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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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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zeczpospolita Polska〉
Poland
폴란드
이름
폴란드 공화국
수도
바르샤바
국화
팬지꽃
국조
흰꼬리수리
클레이
312,685km²[1]
별명
폴스카, 화장실 청소부
인구
37,739,779명 [2]
인구 밀도
약 123명/km²[3]
출산율
1.29명
언어
폴란드어
공용 문자
로마자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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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교 없음
가톨릭 87.5%
정교회 0.7%
화폐
즈워티
대한수교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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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989년 11월 1일
북한: 1948년 10월 16일


1. 개요2. 지도 및 영토
2.1. 지도
3. 역사
3.1. 고대
3.1.1. 슬라브족 이전3.1.2. 건국 전설
3.2. 중세
3.2.1. 폴란드 왕국, 피아스트 왕조 시절3.2.2.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절3.2.3. 동유럽의 최강국이 되다
3.3. 근세
3.3.1. 대홍수와 쇠퇴기
3.4. 근대3.5. 현대
4. 컨트리볼 만화에서5. 관계6. 기타7. 갤러리


번호
HEX 코드
1
#FFFFFF
2
#DC143C

언어별 명칭
폴란드
Polska
한국
폴란드 , 폴란드 공화국
러시아
Польша , республика польша
독일
Polen , Republik Polen
프랑스
république de pologne
리투아니아
Lenkijos Respublika

1. 개요 [편집]

중유럽에 위치한 슬라브 국가이다. 자신을 3인칭할 때 쓰는 명칭은 폴스카. 그 외에 도길은 폴른, 루스끼는 폴샤, 로마의 후예는 폴로니아, 전 동업자 이웃은 렌키아, 등쳐먹었던 이웃은 폴스코라 부르며 사막국에서는 불란더, -짱-에서는 물결과 난초 및 성진국에선 포란도, 천조국에선 리투아니아 등으로 불린다 한다.

폴란드볼 만화에서 주인공격으로 등장하며, 30년 동안의 업무로 발전한 기술과 요령, 그리고 뚫어뻥을 동원해 변기의 단단한 배설물을 간단히 뚫어 버린다.[4] 하지만 그 뛰어난 배설물 돌파 능력을 가진 대가인지, 배설물과의 전투를 제외한 거의 모든 행동에서는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 라이히에게 털리는 건 일상이고, 능지가 영 좋지 않은지 허구한 날 다른 나라에게 당한다. 특히 폴스카가 우주에 가는 것은 컨볼 세계관에서 불가능이고 심지어는 우주로 가려다 세계가 멸망하기도 한다. 물론 챈 광고의 '폴란드는 우주에 갈 수 있어!'도 구라임
그는 자신의 영악함으로 이를 극복해내고자 했으나 무식으로 인해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발생시켜 반갈죽당했다고 전해진다.

2. 지도 및 영토 [편집]

2.1. 지도 [편집]

3. 역사 [편집]

3.1. 고대 [편집]

3.1.1. 슬라브족 이전 [편집]

슬라브족이 폴란드 땅에 살게 된 것은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절에 슬라브족들이 게르만족들의 뒤를 따라왔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폴란드 땅에는 켈트족, 게르만족, 발트족이 살고 있었다. 원래 슬라브족 자체가 폴란드보다는 벨라루스의 남동부와 우크라이나드니프로 강 부근에 살았던 민족이다.

켈트족은 현 폴란드의 남쪽 끄트머리 산악지대[5]에, 발트어족은 현 폴란드의 북부를 중심으로 거주하였고 이 중 동프로이센[6]에 거주하는 발트어족 외에는 상당수가 슬라브족의 이주 과정에서 흡수되었다. 게르만족은 폴란드 서부를 중심으로 거주하였다. 이들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서쪽으로 이동하거나 슬라브족에 동화되었다.[7]

3.1.2. 건국 전설 [편집]

옛날에 레흐, 체흐, 루스란 형제가 있었다. 어느 날, 각자의 길을 떠나 나라를 세우기로 하였다. 루스는 동쪽으로 가서 러시아를 세우고, 체흐는 남쪽으로 가서 체코를 세웠다. 하지만 레흐는 결정을 못하고 그냥 서쪽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그는 큰 나무를 보았는데, 그 위에서 크고 하얀 독수리가 둥지를 틀고 새끼들에게 먹이를 먹이는 걸 보았다. 독수리가 반갑다며 석양을 등지고 날개를 크게 펼치며 아는 척을 하였다.

