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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가렛이 보냈다?”


 “예, 예에.”


 부욱


 “로도스 아일랜드란 곳에 있단 말이지?”


 “예에…….”


 부욱


 “그래서 이걸 전해주려고 일부러 왔다고?”


 “뭐어, 그렇긴 합니다만…….”


 부욱


 “그런가.”


 “…….”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련의 동작.


 채 뜯어보지도 않은 편지.


 그걸 한마디 한마디에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찢어버린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수고했다. 가 봐라.”


 딱 다섯 마디만으로 대화를 끝내고선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요만큼도 감정 따윈 안 느껴져서, 차라리 벽에 대고 수고했다고 하는 게 더 정감 있게 들릴 정도였다.


 “…….”


 뭐지.


 뭐지?


 이해를 아득히 넘어서는 일을 마주하면 사람이 멈춘다고 했던가.


 정문에서 신분을 밝히고, 정원을 지나 응접실로 들어와서 지금까지 대충 5분이나 지났을까. 체감상 그것도 길다고 느껴지는 걸로 봐선 길게 봐줘야 3분 남짓. 그게 마가렛 이외의 니어 가문 사람과의 최초의 만남이라니.


 제이는 문자 그대로 골이 띵할 지경이었다.


 “어, 어어, 아니. 잠깐만요. 그, 어……. 무에나 어르신!”


 “뭐냐?”


 니어…그러니까 마가렛이 얼핏 말했던 이름 중 하나를 기억을 뒤져 끄집어낸 제이는 무에나를 멈추는 데엔 성공했다. 저 사람 이름이 무에나가 맞나? 제길, 일단 맞으니까 멈춘 거겠지. 그야말로 1초만 더 입 닫고 있으면 그대로 발길을 돌릴 기세라, 제이는 있는 생각 없는 생각 다 짜내서 되는 대로 뱉어내야 했다.


 “그, 죄송한데 편지……. 안 읽으심까?”


 “왜 읽어야 하지?”


 “???”


 그야말로 일 더하기 일이 왜 이가 되느냔 질문을 받은 듯한 느낌. 가족이 보낸 편지를 왜 읽냐고 되묻는 거에 대해선 대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아니 그게 정말 되물어 볼 거긴 한 것인가?


 그야말로 물음표가 머리에 수천 개도 더 뜨는 제이였지만, 무에나라 불린 남성은 그런 제이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대로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쿵, 하고 문 닫히는 소리. 그게 이 응접실에서 무에나가 낸 소리 중 제일 큰 소리였다.


 “아이고…….”


 세상에서 증오보다 무서운 게 무관심이라고 했던가.


 무에나는 마가렛에게 화가 난 것도, 제이를 불쾌하게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정말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까 편지를 찢으며 던졌던 질문들도 바깥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만큼이나 부질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거, 찢어진 거라도 가져가서 다시 붙여 와야 하나.


 한순간 그런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지만, 제이는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에나는 편지 내용 따윈 거들떠도 안 본 채로 그대로 찢었다. 그 말인즉슨 내용 따윈 하등 중요하지도 않다는 얘기였다.


 “제 조카 얘기 따윈 알고 싶지도 않다는 건가. 쩝, 거 가족끼리 인정머리 없기는.”


 제이도 언뜻 들어서 마가렛이 그리 좋은 이유로 카시미어를 떠난 건 아니라는 것 정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랜만에 받는 조카의 소식까지 매정하게 걷어찰 건 또 뭔가? 다른 건 다 제쳐놓더라도 제이는 그게 가장 화가 났다. 앞집에 옆집 뒷집은 물론 건넛집 사정까지 제 일처럼 생각해주는 게 용문 특유의 정이고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지금껏 살아온 제이로서는 무에나의 태도 따윈 그야말로 이해의 범주를 아득히 초월해 저 멀리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끄응.”


