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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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حزب البعث العربي الاشتراك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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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명
바트당 (부흥당 / 재건당)

حزب البعث العربي الاشتراكي

Arab Socialist Ba'ath Party
창당일
1947년 4월 7일
중앙당사
설립자
슬로건
통일, 자유, 사회주의
이념
바트주의 (범아랍주의, 아랍사회주의, 세속주의)
주요 인물

1. 개요2. 상세
2.1. 시리아 지부2.2. 이라크 지부

1. 개요 [편집]

“وحدة ، حرية ، اشتراكية
통일, 자유, 사회주의”

바트당 슬로건.
'아랍사회주의 부흥(Ba'ath)당'. 1940년 시리아, 이라크의 지식인이었던 미셸 아플라크가 창당한 당이다.

아랍어로 '바트(بعث)'란 '부흥', '재건'을 뜻하므로 바트당이라는 당명은 '부흥당' 쯤 되는 의미이다. 이름처럼 아랍사회주의, 아랍민족주의 성향을 띠며, 따라서 세속주의적이다. "통일, 자유,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시리아 바트당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하페즈 알-아사드바샤르 알-아사드가 종신대표로 자리잡고 있다. 실제로 하페즈는 사망 이후에도 계속해서 시리아 바트당의 종신대표를 역임하고 있으며, 이라크 바트당의 대표적인 인물으로는 사담 후세인과 후세인 정권 2인자였던 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가 있다.

2. 상세 [편집]

1940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창당된 바트당은 1947년 4월 7일에 제1차 당대회를 다마스쿠스에서 개최한 이래 점차 아랍 각국에 세력을 넓혀, 1949년 팔레스타인, 1951년 레바논, 1952년 이라크, 1954년 요르단, 1958년 남예멘, 1964년 수단에 각각 지부를 두어 범아랍 정당으로 기능하게 된다.[1] 그 중에서 특히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건 시리아와 이라크의 당이었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라크의 바트당 지부는 양국에서 서로의 영향력이 커져가자 서로를 위협으로 보기 시작했으며, 끝내 양당이 분열하자 분열의 원인을 서로에게 미루며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걸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는 시리아 바트당이 이란-이라크 전쟁걸프전에서 이라크 대신 이란미국, 쿠웨이트를 지지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1970년대 당시 부통령이었던 사담 후세인의 영향력이 점점 커져가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알-바크르 대통령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하페즈와 함께 바트당 지부 통일 뿐만 아니라 이라크-시리아 통일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알-바크르는 이 논의에서 하페즈를 이라크-시리아 통일 국가의 1인자로 세우고자 했고, 후세인을 3인자로 끌어내려 정치적인 영향력을 축소하고자 했다.

그러나 하페즈는 이에 회의적이었는데, 통일 자체가 상당히 비현실적인 얘기인 건 물론, 이라크가 국력을 이용해 시리아를 집어 삼킬 거라 염려했고, 후세인 역시도 본인을 배제시키기 위한 논의인 걸 모르지 않고 있었기에 별 다른 진전 없이 결렬되었다.

2.1. 시리아 지부 [편집]

حزب البعث العربي الاشتراكي

시리아 알-아사드 왕조의 여당으로 바트당의 분열 속에서 이라크파를 지지하며 분열한 세력이다. 정식 명칭은 아랍 사회주의 부흥당 시리아 지부(Arab Socialist Ba'ath Party – Syria Region).

1963년 3월 8일 시리아 군부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지금까지 여당 자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1970년대부터 시작해서 사망한 현재까지도 하페즈 알-아사드가 중앙당 서기장직을 맡고 있다. 아무래도 이미 사망한 사람이 종신 대표직을 맡고 있으니 실권은 시리아 바트당의 2인자격인 압둘라 알-아마르와 시리아 지부 서기인 바샤르 알-아사드에게 있는 상황.

1963년 바트당은 시리아에서 정권을 잡게 되지만, 1966년 2월 23일, 지역주의 세력인 살라 자디드하페즈 알-아사드가 쿠데타를 일으키며 민족주의 세력인 미셸 아플라크만수르 알-아트라쉬, 무니프 라자즈의 바트당을 전복시켰다.

이후 미셸 아플라크무니프 라자즈는 이라크로 망명하고, 살라 자디드는 국가 운영을, 하페즈 알-아사드는 군사를 담당하게 되지만, 1970년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던 하페즈가 다시 한번 쿠데타를 일으키며 하페즈가 시리아를 지배하게 되었다.

2003년 기준으로 당원은 180만 명으로 시리아 인구의 18%를 차지하고 있다. 기관지로는 1948년 창간한 알-바스, 1963년 창간한 알-타우라(혁명)가 있다.

시리아 구 헌법 상에는 바트당을 '사회와 국가에서의 지도적 정당'이라 칭하며 사실상 시리아의 유일 정당으로 활동했으나[2], 시리아 내전 이후 바샤르가 유화책을 펼치며 2012년 2월 26일부로 해당 부분은 삭제되었다.

