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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샤르 알-아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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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Syria and Bashar!



바샤르 알-아사드
بشار حافظ الأسد
프로필
성명
바샤르 하페즈 알-아사드

Bashar Hafez al-Assad

بشار حافظ الأسد
출생
1965년 9월 11일 (58세)
시리아 다마스쿠스주 다마스쿠스
학력
알 후리야 고등학교[1] (졸업)(-1982)
다마스쿠스 대학교 (의학 / M.D.)(1982-1988)
종교
신체
190cm
가족
하페즈 알-아사드 (1930 ~ 2000)
母 아니사 마클루프 (1930 ~ 2016)
배우자 아스마 알아사드 (2000년 결혼)
슬하 2남 1녀 (하페즈 2세, 자인, 카림)
소속 정당
재임 기간
제6대 대통령
2000년 7월 17일 ~ 현직
Bashar al-Assad 테마곡

1. 들어가기 전에2. 개요3. 상세4. 일생
4.1. 젊은 시절4.2. 하페즈의 뒤를 잇다
5. 바샤르 알-아사드 정부
5.1. 정치적 성향5.2. 주요 행보 및 공과5.3. 외교적 노선5.4. 영향
6. 시리아의 봄내전7. 관련 밈
7.1. Assad Must Go7.2. Assaded
8. 여담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1. 들어가기 전에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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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깟 일로 좆되면 세상 어떻게 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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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은 꽃과 같아서 잎이 있어야 그 미가 살아나는 법입니다.
“다시 보니 선녀 같다!”

盧래를 만들어라.

盧래를 만들라고 할 때, 만들 수 있을 때 만들어라.

盧래를 만들었다.

盧래를 만들라고 할 때, 만들 수 있을 때 만들었다.

2. 개요 [편집]

바샤르 알-아사드
Bashar al-Assad
“하나님, 시리아, 바샤르!
!الله وسوريا وبشار”

ㅡ God, Syria and Bashar! #

بشار حافظ الأسد
바샤르 알-아사드 (Bashar Hafez al-Assad, 1965년 9월 11일 ~ )란, 시리아의 반인반신이다. 본래는 안과 의사였으나, 하페즈 알-아사드가 죽으면서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소속 정당은 바트당.

집권 초기에 바로 아랍의 봄이 터져 버리면서 카다피살레, 무바라크처럼 얼마 못 버티고 끌려내려올 것으로 예측되었는데.. 진압되긴 커녕 반군을 압살해버리면서 시리아의 최고존엄이 되어버렸다.

알라 쑤리이 야우 바샤르!!

바샤르 펀치! 바샤르 펀치! 바샤르 펀치! 바샤르 펀치! 바샤르 펀치! 바샤르 펀치! 바샤르 펀치! 바샤르 펀치!

3. 상세 [편집]

바샤르 알-아사드 / Bashar Hafez al-Assad
아랍사회주의 계열의 정치인으로, 안과 의사 시절에는 환자들을 치료해주다가 이젠 환자들을 본인이 직접 대량생산 해내고 있다.

샌드니거판 김정은으로, 성향도 딱 좌익에서 극좌 성향이긴 하다. 친북에 친중, 반서방 성향인 건 덤. 무고한 국민들도 ㅈㄴ 많이 죽였는데, 이재명에게 드럼통이 있다면 바샤르에게는 통폭탄이 있다고 말해도 될 정도이다.


바샤르식 성능 좋은 통폭탄.

원래는 평범하게 안과의사로 쭈-욱 살아갈 운명이었는데 아버지의 후계자로 지목된 형이 교통사고로 뒈짖하는 바람에 대타로 후계자가 되었다. 남동생이 둘 있는데 하나는 정신병에 시달리다 노짱 따라 갔고, 다른 하나는 군대의 총사령관인데 성격이 존나게 포악해서 후계자로서 실격하는 바람에 딱히 경쟁할 사람 없이 착실히 정치수업 받다 애비가 뒈짖하자 형식적인 대통령 선거로 당선, 사실상 세습해서 그 이후로 쭈-욱 시리아를 다스리고 있다.