 남의 집안일이요, 거기에 자세한 사정도 모르는 판국에 우격다짐으로 뭘 해보기엔 지금 그의 코가 석 자였다. 아직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마당에 무슨 남의 가정사에 고갤 들이밀겠다는 건가. 제이는 뒷머리를 득득 긁고, 한숨을 한번 푹 쉬고선 응접실을 나섰다. 그대로 밖으로 나가자, 아까 오면서 지나쳤던 니어 가의 정원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거 사람 사는 데가 맞긴 하나.


 매우 실례되는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느껴지는 걸 어쩌겠는가.


 아무렇게나 자란 풀과 나무들로 가득한 정원. 이건 정원이 아니라 거의 숲에 가까웠다. 관상용이랍시고 있는 것 같은 연못엔 개구리밥과 수초가 그득그득했고, 저택의 벽이며 기둥 등등 하여간에 기어오를 수 있는 곳이라면 담쟁이덩굴로 안 뒤덮인 곳을 찾기가 더 힘들 지경이었다. 감상을 종합하자면, 이른바 여긴 폐가 반보 직전의 저택인 셈이었다.


 관리라곤 전혀 되있지도 않은 정원.


 인기척이라곤 조금도 없는 저택.


 차라리 그 무에나라는 사람이 의욕도 없이 맥빠진 모습을 하고 있었더라면 이해라도 했겠지. 그러나 그는 이 무너져가는 저택과는 이질적이리만큼 의연했다.


 기사.


 고결하고 고귀한.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눈에서 형형한 빛을 띠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사람.


 그게 제이가 느낀 무에나라는 사람에 대한 인상이었다. 좋게 말하면 심지 굳은 사람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세상을 되게 피곤한 방식으로 사는 사람이었다. 뭐랄까, 주변에 무심하고 배려 따윈 안 하면서도 제가 생각하는 올바른 길은 주저 없이 갈 것만 같은 사람이랄까. 미운 짓만 골라 하는데 차마 밉다는 말은 할 수 없는 그런 사람.


 “너, 잠깐만.”


 허리까지 자란 잡초며 풀 따위 앞에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누군가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여자였다.


 “…안녕하심까.”


 굉장한 미인이었다.


 상대방을 꿰뚫어 볼 듯한 깊고 푸른 눈. 마치 아침 햇살처럼 잔잔한 색의 금발.


 실용성 높아 보이는 경갑 차림새는 굉장히 단아하고 깔끔해서, 그대로 어디 연회장 같은 곳에 가도 될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허리춤에 매달린 한 자루의 칼은 그녀가 겉멋으로 그런 갑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녀 역시 기사였다. 자세부터 눈빛까지, 그녀의 모습 자체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편지, 정말 네가 가져온 거야? 필체는 마가렛 그 애 거가 맞는데.”


 그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그녀는 손에 쥔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좀 전에 처참하게 작살난 편지였다. 정확히는 그 일부였지만. 제이는 다시금 기분이 급속도로 울적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예에. 일단 전해달라고 부탁받았거든요.”


 “타이밍이 나빴어. 하필 무에나 그 작자가 있을 때 오다니…….”


 그녀는 두 귀가 늘어질 정도로 한숨을 푹 쉬더니 애써 미소를 지었다.


 “일단 편지라도 가져다준 건 고마워. 솔직히 연락이 너무 뜸했었거든. 정말 어디서 객사라도 안 했나 걱정까지 될 지경이었다니까. 편지 보낼 정신이 있다면 그럭저럭 제 앞가림은 하면서 살고 있단 뜻이겠지. 맞아?”


 “맞슴다. 건강하세요. 이전에 조금 다치시긴 했지만요. 그래도 제가 여기 오기 전에 뵀을 땐 거의 다 나으신 듯했슴다.”


 “그래? 이전에 듣기론 어디 구호 조직 비슷한 데로 들어갔다고 하던 거 같은데. 무슨……. 살카즈 집단, 같은 거라고.”