레흐는 아래서 쳐다보니 크고 아름다워 이 세상 새가 아닌거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보니 광활한 평야, 비옥한 흙, 그리고 맑은 시냇물을 보니 이곳을 낙원이라 생각, 그는 그곳에 깃발을 꽂고, 둥지라는 뜻을 가진 수도를 만들었다.[8] 이 전설은 1295년에 발간된 폴란드 중세 연대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폴란드 국장의 백수리와 붉은 바탕은 이때 레흐가 본 수리와 석양을 나타내는 것이다.

3.2. 중세 [편집]

3.2.1. 폴란드 왕국, 피아스트 왕조 시절 [편집]

960년에 슬라브계 폴란인(Polanie)[9]인 '미에슈코 1세'(Mieszko I, 930 ~ 992, 재위 960 ~ 992)가 폴란드 서쪽 그니에즈노에 둥지를 튼 것으로 폴란드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된다.[10]
미에슈코 1세가 966년에 가톨릭을 받아들인 이래, 992년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Bolesław I, 967 ~ 1025, 재위 992 ~ 1025)의 왕위 등극부터 폴란드 왕국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볼레스와프 1세는 동서남북으로 왕국의 영토를 넓혀나갔다. 그는 키예프 대공국과의 전쟁에서 승전하여 영토를 넓히기도 했는데, 그 덕분에 그의 별명이 용감왕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신성 로마 제국과의 전쟁으로 날을 지세우고(1004년 ~ 1018년. 중간에 몇 번 쉬었지만, 그래도 10년 넘게 전쟁이 이어진 셈) 12세기에 벌어진 내란으로 나라가 쪼개졌으며(분할 공국시대, 1138 ~ 1320) 뒤이어 벌어진 몽골 제국의 침략을 막아내느라 국가가 황폐화 되었다. 폴란드의 악몽인 레그니차 전투도 이때의 일. 이렇게 국력을 소모하며 지내던 폴란드는 내부의 결합을 필요로 하게되고 14세기 초반부터 폴란드 역사상 첫번째 왕조인 피아스트 왕조의 '브와디스와프 1세'(Władysław I, 1260 ~ 1333, 재위 1320 ~ 1332)를 중심으로 통일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북쪽의 독일 기사단국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압박을 막아내면서 폴란드를 계속 통일하기 시작했고, 이후 자신의 아들 카지미에시 3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망한다.

폴란드가 본격적으로 강대국으로 뜨기 시작한 것은 '카지미에시 3세'(Kazimierz III , 1310 ~ 1370, 재위 1333-1370)가 폴란드를 통치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미에슈코 1세 사후 그의 아들 볼레스와프 1세가 사방팔방으로 영토를 넓히면서 폴란드의 위용을 자랑하기도 했지만 이후 폴란드가 분열 지경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몽골이 동쪽에서부터 침공해 왔기 때문에 방어했으나 나라의 국력을 다 써버렸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성기는 바로 카지미에시 3세부터 시작한다. 카지미에시 3세는 정치, 행정, 외교, 군사, 경제, 문화 각 분야에서 모두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 그는 '카지미에시 3세 대왕(Kazimierz III Wielki)'으로 불리기도 한다. 폴란드판 세종대왕이라 보면 될 듯.

3.2.2.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절 [편집]

