한창 막장 테크를 열심히 타던 오스만 제국(1299~1923)이었다. 거의 틈만 나면 오스만을 털어먹는 탓에 다른 유럽 국가들은 오스만을 살려두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다.[13]

3.4. 현대 [편집]

1918년 11월, 독일제국이 항복하면서 소비에트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아주 빠르게 파기해버리고 그것으로 독립한 국가들 역시 모두 찢어버리고자 하였다, 전시공산주의로 군사력을 크게 강화한 소비에트의 앞에서 강대하던 백군도 점점 약해지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소비에트는 4년 전 러시아 제국 시절 고토의 수복을 앞두게 되었으나, 뜬금없이폴란드가 우크라이나와 힘을 합쳐 소비에트의 후장을 털었고, 전쟁이 끝나자 우크라이나의 후장도 털어가는 만행을 저질러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게는 독립을, 러시아인에게는 분노를, 그리고 리투아니아에게는 반갈죽을 선물하게 되었다. 여하튼 분노한 러시아인들로 인해 내전은 빨리 끝났고, 결국 1922년 12월 30일에 자캅카스, 우크라이나, 벨로루시와 소련을 형성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소련 문서로

3.4.1. 소련 해체 이후 [편집]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 미국과 함께 명목상 세계 2위를 차지하던 소련은 1991년 12월 26일에 해체되었고, 러시아는 옐재앙의 만행으로 혼돈의 세기말을 보내게 되었다. 21세기를 맞이하며 그 뒤를 이은 푸짜르는 체첸 테러리스트를 소멸시키고 러시아를 안정시켜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그는 전 러시아에 자신이 가진 횡령의 기술을 보여주었고, 부패를 해결하지 못했으며 우크라이나에 '의용군'을 파견하는 등의 무시무시한 행동으로 결국 러시아의 수준은 30년 전과 비교해 별로 발전하지 못한 상태로 되었다, 신기하게도 이 '의용군'의 파견은 시간이 갈 수록 커지다 2022년 3월 들어서는 아예 공식적으로 우크라이나군을 '무장해제' 시킨다고 한다.


4. 컨트리볼 만화에서 [편집]

5. 기타 [편집]

  • 소비에트워에선 연합국 팀에 들어간 선역으로 나온다.(?)



러시아의 국기
국기 비율
2 : 3
[1] '카카카' / 'ㅋ하ㅋ하ㅋ하' (ㅋ소리에서 혀를 살짝 더 뒤로 빼고 목을 긁는다) Х가 목 긁는 소리가 난다고 한다.[2] 동성애를 합법으로 한 나라들 [3] 전설에 따르면 바이킹 수장의 아들들 중 하나인 루스란 남자가 이 일족의 시조라 한다.[4]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이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아래에 나오듯 후대에 정책적으로 조성한 계획도시고 이때는 늪지대에 불과했다.[5] 원초연대기에서 발췌.[6] '바랴기'라고 불렸다. 동로마 황제의 바이킹 출신 호위대인 바랑기안 친위대를 뜻한다.[7] 2차 대전 당시 게르만의 또다른 일파인 독일이 이 노르드 루스설 및 동방식민운동과 같은 여타 역사적 사례를 들먹이며 쳐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8] 블라디미르는 기독교로 결정하고 신하들을 동로마 제국신성 로마 제국으로 두 그룹씩 보냈다. 신성 로마 제국으로 간 신하들은 가톨릭 미사를 보았지만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고 보고한 반면, 동로마 제국으로 간 신하들은 정교회의 성찬예배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아 자신들이 신계에 있었던 건지, 지상에 있었던 건지라고 보고했다.[9] 당시 모스크바 공국의 대공이었던 이반 1세는 상납금을 수금받아 그 상납금을 바치면서 간간히 귀한 선물을 준비해 몽골 장군들에게 진상했고 이에 크게 기뻐한 몽골 장군들과 칸들은 이반 1세를 모든 러시아를 지배하는 권한을 주었고 상납금을 받을 권리를 주었다. 이후 이반 1세는 특유의 재산관리와 상납금을 이용해 몽골의 환심을 받았고 이후 돈주머니란 이름의 칼리타란 호칭을 얻었다.[10] 니꼴라이 V. 랴자노프스키 작, 러시아의 역사 1 '속령 러시아' 부분 참조[11] 시베리아의 어원이 되는 나라이다.[12] 사실 영국도 러시아와 비슷하게 변두리에 있고 수비하기가 유리한 지형이어서 프랑스나 독일 등보다 상당히 유리한 조건에서 강력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은 19C~20C에 걸쳐 가장 강한 대립각을 형성한다. 또한 일본도 이런 좋은 조건이 다 갖춰져서 도움이 됐다고 평가된다.[13] 애초에 크림 전쟁 역시 이런 상황 때문에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