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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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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라틴어 ROMA ANTIQUA
그리스어 Αρχαία Ρώμη
트라야누스 사후 최대 강역
로마 강역의 변천
1. 개요2. 역사
2.1. 로마 왕국
2.1.1. 누마 폼필리우스2.1.2. 툴루스 호스틸리우스2.1.3. 안쿠스 마르키우스2.1.4.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2.1.5. 세르비우스 툴리우스2.1.6.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3. 로마 공화정4. 로마 제정5. 군제
5.1. 장교5.2. 하사관5.3. 병사
6. 참고 문헌

1. 개요 [편집]

2000년 역사의 제국. 로물루스가 건국하였으며[2], 제정 말기인 기원후 395년 경에 동서로 제국이 분할된 이후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나뉘었다. 서로마 제국은 476년 경에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였고, 동로마 제국은 명맥을 유지해 나가다가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치세 때인 1453년에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메흐메트 2세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여 년이나 지속된 제국의 유산은 전유럽적을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에 현재까지도 중요하게 다뤄지며, 아직까지도 로마사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다만 동로마 제국의 경우 국내에서는 그렇게까지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저명한 동로마 제국 관련 국내 역사서를 3개[3] 밖에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2. 역사 [편집]

  • 로마 왕국(기원전 753~509년)
  • 로마 공화정(기원전 509~27년)
  • 로마 제정(기원전 27~ 기원후 476년)[4]
  • 3세기의 위기(235~285년)[5]
  • 동서 제국의 분할(313년)
  • 제국 통합 및 분할(324년과 337년)
  • 게르만족의 대이동(376년)[6]
  •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년)/동로마 제국의 존속
  • 라틴 제국의 성립과 멸망(1204~1261년)[7]
  •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동로마 제국의 멸망(1453년)

2.1. 로마 왕국 [편집]

로마의 장대한 역사는 기원전 8세기, 그 안에서도 전통적으로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고대 로마 왕국을 창립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파비우스(Quintus Fabius Pictor)는 그 시작을 기원전 747년으로 추산하였으나, 기원전 1세기 마르쿠스(Marcus Terentius Varro)에 의하여 기원전 753년이 시작점으로 잡힌 뒤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로마의 시작을 알리는 전설은 대개 두 단계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아이네아스에 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관련한 유명한 것이다. 플루타르코스 또한 이러한 로마의 기원과 관련한 여러 전승을 다루고 있다.[8]

초기 로마는 서서히 그 세력을 부풀려 나가며 왕정을 수립하였는데, 전설에 따르면 초기 로마에는 7왕이라고 불리는 일곱 명의 왕이 존재하였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로물루스(Romulus), 누마 폼필리우스(Numa Pompilius), 툴루스 호스틸리우스(Tullus Hostilius) 등의 인물들을 포함하며, 왕위는 전적으로 세습이 아닌 민회(民會)에 의한 선임으로 결정되었다. 초기 민회는 로마 시민 전원으로 구성되었다. 정책을 입안할 권리는 가지지 못하였으나, 왕을 비롯한 정부의 관리들을 선출할 권리를 지니고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전쟁, 외국과의 강화 등등 여러 분야의 고려 사안에 있어 그들의 동의는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추후의 사건 및 인물들은 Cornell(1995)에서 지적하듯 그 역사적 진실성과 정당성에서 큰 교차적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초기 로마가 왕정이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예컨대 1899년 포로 로마노에서 발견된 Lapis Niger라고 불리는 석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라틴어 명문 중 하나로 손꼽히는 문장이 발견되었다. 특히 이곳에 ‘왕’을 뜻하는 라틴어 rex의 고형(古形)으로 보이는 RECEI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아, 아마도 로마 왕정은 실존하였을 것이다.[9] 허나 주류 학설에 의하여서는, 로마의 왕이란 결국 여러 전투 집단 사이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우두머리의 우두머리에 불과한 존재였다는 셈이 된다.