카지미에시 3세가 적자를 남기지 못했기에 폴란드 왕위는 카지미에시 3세의 조카였던 헝가리 왕국 국왕 러요시 1세가 계승하게 되었는데, 폴란드 귀족들은 헝가리에 주로 머무는 동군연합 상태를 싫어했다. 이 때문에 폴란드 왕위는 러요시 1세가 죽은 1383년 둘째 딸인 야드비가(Jadwiga)가 계승하게 되었다.[11] 야드비가는 1373년생으로, 즉위 시 10살의 여왕님(...). 이후 1386년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33살 노총각 요가일라가 아직도 13살인 야드비가와 결혼을 하여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Władysław II Jagiełło)로 즉위하게 된다. 그리고 리투아니아도 발트 신화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이로써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군합국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은 1410년 그룬발트 전투를 통해 독일 기사단국을 철저히 박살내버렸다. 초반에 리투아니아 기병대가 독일 기사단을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패주하며 후퇴했고, 그 뒤를 독일 기사단이 따랐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숲에 매복했던 폴란드 군대가 리투아니아 군대를 돕기 위해 나타났고, 결국 독일 기사단은 산산조각나며 괴멸당했다. 39,000여 명에 이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에 맞서 27,000여 명에 이르는 독일 기사단은 8,000여 명의 전사자와 14,000여 명의 포로라는 엄청난 피해를 내며 묵사발이 났고, 전사자 중에는 독일 기사단장 울리히 폰 융잉엔(Ulrich von Jungingen 1360~1410)도 포함되어 있었다. 불과 1,400여 명만이 그단스크(단치히)로 도망쳐 들어갔을 정도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독일 기사단을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이후 독일 기사단의 명예와 영향력은 땅에 떨어져버렸고 1460년에는 무역의 황금알인 그단스크까지 폴란드에 빼앗겼다. 그리고 1454 ~ 1466년의 13년 전쟁을 통해 완전히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에 복속된다.

3.2.3. 동유럽의 최강국이 되다 [편집]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독일 기사단국을 속국으로 만든 후 세력을 크게 불리기 시작했다.[12] 1480년에는 킵차크 칸국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벌이던 모스크바 대공국[13]의 뒤통수를 치며 킵차크 칸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독일 기사단국과 싸우느라 킵차크 칸국을 도울 수는 없었다. 독일 기사단국은 이미 폴란드의 속국이었지만, 계속해서 독립을 시도하였다. 이때의 전쟁은 독일 기사단국의 독립 의지를 완전히 꺾기 위한 전쟁이었다.

카지미에시 4세 시기에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과 야기에우워 왕가는 가장 드넓은 영토를 자랑했고 아들을 통해 헝가리-보헤미아를 별도의 왕국으로 다스리기도 했다.[14] 러시아와의 전쟁을 말아먹으면서 동부 영토의 1/3을 날려먹고 말았다. 이후 중흥을 위한 노력이 결실을 맺으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발전하였고,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시기에 단순한 동군연합이 아닌 단일 연합국가로 통합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지그문트 2세 사후 개시된 선거왕 시대(1569-1795) 시기에 자유 선거(Wolna Elekcja)를 통해 안나 야기엘론카와 공동 군주로 선출된 '스테판 바토리'(Stefan I Batory, 1533-1586, 재위 1576-1586.)[15]그단스크의 반란을 철저히 진압하였다. 이 양반이 반란을 어떻게 진압했냐면, 6배의 그단스크 군(폴란드 군 2,000 vs 그단스크 12,000)을 거의 학살 수준으로 이겨버리고(그단스크 군 4,500명이 전사하고 5,000명은 포로) 다음으로 그단스크 장기 포위전에 들어가서 항복을 받아냈다. 다음으로 그는 과거 반역을 일으켰던 카자크 헤트만 사무엘 즈보로프스키도 참수하였고(...) 주요 귀족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이후 그는 폴란드 역사상 최고의 재상 '얀 자모이스키'(Jan Zamoyski, 1542 ~ 1604)의 지원을 받아 이반 뇌제의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에서 승전, 동부 영토의 일부를 되찾았다. 이후 지그문트 3세 바사 치세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중요한 영토였던 스몰렌스크도 되찾았다. 지그문트 3세는 무능했지만[16]대신 그의 유능한 부하들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면서 지그문트 3세가 일으킨 여러 사건들을 해결하고 덤으로 외국의 침략까지 격퇴해 내면서 폴란드의 위용을 계속 떨쳤다. 그 유명한 윙드 후사르의 활동 시기 역시 바로 이때의 일이다.