 여기사의 푸른 눈이 그를 탐색하듯 위아래로 훑었다. 아마 그가 살카즈인지 아닌지를 보려고 한 것이리라. 그러나 제이의 생김새는 영락없는 우르수스인지라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살짝 찌푸린 눈썹에 비스듬히 바라보는 시선. 세상에, 미인은 거적때기를 입어도 빛이 난다더니. 제이는 마음속 탄성을 감추려는 듯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아님다. 거기는 아마 전에 몸담고 계셨던 곳일 거고, 지금은 로도스 아일랜드라는 곳에 계십니다.”


 “로도스 아일랜드? 로도스, 로도스……. 아아, 그 제약회사 말이지? 광석병을 전문으로 하는. 그래, 들어봤어. 그런데 걔는 그런 의료 쪽으론 아예 맹탕일 텐데?”


 “의료진은 아니시고 디펜더 오퍼레이터로 일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의학 쪽으로도 상당히 해박하세요. 광석병 예방이나 보호 장비에 대해서도 빠삭하시고, 빛나는 아츠로 상처를 치유해주기도 하시거든요. 그러면서도 본인 전투력도 대단하셔서, 와 이거 문자 그대로 빛의 기사님이시죠.”


 제이는 내친김에 아까 무에나에게 하려고 했던 칭찬도 곁들여서 했다. 사실 니어는 정말 객관적으로 봐도 성품이며 실력이며 인망이며, 뭐 하나 빠질 데 없이 대단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웬걸, 활짝 웃으며 그러냐고 할 줄 알았던 여기사는 쓰게 웃으며 시선을 내릴 뿐이었다.


 “…그래? 그 아이, 밖에서도 빛의 기사라고 불리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 저 제가 무슨 이상한 말이라도…….”


 방금 전 무에나에게 뭐 말 한마디 제대로 못 붙여보고 눈앞에서 편지 찢기는 꼴이나 봐야 했던지라, 제이는 유독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아무래도 성격이 그 모양이었던 건 무에나 한 명뿐이었던 건지, 그녀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냥 조금……. 뭐랄까, 좀 의외라서. 아니 그 아이답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다행이야. 적어도 여길 싫어하는 것 같진 않네. 그래서, 너도 그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온 거야?”


 “예에, 일단은요. 저도 거기서 오퍼레이터로 있슴다.”


 “어머나, 그래? 어쩐지 전달자나 그런 거로는 안 보인다 했어.”


 “…….”


 어째 목소리가 좀 ‘차림새에 비해 많이 의외다’라는 식의 말투였지만 제이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뭐 마피아나 부랑배로 안 봐주는 것만 해도 어딘가. 좋게좋게 넘어가면 되는 거지. 게다가 편지까지 없어진 마당에 이 여기사님마저 손을 안 뻗어준다면 그는 문자 그대로 줄 끊어진 두레박 꼴이 되는 셈이었다.


 “그래, 편지 말고 뭐 다른 소식은 없어? 마가렛이 아무 말도 없이 편지 한 장 달랑 들려서 보내진 않았을 텐데.”


 “아아, 곧 여기로 돌아오신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아까 말씀드렸듯 좀 다치셔서, 일단은 제가 먼저 오는 김에 편지부터 전해드리러 온 겁니다.”


 “그랬구나. 그럼 넌 뭘 하러 왔는데?”


 “저요? 어, 음…….”


 글쎄 뭘 하러 왔을까요. 아니 뭘 해야 할까요. 그건 오히려 제이가 묻고 싶은 문제였다.


 박사는 카시미어에 로도스 지부를 설립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을 니어와의 연결 고리이자 전초기지로 삼고 싶다고도 했고.


