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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음. 그 아가씨 퇴사하신답니까?”


 “그래. 카시미어로 돌아간다고 하더라고.”


 “아, 예…….”


 스스로도 미적지근한 반응이라고 생각했지만, 제이는 그 이상 어떻게 더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니어의 퇴사 신청서를 손에 든 채 멍하니 박사의 다음 말만 기다릴 뿐이었다. 어쩌란 말인가? 그는 빈말로라도 니어와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물론 얼굴도 알고 작전도 같이 참가해봤지만 딱 그 정도. 개인적인 친분은 한없이 0에 수렴했다.


 “근데 니어 아가씨가 퇴사하는 거랑 제가 카시미어로 가는 게 뭔 상관임까?”


 “직접적인 연관은 없어.”


 “어, 그럼 제가 가서 그 아가씨를 위해 뭐 어떤 거라도 하면 되는 건가요?”


 “하하, 니어가?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든든한 지원군이 최소 두 명은 있을 테니 그쪽으론 신경 안 써도 돼.”


 든든한 지원군이라는 말에 제이는 누굴까 했다가 니어가 유독 가까이 하던 살카즈 아가씨 두 명을 떠올렸다. 보자, 샤이닝에 나이팅게일이란 분들이었나. 확실히 로도스에 들어오기 전부터 동료 사이였다지 아마.


 “……?”


 뭐야 그럼.


 “어, 음 두목. 죄송한데요. 연관도 없고 도울 필요도 없다면 제가 가서 대체 뭘……?”


 “니어가 아니라, 그 주변이 문제니까.”


 박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니어는, 그 빛의 기사는 카시미어에서 기사의 명예를 되찾으려 하고 있어. 그리고 언제가 되든 그 뜻을 이룰 거야. 그건 분명해.


 이 세상에 ‘기사’라는 말을 사람으로 정의해야 한다면 그녀보다도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거야. 숭고한 목표, 그걸 이룰 수 있는 결단력과 행동력, 거기에 상대의 의중을 꿰뚫어 보고 대처할 수 있는 지혜까지. 이른바 타고난 리더이자 뛰어난 개혁자의 표상이야, 그녀는.”


 “헤에…….”


 제이는 박사의 말을 들으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덕분에 평소에도 맹한 얼굴이 더더욱 맹하게 변해버렸지만.


 사람에 대한 박사의 판단은 대개 정확했다. 만약 백 명의 심사단 중 나머지 아흔아홉 명과 박사 한 명의 의견이 다르다고 해도 박사의 판단이 맞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 박사가 이토록 높이 평가하는 그 니어라는 아가씨는, 분명 그의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인재일 터였다.


 “하지만 빛은 늘 어둠을 만들지. 그건 필연적인 결과야. 찬란하게 빛나는 존재에겐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어둠의 무리가 꼬이게 되어 있어.”


 “…즉 니어 아가씨가 카시미어에 돌아간다면, 두목이 말씀하신 그 세력과 뭐가 됐든 충돌을 일으킬 거란 말씀이시군요.”


 “그래.”


 박사는 짧게 대꾸했다.


 “그녀는 고난 속에서도 충분히 그 어둠을 이겨낼 거야.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희미한 빛마저도 찬란한 태양만큼이나 밝게 보일 테니까. 하물며 그녀 정도나 된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녀에 대한 걱정은 없어. 다만,”


 그 말과 함께 깊이 눌러 쓴 후드 아래서 흘러나오는 한숨은, 깊은 고뇌를 담고 있는 듯했다.


 “다만 그녀의 주변은 그녀만큼 강인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니어는, 그 심지 곧은 기사는 절대로 주변을 버리지 않겠지. 그 모든 역경을 헤쳐 나가면서도 단 한 명도 버리지 않을 거야. 그녀의 이상이, 그럴 땐 족쇄가 되는 것이지.”


 이상이 족쇄가 된다, 라. 제이는 그 말을 곱씹었다.


 박사는 알까. 그 자신이야말로 니어라는 그 아가씨보다 몇 배나 힘든 길을, 몇 배나 무거운 짐을 지고서 하나도 잃지 않으며 가려고 하는 사람이란 것을.


 박사 자신이야말로 이상이 족쇄가 됨에도 불구하고 고행자처럼 묵묵히 갈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두목은 유독 자기에 대한 평가는 낮게 친단 말이지…….’


