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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마르 카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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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마르 카다피
معمر القذاف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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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전에2. 개요3. 상세4. 카다피 리비아
4.1. 카다피주의4.2. 영향
5. 민주화 운동내전6. 평가
6.1. 긍정적인 평가6.2. 부정적인 평가6.3. 총평
7. 결론8. 여담9. 둘러보기

1. 들어가기 전에 [편집]



이 문서가 다루는 대상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여기서 설명하는 대상의 모습은 천사와 악마처럼 극명하게 달라질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ㄴ 빛은 경제 성장과 세속주의 성향, 어둠은 철권 통치 및 기행



이 문서의 대상은 공과 과가 너무나도 극명해 찬양하거나 까내리기만 하기에 애매한 고인입니다.

고인을 희화화하거나 비하해야 할지 너무 고민됩니다.




카다피는/은 사실 미국에게 깊은 사랑을 품고 있습니다!
카다피는/은 누구보다 미국를 사랑하면서 왜 본심을 숨기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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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은 꽃과 같아서 잎이 있어야 그 미가 살아나는 법입니다.
“다시 보니 선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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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아야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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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물은 테러리스트입니다! 안구 테러리스트이든 경제 테러리스트이든 상관 없이 이 인물에게서 도망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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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지고 나서야 봄인 줄 알았습니다...



리비아은(는) 어떤 곳일까...

2. 개요 [편집]

무아마르 카다피
Muammar Gaddafi
“나는 무력으로 이 혁명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고서는 내가 물러나지 않을 것임을 여러분은 알아야만 한다.”
ㅡ 1975년 5월 벵가지 Gharyounis(Garyounis) 대학에서

معمر محمد أبو منيار القذافي
무아마르 무함마드 아부민야르 알-카다피 (Muammar al-Gaddafi, 1942년 6월 7일 ~ 2011년 10월 20일)란, 과거 리비아를 지배했던 독재자이다. 소속 정당은 무소속.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후, 2011년 아랍의 봄으로 축출될 때까지 무려 42년간 리비아를 지배했던 인물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돌아버린 행보로 '사막의 미친 개', '아랍의 망나니'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본인 스스로는 스스로를 '아프리카의 왕중왕'(King of Kings of Africa)으로 불렀다.

3. 상세 [편집]

본래는 반미 진영의 대표적인 독재자였고, 나름대로 개발도 시도하고 있었지만, 2000년대 초반 사담 후세인이 '핵을 만들었다'란 명목으로 축출당한 이후로는 핵을 포기하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 꽤나 관계가 개선되었었다.



2009년에 집권 후 처음으로 UN 총회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처음에는 UN 창설 뒤 터진 65차례 전쟁을 해결하지 못한 무능함을 질타한 데 이어 5개 강대국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안전보장이사회 체제를 신랄하게 까버렸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뜬금없이 "UN 본부를 뉴욕에서 리비아로 옮기자"라고 말하더니 본회의장에서 헌장을 어서 던져버렸다. 이날 남긴 말만 해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핵무기를 조사하려다 암살됐다.", "신종플루는 백신을 팔아먹으려는 제약회사들의 수작이다.", "아프리카 식민지배 피해 배상금으로 7조 7700억 달러를 내놓아라.", "오바마는 아프리카 혈통이니 우리 아들, 영원히 대통령 해먹어야." 등등. 이런 소리를 1시간 반씩이나 하고 있으니[1] 다들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고, 그 결과 다음 차례였던 어맹뿌가 연설을 할 때는 빈 자리로 가득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에 의하면 카다피는 평소에는 말이 없지만, 군중 앞에서 마이크를 잡으면 한 시간, 두 시간이 넘게 연설을 했다고 한다.

4. 카다피 리비아 [편집]

대체적으로 아랍사회주의, 그 중에서도 나세르주의 성향을 띄었는데, 이는 생전 카다피가 가말 압델 나세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카다피와 나세르는 카다피가 리비아군 대위일 때부터 친분을 갖고 있었는데, 카다피는 나세르를 존경했고, 또 정치적 스승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나세르가 대통령 재임 중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카다피는 2번씩이나 기절을 해가면서 오열을 했다고.