솔직히 맘만 같아서는 '재규어' 엔딩이나 '후세인' 엔딩을 만들고 싶긴 한데, 문제는 이 새끼가 그나마 차악이라는 점이다. 얘 뒤지는 순간 더한 놈들이 입갤할 게 뻔하니 이 새끼가 아무리 개지랄을 떨어도 가만 놔주고 있다. 특히나 아사드 가문이 속한 알라위파는 바샤르가 실각하는 순간 그대로 학살당해 사라질 게 뻔하다.

4. 일생 [편집]

4.1. 젊은 시절 [편집]

젊은 시절의 바샤르.
1965년 9월 11일 다마스쿠스에서 당시 시리아 공군사령관이었던 하페즈 알-아사드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982년 다마스쿠스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하여 1988년 졸업했다. 1992년 영국 런던에 있는 웨스턴 안과 병원(Western Eye Hospital)으로 유학하여 안과 전문의 과정을 수료했다. 훗날 그의 영부인이 될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난 수니파 무슬림 아스마 알-아사드와는 안과 수련의 시절에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치가가 될 생각이 없었으나, 사실상 하페즈의 후계자로 낙점이 되어 있던 바셀 알-아사드 중령이 교통 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후 바로 귀국해 시리아 육군에 입대해 다마스쿠스 북부에 있는 홈스의 군사학교에 들어갔고, 다마스쿠스의 티슈린 군병원에서 육군 군의관으로 복무했으며 1999년 1월 육군 군의대령으로 승진했다. 이후 후계자 수업을 받으며 하페즈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했다.

앞서 언급했듯, 누나 부쉬라는 여자였고, 바샤르의 두 남동생들은 정신병이 있거나(마지드) 선천적으로 포악하고 과격해(마헤르) 대권을 잇기에는 부적합했기에 별 다른 마찰음 없이 바샤르가 대권을 잇게 되었다. 특히나 바샤르가 정치 수업을 들으며 동생이었던 마헤르 알 아사드의 권력 기반이었던 시리아 '공화국 수비대'의 실질적인 지휘권을 장악한 점도 한몫했다.

4.2. 하페즈의 뒤를 잇다 [편집]

2000년의 뱌사르. 현재와는 달리 수염을 기르고 있다.
“만약 사회의 운영이 하나의 종교, 하나의 정당, 혹은 하나의 그룹에 편중된다면, 그 사회에는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시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회의 발전과 근대화에 나서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 가지 사항이 중요합니다. 우선, 모든 과제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현실에 걸맞지 않는 낡은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생각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존의 생각을 개선하는 것입니다. (중략)

이를 위해 다음의 여러가지 측면이 필요로 해집니다. 창조적인 사고, 건설적인 비판, 설명 책임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중략)

정치 제도의 개혁을 위해서는 민주적인 사고방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투명성이 요구됩니다. 국가가 개인을, 개인이 국가를 존중하기 위해서 우리는 법의 지배를 지켜야만 합니다. 법의 지배가 우리의 자유를 지켜줍니다. 낭비와 부패에 대해서도 싸워야 합니다. 행정개혁은 더이상 기다릴 수 없는 과제입니다. 무책임하고 부패하며 악한 짓을 행하는 것은 법의 단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현 상황에 안주하는 것을 더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2000년 7월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2000년 6월 10일 하페즈 알-아사드가 심장 마비 및 당뇨로 인한 건강 악화로 사망했는데, 당시 시리아 헌법 제83조에 따르면 대통령 출마는 40세부터 가능하지만 당시 바샤르의 나이는 34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시리아 의회는 특별회의를 소집해 문제의 헌법을 개헌했고, 결국 바샤르가 차기 대선에 단독으로 출마해 당선되는 위업을 남김으로써 공화정을 표방하는 아랍 국가 중 유일무이하게 세습을 한 국가라는 경의로운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물론 이집트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이나 이라크사담 후세인 정권처럼 세습을 시도한 케이스는 상당수 있었지만, 실제로 성사시킨 건 이쪽이 유일하다.

