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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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 |
1. 들어가기 전에 [편집]
2. 개요 [편집]
3. 상세 [편집]
이라크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압둘 카림 카심과 함께 7·14 혁명을 일으켜 하심 왕조를 전복시키고 무함마드 나지브 알-루바이 정부[1] 아래서 총리직을 지내지만, 카심과의 의견차가 커지며 압둘 살람 아리프, 압둘 라흐만 아리프 등의 바트당 구성원들과 함께 라마단 혁명을 일으켜 카심을 제거하고 집권했다.
그러나 아리프가 나세르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알바크르와 사담 후세인 등의 바트주의자들을 축출하자 이에 반발하며 7·17 혁명을 일으켜 세 번째 쿠데타를 발발시킨다. 이로써 바트 이라크가 설립되게 된다.
이후 11년간 이라크를 통치하다 병환으로 사담 후세인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준다. 다만 후세인의 압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사퇴했다고도 여겨지는 모양.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82년 10월,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한다. 바트당의 창립자 미셸 아플라크와 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가 장례식에 참석해 그를 추모했으며, 장례식 이후 바그다드의 알-카르흐 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아리프가 나세르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알바크르와 사담 후세인 등의 바트주의자들을 축출하자 이에 반발하며 7·17 혁명을 일으켜 세 번째 쿠데타를 발발시킨다. 이로써 바트 이라크가 설립되게 된다.
이후 11년간 이라크를 통치하다 병환으로 사담 후세인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준다. 다만 후세인의 압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사퇴했다고도 여겨지는 모양.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82년 10월,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한다. 바트당의 창립자 미셸 아플라크와 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가 장례식에 참석해 그를 추모했으며, 장례식 이후 바그다드의 알-카르흐 묘지에 묻혔다.
4. 일생 [편집]
4.1. 젊은 시절 [편집]
4.2. 정치 활동 [편집]
4.2.1. 7·14 혁명 [편집]
4.2.2. 라마단 혁명 [편집]
4.2.3. 7·17 혁명 [편집]
4.2.4. 바트 이라크 설립 [편집]
4.3. 최후 [편집]
5.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 정부 [편집]
자세한 내용은 바트 이라크 문서 참고하십시오.
6. 평가 [편집]
사후에는 워낙 이후 지도자들이 막장인지라 이쪽이 재평가를 받고 있다. 나름대로 소수파 끌고 잘해보려던 후세인은 그놈의 편집증 덕에 이라크 역사상 유래 없는 철권 통치를 벌였고, 이후에도 누리 알-말리키를 비롯한 종파주의자들이 거하게 말아먹으며 가만히 있던 이쪽의 주가만 실시간으로 떡상하고 있다.
후세인의 석유 국유화와 더불어 아랍사회주의적 정책으로 막장이던 이라크를 중상위권 국가로 올려놓은 인물으로, 아랍 사회에서 이라크의 입지를 상당히 높여놓은 인물이다.
물론 권위주의적인 면이나 부정부패한 면이 없진 않았으나 후세대 지도자들보다는 훨씬 나은 인물.
후세인의 석유 국유화와 더불어 아랍사회주의적 정책으로 막장이던 이라크를 중상위권 국가로 올려놓은 인물으로, 아랍 사회에서 이라크의 입지를 상당히 높여놓은 인물이다.
물론 권위주의적인 면이나 부정부패한 면이 없진 않았으나 후세대 지도자들보다는 훨씬 나은 인물.
7. 관련 문서 [편집]
8. 둘러보기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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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권은 카심이 갖고 있었고, 알-루바이는 상징적 국가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