약간 돌아버린 사람 같긴 하지만 그래도 세속주의 성향을 띄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주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 자주 마찰을 빚었다. 대표적으로는 '수단의 도살자' 오마르 알-바시르를 위시한 리비아 반정부 세력에 의해 여러 차례 나라가 혼란에 빠진 적이 있다.

외교적으로 봤을 때는 의외긴 하지만 친한 성향이었다. # 이 시기 리비아는 한국의 건설업체 해외수주 규모 3위에 해당되는 교역상대국으로서 한국은 리비아의 건설수주를 통해 막대한 국익을 챙겼는데, 카다피가 대놓고 리비아 내에서 한국 기업들에게 특혜를 주면서 한국은 리비아에서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그러다 2010년대 한국 측에서 리비아에 대한 첩보 활동을 벌이다 발각되면서 단교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직후 한국 측에서 이명박의 형인 이상득을 특사로 파견해 카다피와 면담을 나눈 뒤에야 외교 관계가 정상화됐다고. 여담으로 이 면담에서 카다피는 이상득에게 "한국은 리비아를 통해 막대한 이득을 챙겼음에도 교과서나 언론에서 나를 왜 그렇게 비하하느냐?"라면서 서운하다고 하기도 했다.

긍정적인 면으로는 흑인 민권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80년대 넬슨 만델라와 아프리카 국민회의가 서방에서 테러리스트와 테러 조직으로 몰릴때 유일하게 지원한 국가가 리비아였으며, 로디지아의 반정부 무장 세력도 지원하였다. 이 때문에 나토의 리비아 공습에 대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이 극렬히 반대했다. 특히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리비아 혁명 당시 망명을 제안하기도 했고, 현재도 카다피의 비자금을 숨겨주고 있다. 미국 흑인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미국 흑인의 이중국적 취득에 큰 도움이 되었고, 흑표당을 지원하기도 하는 등 미국 흑인 민권 운동에도 깊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미국 흑인 래퍼의 적지 않은 수가 나토의 리비아 공습을 비난했다.

4.1. 카다피주의 [편집]

  • 현재 세계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정치제도는 비민주적 오류로 가득차 있으며, 정당정치, 의회정치, 계급정치로 인해 민주주의는 훼손되어져왔고, 왜곡되어왔다. 이를 단계적 직접민주주의 자마히리야 제도로써 바로잡는다.
  • 오늘날의 헌법은 권력자들이 국민 권력을 무단으로 탈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법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도덕, 경전, 윤리 등을 기초로 삼아 법을 반들어야 한다.
  • 법인, 단체 등에서 발행되는 언론매체는 국민을 대변할 수 없도록 되어있으며, 자마히리야 체제의 중추인 인민위원회에 의해 발행되는 언론매체만이 민주적인 언론이라 볼 수 있다.
  • 임금노동자는 일종의 노예나 다름 없으며, 그 생산물의 생산자는 곧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
  • 주택, 차량 등은 국민의 권리이기 때문에 매매되어서도 안 되며, 양도되어서도 안 된다.
  • 가사노동은 집주인의 손으로 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서는 안 된다.
  • 부족은 대가족, 민족은 대부족, 인류는 대민족이라 할 수 있다. 가족은 한 인간의 터전이자 보호처이며, 부족은 사회적 학교, 민족은 한 사람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가족은 그 어떤 권력에 의해서도 훼손 되어서도 안 되고, 민족 국가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국가체제이다.
  • 여성은 남자와 다름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확고한 사실이지만, 남자와 여자는 신체 구조부터 다르기 때문에 역할도 나뉘어질 수 밖에 없다. 여성은 본능적으로 모성애를 갖고 있어서 육아와 가사의 일이 주어진다. 국가와 사회는 이러한 본능을 지켜주고, 여성으로서의 막대한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보호해주어야 한다. 또한 가정은 여성이 모성애를 보호하는 곳이기 때문에 여성의 소유여야만 하고, 여성도 남자와 같은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 소수민족을 탄압하거나 억압해서는 부당하며, 해서도 안 된다.
  • 흑인은 미개하다는 이유로 여러 인종에게 무시당해왔으나, 그 미개함 덕분에 흑인은 숫자로서 세계를 정복할 것이다.
  • 의무교육으로 국민에게 교육을 의무지워서는 안 되며, 충분한 수의 학교를 설립해 각자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게끔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법이다.
  • 운동 경기와 쇼를 관람하는 것은 관중에게 어떠한 육체적, 심적 영향도 주지 못한다. 따라서 운동선수, 배우 대신 관중들이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이며, 또한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것이다.

