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링크 삭제 이동 폴란드 (r161 편집) [오류!]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login이상의 권한이 필요합니다.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 기울임 취소선 링크 파일 각주 틀 ====# 대홍수와 쇠퇴기 #==== 지그문트 3세 사후 그의 아들인 '유능한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재위 시기에는 루스 차르국과 오스만 제국의 침공도 격퇴하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사망한 [[스웨덴]]과도 자국에 유리한 조약을 맺으면서 동유럽의 전통적인 강대국임을 입증해보였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 스웨덴과 러시아의 집중 견제를 받았고, 그 와중에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슬슬 국력의 한계를 보이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폴란드의 전성기는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코사크 대반란이 시작되면서 막을 내렸다. 코사크의 봉기로 폴란드-리투아니안는 한때 우크라이나 전역을 상실하고 코사크의 자치권을 인정해야만 했다. 코사크의 반란은 1651년 베레스테츠코(Beresteczko)에서 폴란드군이 카자크-타타르 연합군에 대승을 거둠으로써 겨우 진정되었으나, 이 봉기에서 엄청나게 많은 정예병이 희생되었고, 또한 국력이 계속 소모되어 결과적으로 대홍수(Potop) 시기를 맞이하였다. 폴란드에게 패배한 코사크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해 왔고, 얼마 되지 않아 러시아가 직접 공격에 나서면서 폴란드는 순식간에 국토 절반이 점령당했다. 이후 스웨덴도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손잡고 함께 침공해 오면서 나머지 절반을 점령해 폴란드는 거의 패망 직전에 이르렀지만, 폴란드 농민과 귀족들 너나할 것 없이 스웨덴의 폭압적인 지배에 민중봉기를 일으켰고, 타타르가 폴란드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폴란드와 종교가 다른 세력들과 전쟁을 치루면서 가톨릭에 기반한 폴란드 민족정체성의 맹아가 이때에 생성된다. 폴란드군은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파베우 얀 사피에하, 얀 소비에스키, 스타니스와프 포토츠키 등 명장의 지휘를 받아 스웨덴군과 브란덴부르크, 루스 차르국 등에 맞서 여러 번의 승리를 거두었고, 1657년 벨라우 조약을 체결하여 [[프로이센]]을 독립시켜 [[브란덴부르크]]와의 전쟁을 끝내고, 1660년에 올리바 조약을 체결하여 리보니아의 영유권과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의 스웨덴 왕위 계승권 주장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스웨덴과의 전쟁을 끝냈다. 그러나 아직 러시아와의 전쟁이 남아있었다. 폴론카(Polonka), 류바르(Lyubar), 바시아(Basia) 강, 추드니우(Chudniv) 등에서 폴란드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쟁 막판에 흘루키우(Hlukiv) 공방전에서 [[타타르]]가 발을 빼고 계속된 전쟁에 지친 리투아니아군이 후퇴하는 등 군대가 붕괴하면서 다 말아먹고 말았다. 러시아와의 전쟁은 1667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양측 모두 엄청난 피를 흘린 끝에 1668년 안드루소보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끝맺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폴란드는 전체 인구 중 1/3이 사망하거나 외국에 편입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무엇보다도 프로이센의 독립에 더해 [[리보니아]]와 스몰렌스크, 키유프 등 폴란드 변경의 주요 부분들이 다 날아가버려 정치적, 경제적으로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게다가 전성기만 해도 그럭저럭 지배층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여 제대로 작동하던 귀족회의도 나라가 망조가 드니 주변 국가들의 정치적 침투에 넘어가 이후로는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재위 시절 빼고는 나라 정치 자체가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변경 사항 요약 약관 동의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문서를 하면 문서의 편집 역사에 (3.141.31.240)가 기록되며 이에 .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