루스 차르국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적극 개입하여 루스 차르국의 차르를 바꾸기도 하였고, 1611년에는 클루쉬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모스크바까지 함락시켰다. 얼마 안 가 쫓겨나기는 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그 영토가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뻗어있던 동유럽의 강국이었으며, 합스부르크 제국과 함께 오스만 제국을 막아내는 가톨릭의 방패요, 유럽의 방파제였다. 1683년의 빈 전투에서는 폴란드군 윙드 후사르의 결정적인 돌격으로 승패가 결정되었다. 빈 전투의 승리는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을 좌절시켰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3.3. 근세 [편집]

3.3.1. 대홍수와 쇠퇴기 [편집]

지그문트 3세 사후 그의 아들인 '유능한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재위 시기에는 루스 차르국과 오스만 제국의 침공도 격퇴하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사망한 스웨덴과도 자국에 유리한 조약을 맺으면서 동유럽의 전통적인 강대국임을 입증해보였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 스웨덴과 러시아의 집중 견제를 받았고, 그 와중에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슬슬 국력의 한계를 보이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폴란드의 전성기는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코사크 대반란이 시작되면서 막을 내렸다. 코사크의 봉기로 폴란드-리투아니안는 한때 우크라이나 전역을 상실하고 코사크의 자치권을 인정해야만 했다. 코사크의 반란은 1651년 베레스테츠코(Beresteczko)에서 폴란드군이 카자크-타타르 연합군에 대승을 거둠으로써 겨우 진정되었으나, 이 봉기에서 엄청나게 많은 정예병이 희생되었고, 또한 국력이 계속 소모되어 결과적으로 대홍수(Potop) 시기를 맞이하였다. 폴란드에게 패배한 코사크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해 왔고, 얼마 되지 않아 러시아가 직접 공격에 나서면서 폴란드는 순식간에 국토 절반이 점령당했다. 이후 스웨덴도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손잡고 함께 침공해 오면서 나머지 절반을 점령해 폴란드는 거의 패망 직전에 이르렀지만, 폴란드 농민과 귀족들 너나할 것 없이 스웨덴의 폭압적인 지배에 민중봉기를 일으켰고, 타타르가 폴란드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폴란드와 종교가 다른 세력들과 전쟁을 치루면서 가톨릭에 기반한 폴란드 민족정체성의 맹아가 이때에 생성된다.

폴란드군은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파베우 얀 사피에하, 얀 소비에스키, 스타니스와프 포토츠키 등 명장의 지휘를 받아 스웨덴군과 브란덴부르크, 루스 차르국 등에 맞서 여러 번의 승리를 거두었고, 1657년 벨라우 조약을 체결하여 프로이센을 독립시켜 브란덴부르크와의 전쟁을 끝내고, 1660년에 올리바 조약을 체결하여 리보니아의 영유권과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의 스웨덴 왕위 계승권 주장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스웨덴과의 전쟁을 끝냈다. 그러나 아직 러시아와의 전쟁이 남아있었다. 폴론카(Polonka), 류바르(Lyubar), 바시아(Basia) 강, 추드니우(Chudniv) 등에서 폴란드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쟁 막판에 흘루키우(Hlukiv) 공방전에서 타타르가 발을 빼고 계속된 전쟁에 지친 리투아니아군이 후퇴하는 등 군대가 붕괴하면서 다 말아먹고 말았다. 러시아와의 전쟁은 1667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양측 모두 엄청난 피를 흘린 끝에 1668년 안드루소보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끝맺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폴란드는 전체 인구 중 1/3이 사망하거나 외국에 편입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무엇보다도 프로이센의 독립에 더해 리보니아와 스몰렌스크, 키유프 등 폴란드 변경의 주요 부분들이 다 날아가버려 정치적, 경제적으로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게다가 전성기만 해도 그럭저럭 지배층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여 제대로 작동하던 귀족회의도 나라가 망조가 드니 주변 국가들의 정치적 침투에 넘어가 이후로는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재위 시절 빼고는 나라 정치 자체가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3.4. 근대 [편집]

3.4.1. 폴란드 분할나폴레옹 전쟁 [편집]

18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기세는 날이 갈수록 무서워졌다. 1772년에 폴란드에 살던 온갖 민족들이 폭동을 일으켰는데, 여기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개입함으로써 1773년 8월 영토가 쪼개졌다. 물론 친러파가 가득한 의회의 동의를 얻은 조치였다. 당시 폴란드 의회의 의원 타데우시 레이탄(Tadeusz Rejtan)이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분할안의 통과를 막는 데에는 실패했고, 이후 그는 울분에 휩싸여 자결했다.