4.2. 영향 [편집]

사후 리비아가 내전을 치루고 ㄹㅇ로 막장이 되면서 카다피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혁명 이전에는 단 한 명의 카다피가 있었지만, 리비아 혁명 후엔 수백만 명의 카다피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며, 지역이나 마을 단위로 쪼개져 내전을 벌이는 리비아의 현실에 대한 개탄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심지어 리비아 혁명에 첫날부터 참여한 청년조차도 그때의 행동을 후회하며 카다피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분위기에 물 타서 카다피의 둘째 아들인 사이프 알-이슬람가 정계 복귀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 리비아 법원은 그의 대선 출마를 불법으로 규정했다가 끝내는 출마를 허용해줬다고.

한편 카다피 축출 이후 혼란에 빠진 현 리비아 정국에 개탄하고 있는 몇몇의 리비아인들은 그렇다고 예전의 카다피 시절로 역행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카다피 정권으로부터 숙청, 탄압당한 경력이 있었고, 최근 리비아 내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리비아 국민군(LNA)의 칼리파 하프타르(Khalifa Haftar) 최고 사령관을 지지하기도 한다. 다만 서방과 아랍권의 외교계 일각에서는 하프타르 역시 카다피와 별 반 다를 것 없는 독재자가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28세에 정권을 장악하여 장기집권을 펼쳤던 카다피와 다르게 하프타르는 이미 70대 고령이라서 리비아의 내전 상황을 종식시키고 리비아의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카다피처럼 종신 독재자가 되지 못 하고, 대신 과도 정부에 가까운 통치를 펼치다 다른 LNA 인사들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줄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물론 2021년 기준 현재는 둘 다 압둘 하미드 드베이베 임시 총리에게 지지율로 처참하게 발리고 있긴 하다. 두 사람의 지지율을 합쳐도 드베이베 총리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수준.

5. 민주화 운동내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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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2011년 아랍의 봄으로 리비아 내에 반정부 여론이 커지기 시작하고, 이에 카다피가 이들을 대상으로 내전을 선포하자 서방 국가들이 리비아에 무력 개입을 하며 끝내 정권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후 리비아 시민군에게 사로잡혀 집단 구타당하고 암컷타락 당하는 등 심각한 학대를 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향년 69세.

사후 시신이 정육점의 냉동 창고에서 민간인들에게 공개 되다가 # (혐짤 주의), 25일 리비아의 한 사막에 비밀리에 묻혔다. 매장 지역은 기밀로 처리된 데다 사막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라고.

6. 평가 [편집]

6.1. 긍정적인 평가 [편집]

  • 석유 국유화를 통한 경제 성장
  • 복지 정책 증진과 문맹률 감소, 농업 발전, 교육·의료 전면 무상화.
  • 2000년대 이후 반미에서 돌아선 외교 정책과 대량학살무기 폐기, 해외 투자 적극 유지[2]
  • 흑인 민권 운동 지원, 넬슨 만델라 등 80년대 흑인 인권 운동 지원
  • 자마히리야를 통한 나름대로의 선거 제도 및 지방자치제도 구축
  • 세속주의 추구,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탄압

6.2. 부정적인 평가 [편집]

  • 42년간의 철권 통치 및 인권 탄압
  • 전세계에 골고루 숨겨둔 비자금과 부정부패. 이 여파는 2021년 현재까지 이어져서 전직 프랑스 대통령인 니콜라 사르코지가 카다피에게 500만 유로를 받은 혐의를 받고 조사를 받기도 했다.
  • 테러리즘 지원 및 테러 사주, 테러리스트 보포
  • 핵실험 및 대량학살무기 제작[3]