 “그러면 늦어. 그녀 혼자서도 헤쳐 나갈 수 있겠지만, 모든 건 적절한 시기라는 게 있는 법이야. 우리는 그녀의 여정을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을 정도로 여유롭지는 않아.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지.”


 제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박사는 이미 다음 말을 하고 있었다. 깊이 눌러 쓴 후드 속에서 번득이는 듯한 눈빛. 깊고 깊은, 마치 내면으로 침잠(沈潛)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 그가 신뢰해 마지않는 박사의 모습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제이.”


 “네, 두목.”


 “난 카시미어에 로도스 사무소를 차리고 싶어. 그리고 그 지부장으로 가장 적임자는, 니어겠지. 그녀 이상 가는 적임자도 없을 거야.


 그곳은 네가 있던 용문 이상으로 광석병에 대한 차별이 심해. 사람들이, 도시가 그들을 증오하게 만들지. 중앙과 변방의 격차가 심각한데도 불구하고, 그 원인이 곪아 문드러진 부패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광석병의 탓으로 돌려 버려.”


 “…….”


 “카시미어는 썩어들어가는 용과도 같아. 언뜻 보기엔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은 제 살점을 뜯어먹으며 겨우 연명해 나가는 그런 용. 제이, 난 그런 곳이 광석병 환자들을 증오의 연료로 삼아 연명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그런 방식은 올바르지 않아.


 그리고 올바르지 않은 건, 고쳐야 해. 비록 우리의 힘만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해도 첫 발짝 정돈 뗄 수 있을 테니까.”


 차갑게 가라앉은 박사의 눈과 목소리엔 증오도 뭣도 없었다. 그런 부차적인 감정에 신경 쓸 여력 따윈 없다는 것과도 같은 표정이었다. 사명을 위해 자신을 죽인 자가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카시미어에 로도스 지부를 건설하고, 그곳을 니어와의 연을 유지하는 교두보로 삼는 것. 그게 내 1차 목표야.”


 “…두목께선 니어 아가씨를 이용하려 하시는군요.”


 “그래.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제이. 나도 마찬가지고. 필요하다면 뭐든 이용할 거야.”


 박사는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남을 이용한다는 것을.


 가식 따윈 없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진심일 뿐. 박사는 제이에게 자신의 생각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제이는, 그는 모를 것이다. 박사가 이렇게 자기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기 생각을 여과 없이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눈앞의 인물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를. 그건 신뢰하는 이에게만 보낼 수 있는 증표와도 같았다.


 “후우…….”


 “얘기가 좀 복잡하지?”


 “복잡하기보단 넓고 멀다는 느낌임다. 역시 전 두목처럼 그렇게 멀리 보는 건 죽었다 깨도 못할 거 같아요.”


 제이의 입장에서 박사의 목표는 너무 크고 멀었다. 솔직히, 뭐랄까 공감은 가는데 이해가 잘 안 가기도 했고 말이다. 그의 머릿속에서 로도스 지부 같은 건 대충 음식점 분점 같은 개념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두목께서 뭘 말씀하시려는 건지는 알겠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는 거 아님까?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비슷해.”


 “이건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 그 1차 목표 뒤에 2차나 3차 목표는 말씀 못 해주시죠?”


 “그야 그렇지. 첫 단추도 못 채운 상황에서 그 다음 단계 따윈 뜬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할 테니까.”


 “하하, 뭐 그거야 그렇죠.”


 제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박사가 그은 선을 굳이 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 정도로 얘기해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배려 아니겠는가. 그는 더 떼를 써서 박사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얘기는 충분했다.


 “알겠슴다.”


 “아직 가서 뭘 할지 아무것도 안 알려줬는데?”


 “오, 알려주실 수 있슴까?”


 “아니, 나도 몰라.”


 “푸핫.”


 기껏 장황하게 늘어놓고 고작 한다는 소리가 모른다라니. 그러나 그 말을 하는 박사도, 그 말을 듣는 제이도 웃긴 농담이라도 들은 양 피식 웃었다. 하긴 방법 따위가 있다면 박사가 이렇게 그를 찾아 어렵게 얘길 꺼내지도 않았을 터. 


 제이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두목은 너무 멀리 보심다. 저 같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요.”


