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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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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Հայաստանի Հանրապետություն>
Armenia
아르메니아
이름
아르메니아 공화국
수도
예레반
클레이
29,743km²
별명
하야스탄, 에르메니스탄
소속
언어
아르메니아어



1. 개요2. 지도 및 영토
2.1. 지도
3. 역사
3.1. 고대3.2. 중세3.3. 근세3.4. 근대3.5. 현대
3.5.1. 소련 치하3.5.2. 소련 붕괴 이후
4. 컨트리볼 만화에서5. 관계도6. 기타
6.1. 대학살의 후유증
7. 갤러리



번호
HEX 코드
1
#D90012
2
#0033a0
3
#F2A800


1. 개요 [편집]

아르메니아는 서아시아 캅카스에 위치한 국가로 캅카스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작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다. 수도는 예레반이고 해발고도가 매우 높다. 1991년에 소련으로부터 독립했으며, 아제르바이잔과는 관계가 매우 안 좋으며, 2020년에 침공당한 전적이 있고, 대체로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영유권을 두고 싸웠었다. 그러나 2023년 아르메니아 정부가 공식적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며 일단락되었다.

2. 지도 및 영토 [편집]

2.1. 지도 [편집]



당장 위 지도만 봐도 작고 산투성이에다가 해발고도가 엄청나게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아르메니아인들은 트라브존, 킬리키아 등의 땅에 살았으나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 대학살으로 이렇게 안좋은 땅으로 쫓겨나게 된 것이다.

3. 역사 [편집]

3.1. 고대 [편집]

아르메니아인들은 캅카스 지역에 살고 있었기에 아주 오래전부터 캅카스 지역에 거주해 있었다.

아르메니아의 역사 중에 기록으로 확인할 수가 있는 최초의 국가는 고대 아시리아 제국 시절인 기원전 1270년경, 아르메니아 고지에 있는 반 호수의 주위에 있던 철기 시대 비인도유럽어족 Y하플로 G계열인 우라르투가 있었으며, 우라르투 붕괴 이후 아르메니아인들이 아르메니아 고원의 패권을 쥐게 된다.

아르메니아가 주장하는 고대 건국사는 바로 노아의 후손인 하야크가 기원전 2492년에 바빌로니아를 물리치고 나라를 세운 것이 바로 아르메니아에서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인 하야스탄이라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스스로 유태인 피가 흐른다고 주장하는 아르메니아인들과 유태인들은 오랜 갈등을 빚어왔다.

아르메니아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6세기인데, 예르반드 왕조라는 독자 왕조가 있었으나 메디아 왕국의 속국이었다. 이후 메디아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로 교체될 때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결국 사트라피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3세에 의해 페르시아가 망한 후에야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는데, 그나마 BC 201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공격으로 예르반드 왕조는 멸망했다.

하지만 셀레우코스 왕조에 의해 아르메니아의 스트라테고스 (사트라프)로 임명되었던 예르반드 가문의 왕자 아르타셰스(Արտաշես)가 곧 반란을 일으켜 아르메니아를 장악하고 아르타셰스 왕조(Արտաշեսյան)의 아르메니아 왕국을 세웠다. 캅카스 일대에서 차근차근 세력을 키운 아르타셰스 왕조는 기원전 1세기 티그라네스 대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아 시리아, 팔레스타인까지 영토를 가지고 동방의 강자로 부상하기도 했지만, 로마의 공격에 멸망하였다. 이후 서방의 강국 로마와 동방의 강국 파르티아(이후 사산 왕조 페르시아)사이에 끼어 몰락의 길을 걸었다. 아예 지배 왕조가 파르티아계인 아르사케스 왕조로 교체되기도 했다. 아르메니아어로는 아르샤쿠니 왕조라고 하며, 이란 본국의 아르사케스 왕조가 페르시아계인 사산 왕조에게 멸망당한 뒤에도 아르메니아에서 토착화하여 202년간 더 존속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원래 조로아스터교의 분파를 신봉하는 등 이란과 문화적으로 매우 가까웠으나, 이란에 사산 왕조가 들어서면서 점차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서기 288년 왕위에 오른 티리다테스 3세는 로마 제국을 모방하여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도입하여, 군사력 강화와 상업 발전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4세기 초,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313년)하기도 전에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것이 392년이니 무려 80년 이상 앞선 것으로,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는 자국이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였다고 자랑하고 있다. 교회는 독자적인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이다.