6.3. 총평 [편집]

<<After Khadafi>>
나세르 이래 아랍사회주의자, 중동의 지배자들 중에서 가장 큰 경제적 성공을 이룩한 인물이다. 그나마 중동에서 석유로 재미를 봤다고 할 수 있는 후세인바트 이라크의 경제는 카다피 리비아의 반에도 못 미쳤고, 우아리 부메디엔 등의 알제리가 바트 이라크의 반 정도 수준, 나머지[4]는 그에도 못 미쳤다.

물론 카다피 리비아가 부패한 면도 없진 않았으나, 카다피는 석유 기업들을 국유화해 벌어들인 오일머니를 이용해 국민들을 위한 복지제도를 도입했다. 리비아 곳곳에 도로, 학교, 병원 등을 지었고, 노동자의 최저임금도 인상했다. 국민의 문맹률을 낮추기 위한 교육 사업에 주력해 리비아 국민 문맹률을 90%에서 10%대로 낮추었다. 당시 400만명이 조금 넘는 리비아 총인구 가운데 140만명이나 무상으로 대학교육까지 받게 했으며 여성을 문교장관과 문공차관으로 임명하는 개혁 행보를 이어나갔다.

이슬람권이면서도 남녀공학이 실시되었으며, 무상교육뿐만 아니라 학용품, 식비까지 모두 무료로 했고, 해외유학비도 국가에서 지원할 정도였다. 이러한 혜택은 저유가와 경제재제로 재정이 나빠졌던 90년대에도 지속되었기 때문에 당시 리비아는 극심한 빈부격차에 시달리는 타 아프리카 국가와는 빈부격차 문제는 덜했고 생활수준은 아프리카에서 1위를 기록했다. 집권 후반기인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학생 대상 노트북 전면 배급과 실각 이후 중단된 구형 노트북 교체 사업, 인터넷 통신 대부분 무료화 실시는 서방에 파격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농업 부문에 있어서도 상당한 능력을 보여주었는데, 자급자족을 할 수 있도록 농업의 수준을 끌어올렸고, 농민의 생활 수준을 상당히 발전시켰다. 그는 농민이 자력으로 경작할 수 있는 정도의 땅을 배분해 모든 농부에게 기회의 평등을 마련하도록 했다. 이런 개혁 정책에 관개용지, 목초지 개발, 대수로 공사, 현대적 영농기법 개발을 포함하여 전체 개발예산의 1/6이 농업 개발에 투자되었는데, 이 개혁은 나름대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1970년 기준 2만 7000톤이었던 밀 생산이 1983년에는 21만 3000톤에 이르렀고, 채소 생산은 10.8%가 증가했으며, 보리와 과일 채소 육류, 계란, 우유 등의 수요가 급증했다.

1969년을 기점으로 카다피 리비아는 산업을 다각화하며 경제 성장을 촉진했는데, 카다피는 노동 착취를 근절하고 노동자를 생산 순환 구조에서 파트너로 취급하는 새로운 노사 관계를 구축했다. 1981~85년의 5개년 개발 계획 동안 리비아는 산업 생산의 연간 22,6%의 성장률과 산업생산품 수출의 연간 2.4% 증가 그리고 석유산업 분야 노동자 수 연간 11% 증가를 기록했다.

또 석유가 고갈될 때를 대비해 사막을 가로지르는 대수로 공사를 실시, 리비아에 농업을 확충하여 농업국으로 발돋움하려고 했다. 이 공사의 1단계를 한국이 수주했는데, 이 공사를 위해 리비아와 한국과 직항편이 설치될 정도였다.[5]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에 의하면 당시 리비아의 정치가들은 "대수로 공사를 할 돈이면 리비아 국민들이 1년 내내 먹고 살 수 있다"며 반대했지만, 카다피는 "대수로 공사만이 식량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며 대수로 공사를 추진하였다고 한다. 카다피는 최원석 전 회장을 만날 때마다 리비아인을 대규모로 고용해달라는 요구를 하였고, 최 회장은 자국민의 일자리를 신경쓰는 카다피의 모습을 보며 왜 그가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지 짐작하였다고 한다.