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Tarquinius Priscus)를 포함한 마지막 3대 왕이 모두 에트루리아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전해지므로 당시 고대 로마 왕국이 에트루리아인의 지배 하에 있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기원전 600년 즈음에는 차기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Servius Tullius)에 의해 세르비우스 성벽이 축조되어 공공단체적인 도시생활을 영위하였으나, 7왕 중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Tarquinius Superbus)가 포악한 행정을 시행하였기에 기원전 509년 민중 반란으로 그가 쫓겨나며 로마는 공화정치를 선언한다. 선언 당시는 기원전 510년으로 추산된다.[10]

2.1.1. 누마 폼필리우스 [편집]



누마는 사비니족의 일원이었으며, 로물루스를 이어 7왕이라고 불리는 로마의 두 번째 왕 자리를 차지하였다. 리비우스에 의하면 그는 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쿠레스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리비우스는 자신의 저서 <로마사>에서, 누마의 업적을 다음과 같은 포문을 열며 서술한다.
“왕위에 오른 누마는 법과 풍습을 개선하여, 그때까지 폭력과 전쟁으로 기초를 쌓은 로마의 건전함을 주고자 했다.”
그는 또한 왕위에 올라 처음으로 야누스 신전을 지었으며, 이 신전은 아르길레툼의 아래에 건설되어 전시에는 문을 열고 평화시에는 문을 닫아놓았다. 결과적인 관점에서, 누마가 다스린 43년간 야누스 신전의 문은 단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다. 이렇듯 누마는 제대로 된 전시 상황 없이 농축업의 진흥에 힘을 쏟았으며, 후대에 타고난 지혜를 높이 사 칭송받았다.

그의 업적 중 종교와 관련한 개혁은 조금 더 특이한 것인데, 누마의 통치 이전에도 이미 로마인은 많은 신을 섬기고 있었다. 누마는 그런 신들을 각각 계급화하여 분류하고, 신을 받드는 신관 조직까지 정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신관 계급의 우두머리는 최고신관(폰티펙스 막시무스)이 맡는다. 그 외 30년간 처녀성을 지키며 무녀로 근속하는 베스타, 새가 나는 모습이나 모이를 쪼아먹는 모습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10명 정도의 사제가 이러한 정비의 대상이 되었다.

2.1.2.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편집]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따르면,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는 누마의 뒤를 이어 왕으로 선출되었다. 로마의 7왕이라 불리는 그 세 번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는 로물루스와 마찬가지로 라틴계 로마인이었으며, 사비니족 침공 당시 로물루스와 함께 싸우다 전사한 호스투스 호스틸리우스의 손자였다.

그는 왕위에 올라 알바롱가를 제일의 공격 목표로 삼고, 치열한 전쟁 끝에 알바롱가를 제압하여 로마의 종속국으로 삼은 것으로 유명하다. 알바롱가시는 전투로 인하여 철저히 파괴되었으나, 알바롱가의 시민들은 노예가 아닌 로마 시민으로서 로마로 강제 이주되었다. 로마인과 동등한 위치를 부여받은 그들의 주거지로 선택된 곳은 카일리우스(첼리오) 언덕이었다.

또한 그의 치세에서 고대 로마 왕정 시기 단 한 번 유일하게 역병이 돈 적이 있었으니, 리비우스의 <로마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후의 역병은 전부 로마 공화정 시기 이후의 것만이 서술되고 있으며, 이는 로마 병리학의 역사 속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에 역병이 돌았다. 로마 왕은 그동안 전쟁에만 몰두해왔다. 계속 군역에 종사해야 하는 불우한 환경 탓에 병사들이 군복무를 괴로워한다는 분명한 표시에도 불구하고 왕은 군복무의 일시적 해제를 허용하지 않았다.”
다시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따르면, 그는 32년의 치세 후 번개를 맞아 죽었다고 전해진다.

2.1.3. 안쿠스 마르키우스 [편집]

2.1.4.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편집]

2.1.5.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편집]



기원전 578년부터 535년까지, 로마의 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Servius Tullius)는 선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딸을 왕비로 함으로서 왕이 되는데, 유명한 것은 그는 왕비의 도움을 받아 민중 투표 없이 오직 원로원에 의하여 선출된 최초의 왕이라는 사실이다.