시리아 말고 예멘에도 지부를 가지고 있으나, 군소 정당에 불과한 건 물론, 예멘도 내전으로 개판이 된 이후에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2.2. 이라크 지부 [편집]

حزب البعث العربي الاشتراكي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의 여당으로, 바트당의 분열 속에서 이라크파를 지지하며 분열한 세력이다. 정식 명칭은 아랍 사회주의 부흥당 이라크 지부(Arab Socialist Ba'ath Party – Iraq Region).

분열 이후 바트당의 창립자였던 미셸 아플라크가 1989년까지 중앙당 서기장(당대표)직을 맡다가 이후 사담 후세인이 중앙당 서기장 겸 이라크 지부 서기를 겸직했다.

이라크 바트당은 창당 이후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정권을 잡고 있던 압둘 카림 카심과 대립하며 사담 후세인 등이 여러 차례 압둘 카림 카심을 암살하고자 했지만 실패로 돌아가기도 했다.[3]

그러다 1963년 2월 나세르주의자[4]였던 압둘 살람 아리프와 바트주의자였던 알리 살리 알-사디,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 등이 손을 잡고 라마단 혁명을 일으켜 카심을 제거한 뒤 정권을 잡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바트주의와 나세르주의 간의 내분이 발발해 다시 11월에 다시 한번 쿠데타가 발발했고, 이 과정에서 나세르주의 세력이었던 압둘 살람 아리프가 정권을 잡으며 바트주의 세력은 9개월 만에 다시 몰락하게 된다.

그리고 이 형국은 5년 간 이어지다, 1968년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사담 후세인, 하르단 알-티크리티 등의 바트주의 세력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압둘 라만 아리프를 실각시킨 뒤 정권을 잡게 된다.

이후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가 대통령직을 맡다 사담 후세인에 의해 실각당하고, 사담 후세인이 대대적으로 바트당 내 반후세인 세력에 대한 숙청을 실시하며 이라크 바트당은 완전히 후세인의 1인 정당이 되고 말았다.

본래 2003년 전까지는 이라크의 여당으로 기능을 했지만, 이라크 전쟁 직후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사담 후세인 사후에는 후세인 정권의 2인자였던 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가 중앙당 서기장 겸 이라크 지부 서기를 맡아 이라크 바트당을 이끌었지만, 미군 측에서 이라크 바트당을 불법 정당으로 규정하며 완전히 와해되고 만다.

한편 이자트의 바트당은 시아파를 중심으로 구성된 신(新) 이라크 정부와 교전을 이어나가며 반정부 활동을 벌이다 다에쉬와 손을 잡는 막장 행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바트당 입장에서도 다에쉬의 원리주의는 감당하기 어려웠는지[5][6] 이라크 정부군과 손을 잡고 다에쉬 소탕에 나서게 된다.

2018년에 들어서는 바트당이 이라크 정계에 전면적으로 복귀하게 허용해준다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찌라시가 아니라 UN 피셜. 이는 누리 알-말리키를 필두로 한 이라크 시아파 정부의 수니파 탄압을 견제하기 위함인 듯. 이에 바트당 측도 호응해서 쿠웨이트 침공을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시아파 정부와의 내전에 대해 입도 뻥끗 안 하는 등 상당히 온건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

2020년 들어 IS가 몰락하면서 일부 이라크 바트당의 잔당들과 지지층 세력들이 시리아, 요르단 국경 사막지대에서 게릴라 반군 투쟁을 벌이며 이라크 정부에게 맞서고 있지만 숫적으로도 이라크 정부군보다 딸리는지라 현 이라크 정권을 전복시키고 정국 주도권을 재장악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바트당 측도 이를 인지해 여러 루트로 이라크를 비롯한 각국 정부에 접촉하고 있는데, 미국과 이란이 지켜보고 있는 이상 양지로 나올 가능성은 높다고 보기 어렵다.

2020년 이자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7], 사담 후세인 정권의 대사였던 살라 알-무크타르가 중앙당 서기장 겸 이라크 지부 서기직을 이어받았다.

본국인 이라크에서는 사실상 멸망했지만 요르단 국회에 1석을 가지고 있다.
[1] 카타르튀니지에서는 불법화[2] 물론 사회주의자 연합, 아랍 사회주의운동, 시리아 공산당 등의 다른 정당이 없던 아니지만, 사실상 바트당의 위성정당.[3] 본래 바트당과 카심은 그리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카심 내각 대다수가 바트주의자였을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으나, 서로 국정 운영에 대해 마찰이 생기며 대립하기 시작했고 끝내 정적으로 돌아서게 되었다.[4] 이집트 전 대통령이었던 가말 압델 나세르를 따르는 세력[5] 앞서 서술한 것처럼 바트당은 세속주의 성향이다. 이슬람 극단주의를 추구하는 다에쉬와는 근본부터가 다른 세력.[6] 이 이유 뿐만이 아닌 당시 바트당의 지도자였던 알-두리와 ISIL의 종교 관점에 대한 차이도 존재했다.[7] 다만 이쪽은 생존설도 간간히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