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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차.


"제가, 작전에 출격을...? 거기에 팀장이라고요? 정말 괜찮을까요? 제가 단독으로 팀을 이끌게 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린에게 작전 개요를 요약한 서류를 내밀었다.

한참 동안 서류를 읽던 그녀는 궁금한 것이 있었는지 펜을 꺼내서 이것저것 동그라미와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이내 다 끝났는지, 나에게 다시 서류를 보여주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이 배치의 이유는..."


그런 식으로 가능한 하나하나 차분히 설명해가자, 음음,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어...하면서 난감한 반응을 보이던 아이린은 수긍했다는 듯 다시 서류를 가져가서 주머니에 넣었다.


"작전대로만 진행된다면...완벽하겠네요. 그나저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박사님."


무슨 질문을 하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들어봐야 알겠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린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이렇게...작전을 짜면서 고민하다보면 매 순간순간 무게감이 클 거에요. 그렇다면 그 무게감으로 박사님께서 말한 신념이 흔들리는 일이 생기지 않나요? 목숨의 값은 박사님께 얼마나 무겁고, 얼마나 비싼 건가요? 저는..."


표정이 굳어진 채, 무어라 더 말하려던 아이린은 고개를 젓더니 이만하면 괜찮아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서 나가려던 아이린을 나는 조용히 불렀다.


"...혹시 오늘도에요? 하아...어쩔 수 없네요..."


그럼, 잠시 저를 박사님께 맡기도록 할게요. 그렇게 말하며 다가온 아이린을 무릎 위에 올리고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긴장감으로 조금 굳어진 몸이 다시 부드럽게 풀리는데는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어쨌든 오늘도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 아이린이 귀여웠다.



14일차.


오늘은 작전을 결행하는 날이다.

지휘 단말에 접속하여 신호를 확인하고 중요한 부분들을 체크한 뒤, 계획대로 작전을 진행시켜나갔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이제 30퍼센트 정도 남은 찰나, 현장에서 급보가 들어왔다.


『박사님, 적의 긴급 증원이 감지되었습니다. 1팀이 있는 쪽입니다.』


작전의 변경이 필요할 것 같다는 PRTS의 메세지에 1팀과 연락을 취했다.


「여기는 팀장 아이린. 박사님, 무슨 일이신가요?」


적의 긴급 증원이 확인되었다는 말에, 잠시 단말기의 너머에는 침묵이 감돌더니 평소에는 들을 수 없는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재판관은 악을 두고 물러서지 않습니다. 박사님, 하지만 아직 여기서 죽진 않을 거에요. 그러니 원하는 대로 하세요.」


아직 오늘의 일과도 못 끝냈잖아요? 농담처럼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의 떨림이 느껴졌다.

주변에서 다른 오퍼레이터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팀장으로서 그녀가 짊어지는 무게는 크겠지.

그렇다면 여기서는 조금 대담하게, 그렇지만 냉정하게 갈까. 그녀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

다시 가능한 구체적으로 추가적인 지시를 내리자, 단말기 너머에서 놀랐는지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그대로 하면 된다고요? 그대로 하면 우리가 다 죽을지도 몰라요...당신을 믿어도 될까요...?」


괜찮아, 나는 뭐든 할 수 있으니까. 나를 믿어도 괜찮아. 나의 신념은 언제나 흔들리지 않아.

그렇게 말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쿡쿡 웃은 그녀는 말했다.


「...신념대로 행동한다...그렇다면 당신을 믿어볼게요. 저와 팀원들의 목숨의 값은...당신에게 얼마나 값어치가 있을까요? 제 불빛이 꺼지지 않기를.」


결과적으로 작전은 무척 성공적이였다. 

아무도 큰 부상을 입지 않고,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다.

돌아가는 차량의 안에서, 뒷 좌석에 나와 나란히 앉은 아이린은 피곤한지 눈을 감고 있다가 창문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에기르의 헌터들도 이런 식으로 지휘하셨나요? 그 잘난 의사가 약속한 승리에...제법 신빙성이 생기긴 했네요."


잘난 의사라면 켈시인가, 그렇게 묻자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맞아요. 그 녹색 필라인...무언가 많은 걸 숨기고 있는 것 같아요...그나저나...조금 졸리네요."


