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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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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
عزة إبراهيم الدور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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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일생
3.1. 젊은 시절3.2. 바트 이라크3.3. 이라크 전쟁3.4. 행방 불명
4. 여담5. 둘러보기

1. 개요 [편집]

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
Izzat Ibrahim al-Douri
عزة إبراهيم الدوري

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 (Izzat Ibrahim al-Douri, 1942년 7월 1일 ~ ?)란, 이라크의 정치가이자 군벌으로, 바트 이라크 후세인 정권의 2인자이자 후세인의 오른팔로 불리던 인물이다. 바트 이라크가 무너지고 시아파 중심의 이라크 신정부가 세워진 이후로는 구 후세인 충성파들과 함께 이라크의 아랍의 봄을 유발시켰고, 이후로는 나크슈반디 군대(일명 JRTN)를 이끌며 이라크 신정부를 무너뜨리고자 하고 있다. 소속 정당은 바트당 (이라크)이며, 별칭은 "유령".

2. 상세 [편집]

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 / Izzat Ibrahim al-Douri
이라크 바트당 정권에서 내무장관을 역임했고, 1979년부터는 혁명사령부 위원회 부의장과 이라크 부통령 등에 재임하며 사담 후세인의 통치를 도왔던 인물이다. 이란-이라크 전쟁에 참전했고, 이후 벌어진 걸프 전쟁에서 쿠웨이트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후세인 정권의 몰락 이후, 구 후세인 정권의 명맥을 잇고 있는 인물로, 그가 이끄는 나크슈반디 군대(일명 JRTN)는 몇 안 되게 후세인 정권과 후세인이 내세웠던 사상을 계승한 세력들 중 하나이다.[1]

3. 일생 [편집]

3.1. 젊은 시절 [편집]

알-두리는 알-부 하르바 씨족에 속하는 인물로, 다우르 시에 있는 알-마와샤트 씨족의 일부이다. 그는 농부의 아들로 가난한 수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살라딘 주의 알-다우르 지구에서 자랐는데, 그는 아다미야 고등학교를 다녔으나, 별 다른 성과는 없는 상황에서 여러 차례 낙방하자 학업을 포기하고 거리로 나가 일했다. 이후 그는 얼음 덩어리를 팔며 '아이스맨(the Iceman)'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러던 와중 1963년 사담 후세인을 만나 사담 후세인과 바트당의 정보기구에서 근무했다. 이후 바트당 세력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에 여러 차례 참여해 후세인에게 신뢰를 얻었고, 1968년 바트당이 정권을 잡자 그는 내무 장관을 재임하며 이라크 공산당과 같은 바트당의 정적들을 공격했다.

3.2. 바트 이라크 [편집]

1979년 혁명사령부 위원회 부의장으로 취임해 이라크 역사 상 유래가 없던 큰 권력을 누리고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생하자 알-두리는 혁명사령부 위원회 부의장으로서 이 전쟁에 참전했다. 심지어 알리 하산 알 마지드(케미컬 알리)에게 겨자와 사린 신경 가스 등을 활용한 화학 공격을 지시했다는 의혹도 있다.

1990년 이라크가 기습적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해 걸프 전쟁이 발발하자 또다시 전쟁에 참여하며 사우디아라비아 카프지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전투를 치뤘다. 1991년 이라크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반란을 진압했고 쿠르드족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할라브야를 잊어버렸다면, 우리가 작전을 반복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고 경고했다.

1993년 이슬람에 대한 헌신을 장려하기 위해 이라크에서 도입한 "신앙 캠페인"의 감독관으로 참여해 이슬람 단체를 지원하고 이슬람 방식의 처벌을 증가, 이슬람 단체에게 더욱 자유를 보장하는 등의 활동을 하며 교육, 사법 제도를 이슬람 중심으로 바꾸었다. 1998년 11월 22일, 이라크 카르발라에서 그를 암살하려던 시도가 발생했다.

