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소련군에서 복무했던 교수님(러시아 과학원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연구소 재직 중)한테서 직접 들은 썰.


소련군 사병 전투복의 상의는 원래 앞섶을 전부 여미는 타입이 아니라, 풀오버 셔츠였음.



짤은 43년도 도입된 루바쉬카형 튜닉 (통칭 M43). 보다 이전 모델인 36년형 역시도 풀오버였고, 1차대전기에도 사병 전투복은 다 풀오버 타입이었음.


근데 69년이 되면 갑자기 단추로 앞섶을 여미는 타입으로 교체됨.



69년형 전투복. 상의가 풀오버에서 일반 셔츠타입으로 바뀐 것을 볼 수 있음.


56년생으로, 대학을 바로 안 가서 70년대 중반에 사병으로 복무를 하신 교수님은 이 69년형 전투복을 보급받았다고 하심. 전에 한벌 갖고 있어서 사진 보여드리니까 자기는 콤소몰 뱃지랑 뭐 체육 기장 그런 것들 달았다고 그러시면서 썰을 푸시던데, 잠깐 삼천포로 빠져서 한두개 소개해보겠음.


1.시의적절한 종이

옛날 노서아 혁명 하던 시절에 레닌은 막심 고리끼의 소설을 보고 '시의 적절한 글'이라고 평했다고 함. 사회 모순을 지적하면서 혁명 버프를 주는 고리끼의 글이 당시 구체제 갈아엎던 레닌을 위시한 혁명가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데서 유래한 표현인데, 이게 일종의 사회 은어가 되었음. 당시 소련 사회, 그리고 소련군 내에서도 당이나 정치부가 배포하는 선전물을 '시의 적절한 종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보통 그런 선전물들은 그리 좋은 종이를 쓰지 않는 지라 대부분 그냥 버리는데, 이게 똥간에 휴지가 없을 때 아주 적절한 휴지 대용품이 되었고, 휴지가 없는 화장실에서 고통 받는 이들에게 적절한 도움을 준다는 의미에서 '시의 적절한 종이' 라고 부르게 된 것이었음.

아무튼, 이 교수님이 복무하시던 곳이 아무르 연안 중소국경지대였는데 당시 국경 분쟁 때문에 관계가 험악했기 때문에 중국 애들이 매번 소련군에 대고 선전방송을 틀었음. 물론 소련도 선전방송을 틀었다고 함. 어느 날, 중국쪽 방송 왈:

'북경에서 전합니다 북경에서 전합니다. 우리 중국 영토에 잠시 거주하는 소련 병사들에게 전합니다. 중국 시골의 어느 나이 든 노동자가 일을 마치고 힘이 들어 앉아서 쉬고 있었는데, 그 때 모주석 어록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노인은 그 즉시 마음이 편해져 새 힘을 얻어 다시 일을 하러 나갈 수 있었습니다.'

뭐 이런 소리였음.

이걸 들은 소련군 병사들이 비꼬기로,

'아, 당연히 마음이 편하겠지. 똥간에 휴지가 없어서 힘들 때 휴지가 있으면 당연히 힘을 얻지'

라고 했다고 함.


2.댄스파티

위에 썼듯, 이 교수님은 방공군 통신병이었음. 그래서 근무지가 방공벙커였는데, 거기서 통신 감청이랑 레이더 감시 임무를 수행했다고 하심.

통신 감청을 하다 보면 중국 방송도 잡히고 일본 방송도 잡히고 미국 방송도 잡힌다고 함. 근데 희안하게 소련 방송은 잘 안잡혔다고 그러시더라.

아무튼, 중국 방송은 별 의미가 없고 가장 인기 있던 방송이 바로 미국 방송이었음. 여기서 말하는 미국 방송이란, 주한-주일 미군 대상으로 하는 방송으로 보통 뭐 '이역만리 타향에서 세계 평화와 자유 수호를 위해 헌신하는 우리의 남편과 아들들'에게 보내는 위문 편지라던가 이런 것들이었음. 으레 이런 방송들은 유행가를 틀어주기 마련이라, 교수님이 복무했던 부대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라던가 당시 서방 인기곡들이 잘 알려져 있었음.

그래서 근무 시간에 적당히 사주경계하다가 장교가 없으면 바로 미국 방송 틀어서 노래 나오는대로 댄스타임을 즐겼다고 함.

당연히 망 봐주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누구 온다 하면 바로 정자세 근무로 돌아갔다고 함.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왜 저렇게 옷의 형태가 혁명적으로 바뀌었는가, 하니 월남전의 전훈 때문이었다고 함. 챈넘들도 월남전 영화라던가 기록 영상 봐서 잘 알겠지만, 미군이 어디 보통 네이팜 성애자가 아니었던지라, 뭣 하면 네이팜 떨궈서 다 지져대는걸 소련 애들도 봤던 것이었음. 그래서 이런저런 전훈을 분석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군복에 관한 것이었음. 네이팜이 떨어져서 사람한테 불이 붙었을 때, 일단 빨리 옷을 벗어 던져야 하는데, 당시 소련군이 입고 있던 풀오버 타입 M43으로는 신속한 탈의가 불가능했던 것임. 신속한 탈의를 하려면 그냥 앞섶을 다 뜯어버리는게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던 소련군부는 1차대전때부터 쭉 입어오던 유서 깊은 풀오버 타입 상의를 버리고, 단추로 앞섶을 여미는 셔츠 타입으로 군복을 바꾸게 되었다...


라는 것이 당시 소련군 내에서 널리 알려진, 전투복 교체 이유에 대한 통설이었다고 함.

이거 외에도 소련군 군대 썰 재밌는거 여럿 있었는데 일단 여기서 시마이 치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