그렇게 말한 아이린은 그대로 내 쪽으로 눕더니 나의 허벅지에 머리를 올리고 눈을 감았다.

버릇처럼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자니,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사님은...정말 뭐든 하실 수 있으시네요...박사님의 마음 속에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있으며...어른답고...당신이 정말 부러워요."


무슨 의미지, 라고 물으려던 찰나, 작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피곤한 모양이니 이대로 내버려 둬야겠다.

오늘의 아이린은 여전히 귀여우면서도 무언가가 불안해보였다.



15일차.


오늘은 유독 업무가 많았다.

어제의 작전 뒷처리 때문에, 오늘은 아이린에게 한 마디도 말을 걸지 못했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어쨌든 오늘의 실험은 아무래도 포기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집무실에서 나와 침실로 가던 찰나, 갑자기 주머니 속에 넣어둔 단말기가 울렸다.

화면에 표시된 이 코드네임은...로렌티나인가.

버튼을 누르자, 경쾌하고도 묘한 색기가 흐르는 음성이 들려왔다.


"박사, 안녕? 좋은 밤이야. 혹시 자고 있어? 안 자면 여기에 와서 이 작은 새 좀 어떻게 해줄래?"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나를 불러낸 곳은 로도스 아일랜드의 자그마한 와인 바였다.


도착하자마자 내 눈에 비친 광경은, 안색이 하나도 안 변한 로렌티나가 자신의 맞은 편에 앉아서 무언가를 실컷 떠드는 아이린의 새빨갛게 물든 뺨을 콕콕 찌르는 것이였다.

테이블 위의 와인들을 보아하니, 다 같이 제법 마신 모양인데...어째선지 취한 건 아이린 혼자인 것 같았다.

로렌티나의 양 옆에 앉아있던 글래디아, 스카디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아이린의 왼쪽 의자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마치 삐약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나의 귀를 찔러댔다.


"박~사님! 그러니까요! 저 못된 에기르인들이 자꾸 저를 놀린다고요! 빨리 혼내주세요!"

"어머, 작은 새야...네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박사님'을 불러와준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나 슬퍼? 박사님께 일러바칠 건 이 언니 아닐까?"

"읏! 로렌...아니 에기르인...너 진짜!"

"후훗, 그럼 박사님이랑 좋은 시간 보내렴, 작은 새야...'단 둘이서'. 그리고 잊지 마렴...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


그렇게 말하며 일어서는 로렌티나와 글래디아, 그리고 스카디.

따라 일어서려다가 균형을 잃고 나의 어깨에 기댄 채 씩씩 거리며 바에서 나가던 어비셜 헌터들을 노려보던 것도 잠시, 나의 오른팔에 달라붙으며 이마를 비비던 아이린은 오른손을 뻗어 와인이 든 잔을 나에게 내밀었다.


"박사님도 마시세요!"


사양하려던 찰나, 억지로 나의 입에 들이밀어진 잔에 어쩔 수 없이 아이린이 주는대로 와인을 마셨다.

그러자 기쁜듯 웃던 아이린은 다시 눈 앞의 와인병을 들어 잔을 채우더니 다시 또 나에게 들이밀었다.


"박사님은 어른이니까 괜찮잖아요! 더 드세요! 더!"


그렇게 다시 들이밀어진 와인을 마시자, 아이린은 박수를 치더니 다시 한 번 와인병을 들어 잔을 채워서 나에게 들이밀었다.

그러면서 아까까지만 해도 환하게 웃던 표정이 조금씩 우울한 표정으로 변하더니, 그녀는 작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박사님은...뭐든 할 수 있잖아요. 저 같은 아이가 아니니까...괜찮죠. 저 헌터들도 그렇고 말이죠..."


그렇게 내밀어진 잔을, 한동안 마시지 않고 아이린을 바라보자 읏...하고 작게 신음한 아이린은 잔을 내려놓더니 순식간에 내 무릎 위에 올라타서 목에 양팔을 두르고 정면에서 안겨왔다.


"...박사님."


그렇게 말한 아이린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평소처럼, 쓰다듬어주세요."


그렇게 아이린을 쓰다듬으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

선생님과 함께 했던 이야기.

살비엔토에서 있었던 이야기.

그란 파로에서 있었던 이야기.