다만 취임 연설에서 국민의 광범위한 정치적 참여와 민주주의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연설을 들고 나오면서 오히려 국민들이 더 당혹스러워 했다고 한다. 하페즈의 철권 정치 시대에는 민주주의는 커녕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바로 코렁탕을 먹기 일수였는데, 그런 상황에서 저런 말을 했으니 말이다. 이후 사회 분위기는 어느 정도 누그러져 다마스쿠스의 지식인 99명이 치안유지법의 철폐와 민주화 개혁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5. 바샤르 알-아사드 정부 [편집]

바샤르 알-아사드 / Bashar al-Assad

5.1. 정치적 성향 [편집]

대체적으로는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 정부를 이어 아랍사회주의 기조를 띄고 있었다.

그러나 시리아 내전에서 수많은 국민을 죽음으로 내몰며 시리아의 도살자란 타이틀을 달기도 했다. 다만 정치적 / 종교적인 복잡한 이유로 시리아 내 기독교인, 알라위파, 드루즈파 등 이슬람 소수 종파 세력, 시리아 바트당 지지자 및 아랍사회주의자들, 그리고 수니파 시아파를 막론하고 반(反)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 무슬림들에게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5.2. 주요 행보 및 공과 [편집]

2000년의 뱌사르.
처창기 바샤르 알 아사드는 과거 아버지의 철권 정치에서 벗어나 시리아를 개혁하고자 했는데, 바샤르의 등장 이후 사회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지며 국민들조차도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하는 분위기였지만, 점차 사람들은 그를 ‘희망’이라고 불렀다.

당시 바샤르는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한 건 물론, 컴퓨터와 정보 통신 분야에도 관심이 많았고, 취임 이후 정치범을 석방하고 국영 기업의 민영화와 경제 개혁을 추진하는 등 시리아의 개혁을 추진했다. 바샤르는 시리아컴퓨터협회 회장직을 맡아 시리아에 인터넷과 휴대폰을 도입하고 각급 학교에 컴퓨터를 보급하는 등 이른바 ‘현대화의 기수’로 행세하는 한편, 아버지의 오랜 측근이었던 마르무드 알 조흐비 총리를 숙청하는 등 대대적인 반부패 캠페인도 전개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뜻대로만 되진 않았는데, 시리아 내에도 온건 노선에 반발하는 강경파들이 있던 건 물론, 임기가 시작하자 마자 9.11 테러가 발발하며 중동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중동 관련해서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다고 봐도 무방해서, 눈에 뵈는 것 없이 싹 다 조졌는데, 아사드 정권을 무너뜨리겠다는 등 미국 내에서 반 아사드 행보를 보였다.

또한 그가 주장했던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는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가 반정부 활동으로 이어지며 변질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아사드 측에서도 이를 탄압하기 시작하며 그대로 묻혔다.

그러나 성과가 아예 없던 건 아니었는데, 하페즈 시대와는 달리 바샤르 알 아사드 통치 초기에는 민주화 운동가나 반정부 인사와 같은 확신범이 아니라면 매우 유연해졌다. 또 외국 기업이나 기관에 근무할 경우 정기적으로 당국에 출두하여 허가증 기한 연장에 대한 절차와 보고를 하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었으나 바샤르 시대부터는 형식적인 절차가 되었다. 또 밀고에 대해서도 강압적인 자세가 사라지고 무조건 입건부터 시키고 보는 것은 사라졌다.

알라위파만이 고위직에 오른다는 아사드 정권의 전통을 깨기도 했으며, 하페즈 시대에는 다마스쿠스 대학 출신 학자만을 내각에 임명했는데 지역감정을 깨고 알레포 대학 출신 학자들을 임명하기도 했다. 이 덕에 수니파들의 지지도 상당수 얻을 수 있었다.

경제 부문에 있어서의 개혁의 골자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탈피와 자유경제 활성화였다. 이에 대한 바트당 보수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2000년 사립학교의 설립을 자유화했고,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며 소매점 이상의 개인 상공업을 금지하는 법안을 완화하였으며 2005년 6월에는 바트당 보수파를 물리치고 당대회를 열어 자유경제정책을 골자로 하는 10차 5개년 계획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개혁정책에 의해 관광업을 비롯한 민간 업종의 성장이 조금씩 이루어져 2006년 3.5%, 2007년 4.3%, 2008년 4.5%, 2009년 5.9%로 지속적인 상승을 기록했다.