 “어려운 얘기라 미안해. 막무가내로 맡기는 식이지만, 그래도 가 줘. 가서 네가 생각한 대로 행동해봐. 그게 뭐든 분명 도움이 될 거라 믿으니까.”


 “어휴, 제가 그냥 가서 관광이나 하고 시간만 때우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런 말 하는 사람이 과연 그냥 가서 관광이나 할까?”


 박사의 말이 옳았다. 박사는 그를 신뢰했기에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해야 할 터. 자신이 뭘 할 수 있을지 몰랐지만, 제이는 그게 뭐가 되든지 부딪혀 보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제가 뭘 할 수 있을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두목께서 말씀해주신 목표.”


 제이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거 하나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거기 가서 뭘 하더라도요.”


 “그래, 언제 갈 거야?”


 “지금 바로 떠나겠습니다. 참, 혹시 된다면 굼 씨에게 전해주세요. 우르수스식 생선 수프는 나중에 배우겠다고.”


 “…그래, 고맙다.”


 박사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인사치레로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라도 하지, 그런 말 따위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그들의 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박사도, 제이도 모두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니어는 너보다는 늦게 떠날 거야. 퇴사 신청서를 미리 받아놓긴 했지만, 실은 저번 작전 때 다친 상처가 아직 낫질 않았거든. 그래도 간다는 걸 부득부득 말리고 있는 상황이지.”


 “어째 그런 성격이라면 제가 만나는 것도 좀 그렇지 않겠슴까? 엄청 부담스러워하실 거 같은데.”


 “하긴, 네가 카시미어로 간다는 거 자체가 너무 티가 나긴 하지. 하지만 부담스러워해도 널 말리진 않을 거야. 도와준다는 사람을 내칠 정도로 매몰찬 성격은 아니니까.”


 “알겠슴다.”


 “로도스는 ‘공식적으로’ 그 뒤에 카시미어 측과 접촉할 거야. 니어와는 전혀 상관없는 상태로 말이지. 물론, 너하고도 상관이 없는 상태일 거야.”


 “괜찮슴다. 외상값이라 생각하죠 뭐.”


 제이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사실 얘기를 들을 때부터 첩보 영화 같은 비밀 임무라는 냄새가 풀풀 풍겼던 터라 그 정도쯤은 예상 가능한 범위였다. 과연 자신이 그 첩보 영화 주인공에 걸맞는 인물인지는, 그거야말로 미지수였지만. 어쨌든 제이는 자기 눈보다 박사의 눈을 더 믿기로 했다.


 그런 그를 보며 박사는 의자 등받이에 깊이 몸을 묻었다. 어젯밤의 피로가 한번에 몰려온 건지, 조금 전과는 다르게 명백히 피곤한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뭐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


 마지막이라.


 박사의 그 말에 제이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질문 하나를 던졌다.


 “음, 두목. 근데 왜 접니까? 아니 불만이 있단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요.”


 “왜 너냐고? 반대로 물어보자. 넌 왜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아니 뭐……. 굳이 말할 필요나 있겠습니까? 저는 뭐, 다른 분들처럼 싸우는 재주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또 첩보나 이런 쪽으론 굴러다니는 저어기 원석충만도 못할 테고, 굳이 재주라고 한다면야……. 그, 생선 쪽이나 요리로는 자신 있다는 거, 뭐 그 정도잖슴까.”


 “푸핫! 설마 했지만 네게 그런 말을 들으니 웃긴데?”


 “어딜 봐서 웃김까…….”


 “좋게 생각해. 세상에 용문 출신 노점상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을 누가 의심이나 하겠어?”


 “뭐, 그건 그렇지만요.”


 제이는 역시나-하는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수그렸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책상엔 없던 게 생겨 있었다. 그건 체스의 말이었다.


 “저 체스는 모르는뎁쇼. 바둑이라면 모를까.”


 “넌 나이트(Knight)야.”


 “에?”


 오늘 벌써 몇 번이나 진지함과 능글맞음을 오갔던 박사가, 다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킹즈 나이트 오프닝(King's Knight Opening). 내가 자주 써먹는 수지. 그리고 난 이 수로 한 번도 진 적이 없어.”


 “……?”


 아니 체스 모른다니까요. 제이는 그런 표정을 짓고선 박사를 멀뚱멀뚱 쳐다봤지만, 그는 설명해줄 생각 같은 건 없어 보였다.