"선생님께서...그러셨죠. 언젠가 자신의 등불과 무기를 본인의 무덤에 놓을 날이 올 거라고. 그 날 부터는, 나를 더 이상 가르쳐줄 사람이 없을거라고요."

"그리고 싸우는 의미를 깨닫길 바란다고 하셨어요."

"경전과 율법은 제 행동을 인도하겠지만, 제 행동은 제 신념에 따른 것...그것이 제가 내린 싸우는 의미에요."

"물론 잘 알고 있어요...제가 해야할 일도...하지만...제 신념마저 틀리는 날이 올까봐, 저는 너무 걱정이에요."

"이베리아인들이 저를 데면데면하게 보는 것도 알아요...당연한 것이지만..."

"제 마음속 한 켠의 외로움도...이런 바보같은 생각도...정말 아이같은 걱정이죠. 저는 여전히 아이인가봐요..."

"박사님은...뭐든 하실 수 있잖아요...저랑 다르잖아요...제게 가르침을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는 아이린을 조금 더 세게 껴안았다.


나도 너를 가르칠 순 없어.

하지만 너와 함께 배워나갈 수 있어.

둘이서 같이 배워나가자. 분명 혼자보다는 괜찮을거야.

내가 네 곁에 있어줄게.


혼자서 가는 외로운 길이 아니라는 나의 말의 의미가 전해질 수 있도록, 그녀를 가두듯이 껴안았다.

조용히 있던 그녀가 입을 연 것은 찰나가 겹쳐진 많은 시간이 지난 뒤였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며 내 품 속에서 눈을 감고, 고른 숨소리는 내는 아이린이 귀여웠다.

...그런데 어떻게 숙소까지 옮기지.

어쨌든 오늘 실험은 성공적이였다.



16일차.


"그...어제는 제가 폐를 좀 끼친 것 같아서...죄송해요. 박사님."


어젯 밤에 있었던 일이 전부 기억났는지 우물쭈물하면서 연신 머리카락을 매만지더니, 얼굴을 붉히는 아이린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다가온 아이린의 손을 앉은 채 잡아주자, 스스로 무릎 위에 기어 올라온 그녀는 얼굴을 아까보다 새빨갛게 붉혔다.


"...앞으로도 폐를 많이 끼칠지도 모르겠네요. 박사님...잘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린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생각을 했다.

우선 이베리아인들과의 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녀가 지치지 않게, 자신의 신념의 무게감을 받아들이고 조절하는 방법도 알아봐야겠지.

잠시 손이 멈춘 것에 의아해하던 아이린에게 웃어보이고 머릿속으로 차분히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당장 내일부터 하자. 

뭐 어쨌든 오늘도 아이린이 귀여웠다.



17일차.


아이린에게 오늘은 일이 있어서 오지 말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조금 뒤에 날아온 문자는 괜찮다는 내용과 무슨 일이 있냐는 걱정이 담긴 내용이였다.

별 일은 없다고 답신한 뒤, 책상 위의 서류들을 정리하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요, 전우! 어쩐 일로 우리를 부른거야?"


경박한 목소리와 함께 등장한 리베리 남성, 엘리시움과 그 옆에는 늘 붙어다니던 멤버인 쏜즈, 그리고 위디.

모두 내가 미리 불러놓은 멤버들이다.


"...너라면 내 귀중한 시간을 조금 나눠주는 것도 괜찮겠지."

"너희들, 참 박사한테 너무 허물없이 구는 거 아니야...?"


그렇게 한동안 그들만의 티격태격이 즐겁게 이어지더니 정신을 차린 위디가, 그건 그렇고. 하면서 운을 떼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박사, 오늘은 무슨 일이야?"


그렇게 말한 그들에게 나는 정리한 질문들을 꺼냈다.

우선은 재판소에 관한 내용과, 재판관에 관한 의견에 대해서 먼저 물었다. 


"으음...나는 솔직히 말하자면...그들도 가엾다고 생각하긴 해. 내가 그란 파로에서 겪은 일을 생각하면 어째서 그렇게 된 건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는 가고."

"...종교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할 말은 없다만, 최근 여러 가지 일을 엘리시움에게서 들었다. 그것들이 전부 사실이라면, 그들이야말로 존중 받을 만하지."