한편 바샤르는 2007년 대선에 단독 출마해 97.6%의 득표로 재선됐는데, 투표장마다 정권의 친위대인 공화국 수비대원들이 깔려 있었고, 투표소 안에는 ‘찬성란에 동그라미를 치면 된다’는 친절한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바샤르와 그의 아내 아스마.
2007년부터 심각한 가뭄과 이상기후로 인하여 시리아 인구 20%가 종사하는 농업이 큰 타격을 받았고, 상대적으로 상공업 위주의 경제정책을 펴던 시리아 정부는 농업을 소홀히 대하는 경향이 있어 대책도 미봉책 수준이었다. 이에 따라 파탄난 농촌경제를 뒤로 하고 도시로 상경하는 이촌향도 현상이 심화되어 결과적으로 실업률 증가로 이어졌다. 2011년 기후 정상화로 농업 생산량은 회복되기 시작했으나 이때는 시리아 전체가 난리가 났고 이후 내전으로 인해 시리아의 경제개혁은 완전히 주저앉아버린 상황이다.

5.3. 외교적 노선 [편집]

외교적 노선은 나름대로 반서방 기조에서 벗어나는 행보를 보였는데, 서방 국가들과 정상회담을 하기도 하면서 서방 측과 대화할 여지를 남겨뒀다. 이는 과거 하페즈 시절에도 비슷했는데, 하페즈도 완전히 친소 반미만 한 게 아니라 서방 측과 여러 차례 정상 회담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이 호응하지 않은 건 물론 바샤르가 친이란, 친러, 친북, 반시오니즘이란 외교 노선을 유지한 덕에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더군다나 당시 9.11 테러로 경직된 분위기 + 바샤르의 친러 행보를 감안하면 성과가 나올 리는 만무했다.

레바논과의 외교는 실책으로 평가받는데, 한때 레바논에 대한 시리아의 영향력은 상당했었으나 레바논 내전을 거치며 시리아의 영향력이 줄기 시작했고, 2005년에는 한때 친시리아 성향이었다가 마찰이 생긴 라피크 하리리 전 총리까지 암살했다가 역풍만 불고 만다. 하리리 총리 암살 이후 레바논은 시리아의 영향력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시리아의 내정 간섭에 반대하는 시위도 여러 차례 발발한다. 여담으로 시리아의 이런 짓은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예전에도 시리아 내전 도중에 드루즈파 지도자인 카말 줌블라트를 암살하는 등 대놓고 막나갔다.

5.4. 영향 [편집]

바샤르 임기 종료 이후 작성 예정.

6. 시리아의 봄내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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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마 씨발





"전쟁하자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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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및 현황








2011 지부티 시위


2011–2012 팔레스타인 시위 | 파타 | 하마스


2011 바레인 시위


2011–2012 쿠웨이트 시위

2011–2012 모로코 시위

2011–2013 모리타니 시위


여파

문화적 영향


바샤르 알-아사드 / Bashar al-Assad

그러다 튀니지에서 아랍의 봄 사태가 발발하며 이는 범아랍 전 지역으로 퍼져나가게 되는데, 주변국인 이라크, 요르단, 레바논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리아에는 별 다른 큰 소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레바논 시위는 독특한 게, 레바논 정부를 겨냥한 시위라기보다도 레바논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바샤르에 대한 시위라는 게 함정.

그러다 2011년 기여코 시리아 내 반정부 세력들에 의해 대규모 시위가 발발하게 된다. 이 시위를 끝으로 2010년대 초의 아랍의 봄이 마무리되어 "마지막 아랍의 봄"이라는 말도 있다.

처음에 바샤르는 그답게 유화책을 꺼내들었으나,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인 ISIL이 개입하고 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가자 바샤르는 시위대에 대해 무자비한 학살을 저지르고 만다.

