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링크 삭제 이동 무아마르 카다피 (r43 편집) [오류!]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assistants이상의 권한이 필요합니다.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 기울임 취소선 링크 파일 각주 틀 === 총평 === ||<table align=center><tablewidth=500><tablebordercolor=#191919><tablebgcolor=#fff,#1f2023>{{{#!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libya_after_khadafi_1207205.jpg|width=100%]]}}}|| || <<'''After Khadafi'''>> || [[나세르]] 이래 [[아랍사회주의|아랍사회주의자]], 중동의 지배자들 중에서 가장 큰 경제적 성공을 이룩한 인물이다. 그나마 중동에서 석유로 재미를 봤다고 할 수 있는 [[사담 후세인|후세인]]의 [[바트 이라크]]의 경제는 카다피 리비아의 반에도 못 미쳤고, [[우아리 부메디엔]] 등의 알제리가 바트 이라크의 반 정도 수준, 나머지[* [[하페즈 알아사드|하페즈]]의 [[시리아|바트 시리아]], [[안와르 사다트|사다트]]와 [[호스니 무바라크|무바라크]]의 [[이집트]], [[알리 압둘라 살레|살레]]의 [[북예멘]], [[남예멘]] 등]는 그에도 못 미쳤다. 물론 카다피 리비아가 부패한 면도 없진 않았으나, 카다피는 석유 기업들을 국유화해 벌어들인 오일머니를 이용해 국민들을 위한 복지제도를 도입했다. 리비아 곳곳에 도로, 학교, 병원 등을 지었고, 노동자의 최저임금도 인상했다. 국민의 문맹률을 낮추기 위한 교육 사업에 주력해 리비아 국민 문맹률을 90%에서 10%대로 낮추었다. 당시 400만명이 조금 넘는 리비아 총인구 가운데 140만명이나 무상으로 대학교육까지 받게 했으며 여성을 문교장관과 문공차관으로 임명하는 개혁 행보를 이어나갔다. 이슬람권이면서도 남녀공학이 실시되었으며, 무상교육뿐만 아니라 학용품, 식비까지 모두 무료로 했고, 해외유학비도 국가에서 지원할 정도였다. 이러한 혜택은 저유가와 경제재제로 재정이 나빠졌던 90년대에도 지속되었기 때문에 당시 리비아는 극심한 빈부격차에 시달리는 타 아프리카 국가와는 빈부격차 문제는 덜했고 생활수준은 아프리카에서 1위를 기록했다. 집권 후반기인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학생 대상 노트북 전면 배급과 실각 이후 중단된 구형 노트북 교체 사업, 인터넷 통신 대부분 무료화 실시는 서방에 파격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농업 부문에 있어서도 상당한 능력을 보여주었는데, 자급자족을 할 수 있도록 농업의 수준을 끌어올렸고, 농민의 생활 수준을 상당히 발전시켰다. 그는 농민이 자력으로 경작할 수 있는 정도의 땅을 배분해 모든 농부에게 기회의 평등을 마련하도록 했다. 이런 개혁 정책에 관개용지, 목초지 개발, 대수로 공사, 현대적 영농기법 개발을 포함하여 전체 개발예산의 1/6이 농업 개발에 투자되었는데, 이 개혁은 나름대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1970년 기준 2만 7000톤이었던 밀 생산이 1983년에는 21만 3000톤에 이르렀고, 채소 생산은 10.8%가 증가했으며, 보리와 과일 채소 육류, 계란, 우유 등의 수요가 급증했다. 1969년을 기점으로 카다피 리비아는 산업을 다각화하며 경제 성장을 촉진했는데, 카다피는 노동 착취를 근절하고 노동자를 생산 순환 구조에서 파트너로 취급하는 새로운 노사 관계를 구축했다. 1981~85년의 5개년 개발 계획 동안 리비아는 산업 생산의 연간 22,6%의 성장률과 산업생산품 수출의 연간 2.4% 증가 그리고 석유산업 분야 노동자 수 연간 11% 증가를 기록했다. 또 석유가 고갈될 때를 대비해 사막을 가로지르는 대수로 공사를 실시, 리비아에 농업을 확충하여 농업국으로 발돋움하려고 했다. 이 공사의 1단계를 한국이 수주했는데, 이 공사를 위해 리비아와 한국과 직항편이 설치될 정도였다.[* 실제로 북아프리카는 기후가 변해 사막이 되어버려서 그렇지 토질은 여전히 좋은 편이기 때문에 관개만 제대로 된다면 농업이 충분히 가능하다. 즉, 카다피가 마냥 공상적인 계획을 들고 나온 게 아니라는 소리.]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에 의하면 당시 리비아의 정치가들은 "대수로 공사를 할 돈이면 리비아 국민들이 1년 내내 먹고 살 수 있다"며 반대했지만, 카다피는 "대수로 공사만이 식량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며 대수로 공사를 추진하였다고 한다. 