"나는 과학적인 부분 외에는 잘 모르지만...좀 오해를 받은 적은 있지. 박해를 받았다...는 건 사실 아니거든. 이베리아가 너무 폐쇄적인거지. 어쨌든 나는 잘 모르겠으니까 할 말이 없어."


엘리시움과, 쏜즈와 위디의 대답을 들으니 어떻게 할지 조금은 감이 잡힌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질문으로 넘어가야겠다.

두 번째는 그렇다면 우리 로도스 소속의 이베리아 출신 오퍼레이터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다들 좀...아무래도 거리를 두고 있긴 하지? 말 한 마디 잘못하면 끌려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안타까울 따름이야. 그들도 많이 변했는데 말이지."

"...엘리시움의 말 그대로다."

"오퍼레이터 위스퍼레인이나 블루포이즌...정도를 빼면 아마 다들 두려워 할 걸? 나는 별로 두려워 하진 않아."


그나저나...그렇게 말하며 눈을 빛내던 엘리시움이 말했다.


"이걸 묻는다는 건, 역시 그 리베리 재판관 때문이지? 그치?"


엘리시움치고는 제법이라고 대답하자, 엣헴 하면서 늘 갖고 다니던 깃발을 자랑스럽게 흔들던 엘리시움은 그렇다면...하고 운을 뗐다.


"나라면 이렇게 할 것 같은데. 이베리아인들의 모임을 하나 주최하고 박사랑 그 재판관이 같이 참석해서 재판관도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거야. 어때? 괜찮지 않아?"

"...너치고는 제법 좋은 아이디어군. 엘리시움."

"오늘 뭐 잘못 먹었어? 어...그러고보니 오늘은 사고를 안 쳤네? 내 옷도 멀쩡하고..."


하하, 하면서 평소와 같은 경박한 웃음을 짓던 엘리시움은 이내 이거, 욕한거 아니야? 하고 의문을 표하고 실컷 떠들었지만, 그 의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일단, 박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대충은 알겠다. 내가 위디와 함께 모임의 기회를 한 번 만들어보겠다."

"세상에...우리 쏜즈가 이렇게 달라졌다고...? 평소에 귀찮다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실험만 하더니?"

"...위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어쨌든 박사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도와야하지 않겠나."

"그래, 그럼 난 여자 오퍼레이터들에게 물어볼게. 저 자뻑하는 바보는 네가 데리고 가."

"...싫다. 네가 데려가라. 어쨌든 얼굴은 반반하니까 입만 다물고 있다면 성공률이 높아질 거다."

"에라이...그나저나, 박사랑 그 리베리 재판관이 무슨 사이야?"


그렇게 묻던 위디의 입을 엘리시움과 쏜즈가 동시에 손바닥으로 막더니, 쉿! 하고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댔다.

그러면서 다 안다는 듯 눈을 찡긋거린 엘리시움과 나만 믿으라는 표정으로 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위생을 극도로 신경쓰는 위디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었겠지.

그렇게 저수포와 지고의 술과 깃발이 오가며 티격태격하던 셋을 내보내자 순식간에 피로가 몰려왔다.

이걸로 계획의 첫 발걸음을 내딛었으니 결과는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지친 몸을 이끌고 내 방에 돌아오던 도중, 복도의 끝에 회색 머리카락이 얼핏 보인 것 같아서 그 쪽으로 걸어가자 가볍게 탁탁, 내딛는 발소리가 반댓쪽으로 멀어져갔다.

...대충 봐도 누군지는 알 것 같지만 이럴 땐 모르는 척 해주는 것이 예의겠지.

그렇게 한동안 우리들만의 술래잡기는 계속 되었고, 내 방의 앞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크흠크흠.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지금 돌아오시는 길인가요? 아, 저는 그냥 산책을 좀 하고 있었어요. 조금 잠이 안 와서..."


그렇게 사소한 이야기를 계속 하던 아이린은 아, 여기가 박사님의 방인가요? 전혀 몰랐어요. 그렇게 화제를 돌리더니 머리카락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분명 어디선가 읽었는데 불안감을 느끼거나 하면 자신도 모르게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습관이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하던가.

일단 이대로 서있기도 좀 그래서, 방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정말, 들어가도 되나요? 그...그럼, 실례할게요."


그렇게 들어온 아이린에게 손님용 슬리퍼를 건넨 뒤, 소파로 안내했다.