1993년 사담 후세인이 국가를 단결시키기 위해 '이슬람 신앙 캠페인'을 추진해 이슬람을 통해 국민들을 단결시키려 하자 이에 협조하며 교육, 사법 제도를 '이슬람식'으로 바꿨다.

3.3. 이라크 전쟁 [편집]

이라크 전쟁 직후에는 잠적해 지하에서 후세인 추종자들을 모으며 미국에 저항했고, 이에 2003년 11월 그에게 1천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 직후 이자트의 일가가 대거 검거되었지만 그만큼은 잡히지 않았다.

2008년, 침공 당해서 무너진 건 지네들인데도 불구하고 미군에게 협상 조건으로 미군의 이라크 철수 등을 요구했다. 물론 씨알도 안 먹혔지만.

그러던 사이 압둘 바키 알-사둔, 모하메드 유니스 알-아흐메드 등 반 알-두리 세력들과의 내분으로 인해 바트당이 두 갈래로 분열된다. 사둔은 실패하고 미군에 붙잡혔으나, 아메드가 이끄는 알-아우다 세력이 알-두리의 바트당에서 독립해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두 세력의 차이점은 아메드의 알-아우다는 '후세인의 강'을 건너고 시리아 바트당과 협력하고 시아파들도 포섭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두리의 바트당은 '후세인의 강'을 건너지 못한 상황이며 시리아 바트당을 적대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3.4. 행방 불명 [편집]

이라크 전쟁 이후로 알-두리는 몇 년간 행방 불명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시리아로 도피했니, 예멘으로 도피했니 등 수많은 주장이 난무했다. 당시 미국은 알-두리가 백혈병을 앓고 있단 점과 노령이란 점을 들어 그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 예측했으나, 이 예측은 완벽하게 빗겨가게 된다.

2012년, 바트당을 통해 오랜만에 생존 신고를 했는데, 과거의 반미 논조와는 달리 이번에는 미국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라크 내전 발발 직후에는 누리 알-말리키이라크 정부군과 대립하며 바트당 정권의 부활을 목표로 했지만 잘 되지 않자, 급기야 ISIL과 손을 잡는다.

또한 다에쉬 지도자인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와 접촉하기도 했으나, 끝내는 결별을 선언했다. 사실 ISIL 세력이 알-두리의 수피파 세력을 '이단'이라며 공격하고 수피파에 대한 탄압을 일삼는 등 손절 당할 만한 짓을 오지게 저지르긴 했다.

이후 후티이란을 비판하고 사우디아라비아를 지지하며 시아파 반군과 교전을 이어나갔고, 한편으로는 ISIL 반군과 교전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아랍의 봄 정국에서는 반정부 시위대를 지원했고, 반정부 시위대의 배후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2014년에는 ISIL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알두리를 비롯한 반 ISIL 계열 수니파 세력이 중요하다는 분석이 등장했다. # 이들은 나름대로 일부 지역에서 지지를 받고 있는 건 물론이고, 나크슈반디 반군 자체가 수니파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일부 경찰들에게도 합법적인 정치 단체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에 이라크 내에서 가장 간섭받지 않는 테러 단체라는 점이다.

2010년대 후반에는 ISIL 문제와 관련해 이라크 정부와 협상을 이어나가며 반 ISIL 성향 수니파 반군들을 양성하려고 하는 듯 하다. # 다만 본인은 부정한 상태.

또한 이란의 영향력에 대해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우디를 중심으로 하는 반 이란 연대에 합류할 것을 촉구했다.

미국에게는 "우리는 이란, 그 요원, 민병대 및 보안 기구로부터 이라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미국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라며 "미국이 이란의 헤게모니, 통제, 점령으로부터 이라크와 그 국민을 구하고 유혈, 파괴, 불태우기, 인구 변화를 막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라크 국민은 '점령'에 저항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한편 이 시기, 이라크의 시아파 성직자 무크타다 알-사드르는 알-두리를 죽이거나 생포하기 위해 특별 팀을 구성하겠다고 밝혔으나 끝내 아무 일도 없었다.