폴란드의 마지막 국왕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는 영국의 입헌군주제에 상당한 이해를 갖고 있던 인물이었으며, 국가를 이끌기에 충분한 지성과 근대적 능력을 갖추고 있던 개념있는 양반이었다.[17] 스타니스와프 2세는 기사학교(Szkola Rycerska)의 설립안을 가결시켜 이곳에서 수많은 개혁 청년과 엘리트들을 양산해내었고, 세계 최초의 교육부인 '국민교육위원회'의 설치안도 가결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또한, 1차 분할 이전에 폴란드에 관세 제도를 도입하여 외국 물건에 대한 관세를 매겨서 자국의 산업 보호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는 휴고 코원타이, 스타니스와프 스타시츠, 안제이 자모이스키, 아담 카지미에시 차르토리스키, 스타니스와프 마와호프스키, 이그나치 포토츠키 등 열렬한 개혁가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폴란드를 개혁했고, 1788 ~ 1792년에는 위대한 4년 세임을 개최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1791년 5월 3일 가결된 '5월 헌법'으로 세계사에서 2번째(미국 다음), 유럽에서는 최초로 가결된 성문 헌법이었다. 182명의 세임 의원들의 서명을 받은 5월 헌법은 입헌군주제와 세습군주제, 국왕의 자유도시, 종교의 자유, 귀족에 대한 과세(10%의 소득세) 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또한 농민들은 귀족들의 자의적인 재판을 당하지 아니하며 국가가 이들을 보호하고, 도시민들에게 토지 구입을 허용하며, 농노제가 소작제, 즉 계약제로 전환된다는 내용도 담고 있었는데, 소작제는 전적으로 귀족과 농민 모두의 동의를 받은 상태에서 행해야 했다. 농민들은 원한다면 도시로 떠날 수도 있었다. 문제가 많은 자유 거부권을 폐지하고 의회에 2/3 다수결 제도를 도입하였으며, 의회에 외국에 대한 전쟁 선포와 화폐, 공채 등 대외적, 대내적 정책에 대한 가결과 부결의 권리를 맡겼다. 슐라흐타의 국왕 선출권을 박탈하여 포니아토프스키 가의 세습 군주제를 명확히 하기도 했다. 여기에 왕의 조카인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의회 내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왔고, 일체의 자유 거부권이 무시되는 친위 쿠데타 상황에서 5월 3일 헌법은 수많은 귀족들의 반항을 무릅쓰고 가결되었다.

하지만 이것을 빌미로 1793년에 러시아가 폴란드를 침공했다. 폴란드는 맞서 싸웠지만 러시아는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왔고, 결국 1793년 다시 한 번 영토가 분할된다. 최전성기에 100만 제곱킬로미터가 넘는 면적을 자랑했던 폴란드의 영토는 이제 21만 제곱킬로미터로 축소되었으며, 왕국은 370만 명의 인구를 보유한 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1795년에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3국이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의 대(對) 러시아 봉기를 철저히 탄압했고, 1795년에는 세 번째 분할이 이루어져 폴란드는 아예 지도에서 사라졌다. 이때부터 눈물없이 보기 힘든 폴란드의 시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18] 헌법이 생긴 지 고작 4년 만이었다.

독립을 위해 프랑스 혁명정부와 협력했던 폴란드 군단의 공로로 나폴레옹이 폴란드 분할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병합한 영토를 토해내게 하고 그 자리에 바르샤바 공국을 세운 기간 동안 잠시 괴뢰국으로나마 독립하였다. 그러나 빈 회의의 결과 바르샤바 공국은 또 다시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게 분할되어 지도에서 사라졌다. 프로이센의 서프로이센포젠 대공국, 러시아의 폴란드 입헌왕국[19], 오스트리아의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크라카우 대공국으로 분할되어 삼국의 치하에 놓였다. 폴란드인들은 11월 봉기, 1월 봉기, 크라쿠프 봉기, 포즈난 봉기 등 수많은 봉기를 일으키면서 삼국의 폴란드 지배를 거부하였으나 삼국은 이들을 철저히 탄압하였다.[20]

3.5. 현대 [편집]

3.5.1. 폴란드 제2 공화국 [편집]

100년의 세월이 지나 1차대전이 발발한 후 1915년동맹국프리비슬린스키를 점령하였고 위와 같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공동으로 지배했다. 1차 대전에서 폴란드인 150만 명이 동맹국(독일-오스트리아)과 협상국(러시아)에 소속되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그러나 동맹국이 항복하면서 1918년 11월 11일 폴란드는 123년만에[21] 폴란드 공화국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폴란드 역사에서는 이를 '폴란드 제2공화국'이라 한다. 폴란드의 민족영웅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폴란드의 총통(Naczelnik Państwa)이 되었다.