또 그는 세르비우스 성벽을 축조하여 공공단체적인 도시생활을 영위하도록 하였다. 선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가 남긴 습지대 간척사업 등에 힘을 들였으며, 세르비우스 성벽의 축조 또한 이러한 추후 사업의 일환이었다. 이 성벽은 아래와 같이 로마의 일곱 언덕 전부를 둘러싸고 있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다.

세르비우스의 업적 중 또 하나 중요한 것으로 평가받는 것은 바로 여러가지 개혁이다. 로마군을 전위, 본대, 후위로 삼분화하여 전열을 가다듬는 세르비우스의 병법 개혁은 가히 혁신적인 것이었고, 이외 통틀어 세금 및 선거 제도와 관련된 개혁이기도 하였다.

그는 기원전 535년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에게 살해당하였고, 그로 인하여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오만한(arrogant)”, “거만한(proud) 타르퀴니우스” 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를 안게 되었다.

2.1.6.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편집]

3. 로마 공화정 [편집]

4. 로마 제정 [편집]

5. 군제 [편집]

로마의 군단 조직은 여러차례 개편되었다. 초기 제국 시대의 군단은 다음과 같이 조직되었다.

5.1. 장교 [편집]

  • 장성급:
    • Imperator: 최고 사령관, 보통은 황제가 맡는다.
    • Legatus Augustus: 총독, 대개 휘하에 몇 개 군단을 거느린다.
    • Legatus Legionis: 군단장. 군단 하나가 정규군 5000, 비정규군 5000 정도로 구성된다.
  • 고급장교:
    • Tribunus Laticlavius: 직역하면 넓은 띠 대장, 현대 직위로는 부군단장. 군단장 유고 시 권한 대행을 맡는다. 고위 원로원 귀족 집안 내지 황실 출신인 경우가 많아서, 나이는 무척 젊다.
    • Praefactus Castrorum: 직역하면 숙영지 관리관, 현대 직위로는 참모장 + 군단 주임원사. 평민이 올라갈 수 있는 군대 내의 최고위직이기에 거의 다 평민들이다. 부대 훈련 및 운영 총책임자로, 보통 야만인으로 구성된 보조 부대를 지휘하기도 한다. 이 직위를 거치면 귀족으로 신분이 올라가서 다음 대부터 금수저로 살게 된다. 이 직위를 맡은 이들은 보통 군 경력 25년 이상 짬밥으로, 어지간해서는 군단장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긴다.
    • Praefactus Alae: 기병 대장. 하급 귀족이 일반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진급 상한선이다.
    • Tribunus Angusticlavius: 직역하면 좁은띠 대장, 현대 직위로는 참모. 주로 귀족 집안 젋은이들이 경험치를 쌓으러 나온다. 군단 본부에서 군단장을 보조하는 제반 업무에 종사하며, 한 군단에 여러 명이 복무한다. 참모가 아닐 때는 기병 대대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 Praefactus Cohortis: 기병 중대장. 기병대는 귀족이 아니면 끼기도 어려운 고급 병종이라서 우대를 받았다.
  • 백인대장: 로마 군단의 핵심은 백인대장이다. 백인대장 중에서도 여러 가지 분류가 있다.
    • Primus Pilus: 1번창. 무슨 일본 전국시대 지위 같지만, 실제로 그렇게 불렸다. 백인대장 중 최고 선임자로 1대대 1백인대장이며, 동시에 1대대장이기도 하다. 평민이 무예만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위직. Primus Pilus를 지낸 다음에는 Praefactus Castrorum로 진급하기도 한다. 사실상 고급장교인 셈. 일반 병사 월급의 60배를 받는다. 휘하에 각각 160명으로 구성된 5개 특수 백인대가 있다.
    • Pilus Prior: 대대장. 본인 스스로 각 대대의 1 백인대의 대장도 겸한다. 휘하에 각각 80명으로 구성된 6개 백인대가 있다.
    • Primus Ordine: 1대대 소속 백인대장들. 일반 병사 월급의 30배를 받는다. 이 백인대장들은 휘하에 80명이 아닌 160명의 병사를 거느린다.
    • Centurion: 일반 백인대장, 현대 군사 조직으로는 중대장. 로마 군의 기본 전술 단위이며, 로마 군의 척추라고 할 수 있는 직위이다. 보통 고참 병사 중에서 선발되기 때문에, 하사관과 어느 정도 비슷한 면도 있다. 일반 병사 월급의 10배를 받는다.