3.2. 중세 [편집]

7세기 이후 동로마가 소아시아를 상실한 이후부터 이슬람교가 급속도로 파급되었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끝까지 그들의 신앙인 기독교를 지켰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동로마 본토의 정교회와의 갈등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보다는 시리아와 이집트의 오리엔트 정교회, 그리고 이슬람 세력과 더 가까웠던 아르메니아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아르메니아의 기독교는 결국 독자적인 아르메니아 정교로 발전하게된다.

앞서 말한 대로 아르메니아 교회는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키릴로스주의(합성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십자군 전쟁기에 서방교회와 급격히 가까워졌고 잠시 동안은 아예 가톨릭으로 귀의한 적도 있었다. 이런 복잡한 교회사 때문에 아르메니아 정교의 변천은 역사의 중요한 연구과제가 되고있다.

7~13세기 동안은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 제국(諸國)의 통치를 번갈아 받았다. 바그라티온 아르메니아, 아르차흐 왕국, 로리 왕국 등 독립국도 존재했다. 이 동안 아르메니아 본토를 떠난 이들은 동로마 제국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키워 나갔고, 주류층에 편입된다. 심지어 아르메니아 출신의 황가를 두 차례씩이나 배출하기까지 했는데, 이는 동로마가 결코 서방의 주장대로 그리스인들만의 나라가 아님을 보여 줬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아나톨리아 남부 해안 지대 킬리키아는 서기 965년 동로마 제국의 니케포루스 2세가 새로 재정복한 지역으로 강경 반이슬람 성향이었던 니키포루스 황제는 원래 이 지역의 무슬림 주민들을 추방하거나 학살하고 이 지역에 아르메니아인들과 시리아 정교회 신도들을 이주시켰다. 그러나 11세기 이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이 내분으로 휘청거리자, 동로마 제국이 일부 영토를 합병하되 그 대가로 바스푸라칸의 군주들에게 세바스테이아에서 유프라테스 강 북부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식민지로 내주었다. 또한 후임 황제들도 비슷한 조치를 취한 탓에 1070년경까지 척박한 아르메니아 고산지대에서 아나톨리아 해안의 따뜻하고 기름진 땅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이 꾸준히 유입되었다. 그러나 1071년 만치케르트 전투 이후 동로마 제국이 셀주크 제국의 침공으로 소아시아의 영토를 상실하게 되면서 자연히 동로마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의 입지는 줄어들었고, 남은 영토 역시 셀주크 제국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셀주크 제국이 아르메니아인들을 계속 공격하면서 수많은 피난민들이 계속 킬리키아 지역으로 이주 합류하였고 이들은 십자군이 오기 전까지 여러 소국들을 세워 자신들끼리 끊임없이 다투었다. 이런 소국들 중 단 하나만이 십자군이 킬리키아 일대를 보급로로 삼기 위해 장악하는 과정에서 살아남았는데, 이를 소(小)아르메니아 왕국 혹은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이라고 한다.

아르메니아 본토는 13세기 몽골의 대공세 이후 몽골 제국일 칸국의 통치 아래 들어왔다. 몽골인들은 이슬람교를 믿었지만 종교에 관대하여 아르메니아 정교도도 간만에 평화로운 시기를 누렸다. 이 시기 동서 문화 교류와 경제 교역이 번창하면서 아르메니아인들은 상업적 재능을 발휘해 동로마 제국-아나톨리아-시리아-캅카스-이라크-이란을 잇는 무역로를 활용해 많은 활약을 했다.

이 지역의 몽골 국가가 몰락한 뒤 혼란이 이어지면서 무역이 쇠퇴하여 아르메니아 왕국은 마침 레반트 지역으로 들이닥쳤던 십자군과 동맹하기도 하고 몽골과도 동맹을 하며 그럭저럭 버티다가 1375년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3.3. 근세 [편집]

