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링크 삭제 이동 폴란드 (r161 편집) [오류!]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login이상의 권한이 필요합니다.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 기울임 취소선 링크 파일 각주 틀 ====# [[폴란드 분할]]과 [[나폴레옹 전쟁]] #==== 18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기세는 날이 갈수록 무서워졌다. 1772년에 폴란드에 살던 온갖 민족들이 폭동을 일으켰는데, 여기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개입함으로써 1773년 8월 영토가 쪼개졌다. 물론 친러파가 가득한 의회의 동의를 얻은 조치였다. 당시 폴란드 의회의 의원 타데우시 레이탄(Tadeusz Rejtan)이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분할안의 통과를 막는 데에는 실패했고, 이후 그는 울분에 휩싸여 자결했다. 폴란드의 마지막 국왕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는 [[영국]]의 입헌군주제에 상당한 이해를 갖고 있던 인물이었으며, 국가를 이끌기에 충분한 지성과 근대적 능력을 갖추고 있던 개념있는 양반이었다.[* 그러나 그의 유약한 성품은 결과적으로 동쪽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를 막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기사학교(Szkola Rycerska)의 설립안을 가결시켜 이곳에서 수많은 개혁 청년과 엘리트들을 양산해내었고, 세계 최초의 교육부인 '국민교육위원회'의 설치안도 가결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또한, 1차 분할 이전에 폴란드에 관세 제도를 도입하여 외국 물건에 대한 관세를 매겨서 자국의 산업 보호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는 휴고 코원타이, 스타니스와프 스타시츠, 안제이 자모이스키, 아담 카지미에시 차르토리스키, 스타니스와프 마와호프스키, 이그나치 포토츠키 등 열렬한 개혁가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폴란드를 개혁했고, 1788 ~ 1792년에는 위대한 4년 세임을 개최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1791년 5월 3일 가결된 '5월 헌법'으로 세계사에서 2번째([[미국]] 다음), 유럽에서는 최초로 가결된 성문 헌법이었다. 182명의 세임 의원들의 서명을 받은 5월 헌법은 입헌군주제와 세습군주제, 국왕의 자유도시, 종교의 자유, 귀족에 대한 과세(10%의 소득세) 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또한 농민들은 귀족들의 자의적인 재판을 당하지 아니하며 국가가 이들을 보호하고, 도시민들에게 토지 구입을 허용하며, 농노제가 소작제, 즉 계약제로 전환된다는 내용도 담고 있었는데, 소작제는 전적으로 귀족과 농민 모두의 동의를 받은 상태에서 행해야 했다. 농민들은 원한다면 도시로 떠날 수도 있었다. 문제가 많은 자유 거부권을 폐지하고 의회에 2/3 다수결 제도를 도입하였으며, 의회에 외국에 대한 전쟁 선포와 화폐, 공채 등 대외적, 대내적 정책에 대한 가결과 부결의 권리를 맡겼다. 슐라흐타의 국왕 선출권을 박탈하여 포니아토프스키 가의 세습 군주제를 명확히 하기도 했다. 여기에 왕의 조카인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의회 내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왔고, 일체의 자유 거부권이 무시되는 --친위 [[쿠데타]]-- 상황에서 5월 3일 헌법은 수많은 귀족들의 반항을 무릅쓰고 가결되었다. 하지만 이것을 빌미로 1793년에 [[러시아]]가 폴란드를 침공했다. 폴란드는 맞서 싸웠지만 러시아는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왔고, 결국 1793년 다시 한 번 영토가 분할된다. 최전성기에 100만 제곱킬로미터가 넘는 면적을 자랑했던 폴란드의 영토는 이제 21만 제곱킬로미터로 축소되었으며, 왕국은 370만 명의 인구를 보유한 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1795년에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3국이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의 대(對) 러시아 봉기를 철저히 탄압했고, 1795년에는 세 번째 분할이 이루어져 폴란드는 아예 지도에서 사라졌다. 이때부터 눈물없이 보기 힘든 폴란드의 시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폴란드의 국가, 일명 '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가 탄생한 것도 이때였다.] 헌법이 생긴 지 고작 4년 만이었다. 독립을 위해 프랑스 혁명정부와 협력했던 폴란드 군단의 공로로 나폴레옹이 폴란드 분할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병합한 영토를 토해내게 하고 그 자리에 [[바르샤바 공국]]을 세운 기간 동안 잠시 [[괴뢰국]]으로나마 독립하였다. 그러나 [[빈 회의]]의 결과 바르샤바 공국은 또 다시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게 분할되어 지도에서 사라졌다. 프로이센의 [[서프로이센]]과 [[포젠|포젠 대공국]], 러시아의 [[폴란드 입헌왕국]][* [[러시아 제국]]과의 동군연합 형태로, 사실상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점차 자치권을 상실하더니 1월 봉기 실패 이후에는 [[프리비슬린스키]]라는 이름으로 [[제1차 세계 대전]]까지 러시아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 오스트리아의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과 [[크라쿠프 대공국|크라카우 대공국]]으로 분할되어 삼국의 치하에 놓였다. 폴란드인들은 11월 봉기, 1월 봉기, 크라쿠프 봉기, [[포즈난 봉기]] 등 수많은 봉기를 일으키면서 삼국의 폴란드 지배를 거부하였으나 삼국은 이들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그나마 오스트리아는 부분적으로 자치권을 부여하는 등 좀 더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치하의 폴란드인들은 물론 오스트리아의 통치 역시 싫어했지만 적어도 독일이나 러시아의 통치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변경 사항 요약 약관 동의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문서를 하면 문서의 편집 역사에 (3.17.174.156)가 기록되며 이에 .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