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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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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樂浪郡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전한(前漢) 무제(武帝) 시기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설치된 한나라의 군현 중 하나이다. 기원후 313년 고구려의 미천왕(美川王)에 의해 축출되기 이전까지 420여년간 서북한 지역에 존속했다. 군의 치소는 조선현(朝鮮縣)으로, 지금의 평양시 토성동이다.

2. 연구사 [편집]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漢四郡) 연구는 역사지리적 위치에 대한 탐구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한백겸(韓百鎌)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정약용(丁若鏞)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등에서 주요 연구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들은 양란을 겪으며 새로운 역사 의식을 고양시키고 실증적 역사 지리 연구를 집대성하기 위한 사서들이 편찬되면서, 한사군의 지리 고증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들이 제기된 것이다.

최초의 낙랑군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조사는 1909년 세키노 다다시(関野貞)에 의해 시작되었다. 세키노는 당초 평양의 전실묘를 고구려의 유적으로 파악했다. 1910년 도리이 류조(鳥居 龍蔵)는 처음으로 평양 지역의 전실묘가 낙랑군의 유적이라 주장했다. 이후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대동강면고분(乙)에서 발굴된 금동부륜금구(金銅覆輪金具)의 '王□'이라는 명문을 문헌 자료에 등장하는 낙랑군의 왕씨(王氏)와 연결하여 이마니시의 설을 보강했다. 이후 낙랑군 재평양설은 학계 통설이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 '고적조사계획(古蹟調査計劃)'의 일환으로 대동강면 1~10호분을 발굴하는 것을 시작으로, 낙랑고분 자료가 꾸준히 발굴 조사되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이러한 발굴 자료들의 중원적 성격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며, 낙랑 문화와 한 문화의 친연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시켰다. 그들은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을 "지나[1]의 일부" 혹은 "고대 지나가 조선에 세운 식민지"라는 식으로 이해하여, 식민사관의 일종인 타율성론의 중심 논거로 삼았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은 낙랑 관련 고분들의 묘제ㆍ부장품 등을 분석해 묘주를 추측하여 낙랑군의 지배 종족을 밝히는 데 집중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배 종족을 그저 '한인(漢人)'으로 보고 낙랑군의 지배 구조를 한인 지배층과 토착민 피지배층의 이원적 종족지배구조였다고 단정했다. 미카미 쓰기오(三上 次男)는 목곽묘와 전실묘를 한인 지배층만의 것으로, 석관묘와 지석묘(고인돌)를 토착민의 것으로 규정 후 고고학적 증거로 사용했으며, 다무라 고이치(田村 耕一)는 이 견해를 보강했다.

1945년 해방 이후 대한민국 사학계에서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에 대한 연구는 기피되는 경향이 있다. 단적인 예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한국사』(신편,全52卷)의 편목과 내용을 들 수 있다. 『한국사』는 해방 이후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작품이라고 평할만큼 방대한 분량이지만, 유독 낙랑군에 관한 내용은 이 저술에서 책(冊, 卷)은 고사하고 장(章)·절(節)에 해당할 만한 분량도 할당되어 있지 않다.
또한 여전히 많은 학자들은 낙랑고분의 피장자의 성격을 한인으로 보는 견해를 추종하는 등, 일제 시기 정립된 이원적 종족지배구조론을 묵시적으로 따랐었다.

한편으로 1980년대 이후 낙랑군 관련 고고학 자료들이 축적되어 연구의 새로운 토대가 마련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발굴 조사 자료들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정리 후 공개했으며, 일본 동경대 고고학 연구실에서는 낙랑토성 발굴 자료를 정리하였다. 해방 이후 북한에 의해 발굴 조사된 성과들도 소략하게나마 공개되었다. 정백동 1호분(부조예군묘)을 비롯한 여러 목곽묘들이 대표적인 해방 이후의 발굴 성과들이다.
이에 따라 고고학 자료에 대한 해석을 통해 지배 세력·지배 구조 문제에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논의들이 나오고 있다. 권오중의 내속군설과 오영찬의 낙랑인의 형성에 대한 연구가 대표적이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을 중심으로 낙랑을 비롯한 한사군이 요동 혹은 요서에 있었다는 '낙랑요령설(樂浪遼寧說)'이 주장되기도 하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에 맞서는 대응 논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낙랑군의 성격이 고대의 식민지라는 식민사관적 주장을 답습하는, 편향된 인식을 바탕으로 주장되는 것이고, 고고학적으로는 평안도 일대를 중심으로 발견되는 낙랑 관련 유적들에 합리적인 해석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평양 지역에서만 5000여 기가 넘게 있는 것으로 추산되는 낙랑고분들을 전부 조작으로 치부하는 식이다.

3. 역사 [편집]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이 멸망되고 낙랑군을 비롯한 진번·임둔·현도군이 설치되었다.
기원후 3세기 초 공손강이 낙랑군 둔유현(屯有縣) 이남을 분리시켜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였다.
기원후 313년 고구려의 미천왕에 의해 공격받고 축출되었다.

4. 통치 구조와 성격 [편집]

5. 주요 고고학 자료 [편집]

6. 주요 사료 [편집]

원봉 3년[2] 여름, 니계상 삼이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다.
(중략)
이리하여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임둔·낙랑·현도의 사군을 설치하였다.

《한서》 <조선전>

7. 참고 [편집]

  • 오영찬, <낙랑군 연구>, 사계절, 2006.
  • 권오중 外, <낙랑군 호구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0.
  • 안정준.(2016).<오늘날의 낙랑군 연구>.역사비평,(),262-284.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1] 支那, シナ. 중국을 다르게 이르는 말이자, 중국을 비하하는 말.[2] 기원전 10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