 그런 박사의 목표에 대해 그가 과연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솔직한 심정으로 제이는 자기가 그 정도로, 아니 그게 가능할 능력이 있을 거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자존감이 낮아서가 아니라, 정말 그는 평범한 용문 길거리 시장 상인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싸움박질을 잘 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엄청난 두뇌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제 머리로 생각하자니 욱하는 기분이 들긴 해도 외모가 받쳐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여기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박사가 자신을 믿고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를 믿는 게 아니라 박사를 믿었다. 박사는 그보다 한 백 배쯤은 뛰어난 사람이지 않던가. 평소에 나사가 좀 빠진 모습을 보여줘서 그렇지, 사람 쓰는 일엔 아무리 장난 같아도 허튼짓은 안 하는 박사였다.


 그렇다면 제이가 할 일은 그 기대에 최대한 부응하는 것뿐.


 되든 안 되든, 일단 믿고 맡겨줬는데 이대로 나 몰라라 한다면 너무 무책임하지 않겠는가. 그는 박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머리를 굴린 다음 입을 열었다.


 “일단은, 마가렛 아가씨를 도우러 왔습니다.”


 “도와? 뭐를?”


 “뭘 하시던지요. 사실 저도 자세한 건 모름다. 막 그렇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온 건 아니거든요.”


 “그 애가 와서 뭘 할지도 모르는데 그 애를 돕겠다고? 너 지금 되게 이상한 말 하는 거 알지?”


 “으윽, 저도 알지만 진짜임다. 믿어주세요.”


 “믿을 만한 말을 해야 믿든가 하지…….”


 여기사는 어이없다는 투로 말하며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래도 거짓말 같진 않네. 거짓말이었으면 적어도 좀 더 그럴듯한 말로 했겠지.”


 “…그게, 제가 조리 있게 말할 만한 말주변은 없어서요.”


 “그래 보이긴 해.”


 “…….”


 이 아가씨 은근히 말 막 하네.


 스스로를 ‘평범하기 그지없는 용문 소상인 출신 오퍼레이터’라 굳게 믿고 있는 제이는 조금 울컥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다시 한번 참았다. 왜 동씨 아저씨도 그러시지 않았던가, 여자에게 화내는 남자만큼 멋대가리 없는 놈도 없다고……. 


 그 인생 철학을 떠올리며 제이는 여기사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제이를 재보듯 잠시 이리저리 뜯어보는 눈치였지만, 이내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좋아, 믿어줄게. 마가렛 그 애, 철두철미한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맹한 데가 있으니까. 보나 마나 이번에도 사람이 좋아서 남이 도와준다는 거 거절도 못 한 거겠지.”


 뒤이어 그의 앞으로 슥 내미는 오른손. 제이가 얼떨떨하게 그 손을 잡자(의외로 손바닥엔 굳은살이 꽤 박혀 있었다) 그녀는 가볍게 악수를 하며 미소지었다.


 “자기소개가 늦었네. 반가워, 조피아라고 해. 마가렛의 먼 친척이지. 방계이긴 하지만 니어 가문의 일원이기도 해.”


 “제이임다.”


 “흐응, 용문 출신인가 보구나?”


 “오? 어떻게 아셨슴까? 용문 오신 적 있으세요?”


 “간 적은 없지. 하지만 억양이 특이하잖아. 그런 말투가 용문 말고 또 어디 있겠어? 용문 사람들은 자기네들 억양이 특이한 줄 모른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엑, 그렇게까지 특이한 것 같진 않은데요.”


 “어머, 본인이 그렇게 말하는 거 아무 의미 없단 거 알지?”


 조피아는 쾌활하게 웃더니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선 힐끗 등 뒤의 저택을 보더니 미안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아까 네가 만났던 사람은 무에나라고 해. 무에나 니어. 마가렛의 삼촌이야.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아까 좀 당황스러웠지?”


 조피아가 찢어진 편지 조각을 팔랑거리며 말하자 제이는 얼굴을 찡그렸다. ‘당황스럽다’는 아까의 상황을 묘사하기엔 너무나도 조심스러운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당황스럽기만 했겠슴까. 너무 자연스러워서 전 그게 카시미어식 인사인 줄 알았다고요.”