2018년에는 노선이 상당히 온건해졌는데, 쿠웨이트 침공을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시아파 정부와의 내전에 대해 입도 뻥끗 안 하는 등 상당히 온건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다시 바트당이 이라크 정계에서 복귀하려는 시도로 추정되며, 이에 UN 측도 이라크의 수니파 소외 현상 등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바트당을 이라크 정계 전면에 불러들이려고 하고 있다. #

그러던 2020년 바트당 측에서 이자트가 사망했음을 밝히며 후계자로는 살라 알-무크타르를 지목했다. 다만 알-두리의 정확한 사인은 바트당 측에서도 몰?루를 시전했다. 생전 백혈병을 앓고 있었단 점을 들어 백혈병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제일 높게 쳐지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추측 선이기 때문에 확실한 건 아니다.

그러고 또다시 목격담이 등장했다. NRT News에 따르면 이라크 정치인인 하산 알-라위는 이라크 쿠르디스탄에서 이자트와 만났고, 최소한 2021년 8월 17일까지도 생존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는 알려진 바와 달리 한번도 이라크를 떠난 적 없다고. # 알-라위에 따르면 이자트는 이슬람 근본주의자였지만, 알-라위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전쟁을 거부하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또한 대화 후 바트당 간부 중 한 명이 쿠르디스탄 지도자 마수드 바르자니를 찾아가 알-라위를 중앙 정부에 넘기자고 하기도 했지만, 이자트는 그걸 거부했다고.

혹은 후술할 백혈병 덕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백혈병 치료를 받으며 체류하다 사망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4. 여담 [편집]

평생 백혈병을 달고 살았고 6개월에 한번씩 수혈을 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가 2018년 6월에 백혈병으로 사망했다는 루머가 떠돌기도 했다.

1968년 첫 결혼을 시작으로 5번 결혼을 했고 배우자들과의 관계에서 아들 11명과 딸 13명, 총 24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사담 후세인에 대한 충성을 표시하기 위해 사담 후세인의 아들 우다이 후세인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켰다.

종교적으로는 이슬람 수피즘 수니파였다.[2] 바트 이라크가 수니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단 점을 감안하면 기독교인 타리크 아지즈와 함께 예외적인 케이스. 실제로 그가 이끌었던 나크슈반디 군대는 수피파와 수니파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ISIL와 손절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ISIL의 수피파 탄압 때문.

외모는 하얀 피부와 밝은 갈색 머리칼 때문에 아랍인보단 유럽 백인을 닮았는데 사실 아랍인이나 터키인 등 중동의 백인계들 중에서도 유럽인과 유사한 사람들이 꽤 있다. 사진만 보면 영국이나 체코, 네덜란드, 독일인 같기도 하다. 다만 중동에서도 저런 외모는 흔한 외모는 아니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진에서 군모를 쓰고 있거나 모자를 쓰고 있어 잘 눈에 띄진 않지만, 모자를 벗은 사진들을 찾아보면 머리가 꽤나 심하게 벗겨진 걸 알 수 있다. 아마 탈모를 심하게 겪은 모양이다.

평생 이란을 주적으로 여겼다. 그나마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 세력에 대해서는 말년에 약간이나마 유화적인 태도로 나오긴 했으나, 이란과 친 이란 세력에 대해서는 끝까지 적으로 여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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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영향
[1] 또 다른 세력은 모하메드 유니스 알-아흐메드가 이끄는 알-아우다. 본래 바트당 소속이었으나, 이라크 전쟁 직후 내분으로 분열됐다.[2] 수피파는 이슬람의 신비주의 계열 사상인데, 전근대 시절 이슬람권 전반에서 유행했으나 현재는 소수로 몰락한지 오래인 세력. 사챈위키에 등재된 또다른 수피파로는 압델 파타 알-부르한 수단 공화국 주권위원회 의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