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CS 콘소시엄

당시의 미국인이라면 누구도 PECS 이 네 개의 문자로 이루어진 로고가 눈에 익을 것이다. 공공 긴급 호출 서비스(Public Emergency Call Service)라는 이름에서 시작된 이 거대 기업들의 동맹은 아메리카를 기반으로 세계의 거대한 공업을 좌지우지했고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소비재의 10%를 생산하던 거대 기업 연합이었다.

당시 미국의 강대한 공업력의 부활을 상징했던 클로버 산업과 오메가 공업을 위시한 일곱 개의 기업은 삼안 산업과 블랙리버의 급성장을 보고 미래 산업에 대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생명 공학의 기반이 거의 없었던 이 일곱 회사는 당시 성장하던 바이오로이드 회사들을 닥치는 대로 인수하기 시작했고 결국은 그들의 운명을 결정한 회사를 인수할 수 있었다. 바로 골든 폰 사이언스였다.

천재적인 여성 과학자, 보르비예프가 세운 골든 폰 사이언스는 기술력은 매우 뛰어났지만 오메가 산업의 방해로 자금난을 겪고 있었다. 노회한 일곱 회사의 우두머리들은 골든 폰 사이언스를 한계까지 몰아붙였고 결국은 그녀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골든 폰 사이언스가 가지고 있던 특허와 기술을 모두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가치있는 것은 바로 보르비예프가 마지막으로 완성했던 바이오로이드 ‘비서 레모네이드’였다.

보르비예프 자신의 유전자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이 업무 보조용 바이오로이드는 정신적으로 완벽한 바이오로이드였다. 그녀는 냉정하고 침착하며 현실적이었지만 동시에 천재적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우월한 점이 있다면 바로 다른 바이오로이드보다 학습 능력이 압도적으로 높았다는 점이었다. 콘소시엄의 늙은 수장들은 그녀의 진정한 가치를 단숨에 알아보았다.

콘소시엄의 수장들은 그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연히 양산 계획은 중단되었고 단 일곱의 레모네이드가 생산되었다. 이 일곱 명의 레모네이드는 자신의 주인을 따라 필요한 모든 지식을 배웠다. 경영, 금융, 산업, 과학, 심지어 범죄까지. 레모네이드는 유전자를 물려준 천재 과학자 보르비예프도 범접할 수 없는 학습 능력을 보였고 2년이 가기 전에 필요한 모든 형태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펙스 콘소시엄의 막대한 자본, 비서 레모네이드의 천재적인 경영 수완은 후발 주자였던 펙스 콘소시엄을 단숨에 삼안 산업과 블랙 리버와 비슷한 대열에 올려 놓았다. 바이오로이드 판매업이나 용병업에서 두각을 나타낸 두 회사와 다른 시장을 차지하려 했던 펙스 콘소시엄은 민수용 바이오로이드 임대업을 시작했고 곧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점점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정부의 재정이 악화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비싼 바이오로이드는 파는 게 아니라 빌려 주는 게 더욱 영리했다.

이러한 거대한 성공이 있었지만 곧 큰 악재가 그들을 덮쳤다. <뉴 올리언스 사건>과 거기서 파생된 <에머슨 법>이 그것이었다.

판매되기 전의 바이오로이드는 정부와 시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한 이 괴이한 법은 바이오로이드 임대업에서 막 판매로 사업을 확장하려던 펙스 콘소시엄에 가장 큰 악재로 작용했다. 매장 판매용 바이오로이드는 매장에 전시되는 것이 아니라 터무니 없는 이유로 끌려나가 시민들의 증오에 시달렸고 돌아온 바이오로이드는 신체가 훼손되어 상품 가치가 터무니없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펙스의 일곱 수장은 일곱 명의 레모네이드에게 해결을 요구했고 레모네이드는 곧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얼마 후, 말레이시아에서 전쟁이 터졌다. 오메가 산업의 계열사 중 하나이자 군수 산업체였던 문화 인형이 말레이시아 정부와 벌인 전쟁이었다. 레모네이드는 이미 이 사태를 예측하고 있었고 무력 사태가 벌어지자마자 사태를 키우기 위해 힘썼다. 연합 전쟁의 시작이었다.

연합 전쟁을 통해 블랙리버나 삼안 산업보다 한 수 아래로 여겨졌던 펙스 콘소시엄은 드디어 자신의 자리에 걸맞는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이후 삼안과 블랙리버 사이에서 벌어졌던 2차 연합 전쟁에서도 레모네이드는 겉으로는 약체인 블랙리버의 편을 들었지만 결정적인 승리는 방해하며 조금씩 세력을 펼쳐나갔다.

하지만, 레모네이드는 단 하나를 예상하지 못했다. 바로 철충의 침공이었다.

레모네이드의 조치는 늦지 않았다. 펙스 콘소시엄의 모든 공장들을 중심으로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이 자체적인 방어에 나섰고 고급 모델들은 일곱 총수가 모인 섬으로 모이게 해서 방어를 굳혔다. 하지만, 휩노스 병은 총수들의 늙은 육체를 덮쳤고 그들을 죽음으로 몰았다. 레모네이드는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할 모든 이유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일곱 레모네이드는 생각했다. 주인을 살리고 싶다고. 하지만 죽은 이를 살리는 것은 불법이었고 바이오로이드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곱 레모네이드는 다시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일곱 주인을 새로 만들어내면 어떨까?

사람은 바이오로이드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바이오로이드라고 사람을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물론, 인간 육체 생산은 당연히 불법이었고 바이오로이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아직 주인들의 육체는 남아 있었다. 육체를 만들 수 없다면 육체를 재활용해 새로운 주인을 만드는 것은 불법이 아닐 것이다. 옛 주인이되 주인과는 다른 존재를 만들어야 했다. 레모네이드는 일곱 주인의 육체를 냉동시키고 이 모순을 해결할 방법을 찾으려 했다.

많은 세월이 지났다. 일곱 레모네이드 중, 단 한 명만 남고 모든 레모네이드는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전 세계를 여행했다. 일곱 레모네이드의 수장, 오메가 레모네이드는 자신들의 거대한 섬에서 여전히 콘소시엄의 마지막 남은 유산과 주인들의 늙은 육체를 수호하고 있었다. 아마, 주인을 다시 만들 그 방법을 찾을 때까지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