한편 소비에트 러시아는 1918년 11월 1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파기를 선언, 그 직후 유럽을 공산화할 목적으로 동유럽의 모든 신생국들에 대해 소비에트의 서방 공세로 알려진 대대적인 침공을 단행한다. 피우수트스키는 동유럽의 다른 신생국가들과 편먹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해 1919년 2월 베레자 카르투스카의 붉은 군대를 공격, 이로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발발한다. 그해가 가기 전 폴란드는 빌뉴스민스크를 점령했다. 이후 1920년 초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원조를 요청하자 동맹을 체결[22], 5월에 키이우를 점령하는 등 우세를 점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러시아는 미하일 투하쳅스키 지휘 하에 반격을 개시, 빌뉴스와 민스크, 키이우를 모조리 재점령하고 역으로 폴란드를 밀어붙였다. 8월에는 바르샤바까지 붉은 군대가 진격했으나, 피우수트스키의 지도 하에 폴란드군은 기적적으로 비스와 강에서 붉은 군대를 대파, 폴란드 영내에서 붉은 군대를 몰아냄으로써 국가 존망의 위기를 넘겼다. 1921년 3월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는 리가 조약을 체결, 이로서 벨로루시 서부와 우크라이나 서부는 폴란드령이 되고 나머지는 소련령이 되었다.

폴란드는 이때 왕년의 한 나라였던 리투아니아와 같이 적군을 막았는데, 빌뉴스[23] 일대를 폴란드가 점령하고 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세운 괴뢰국이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이다. 결국 이 땅은 리투아니아에게 돌아가지 않고 1920년 강화조약에 따라 폴란드 영토가 되었다.

폴란드의 민주정은 1926년 5월 피우수트스키가 쿠데타를 일으켜 무너뜨렸다. 피우수트스키는 대통령으로 취임하진 않았으나 총사령관으로 군사력을 휘어잡고 배후에서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부리듯 군림했다. 게다가 차기 외무장관 및 다른 정부 요직도 죄다 그의 부하들이나 인맥이 독점했다. 반대파들은 탄압당했고, 일부는 정치범수용소[24]에 갇히기도 했다. 그가 죽고 나서도 유제프 베크(Józef Beck) 외무장관을 비롯한 부하들이 권력을 이어받고 반대파를 제거하며 정치적으로 불안하게 만들었다.

한편,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나치당정권을 잡았고, 이후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군대를 재건하기 시작했으며, 비무장지대인 라인란트에 군대를 진주시켰고, 마침내 주변국들을 차례로 합병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은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불가침 조약의 조건이 폴란드 분할이었다.

3.5.2. 2차 세계대전 [편집]

폴란드는 1939년에 독일소련에게 거의 동시에 침공을 받아 분할 점령되었다. 독일 점령 지역에는 총독부가 들어섰으며, 소련 점령 지역은 우크라이나 SSR벨라루스 SSR에 분할 합병되었다. 전후에도 폴란드에 돌려주지 않고 바르샤바가 국토의 중앙에서 동쪽으로 간 듯한 이유이다. 이후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 양측에 저항했고, 이로 인해 심한 탄압을 받았다. 소련은 폴란드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지식인들과 장교들을 학살하였고, 독일도 폴란드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뒤이어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유대인 학살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수도인 바르샤바는 1944년 8월 봉기 때 독일군이 도시 전체를 다 쓸어버려 아무것도 안 남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폴란드 정부는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가 독일의 프랑스 침공 때는 프랑스 서부의 앙제 시, 그 다음에는 런던으로 옮겨가서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소련에 억류된 폴란드인과 망명 폴란드인들을 모아서 자유 폴란드군을 조직해서 연합군과 함께 영국 상공에서부터 시작해서 이탈리아, 노르망디, 네덜란드 등지에서 피터지게 싸웠다. 연합군 내에서 폴란드군이 네다섯번째로 큰 군대였다. 하지만 망명정부는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점령하기 전에 자력으로 탈환코자 무리한 봉기를 시도하여 대패했고, 폴란드 국내군도 큰 피해를 입고 뒤따라온 소련군에게 박해받아야 했다.