5.2. 하사관 [편집]

  • 군단 소속: 일반 병사가 백인대장으로 승진되기 전에 거치는 지위이다. 특히 Aquilifer를 거쳐서 백인대장이 되는 것이 가장 정상적인 과정이다.
    • Aquilifer: 군단 전체에서 최고 선임 병사. 군단기 역할을 하는 독수리 상징을 들고 다닌다. 일반 병사 월급의 2배를 받는다.
    • Cornicen: 군단 나팔수. 일반 병사 월급의 2배를 받는다.
    • Imaginifer: 황제 얼굴 모양을 들고 다닌다. 일반 병사 월급의 2배를 받는다.
  • 백인대 소속
    • Optio: 백인대 부대장. 각 백인대에 1명씩 있다. 일반 병사 월급의 2배를 받는다. 백인대장 유고 시 지휘 대행을 맡는다.
    • Signifer: 현대 군대에서의 인사계와 비슷한 일을 한다. 각 백인대 당 1명씩 있다. 월급 및 인사 관리를 한다. 일반 병사 월급의 2배를 받는다.
    • Tesserarius: 각 백인대에서 점호, 암구호 등을 담당한다. 일반 병사 월급의 1.5배를 받는다. 지휘 계통 상 백인대 제3인자.[11]

5.3. 병사 [편집]

  • Evocatus: 이미 복무 기간을 다 채웠는데도 자원해서(??) 연장 복무하는 병사들. 여러 가지 혜택이 많으며 사역이 면제된다.
  • Immunes: 특수한 기술이 있는 병사들. 역시 사역이 면제된다.
  • Milites: 일반병들.

6. 참고 문헌 [편집]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저, 비잔티움 제국사(324-1453), 한정숙 외 옮김, 까치글방(1999)

김칠성(2021). “기원전 674-205년, 로마에서 발생한 역병의 유행과 그 대응 조치 -리비우스(Titus Livius)의 『로마사』(Ab Urbe Condita)를 중심으로-”,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디트마르 피이퍼 외 저, 만들어진 제국 로마 - 그들은 어떻게 세계의 중심이 되었는가, 이은미 옮김, 21세기 북스(2016)

시오노 나나미(2007). “로마인 이야기”, 김석희 역, 한길사.

최혜영(2005). “고대 로마와 동북아시아의 신화 분석: 늑대와 새 -건국신화 비교를 통한 고대 지중해 세계와 동북아시아의 문명 교류의 가능성-“,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지역원.

티투스 리비우스 저, 리비우스 로마사 3 4, 이종인 옮김, 현대지성(2020)

프리츠 M.하이켈하임, 하이켈하임 로마사, 김덕수 옮김, 현대지성(2018)

학원사(1958). “학원사대백과사전”.

Arthur E(1983). “Gordon Illustrated Introduction to Latin Epigraph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 로마의 군단기[2] 사실 이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단, 일종의 건국 신화로 받아들여지고 있다.[3]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의 비잔티움 제국사(324-1453), 존 줄리어스 노리치의 비잔티움 연대기, 주디스 헤린의 비잔티움[4] 서로마 제국에 한정.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 멸망 후에도 계속해서 명맥을 이어나갔다.[5] 군인 황제 시대라고도 한다.[6] 훈족의 아틸라에 의해 쫓겨온 게르만족이 대거 로마 제국으로 이동한 사건이다.[7] 십자군 원정의 일환으로 성립한 제국이다. 자세한 건 십자군 원정 참고.[8] 최혜영(2005). “고대 로마와 동북아시아의 신화 분석: 늑대와 새 -건국신화 비교를 통한 고대 지중해 세계와 동북아시아의 문명 교류의 가능성-“,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지역원.[9] Arthur E(1983). “Gordon Illustrated Introduction to Latin Epigraph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10] 학원사(1958). “학원사대백과사전”.[11] Signifer는 지휘계통에 들어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