천만명의 인력과 오백만대 분량의 중장비가 동원된 대공사 끝에 한국의 동아건설은 성공적으로 대수로 공사를 완공하였고 리비아는 한반도 면적의 8배 이상의 땅을 농지로 얻게 되었다. 대수로 공사의 통수식 날 메마른 사막에 물이 콸콸 쏟아지는 신기한 광경에 리비아 국민들은 열광하였고 카다피는 이처럼 성공적인 대수로 공사를 세계 8대 불가사의라며 자랑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카다피는 단순한 독재자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는데, 자마히리야란 나름의 선거 제도와 지방자치제도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 이 제도는 때때로는 제1세계의 민주주의 제도 이상으로 공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지역간 갈등 완화나 소수자 인권 보호에도 꽤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외교적인 면에서는 강경한 반미 지도자였는데, 한때는 서방 세력에게 '사막의 미친 개'라고 불릴 정도였다. 또한 범아랍주의와 아프리카의 통합을 외쳤고, 흑인들의 인권 운동 특히 넬슨 만델라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제도 폐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다 반미 노선이 바뀌는 결정적인 계기가 생기는데, 아프간 전쟁이라크 전쟁으로 탈레반 정부와 바트 이라크가 무너지자 바로 노선을 바꾸고 과거부터 계획 중이던 대량살상무기의 폐기를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이 덕에 유엔미국이 리비아에 때린 경제 제재를 해제시키는 쾌거를 이끌어냈고, 자국 경제를 해외에 개방해 해외 투자를 적극 유치하기도 했다.

의외라면 의외지만 친한 성향이었다. 앞선 건설에도 한국 기업에 특혜를 주기도 했고, 왠진 몰라도 한국에게 좋은 감정이 있었던 거 같다. 물론 트러블이 없진 않았지만. 자세한 건 하단 문단 참조.

2004년에는 2차례에 걸쳐 북한에 특사를 파견하여 핵을 포기하도록 설득하였으며, 2006년에는 한명숙 총리의 요청을 받고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중재에 나서기도 하였다. 카다피는 북한에게 "국민들의 고통을 막기 위해선 핵을 포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예 비판받을 점이 없는 건 아닌데, 결론적으로는 독재자였고, 수많은 정치 탄압을 시행하고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기행도 잦았고.

그러나 아랍의 봄으로 카다피가 실각하자 오히려 수많은 부족, 정치 단체의 개입으로 개판이 나버렸다. 한 인터뷰에 따르면 카다피 시절 죽은 리비아인보다 이후 혼란 속에 죽은 리비아인이 훨씬 많다고.

카다피 통치기인 2010년 리비아의 GDP는 1만 1417달러로 어지간한 중진국 수준이었지만, 카다피 실각한 후인 2020년에는 3282달러로 3분의 1 이하로 급감했다. 심지어 리비아 혁명에 첫날부터 참여한 청년조차도 그때의 행동을 후회하며 카다피의 열렬한 팬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프라인 뿐만이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해외에 나가있는 리비아인들을 중심으로 카다피에 대한 향수가 불고 있다. 유튜브에 카다피 관련 영상의 반응만 해도 당시의 혁명을 후회한다거나 카다피를 그리워하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정리하면 중동 내에서는 1티어 독재자 중 하나라고 할 만한 인물. 경제적으로 높은 성과를 보여준 사담 후세인도 이 정도급의 성과는 못 냈으며, 타 독재자들은 후세인만큼도 못 했으니 말 다했다.