아르메니아 왕국은 몰락했으나, 16세기 오스만 제국사파비 제국의 패권 다툼 아래 아래에 아르메니아 서부를 비롯한 동지중해 근방이 통합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타 종교에 관대한 실용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이스탄불에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건물 수십여 개가 건설되었으며, 이슬람 율법 대신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내에서 자체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였다.이러한 환경에서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지대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서구 국가들과의 무역을 주도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번영에 이바지했다. 오스만 통치 아래 지중해 동부의 상업은 유대인과 아르메니아인이 총괄하여 경쟁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번성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은 통역 등 여러가지 공식적인 직책은 아르메니아인보다는 유대인 혹은 그리스인 파나리오테스를 중용하는 편이었으나,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의 부는 유대인들의 그것을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중해 연안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상인으로 번영한 것과 다르게 아나톨리아 동부 내륙지방과 아르메니아 서부 내 아르메니아인들은 대다수가 여전히 자급자족하는 농민으로 살고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에서 발흥한 이란의 사파비 왕조에서는 오늘날 나흐츠반 일대 줄파의 아르메니아인 30~50만명을 노예로 끌고 가서 이스파한 남부(노르 줄파)에 정착시켰는데, 이렇게 끌려간 아르메니아인들은 강제이주 과정에서 절반이 넘는 수효가 사망했을 정도로 고생했음에도 악착같이 금방 재기하여 사파비 왕조 전역의 상권을 장악했다. 당시 강제이주를 명령한 아바스 1세는 나흐츠반 일대의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던 도시들을 파괴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나흐츠반의 주 거주민은 아르메니아인에서 아제르바이잔인으로 바뀌었다. 다른 한편으로 사파비 제국 시기 조지아인들은 남성들은 주로 이슬람으로 개종된 이후 군인 노예로 이용되고 여성들은 주로 하렘으로 끌려간 것과 다르게 아르메니아인들은 사파비 제국 위정자들과 서구 국가들 사이의 무역을 돕는 대가로 종교의 자유를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다. 아라비아 만 일대의 항구도시들을 장악한 서구 국가들은 이란과 교역할 때 무슬림들과 직접 교역하는 것보다는 기독교인 아르메니아인을 거쳐서 통상하는 것을 선호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은 서로 종파가 달라서 공식적으로 적대하는 관계였으나, 양국 사이의 아르메니아인 기독교도 사이에서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며 양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이스파한으로 강제이주당한 조지아인들은 몇 세대를 거치며 이란인에 동화된 것과 다르게 이란 내 아르메니아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상당한 규모의 공동체를 가지고 있다. 사파비 제국은 아르메니아 동부 일대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하고 아르메니아인들을 이스파한 근교로 강제이주시킨 것을 계기로 전체 인구의 20% 정도는 아르메니아인이었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에서 아르메니아인과 유대인들이 갈등 속에서 공존했던 것과 다르게 사파비 왕조에서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유대인들을 완전히 비주류 상업민족으로 밀어내었다. 근세 페르시아계 유대인들은 아르메니아인들의 등쌀에 밀려서 상당수가 부하라로 이주하여 부하라 유대인이 되었다고 한다.

3.4. 근대 [편집]

이란의 사파비 왕조 몰락 이후 아르메니아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예레반 칸국, 나히체반 칸국, 동부의 카라바흐 칸국이 들어서며 아프샤르 왕조카자르 왕조의 봉신국 역할을 하였다. 카자르 왕조 봉신국들의 아르메니아 지배는 영 아니었는지 당시에는 인구가 상당히 희박한 편이었다. 러시아 정복 직전 나히체반 칸국은 보병 800여 명에 기병 200여 명에 달하는 군사력을 자랑하던 수준이었고, 예레반 칸국은 인구 14만 명 정도였으며, 카라바흐 칸국은 가구 수 기준 2만여 호 정도의 수준이었다. 이미 중세 말 티무르 제국의 캅카스 침공과 사파비 왕조의 아르메니아인 대량 납치와 강제이주 정책 이후 아르메니아인 인구 상당수가 아르메니아 본토에서 가깝고 좀 더 비옥한 아나톨리아 동북부 지역 혹은 조지아로 이동하였다.

18세기 말부터 러시아 제국캅카스를 넘어 남하해 오면서 오스만과 이란을 동시에 압박하기 기작했다. 러시아는 이란의 카자르 왕조를 몰아내고 1813년에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하여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의 대부분을 흡수하였다. 1828년에는 예레반 칸국, 나히체반 칸국, 카라바흐 칸국을 무너뜨리고 이란과 투르크만차이 조약을 체결하여 지금의 아르메니아 영토 대부분과 남캅카스 전역을 정복하게 된다. 그 결과 아르메니아는 같은 기독교 국가인 러시아 제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이 새로 설치한 아르메니아 주 내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 인구는 처음에 2만여 명에 불과하였는데,[1] 지역의 무슬림 인구 역시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 시아파 무슬림 아제르바이잔인이나 쿠르드인 계열이었다. 러시아 제국이 아르메니아 주를 설치한 이후 이웃 오스만 제국이나 카자르 왕조 영내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주를 암암리에 장려하면서 오늘날 아르메니아에 해당하는 지역은 다시금 아르메니아인들이 주류 민족이 되었다.