폴란드는 2차대전 중 동유럽 전체에서 가장 크고 조직적인 반나치 저항 운동을 펼쳤다. 폴란드의 저항조직 중 하나인 국내군(Armia Krajowa)이 보유한 병력만 40만에 달했고, 1944년 바르샤바 봉기도 일으켰다. 또 폴란드 국내에서 폴란드 지하국(Polskie Państwo Podziemne, 약칭 PPP)이라는 임시 정부를 세워 이들도 적극적으로 나치 독일에 대항했다.

또한 폴란드는 2차대전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국가 중 하나로, 연합국 기준으로 소련과 중국에 이어 사망자가 3번째로 많은 나라다. 여기서 사망자는 민간인과 군인의 사망을 모두 포함한 수치로 전 인구의 20%가 사망했다. 특히 유대계는 열 명 중에서 아홉 명이 학살당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 전에 연합국에게 토사구팽당해 폴란드 침공 당시 소련이 점령한 동쪽 땅을 바쳐야 했다. 또한 이걸 논의하는데 폴란드 망명정부한테는 초대는커녕 귀띔도 안해줬고 이에 항의하는 망명정부에게 처칠은 '불만이면 언제든지 연합군을 나가도 좋다'고 무시했다. 그래도 소련이 독일의 오데르 강 동부를 폴란드 영토로 주었는데 웬만한 폴란드 도시보다 산업화가 잘 되어 있는게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그러나 이것도 억지로 찾아보면이지, 해당지역을 넘겨받으면서 경제발전이 되지도 않았고 구 독일령 지역은 현재까지도 가난한 지역인데다 동부지역을 빼앗기면서 전후 폴란드는 주기적인 식량난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전쟁 초기부터 후반까지 용감하게 싸운 폴란드 입장에서는 독일의 배상이라면 모를까, 본인들 땅 빼앗기는 대신 던져준 거나 다름없다.

3.5.3. 폴란드 인민 공화국 시절 [편집]

소련이 동유럽을 점령하고 소련의 사상을 따라 소련 따까리가 되었다가 1989년 벗어났다.

3.5.4. 소련 붕괴 이후 [편집]

나토에 가입하고 주변국의 놀림을 받는 평범한 국가가 되었다.

4. 컨트리볼 만화에서 [편집]

5. 관계 [편집]

6. 기타 [편집]


폴란드의 국기는 뒤집어서 그려야 한다.

7. 갤러리 [편집]