 뭐, 됐나. 제이는 그냥 자길 믿어주는 거다, 뭐 그런 식으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박사 같은, 자기보다 몇 배는 더 똑똑한 사람과 얘기할 땐 적당히 묻어가는 것도 대화의 한 방법이었다. 웃는 거야 말로 대화에 있어 최고의 유연제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조심해라.”


 “네, 두목. 몸 챙기면서 일하십쇼.”


 거의 몇 달 동안 안 볼 사이치곤 참으로 조촐한 인사였다. 제이는 허릴 꾸벅 숙였고, 그 인사를 받으며 박사는 의자에 몸을 묻고 있었다. 제이에게 내밀었던 체스 말은 그의 손에서 이리저리 굴려지고 있었다.


 “…후우.”


 그가 나간 뒤 박사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오늘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을 끝내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박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미야, 이제 나와도 돼.”


 그러자 간이침대 쪽에 걸려 있던 휘장이 슬쩍 움직였다. 놀랍게도 거기선 아미야가 쑥스러운 듯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상한 분위기 같은 건 아니었고, 팔에 링거며 거즈가 붙어 있는 걸로 봐서 모종의 사유로 여태껏 침대 신세 좀 진 모양이었다.


 “죄, 죄송해요 박사님. 저 때문에 켈시 선생님께도 혼나시고, 일도 늦으시고……. 대, 대화도 어쩌다 보니 전부 듣게 됐어요. 죄송해요…….”


 아미야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연신 사과 연발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하필 박사의 비서를 하고 있는 도중에 몸 상태가 나빠져서 켈시가 오고 어제 당번이었던 제시카가 대신 비서 업무를 맡는 등 이른 아침부터 사람 여럿 돌아다니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죄책감에 죽을 거 같은데 박사의 얘기까지 엿듣게 될 줄이야. 아까 침대에 누워 있다가 나올 타이밍을 못 잡아서 그랬다지만, 아미야는 그야말로 박사를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 엿들을 생각은 절대 없었는데, 그게…….”


 “괜찮아. 일부러 그랬던 거니까. 적어도 네겐 알려주고 싶었어.”


 아미야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오퍼레이터의 관리. 비록 지금은 박사와 같이하는 형태였지만, 언젠가 그는 아미야가 자신의 모든 것을 이어받길 원했다. 제이와의 대화를 일부러 엿듣게 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보내시는군요, 제이 씨를. 정말로 카시미어에.”


 사실 얘기 자체는 아미야가 예전부터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아까 둘의 대화를 엿듣는 도중에 예의고 뭐고 뛰쳐나와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냐고 소리쳤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알고 있던 것과, 실제로 일어난 건 다른 일이었다. 박사는 그런 아미야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의 손엔 예의 그 나이트가 쥐어져 있었다.


 “그래, 기대하고 있어.”


 “제이 씨가 정말 카시미어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래.”


 아미야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박사의 판단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솔직히 보통 시선에선 납득하기 어려운 관점이지 않던가. 그런 아미야의 놀람을 풀어주려는 듯 박사는 뒤이어 말을 덧붙였다.


 “그 녀석은 자기가 내세울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게 웃기단 거야. 이 내가 높게 쳐주는데도 정작 자기는 스스로를 대단치 않다고 여기는 게 말이지. 그런 인물이 과연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 기대되지 않아?”


 “저는 솔직히 기대보다 걱정이 더 돼요.”


 아미야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당연했다. 카시미어를 양분하는 거대한 두 세력, 상업연합회와 감정회. 그 갈등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기사 토너먼트. 그 폭풍 속에 제이 한 사람 툭 던져 넣은 건데 그게 걱정이 안 되면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아까 그를 뭐라 비유했는지 기억해?”


 “아, 음……. 나이트에 비유하신 거요?”


 “그래, 그 녀석은 그게 무슨 의민지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런 비유라면 누구라도 모를 걸요.”


 아미야는 입을 살짝 내밀면서 말했다. 박사는, 정말 나머지는 다 그렇다 쳐도 때로는 도저히 알아듣기 힘든 비유로 머리를 아프게 했다. 때로는 그 켈시를 화나게 할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었다.


 “체스에서 나이트는 유일하게 기물을 뛰어넘지.”