이렇게 19세기 초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러시아가 지배하는 동부 아르메니아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는 서부 아르메니아로 나뉘었다. 아제리계 군벌정권들의 무능한 학정 하에서 낙후되어 있던 아르메니아 동부 지역에도 러시아의 영향으로 19세기 말부터 민족주의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치하로 분리되어 있었고, 경제적 여건과 교육 상태가 열악하여 민족주의자들의 뜻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러시아와 오스만 정부의 분리주의 운동 탄압도 작용했다. 러시아인들과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의외로 서로 많이 충돌하는 편이었다. 러시아의 여러 민족주의 사상가들은 서구에 비해 낙후된 러시아의 상황을 위로하거나 발전시키기 위해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로서 아시아의 이슬람으로부터 기독교를 지키는 나라"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아르메니아의 그것과 그대로 겹친다. 19세기 초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믿던 국가 중 하나인 아르메니아가 러시아 영토 일부분으로 포함되자 러시아인 학자들은 아르메니아를 "러시아 제국이 해방시킨 아시아의 신비한 고대 기독교 국가"로 정의하였고, 아르메니아인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라고 주장하면서 러시아 제국 사이의 갈등이 발생했다. 이웃 조지아인들의 경우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 하에서 시아파 이슬람에서 다시 정교회로 개종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문제가 덜했다. 하지만 무슬림 중앙정부의 지배하에서도 함셴인(Համշենցիներ)과 같은 일부 아르메니아인 무슬림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기독교 신앙을 지켜왔던 아르메니아인들과 러시아 제국 사이에서 갈등이 더 심해졌다.

19세기 말부터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한 오스만 제국은 내부의 분리주의 움직임을 잔혹하게 탄압했고, 전근대적 체제를 뒤엎고 집권한 터키 군부도 이 부분에선 술탄 시대와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오히려 근대적 사상으로 무장한 터키 군부가 1차 대전 중에 조직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하는데, 이전까지 이뤄지던 전근대적 '진압'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근대적 제노사이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아르메니아인만 골라 죽인게 아니듯이 이 명칭도 잘못된거라는 지적이 계속 나오고 있다. 수십만이상이 학살된 쿠르드인, 50만 이상이라고 추정되는 이라크인을 비롯한 아랍 무슬림들에서 역시 수십여만 이상이 학살당한 아시리아인들도 덩달아 마구잡이로 곳곳에서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은 단순히 아르메니아인만 특정해 학살한 게 아니라, 이슬람이고 뭐고 반튀르크적인 종족을 아예 절멸시킨다는 목표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되려 무신론적에 가까운 범튀르크주의 극단파였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인 학살이라고 알려지다보니 국제적으로 기독교 아르메니아인들만 골라죽여 이슬람 탓으로 하는 엉뚱한 오해도 많다. 당연히 이라크인이나 아시리아인들은 이 명칭에 대하여 분노하고 아르메니아인들을 탓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 당시 대략 300만 정도로 추정되는 오스만 내 아르메니아인 중에 추정치에 따라서는 100만에서 150만에 가까운 숫자가 학살됐다. 이 중 상당수는 대책없는 강제 이주 과정에서 아무런 보급도 받지 못하다 병사하거나 아사했다. 또 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 내부에서 노선 갈등으로 분쟁이 빚어지기도 하고, 다른 소수민족들이 가세하여 아르메니아인들을 습격하는 일도 자주 벌어졌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저항 과정에서 터키군이나 쿠르드인 보조부대에 반공하는 때도 있었다. 이때 안드라니크 오자냔(Անդրանիկ Օզանյան, 1865년 2월 25일 ~ 1927년 8월 31일)과 같은 아르메니아인 군사지도자들이 활약했는데 그의 일생은 영웅화되어 지금도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물론 연도를 봐도 알겠지만, 오자냔은 아르메니아가 소련에게 합병당하는 걸 보고 미국에서 살다가 조국을 안타까워하며 죽었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로 인해 아나톨리아 동북부 아르메니아인들의 전통적인 거주지역 상당수가 황폐화되었으며 제국 내 민족 존립 기반 자체가 와해되었다. 직접적인 학살에서 살아남은 아르메니아인 상당수는 무슬림으로 위장하고 숨은 후 러시아 제국령 아르메니아로 탈주하였으나, 나중에 아예 무슬림과 동화되거나 오늘날의 레바논, 시리아 등으로 이주한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 서부 해안지대에 거주하던 부유한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은 대학살 이전에도 이미 오스만 제국 경제가 어려워진 것을 계기로 대거 프랑스나 미국으로 이민하던 상황이었는데, 아르메니아 대학살 이후로 이주가 더 가속화되었다.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지대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이루어지던 지역이 아니긴 했지만 이들이 동부에서 자신들의 동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을 리는 없었다. 오늘날 아르메니아계 미국인 및 아르메니아계 프랑스인 상당수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서 오스만 제국 서부에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들의 후손이다.