[1] 세계 70위 [2] (2022)세계 40위 [3] (2017년)[4] 심지어 그 유명한 미국의 배설물이라 해도![5] 카르파티아 산맥 북서부, 현 슬로바키아 일대.[6] 이곳에 살던 발트족은 '프로이센인' 혹은 '프루센'이라고 불렸다. 이들의 이름에서 지명 '프로이센'이 유래되었다.[7] 발트어족의 일파로 동프로이센에 살던 프로이센인은 슬라브족에 동화되지 않았고, 폴란드가 건국된 후에도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이들은 (당시 유럽인 기준에서)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교도였고, 13세기 초반에 마조프셰(현 폴란드 동부 지역) 공작 '콘라트 1세(Konrad I mazowiecki, 1187-1188 ~ 1247, Książę mazowiecki)'는 튜튼 기사단에 이들을 정복하고 기독교화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프로이센인은 튜튼 기사단에 정복되어 피지배민족이 되었으며, 이후 독일 이주민에 동화되거나, 학살, 추방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이들이 사용하던 '고대 프로이센어'도 17~18세기에 사멸하였다.[8] 이곳이 오늘날의 그니에즈노(Gniezno)라고 한다.[9] 서슬라브인의 일파. 이들의 이름에서 국명 '폴란드(Poland)'와 '폴스카(Polska)'가 유래하였다.[10] 미에슈코 1세의 선택은 (농담조로 말해) 폴란드 역사 내내 최악의 선택으로 판정된다. 나토의 군사전문가들이 '이상적인 전쟁터'라고 부르는 드넓은 평원지대에 살림을 차린 것이다. 폴란인이 지금의 영토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현재보다 숲이 우거져 있는 평야지대가 많았고 적들, 특히 기병이 진격하는 데 있어서 버거운 편이었으나 점점 개간과 벌목, 화력 무기의 발달로 인해 숲들이 줄어들어 탁 트인 평야지대로 변모해 갔다. 폴란드도 이러한 자국의 상황을 잘 이용하여 주요 무역로가 되어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기도 하고, 수많은 유럽의 학자들을 배출한 크라쿠프의 야기에우워 대학교의 경우는 유럽 학자들의 고향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 평야 지역에서 폴란드인이 대규모로 농사를 짓고 수확물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키웠고 또 평야를 따라 외국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으니 평야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11] 헝가리 왕위는 야드비가의 언니인 마리어가 계승했다.[12] 독일 기사단국은 1525년에 37대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Albrecht Herzog von Brandenburg-Ansbach, 1490 ~ 1568)가 개신교로 개종하고 로마 가톨릭과 절교한 후 세속국가 '프로이센 공국'이 되었다. 프로이센 공국은 폴란드 왕국의 봉신국으로, 프로이센 공작은 폴란드 국왕의 신하였다. 또 프로이센 공국은 초대 공작 알브레히트의 후손만이 세습할 수 있었다. 이 조항에 따라 1618년에 프로이센계 호엔촐레른 가문의 대가 끊겼을 때 폴란드 국왕은 프로이센 공국을 회수하여야 했으나, 대외 활동으로 정신이 없던 당시 국왕 지그문트 3세는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의 아들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Albrecht Friedrich von Preußen 1553~1618)의 사위이자 호엔촐레른 가문의 직계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Johann Sigismund, 1572 ~ 1620)'가 프로이센 공작은 폴란드 국왕의 신하로 남는다는 조건으로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 결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이 탄생하였고, 이는 비극적인 폴란드 근현대사의 시발점이 되었다.[13] 중세 후기 러시아의 여러 공국들은 1240년 이후 몽골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몽골의 지배는 1480년까지 이어졌다.[14]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헝가리-보헤미아 전체를 단일 통치자가 다스린 적은 없었다. 야기에우워 왕가의 헝가리-보헤미아 왕국은 1490년에야 완성되었으며, 러요시 2세가 모하치 전투(1526)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전사하면서 2대 만에 단절되고 오스트리아 대공국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가게 된다. 보헤미아 왕국 참조.[15] 헝가리어로 '바토리 이슈트반'. 그 유명한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외숙이다. 이슈트반의 누나 언너가 에르제베트의 어머니이다.[16] 지그문트 3세의 관심사는 부왕 요한 3세로부터 물려받은 스웨덴 왕위였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그저 숙부 칼 9세에게 빼앗긴 스웨덴 왕위를 되찾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익보다는 개인의 사욕을 위해 움직였고 이때문에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17] 그러나 그의 유약한 성품은 결과적으로 동쪽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를 막는 데에는 실패하였다.[18] 폴란드의 국가, 일명 '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가 탄생한 것도 이때였다.[19] 러시아 제국과의 동군연합 형태로, 사실상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점차 자치권을 상실하더니 1월 봉기 실패 이후에는 프리비슬린스키라는 이름으로 제1차 세계 대전까지 러시아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20] 그나마 오스트리아는 부분적으로 자치권을 부여하는 등 좀 더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치하의 폴란드인들은 물론 오스트리아의 통치 역시 싫어했지만 적어도 독일이나 러시아의 통치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21] 바르샤바 공국이나 폴란드 입헌왕국 등은 사실상 괴뢰국이었다.[22] 원래는 같은 동포국가인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폴란드와 싸우자 서우크라이나를 원조했고 나중에는 아예 나라를 합치기도 했는데, 소비에트 러시아의 침공을 당해서 이 즈음이면 서부로 세력이 쪼그라들게 된다. 정작 서우크라이나 영토였던 곳은 1919년에 폴란드에게 거의 먹혔다.[23] 리투아니아의 수도였으나 이 당시 인구 비중이 유대인 40%에 폴란드인 50%였다.[24] 골때리게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최초의 전투가 벌어진 베레자 카르투스카에다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