차를 끓이는 동안 아이린을 보니, 그녀는 내 방이 신기한지 이곳저곳 둘러보고 있었다.

딱히 신기할 건 없지만, 타인의 방에 들어오는 것이 처음일까.

그러다가 방 한 켠에 걸린 사진을 본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 한참 보더니 다양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아마도 쓸쓸함, 부러움, 안타까움. 그런 느낌일까.

어쨌든 다 끓인 차를 건네자, 잘 마시겠습니다. 하고는 후후 불면서 차를 마시기 시작한 아이린의 옆에 앉아서 나도 가져온 차를 마셨다.

딱 좋은 온도 같아서 한 번에 다 마시니 기겁한 표정을 지은 아이린은 뭐라 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내 입을 벌리고 입 안을 보기 시작했다.


"...전혀 화상을 입지 않았네요. 그럼 그 소문도 설마 사실인가..."


무슨 소문? 하고 묻자, 라면을 입 안에서 바로 끓여서 마신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어떻게 안 거지?


"아, 아무튼 박사님. 오늘 저를 부르지 않으셔서 혹시 무언가 큰 일이 있으신가, 조금 걱정이 되서요."


우연히 내 방 앞을 지나갔다며? 그렇게 짖궃게 묻자, 읏...하고 고개를 돌린 아이린의 뺨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매번 생각하지만 아이린은 생각하는게 표정으로 다 드러나서 참 재밌고 귀엽다.


"그, 아무튼...오늘은 안 하시는 건가요?"


무엇을? 하고 되묻자, 아까보다도 얼굴이 새빨개진 아이린은 내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아, 혹시 실험 때문에 일부러 와준건가. 정말 기특하기도 하다.

바로 품 안으로 아이린을 끌어당긴 다음 무릎 위로 올리자, 내 가슴팍에 등을 기댄 아이린이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건 박사님께서 늘 하시고 싶어하니까 해드리는거에요. 아시죠?"


그렇게 말한 그녀는 내 왼손을 붙잡고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렸다.

어쨌든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안도감이 담긴 듯 한숨이 들려오더니 조금 더 나의 가슴팍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나에게 완전히 기댄 아이린이 오늘도 귀여웠다.



18일차.


"저기, 박사님. 폐가 안 된다면 한 가지 질문을 해도 괜찮을까요?"


오늘도 별 일 없이 서류를 정리하던 도중, 아이린이 뜬금없이, 그리고 동시에 매우 정중하게 질문을 던져왔다.

괜찮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야기를 꺼냈다.


"어젯밤에 박사님의 방에서 사진을 봤어요. 혹시 그 사진의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그 사진은...생각하니 조금 입맛이 쓰게 느껴졌다.

어쨌든 그녀와는 관계가 없으니 말해줘야겠지.

그렇게 누군지에 대해서 설명하자, 그녀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체르노보그에서 박사님을 구하려고 했던 팀원들의...그렇군요. 그렇다면 어째서 방에 그 분들의 사진을 두고 계신 건가요?"


잊고 싶지 않으니까.

과거의 기억을 잃고 아무것도 모르던 나에게 그들은 생명을 주었으니까.

그들은 나의 가족이야.


그렇게 대답하자, 그녀는 가볍게 몸을 떨고는 마찬가지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면 저는 선생님의 사진 하나 갖고 있지 않네요.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에게 또 다른 삶을 주신 선생님이신데, 그렇게 울 것 같이 말하던 그녀가 안쓰러웠다.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입에서 한 마디가 나왔다.


"...저랑 박사님이 함께 사진을 찍자고요?"


놀랐는지 목소리가 크게 나온 아이린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더니 이건 설마...라고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저기, 라고 불러봤지만...그러고보니 그럼 여태까지 제게 보였던 태도랑...어젯밤엔 방도 들어갔고...그렇다면 이건...거기에 가족...? 그렇게 뭐라 중얼거리면서 계속 왔다갔다 하는 모습에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그렇게 어쩔 줄 몰라하던 아이린은 결국 탁자와 부딪혀서, 내가 올려놨던 커피를 쏟아버렸다.


"아, 정말 죄송해요! 잠시만요. 제가 치울테니까..."