 “그 사람이 좀 배배 꼬인 데가 있어. 마가렛이랑 사이가 나빠서 그래. 아니 나쁘다고 해야 하나, 동족 혐오 비슷한 거라 해야 하나…….”


 조피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냐. 아마도. 네가 하필이면 별로 안 좋을 때 오기도 했고 말이야. 평소 같았으면 그냥 내쫓기만 했을걸.”


 “…아니 보통은 내쫓지도 않는다고요.”


 “성격이 꼬였다고 했잖아. 그러려니 해. 그거 아마 죽어야 나을 거 같으니까.”


 “…….”


 쏘아붙이는 말이 유독 날카롭게 들렸다면 기분 탓일까. 뒤이어 입을 여는 조피아는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가 조금만 더 빨리 왔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한탄도, 안타까움도 훨씬 넘어서서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듯한 그런 표정.


 낙담과 절망이 뒤섞인 듯한 그런 표정. 결국 조피아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려는 것처럼.


 “…뭔 일, 있으심까.”


 “일? 있기야 있지. 사실 그것 때문에 잠깐 여기 온 거야. 무에나에게 소식 전해주려고.”


 조피아는 그렇게 말하며 저택을 사납게 노려봤다. 마치 그 저택이 무에나의 얼굴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런 그녀의 눈은 그야말로 증오와 분노의 불똥이 탁탁 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번득이고 있었다.


 “그런데 꼴을 보아하니 내가 알려준다 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겠네. 됐어, 나도 제 조카 챙기지도 않는 사람한테 지키고 싶은 의리 따윈 없으니까. 너, 뒤에 일 있어?”


 “어……. 아뇨.”


 “그럼 여기까지 온 김에 좀 더 어울려 줘. 그 애도 제 언니 소식 정돈 듣고 싶을 테니까.”


 그 애? 제이는 다시 기억을 뒤졌다. 확실히 니어가 말했던 이름 중에…….


 “어……. 마리아?”


 “마가렛이 말해줬나 보구나? 그래, 마리아. 그 애 동생이야. 사정이 있어서 우리 집에 잠시 데리고 있거든. 너도 알지? 이전의 그거.”


 “…….”


 이전의 그게 뭔데요. 그런 표정으로 조피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잠시 멀뚱하니 그를 바라보다 눈썹을 찌푸렸다. 흡사 야만인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못 살아. 넌 뉴스도 안 보고 사니? 그럼 여기 찾아온 것도 아무것도 모르고 온 거란 말이야?”


 “…죄송함다.”


 “정말 도우러 온 거 맞아? 마가렛은 뭐 이런 사람을 보냈다니.”


 “…….”


 뉴스 꼬박꼬박 안 본 게 죄라면 죄긴 한데, 이거 이 기사 아가씨는 입에 뭔 칼침이라도 박는 재주가 있는지 한마디 한마디가 그야말로 뼈를 쑤시는 것처럼 아프게 들렸다.


 “네가 마가렛을 도와 뭘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카시미어에선 항상 기사 경기 소식 정돈 알고 있어야 해. 네가 여기서 어떤 일을 하든 말이야.”


 “넵.”


 “좋아.”


 기합 들어간 대답이 맘에 들었던 모양인지 조피아는 싱긋 미소를 짓고선 발걸음을 옮겼다. 따라오란 뜻이었다. 말은 좀 거칠긴 했지만, 뭐 좋은 사람인 듯했다. 솔직히 어느 정도 해이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기도 하고.


 “가축들은 때려야 겨우 말을 듣지만 넌 사람이니까. 한번 말하면 알아들을 거라고 믿어.”


 “…….”


 전언철회.


 이 사람, 역시 성격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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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저렇게 틱틱거리다가 나중에 앙앙거리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