3.5. 현대 [편집]

3.5.1. 소련 치하 [편집]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아르메니아인은 인접한 조지아인·아제르바이잔인과 더불어 독립국가인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은 조지아·아제르바이잔과 전쟁을 벌이면서까지 영토 확장에 열을 올리기도 하며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으로 통합되기도 하였다. 이후에 세브르 조약에 따라 현 터키의 동북부까지 차지하며 상당한 국토면적을 지닌 나라가 되었지만, 오래가지 않아 붉은 군대에 점령당하였다. 이후 아르메니아는 소련의 원년 구성국인 자캅카스 SFSR를 거쳐 오늘날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전신인 아르메니아 SSR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한 1921년 모스크바 조약, 1923년 카르스 조약이 체결되면서 세브르 조약으로 아르메니아에 편입된 영토 대다수는 신생 튀르키예의 영토로 넘어가게 됐다.

소련 치하에서 아르메니아는 완전히 서방세계로부터 무시되었다. 때문에 NATO 가맹국인 터키의 전신 오스만 제국이 저지른 아르메니아 학살 문제도 터키와의 관계를 껄끄러워 했던 소련의 입김이 작용하면서 다루어지지 않았다. 거기에 스탈린은 아르메니아의 강성 민족주의자들을 대거 숙청하였다. 이 자칭 민족 전문가는 아라라트산을 외국 튀르키예로, 나고르노카라바흐아제르바이잔 SSR의 자치주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의 독립의지를 가혹하게 탄압하였고, 아르메니아의 암흑기가 지속됐다.

3.5.2. 소련 붕괴 이후 [편집]

소비에트 연방이 멸망하면서 아르메니아에게도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하여 내부의 아르메니아인을 해방시킬 권리가 주어졌다. 소련 해체 전부터 양국 간 분위기가 험악했던 탓에 곧바로 전쟁이 발발하였으며, 아르차흐를 독립시켰지만, 2020년에 아제르바이잔 측이 다시 침공하여 아르차흐의 대부분을 다시 탈환했다, 아르메니아는 돈도 사람도 없는 마이너 중 마이너 국가이기에 그 타격이 상당히 크다.

4. 컨트리볼 만화에서 [편집]

5. 관계도 [편집]

아르메니아의 대외관계
상대국
관계
감정
대사
이웃
적대
이 망할놈아!
이웃
적대
사과도 안 하는 학살자 놈들!
이웃
적대
나라는 맞다만 왜 이슬람인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하지?
친구
우호
우릴 지원해주는 든든한 형님
친구
우호
우릴 지지해주는 좋은 형님
친구
우호
좋은 친구
친구
우호
좋은 친구
친구
우호
좋은 친구

6. 기타 [편집]

6.1. 대학살의 후유증 [편집]

1911년 인구 통계
아르메니아인 거주 국가
거주 인구
1,709,550
1,579,500
83,400
5만여 명
서유럽(영국 본토, 프랑스 본토, 벨기에, 스위스)
21,000
2만여 명
15,500
2만여 명
9천여 명
6천여 명
4천여 명
1천여 명
1922~1926년 인구 통계
아르메니아인
상세
거주 인구
소비에트 연방
1567568명
743571명
313741명
282004명
195419명
281000명
북미
125000명
오스만 제국이 상실한 근동 아랍 영토
104000명
79000명
팔레비 왕조(이란)
5만여명
46000명
43000명
서유럽,중유럽
38000명
케디브 왕조
28000명
인도,자바,호주
12000명
3000명

위 표를 보면 1911년과 1922년 사이 약 150,000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증발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7. 갤러리 [편집]

[1] 당시 오스만 제국 내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 인구가 2~3백만여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