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링크 삭제 이동 무아마르 카다피 (r43 편집) [오류!]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assistants이상의 권한이 필요합니다.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 기울임 취소선 링크 파일 각주 틀 == 카다피 리비아 == 대체적으로 [[아랍사회주의]], 그 중에서도 나세르주의 성향을 띄었는데, 이는 생전 카다피가 [[가말 압델 나세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카다피와 나세르는 카다피가 리비아군 대위일 때부터 친분을 갖고 있었는데, 카다피는 나세르를 존경했고, 또 정치적 스승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나세르가 대통령 재임 중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카다피는 2번씩이나 기절을 해가면서 오열을 했다고. 약간 돌아버린 사람 같긴 하지만 그래도 세속주의 성향을 띄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주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 자주 마찰을 빚었다. 대표적으로는 '[[수단 공화국|수단]]의 도살자' [[오마르 알-바시르]]를 위시한 리비아 반정부 세력에 의해 여러 차례 나라가 혼란에 빠진 적이 있다. 외교적으로 봤을 때는 의외긴 하지만 친한 성향이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4866374#home|#]] 이 시기 리비아는 한국의 건설업체 해외수주 규모 3위에 해당되는 교역상대국으로서 한국은 리비아의 건설수주를 통해 막대한 국익을 챙겼는데, 카다피가 대놓고 리비아 내에서 한국 기업들에게 특혜를 주면서 한국은 리비아에서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그러다 2010년대 한국 측에서 리비아에 대한 첩보 활동을 벌이다 발각되면서 단교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직후 한국 측에서 [[이명박]]의 형인 [[이상득]]을 특사로 파견해 카다피와 면담을 나눈 뒤에야 외교 관계가 정상화됐다고. 여담으로 이 면담에서 카다피는 이상득에게 "한국은 리비아를 통해 막대한 이득을 챙겼음에도 교과서나 언론에서 나를 왜 그렇게 비하하느냐?"라면서 서운하다고 하기도 했다. 긍정적인 면으로는 흑인 민권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80년대 [[넬슨 만델라]]와 아프리카 국민회의가 서방에서 테러리스트와 테러 조직으로 몰릴때 유일하게 지원한 국가가 리비아였으며, 로디지아의 반정부 무장 세력도 지원하였다. 이 때문에 나토의 리비아 공습에 대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이 극렬히 반대했다. 특히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리비아 혁명 당시 망명을 제안하기도 했고, 현재도 카다피의 비자금을 숨겨주고 있다. 미국 흑인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미국 흑인의 이중국적 취득에 큰 도움이 되었고, 흑표당을 지원하기도 하는 등 미국 흑인 민권 운동에도 깊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미국 흑인 래퍼의 적지 않은 수가 나토의 리비아 공습을 비난했다. 변경 사항 요약 약관 동의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문서를 하면 문서의 편집 역사에 (3.19.56.45)가 기록되며 이에 .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