7. 결론 [편집]

8. 여담 [편집]

리비아 반군에 의해 점령된 카다피의 요새 안에서 미국 前 국무부장관 콘돌리자 라이스의 사진첩이 발견되었다. '흑인 여왕' 이라고 호칭하면서 일종의 이상상처럼 여겼다고. 카다피 본인도 이러한 사실을 거의 숨기지 않았고 콘돌리자 라이스가 리비아를 방문했을 때 그녀의 해외 외교영상들을 짜깁기해서 만든 '기괴한' 동영상을 감상시켜주기도 했다고 한다. 콘돌리자의 말에 따르면 기괴하긴 했으나 성적인 느낌은 없었다고 한다. 덕분에 미 정부는 콘돌리자의 방문 일정을 리비아 쪽과 외교 협상을 하는 줄다리기 카드 중 하나로 써먹었다.

생전 입었던 옷들 수준이 ㄹㅇ 믿을 수 없을 만큼 돌아버린 수준이다. 잘 몰?루겠다면 직접 가서 보자. #

썬글라스를 즐겨 꼈는데, 본인의 미래가 너무 밝아서 가리개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총알 나갈 때 화염 일어난 게 밝긴 했다.

카다피는 특유의 곱슬머리로 유명했는데, 사실 카다피는 탈모가 심해서 이를 감추기 위해 가발을 착용했던 것이다. 탈모가 워낙 심하다보니 모발이식 수술까지 한 적도 있다고 하며, 죽기 직전까지도 가발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원래는 의외지만 한때는 잘생긴 독재자로 유명했다. 근데 1970년대부터 얼굴이 작살나기 시작하며 이젠 전부 과거 얘기.

뉴스위크지에 따르면 혼자서 40개의 훈장을 자신에게 셀프 수여했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을 딴 카다피(가 주는) 인권상이 있었다. 역대 수상자로는 넬슨 만델라, 피델 카스트로, 우고 차베스 등이 있다. 2010년 수상자는 튀르키예 총리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제9회 한국 불교인권상 수상자다.

생전 건강의 비결이랍시고 갓 짜낸 낙타 젖을 매일 마신다고 밝혔는데 낙타 젖은 우유보다 지방은 많고 비타민은 적다. 게다가 비살균된 가축의 젖은 브루셀라를 유발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한데 카다피는 갓 짜낸 것을 그대로 마셨으니.. 그러다 보니 평생 복통과 설사를 달고 살았으며 업무 중에도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에 들락날락 거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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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0년대까지, 2010년대 이후 재합류
[2] 2017년까지
[3] 2016년부터
[4] 2021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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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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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6년부터
[2] 2017년부터, 2021년까지
[3] 2011년까지
[4] 2016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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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내전 (2011)
바레인 민주화 운동 (2011 - 현재)
리비아 민주화 운동 (2011)
2011 리비아 내전 (2011)
시리아 내전 (2011 - 현재)
2011 이라크 내전 (2011 - 2013)
2013 이집트 쿠데타 (2013)
2013 이라크 내전 (2013 - 2017)
2014 리비아 내전 (2014 - 2020)
예멘 내전 (2014 - 현재)
카타르 외교 위기 (2017 - 2021)
2017 이라크 내전 (2017 - 현재)
2019 수단 쿠데타 (2019)
바그다드 국제공항 공습 (2020)
2021 수단 쿠데타 (2021 - 현재)
마흐사 아미니 시위 (2022 - 현재)
윤석열 UAE의 적은 이란 발언 논란 (2023)
• 사우디-이란 관계 회복 선언 (2023)
관련 문서
[1] 본래 1인당 연설 시간은 20여분으로 제한되어 있다.[2] 그러나 이러한 행보는 끝내 유엔과 유럽 연합이 리비아 전쟁 때 카다피를 쉽게 배신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도 했다. 잘한 건 맞는데 끝내는 그를 죽음으로 이끈 셈.[3] 물론 2000년대 들어 전부 폐기처분하긴 했다.[4] 하페즈바트 시리아, 사다트무바라크이집트, 살레북예멘, 남예멘[5] 실제로 북아프리카는 기후가 변해 사막이 되어버려서 그렇지 토질은 여전히 좋은 편이기 때문에 관개만 제대로 된다면 농업이 충분히 가능하다. 즉, 카다피가 마냥 공상적인 계획을 들고 나온 게 아니라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