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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트 이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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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축
2002년 1월
또다른 악의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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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악의 축
2022년 3월

1. 개요2. 상세3. 타임라인
3.1.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 정부3.2. 사담 후세인 정부
3.2.1. 정치적 성향3.2.2. 주요 행보 및 공과3.2.3. 외교적 노선
3.3. 몰락
4. 영향5. 관련 문서

1. 개요 [편집]

바트당 정권의 이라크를 부르는 명칭.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7·17 혁명을 일으키며 공식적으로 설립되었으나, 이라크 전쟁으로 미군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체당한다.

여당은 바트당이었고, 아랍사회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내세웠다.

2. 상세 [편집]

3. 타임라인 [편집]

3.1.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 정부 [편집]

3.2. 사담 후세인 정부 [편집]

사담 후세인 / Saddam Hussein
이라크 혁명사령부 위원회 부의장
이자트 이브라힘 알-두리
이라크 부총리
타리크 아지즈
이라크 부통령
타하 야신 라마단
이라크 정보국장
바르잔 이브라힘 알-티크리티
이라크 정보국장
알리 하산 알-마지드
이라크 대통령 비서
아비드 하미드 마흐무드
후세인 정권의 주요 관료들. 물론 바르잔은 최측근이라기보다는 악우에 가깝긴 했다.

3.2.1. 정치적 성향 [편집]

후세인 정권은 기본적으로 아랍사회주의 성향을 띄고 있었다. 물론 집권 후반기부터는 퇴색 되긴 했지만 일단 베이스는 아랍사회주의다.

또한 범아랍주의, 아랍 민족주의 성향을 띄고 있었는데 이 덕에 9.11 테러 직후 반 후세인 세력에 의해 알려진 바와는 달리 이슬람 극단주의와는 상극과도 같았다.

추가로 후세인이 알-카에다를 지원해주고 있다란 이유로 전쟁이 일어난 것과는 대비되게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인 알-카에다를 대놓고 탄압했고,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를 공격하기도 했다.

3.2.2. 주요 행보 및 공과 [편집]

철권정치라는 비판도 받고 있긴 하나,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라크 사회의 세속화를 도모해 현대 국가로 만든 업적이 있다.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석유 국유화인데, 바트당 정권은 소련과 공동으로 남부 최대의 루메이라 유전을 개발시킨 후 1972년에 드디어 석유사업의 국유화를 단행했다. 오랜 세월 이라크는 석유의 이권이 국가가 아닌 외국계 석유회사에 독점되어 있었다. 그리고 석유 국유화를 단행한 결과, 제1차 오일쇼크 이후 이라크의 석유 수익은 계속 성장해, 1980년에는 1968년에 비해 50% 성장한 260억 달러에 이르렀다.

이 석유 수입을 배경으로 바트당 정권은 제3차 5개년 계획을 세워 이라크의 사회주의화와 현대화, 국유화 추진, 이라크의 경제적 자립 등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 소련,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일본 등에 산업시설 건설 및 기술 전문가, 노동자의 파견을 요청했다.

바트당 정권은 약 400억 달러 규모의 제4차 5개년 계획을 진행시켜 전국에 통신망·전기망을 정비해, 벽지에도 전기가 닿게 되었다. 또한 토지개혁으로 농업의 기계화, 농지의 분배를 추진해, 최신식의 농기구까지 배부되어 국유지의 70%를 자영농에게 분배하였다. 또, 소련의 협력으로 이라크 최대급의 모술 댐과 하디사 댐도 완성시켰다. 이러한 정책으로 1970년대 후반에는 이라크의 인구는 35% 증가했다. 국내 총생산에 있어서 국영부문의 비율도 1972년에 35.9%였는데 비해 1977년에는 80.4%로 증가하여, 사실상 바트당 정권이 국민에게 부를 분배하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아랍사회주의 정부 답게 이라크 전역에 학교를 설립하고 문맹률을 낮추었으며, 1977년부터 대규모 문맹 퇴치 캠페인을 전개해, 전국 규모로 읽고 쓰기 교실을 개강했다. 결과적으로는 문맹률이 낮아졌고, 그 성과로 1980년대에 유네스코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또한 여성 인권에도 신경을 썼는데, 성별에 의한 임금 차별이나 고용 차별을 법률로 금지했고, 일부 다처제를 금지했으며, 여성의 사회 진출을 적극 권장하고 또 결혼과 이혼의 자유도 보장해주었다. 이 결과 여성 공무원이 증가한 건 물론 군대에도 입대할 수 있도록 했다. 아랍권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 명예 살인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3.2.3. 외교적 노선 [편집]

외교적 노선은 아랍사회주의 정권답게 본래는 친소에 가까웠으나, 이란-이라크 전쟁 시점에는 일부 국가를 뺀 전세계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북한, 시리아, 리비아, 포르투갈, 파키스탄, 이스라엘 정도를 빼면 겉으로 이란을 지원하는 국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사실상 전세계 맞다. 물론 미국한국은 양다리 걸치긴 했지만.

이 당시 미국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훗날 네오콘으로 악명을 떨치는 도널드 럼즈펠드를 특사로 파견하는데, 둘은 악수하고 포옹까지 하기도 했다. 이는 훗날 이라크 전쟁 발발 후 럼즈펠드를 까는 주요 떡밥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양한 국가의 지원을 받았다고는 해도 이란과의 과도한 전쟁, 그것도 8년간의 전력 소모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으며, 거기다가 이란과의 전쟁 당시 후세인보고 전쟁하라고 부추겼던 사우디쿠웨이트는 후세인을 도와주진 못할 망정 빚 갚으라고 제대로 압박을 해댔다. 그리고 그 압박의 결과는...

걸프 전쟁 이후에는 사실상 전세계의 주적이 되어 버렸다. 전세계로부터 경제 제재를 뚜들겨 맞았고, 주변 국가들에 국경까지 패쇄당하고 여러 각국으로부터 항공 직항편까지 정지당하는 등 그야말로 고립을 당했다.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제대로 회담해주는 국가도 없었고, 걸프전 이후 정상회담을 한 국가원수는 베네수엘라우고 차베스가 다다. 그나마 중립 노선 지키던 요르단후세인 1세이나 팔레스타인야세르 아라파트 정도가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후세인 1세는 걸프 전쟁 때도 이라크 침공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9.11 테러로 한때 지원을 받았던 미국에 의해 완전히 몰락해버리고 말았다. 물론 '신의 천벌'이니 하면서 어그로 끈 후세인 잘못도 있겠지만 당시 미국 정계 내에서도 후세인을 축출하면 좆된다는 말이 오고 갔는데 이걸 전부 씹고 전쟁 일으킨 네오콘 새끼들도 문제 있는 건 마찬가지다.

이후 후세인은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 전쟁 등의 전쟁 범죄 혐의를 쓰고 사형을 당하게 되는데, 그 이란 전쟁을 누가 지원해줬는지는 ㅋㅋㅋㅋㅋ

후세인이 지하 세력으로 전환한 이후로는 반미 세력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팔레스타인에서는 후세인 지지 여론이 커져 후세인 관련 상품들이 불티나게 잘 팔리기 시작했고, 시리아의 반미 성향 국민들에게도 동정을 받기도 했다. 또 친후세인 반군 세력이 사우디아라비아 등 반이란 세력에게 친이란 반군 좀 견제해달라고 지원을 받기도 했다.

3.3. 몰락 [편집]

무너지는 후세인 동상.
미국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바그다드의 이라크 대통령 궁
  자세한 내용은 이라크 전쟁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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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향 [편집]

5. 관련 문서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