괜찮다고 손을 내저은 뒤, 마침 갖고 있던 손수건으로 탁자 위를 닦자 순식간에 나에게 다가와서 손수건을 낚아 챈 그녀는 여전히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말했다.


"손수건은 제가 빨아서 돌려드릴게요! 그...오늘은 갑자기 저 볼일이 생겨서..."


그렇게 끈적이는 손수건을 순식간에 주머니에 접어 넣은 아이린은 아, 맞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소파로 밀어넘어뜨리고는 내 무릎 위에 올라타서 마주보고는 이마를 내밀었다.

어쨌든 잘 모르겠지만 실험을 오늘도 할 수 있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밖으로 나가던 아이린이 어렴풋이, 여보세요! 에기르인! 아니 로렌티나! 도와줘! 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평온한 하루였다.



19일차.


「모임은 내일 어때? 다들 괜찮다고 했어!」


단말기에서 경박한 엘리시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괜찮다고 대답하자, 준비물은 따로 배달해놓을게! 그럼 나중에 봐! 라는 말과 함께 통신이 종료되었다.

단말기를 주머니에 집어넣자, 쭈뼛거리며 아이린이 나에게 다가왔다.


"저...당신. 그 목소리는 누군가요?"


엘리시움, 아마 네가 한 번 봤을지도 몰라. 그렇게 대답하자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에 잠긴 아이린은 아!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때 그 경박해 보이던 사람!"


안타깝게도 그런 느낌으로 기억된건가. 엘리시움에게 미리 애도를 표해놓자.

그렇게 하늘로 먼저 떠난(?) 엘리시움을 추모하고 있는 동안, 평소보다 거리가 조금 더 늘어난 듯, 좁혀진 듯, 묘하게 눈치를 보는 것 같은 그녀는 가져온 서류를 나에게 건넸다.


"제가 절반, 박...아니 당신이 절반. 괜찮네요."


앞으로도 이대로만 하죠. 그렇게 말한 그녀의 말에서 무언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 느껴졌다.

혹시, 뭔가 달라졌어? 그렇게 묻자. 잠시 얼굴의 표정이 변한 그녀는 순식간에 대답했다.


"뭔가달라진것같다고요아뇨평소대로인데요"


그렇게 대답한 그녀의 눈은 바쁘게 오른쪽과 왼쪽을 왔다갔다 하며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로렌티나에게 무슨 말이라도 들은 건가? 확실한 건 이건 분명 거짓말이겠지만, 넘어가주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내일의 일정인 이베리아인들의 모임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베리아 출신 오퍼레이터들과의 모임...말씀이신가요? 그렇다면 저는 가급적이면 동행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살짝 풀 죽은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역시 자신과 거리를 크게 두고 있다는 것을 많이 신경 쓰는 모양이다.

괜찮다. 나에게 다 생각이 있으니, 내 파트너로서 동행해달라. 그렇게 대답하자,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당신도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세요. 이번 달 말...그러니까 11일 뒤에 로도스 아일랜드는 새해를 맞이해서 축제를 한다고 들었어요. 그 날, 저를 무도회에 에스코트 해주세요."


무도회를 에기르인들이 주최한다고 했어요. 그렇게 말한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좋아요 하고 웃은 그녀는 왼손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손가락을 걸고 약속해요.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다고."


나도 왼손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우리의 손가락이 엮였다.

생각보다 작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느껴지고, 그 다음 말에 나는 조금 후회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미리 춤을 연습해야겠죠. 걱정 마세요. 로렌티나...아니 언니가 옆에서 봐줄 거에요."


아, 그래도 오늘 해야 할 일은 해야겠죠. 그렇게 말한 그녀가 양 팔을 뻗은 채 나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렇게 정면에서 안겨 드는 그녀를 무릎 위로 부드럽게 올리고 이마를 쓰다듬자, 행복한 듯 미소 짓는 그녀가 귀여웠다.

...물론 그 뒤에 끌려가서 어째선지 무척이나 흐뭇하게 나를 보던 로렌티나와 함께한 지옥의 댄스 교습을 해야 했던 것은 괴로웠다.



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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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협박을 받았으니 안 쓸 수가 없었다

알코올이 들어가는 순간 두서없는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한데 이것도 좋나?



피드백은 언제든 환영

다음 화는 나올지도 안 나올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