카다피는 최원석 전 회장을 만날 때마다 리비아인을 대규모로 고용해달라는 요구를 하였고, 최 회장은 자국민의 일자리를 신경쓰는 카다피의 모습을 보며 왜 그가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지 짐작하였다고 한다. 천만명의 인력과 오백만대 분량의 중장비가 동원된 대공사 끝에 한국의 동아건설은 성공적으로 대수로 공사를 완공하였고 리비아는 한반도 면적의 8배 이상의 땅을 농지로 얻게 되었다. 대수로 공사의 통수식 날 메마른 사막에 물이 콸콸 쏟아지는 신기한 광경에 리비아 국민들은 열광하였고 카다피는 이처럼 성공적인 대수로 공사를 세계 8대 불가사의라며 자랑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카다피는 단순한 독재자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는데, [[자마히리야]]란 나름의 선거 제도와 지방자치제도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 이 제도는 때때로는 제1세계의 민주주의 제도 이상으로 공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지역간 갈등 완화나 소수자 인권 보호에도 꽤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외교적인 면에서는 강경한 반미 지도자였는데, 한때는 서방 세력에게 '사막의 미친 개'라고 불릴 정도였다. 또한 범아랍주의와 아프리카의 통합을 외쳤고, 흑인들의 인권 운동 특히 [[넬슨 만델라]]의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제도 폐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다 반미 노선이 바뀌는 결정적인 계기가 생기는데,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으로 [[탈레반]] 정부와 [[바트 이라크]]가 무너지자 바로 노선을 바꾸고 과거부터 계획 중이던 대량살상무기의 폐기를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이 덕에 [[유엔]]과 [[미국]]이 리비아에 때린 경제 제재를 해제시키는 쾌거를 이끌어냈고, 자국 경제를 해외에 개방해 해외 투자를 적극 유치하기도 했다. 의외라면 의외지만 [[친한]] 성향이었다. 앞선 건설에도 한국 기업에 특혜를 주기도 했고, 왠진 몰라도 한국에게 좋은 감정이 있었던 거 같다. 물론 트러블이 없진 않았지만. 자세한 건 하단 문단 참조. 2004년에는 2차례에 걸쳐 북한에 특사를 파견하여 핵을 포기하도록 설득하였으며, 2006년에는 [[한명숙]] 총리의 요청을 받고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중재에 나서기도 하였다. 카다피는 북한에게 "국민들의 고통을 막기 위해선 핵을 포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예 비판받을 점이 없는 건 아닌데, 결론적으로는 독재자였고, 수많은 정치 탄압을 시행하고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기행도 잦았고. 그러나 [[아랍의 봄]]으로 카다피가 실각하자 오히려 수많은 부족, 정치 단체의 개입으로 개판이 나버렸다. [[https://www.sundaymail.co.zw/libyans-regret-miss-life-under-gaddafi|한 인터뷰]]에 따르면 카다피 시절 죽은 리비아인보다 이후 [[제2차 리비아 내전|혼란]] 속에 죽은 리비아인이 훨씬 많다고. 카다피 통치기인 2010년 리비아의 GDP는 1만 1417달러로 어지간한 중진국 수준이었지만, 카다피 실각한 후인 2020년에는 3282달러로 3분의 1 이하로 급감했다. 심지어 리비아 혁명에 첫날부터 참여한 청년조차도 그때의 행동을 후회하며 카다피의 열렬한 팬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프라인 뿐만이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해외에 나가있는 리비아인들을 중심으로 카다피에 대한 향수가 불고 있다. 유튜브에 카다피 관련 영상의 반응만 해도 당시의 혁명을 후회한다거나 카다피를 그리워하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정리하면 중동 내에서는 1티어 독재자 중 하나라고 할 만한 인물. 경제적으로 높은 성과를 보여준 [[사담 후세인]]도 이 정도급의 성과는 못 냈으며, 타 독재자들은 후세인만큼도 못 했으니 말 다했다. 변경 사항 요약 약관 동의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문서를 하면 문서의 편집 역사에 (18.191.181.231)가 기록되며 이에 .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