 박사는 손에 쥐고 있던 나이트를 책상 구석에 놓여 있던 체스판 한가운데에 탁 놓으며 말했다.


 “아웃포스트(Outpost, 전초기지라는 뜻. 체스판의 중앙을 말함)를 먼저 점거한 나이트만큼 강력한 것도 없어. 전선을 굳히면서 그 자체로만도 위협적인 기물이 되어 주는 주제에, 이쪽이 유리한 수를 구상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을 벌어줄 수도 있거든. 게다가 쓰기에 따라선 방어선을 구축할 수도, 상대방의 기물을 암살하고 유유히 빠져나올 수도, 아니면 그대로 적의 방패를 부수는 창끝이 될 수도 있어.”


 “제이 씨가……. 그런 나이트라고요?”


 “그래. 그 녀석은 자기가 대단한 걸 몰라. 전투 경험도 없는 일반인이 다른 정예 오퍼레이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과 일반인이 과연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까? 그럴 리 없지. 그 녀석은 자길 몰라. 그러니까 그 녀석은, 제이는 특별한 거야.”


 박사의 말을 다 들은 아미야의 눈은 동그래져 있었다.


 “저 박사님이 그렇게 다른 사람 높게 평가해주시는 거 처음 봐요.”


 “뭐야, 아미야. 질투하는 거야?”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하하.”


 박사는 메마른 웃음을 지으며 물끄러미 체스판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은 정중앙의 나이트에 꽂혀 있었다.


 “이렇게 고평가하는 주제에 비유해주는 게 고작 체스말이라니.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도 틀린 거 하나 없어. 기억 잃기 전에 했다는 짓거릴 지금도 하고 있네.”


 “박사님! 제이 씨는 그런 뜻으로 알아듣지 않으셨을 거예요!”


 아미야는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설마 박사가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비하할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나도 알아. 미안, 아미야. 어리광 좀 부려봤어. 나도 피곤한가 보네.”


 “박사님…….”


 자기 자신을 상처 입혀서 부리는 어리광. 그 모습이 안타까워서, 아미야는 그에게 다가가 머리를 꼭 끌어안아 줬다. 박사는 그런 아미야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머리를 가슴에 품은 채로 아미야는 가만히 속삭였다.


 “제이 씨는 분명 잘 해내실 거예요. 무사히 돌아오실 거고요.”


 “…그래. 아끼는 오퍼레이터 한 명을 전장으로 보낸 주제에 우는 소리만 하고 있을 순 없지. 이쪽도 슬슬 감정회나 연합회 쪽으로 미끼를 던져봐야겠어.”


 “그건 제가 할 테니 아침만큼은 쉬세요. 식사도 하시고요. 무리하시다가 쓰러지기라도 하시면 그거야말로 제이 씨에 대한 면목이 없을 거예요.”


 “끄응.”


 박사는 앓는 소리를 내며 아미야에게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동의해서가 아니라 아미야의 팔을 풀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에. 박사의 체력이나 완력이 가장 약한 오퍼레이터만도 못하다는 건 알 사람은 다 아는 나름 유명한(?) 사실이었다.


 “으으, 알겠어. 알겠다고.”


 “쉬세요, 박사님. 식사 맛있게 하시고요.”


 아미야는 제이가 놔두고 간 식사를 그의 앞으로 밀면서도, 동시에 그가 또 일에 파묻히지 않도록 책상에서 서류를 들 수 있는 만큼 집어 들었다. 그런 사랑스러운 아가씨의 권유를 어찌 무시할 수 있으랴. 박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 한번 쉬고, 아까 들었던 젓가락을 든 뒤 아침부터 먹기 시작했다.


 로도스는 살아남아야 했다. 곧 닥칠 거대한 싸움에 대비해서.


 하지만 우선 눈앞에 식사를 즐기기로 했다.


 배가 고프면 싸울 힘도 안 난다는 말도 있으니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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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에에에엑


다썼다


일단 구상한 데까지는 끝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30페이지 써놓고 와! 프롤로그 끝! 이라니 저도 가끔 제 자신의 뻔뻔함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뱀발: 킹즈 나이트 오프닝은 체스의 오픈 게임 전략 중 하나입니다. 킹 쪽의 나이트를 먼저 움직이는 수죠. 마스터 레벨의 체스 경기에서 많이 쓰이는 오프닝입니다.



..........라고 꺼라위키가 그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