그리고 정부 측과 시위대의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끝내는 2023년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내전,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시리아 민주화 운동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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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7. 관련 밈 [편집]

7.1. Assad Must Go [편집]

“Assad Must Go!”

대충 여러 정치인들이 '아사드는 물러나야 된다!'고 난리치다가 오히려 본인이 물러나버리는 내용의 밈.

시리아 내전을 보고 미국버락 오바마가 아사드는 자국민을 고문하고 학살했다며 "Assad Must Go"라고 말했고, 이후 영국 총리였던 데이비드 캐머런도 이런 주장에 합세했는데, 정작 아사드는 안 물러나고 캐머런이 총리직을 사퇴해버리며 이런 유형의 밈이 뜨게 되었다.

형식은 어떤 정치인이든 “Assad Must Go!”이라 외치면 아사드가 “Who Must Go?”라고 되묻고, 아사드에게 물러나라고 한 정치인이 오히려 몰락하면 아사드가 비웃는 형식이다.

대충 흔히 쓰이는 써먹히는 정치인들은 다음과 같다.

흔히 써먹히는 정치인들만 모아서 '아사드의 저주'라고 모아놓기도 한다.

템플릿은 이거인데, 아무래도 16년 밈이다보니 지금 쓰면 뇌절 소리 들을 확률이 매우 높긴 하다.

7.2. Assaded [편집]

대충 릭롤링의 바샤르 버전으로 보면 되는데, 영상을 진행하다 바샤르가 이를 중단시키고 "Nhan Rjaleak Rame Kzoaar"(신, 시리아 그리고 바샤르!)란 노래를 재생시키는 낚시용 밈이라고 할 수 있다.
2019년 10월 25일 한 유튜버가 심슨이 바샤르 찬양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영상을 올렸고(위 왼쪽), 그날 늦게 겉으로는 바샤르 노래인 척 하면서 뒤로는 헨타이 망가가 있는 척 하지만 실제 내용은 정직하게 바샤르 노래가 있는 영상을 올리면서(위 오른쪽) 이 밈이 시작되게 됐다.

이 때는 별로 호응이 없다가

포르노 영상인 척 하면서 바샤르 찬양 노래를 넣은 이 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뜨게 됐다.

대충 방식은 릭롤링처럼 평범한 영상인 척하면서 뜬금 없이 바샤르가 입갤하는 내용.

용례는 다음과 같다.

다만 19-20년 밈이니만큼 2023년 기준 현재는 많이 사그라들긴 했다.

8. 여담 [편집]

  • 표면상 시리아의 유일한 권력자이지만 실제로는 군부를 직접 장악하지는 못하고 공화국수비대 사령관이자 동생인 마헤르 알 아사드가 군부를 장악했으며 이자가 바샤르 알 아사드를 지지함으로써 정권이 성립할 수 있다는, 즉 보이지 않는 연립정권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마헤르 알 아사드는 과격한 성격으로 1999년에는 언쟁중 매형 아셰프 샤우카트를 권총으로 쏴버릴 정도로 자기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버릇이 있지만 바샤르 알 아사드에게는 잘 따르는 편. 그러나 고집불통이고 감정적이라 바샤르 알 아사드의 시위대 진압 자제명령을 대놓고 무시하며 보안군에게 발포를 명령한 장본인이라는 소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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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람 키가 OOO이냐?
  • 국민을 상대로 한 통폭탄 사용으로 자주 비판받고 있는데, 바샤르 본인은 대량학살을 목적으로 한 통폭탄 사용은 없고, 오히려 시리아군의 재정 상황이 안 좋아서 저렴하게 만든 무기를 사우디 등에서 통폭탄이니 대량학살이니 하고 선동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폭탄의 활용에 대해서도 입장차가 두드러지는데, 아사드 측은 반군 측이 민간인 구역에서 활동하고 병원을 보급 창고로 두고 주요 거점으로 활용하는 등 오히려 반군이 피해를 키우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판단은 각자 알아서.

9. 관련 문서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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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0년대까지, 2010년대 이후 재합류
[2] 2017년까지
[3] 2016년부터
[4] 2021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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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17년부터, 2021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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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1] al-Hurriya Scho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