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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선 수프 카레


0.


 맛있는 냄새.


 이 냄새를 알아. 닭고기 수프 냄새야. 어릴 적 엄마가 해주셨던.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해주셨지. 개척지에선 신선한 고기를 구하는 게 어려워서, 자주 먹진 못했어. 그래도 가족끼리 둘러앉아 먹는 그 수프 한 그릇은 정말 맛있었어.


 이 향기……. 그때의 그 그리운 향기.


 그러고 보니 언제 밥을 먹었더라. 이틀 전, 아니면 사흘 전?


 “이봐요 아가씨. 아가씨?”


 그렇구나. 이건 환각이야. 너무 배가 고파서 느껴지는 환각. 그래도 이렇게 맛있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면 나쁘진 않을지도…….


 “아가씨. 어이구, 이거 완전 맛이 가셨네. 정신 차려요, 아가씨!”


 누군가 어깨를 잡아 흔드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도 환각일까. 몸은 둥실 떠 있는 것 같은데 눈꺼풀은 무게추로 누르는 듯 무거웠다. 이것도 환각이라면, 조금 어리광을 부려도 되겠지.


 “배고파…….”


 “…….”


 그렇게 속삭였을 때.


 난감하다는 듯한 한숨 소리와 함께, 억센 팔이 내 몸을 들어 올리는 듯했다.









1. 


 “그러니까 배가 고파서 쓰러져 계셨다굽쇼.”


 “응…….”


 “어이구, 일단 다행임다. 거 어두컴컴한 복도에 누가 널브러져 있어서 얼마나 놀랐다구요. 불러도 대답도 없고.”


 “아, 아하하…….”


 기가 차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잿빛의 더벅머리 청년 앞에서 도로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떨떠름하게 웃는 것뿐이었다. 라인 랩에서야 엘레나가 챙겨주기라도 했지, 여긴 거기도 아니었다.


 여기는 로도스 아일랜드.


 지금 그녀는 오퍼레이터 등록 절차를 위해 며칠 간 대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며칠 사이를 못 참고 사일런스의 연구 설비를 빌려 다시 연구를 시작했다는 게 그녀답다면 그녀다운 일이었지만 말이다.


 “대체 뭐 얼마 동안이나 안 드셨길래 그러심까. 그동안 식당 운영 안 한 것도 아닌데.”


 “으, 으음, 이틀? 아니 사흘 정도려나?”


 “…뭐 단식 수행하거나 그러시는 분 아니죠?”


 “다, 단식 수행은 아니고, 흥미로운 연구 주제를 찾아서 그만…….”


 “연구가 밥 먹여준답디까. 하여간에 똑똑하신 분들은 당최 이해를 할 수가 없단 말야. 뭔 밥도 안 먹고 머리를 쓰겠다는 건지 원…….”


 청년은 사납게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 투덜거림은 그녀를 향해 있다기보단 이 로도스 아일랜드라는 집단 전체를 향한 듯했다. 그제야 그녀, 도로시는 청년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바라볼 수 있었다.


 잿빛. 머리부터 눈까지, 딱 그 색 하나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덥수룩한 머리 아래에 있는 두 눈은 좋게도 나쁘게도 좀 멍한 느낌이라 이질감이 느껴진다.


 둥그런 두 귀는, 전형적인 우르수스 인의 특징이다. 하지만 말투를 보니 강한 용문식 억양이 묻어난다. 그렇다면 용문 출신이란 걸까.


 불량스러워 보이는 말투, 마찬가지로 불량스러워 보이는 외모, 거기에 칼자국 여러 개 난 팔뚝.


 외견으로 보이는 모든 점이 뒷골목 불량배라는 답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도로시는 신기하게도 이 청년이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닐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건 어쩌면 청년이 두르고 있는, 분위기에 맞지 않는 병아리 무늬의 앞치마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가씨.”


 “으, 으응?”


 언제 자리를 떴던 걸까.


 어느새 청년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뭔가를 들고 서 있었다. 그의 눈빛에서 난감함이 더욱 짙어졌다.


 “어이구, 이거 정신줄을 자꾸 놓으시네. 일단 이거로 허기라도 좀 달래고 계십쇼. 급하게 먹지 말고, 천천히. 아시겠슴까?”


 “고마워. 하지만 나 여기 직원도 아닌데…….”


 “뭐 직원 배는 고프고 직원 아닌 사람 배는 안 고픕니까. 드시기나 하십쇼. 제때 안 먹고 그러는 것도 다 죕니다, 죄.”


 묘하게 투덜거리는 투로 청년은 그릇을 내려놓은 뒤 돌아갔다. 주방으로 가는 듯했다. 아무래도 여기가 식당인 듯했다. 하지만 도로시는 주변을 둘러볼 여력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분명 환각이라고만 생각했던 향기의 정체가 그녀 앞에 놓여 있었으니 말이다.


 “닭고기 수프…….”


 그녀 앞에 놓인 건 닭고기 수프 한 그릇. 위에 채썬 야채가 조금 올려져 있고, 진하고 담백한 풍미가 물씬 코를 자극하고 있었다.


 투명한 황금빛의 국물. 어찌나 깨끗한지 그릇 바닥이 비쳐 보일 정도였다. 기름기도 없이 투명한 수프는 그 자체만으로도 먹음직스러웠다.


 꿀꺽


 침을 삼켰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그녀의 손엔 숟가락이 들린 상태.


 조심조심 한 숟갈 떠서 입으로 가져가니, 며칠 만에 들어오는 음식이라 그런지 혀와 위장이 요동을 치는 듯했다.


 “맛있어……!”


 그리고 터져 나오는 탄성. 애써 억누른 건, 그나마 여기가 제 연구실이 아닌 낯선 환경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정말 맛있다. 공복감을 제쳐 놓고 객관적으로 평가해도, 그녀가 지금껏 먹은 음식 중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맛있었다. 수프의 맛은 맑은 국물과 대비될 정도로 진해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분명 국물 위에 기름기 하나도 안 보이는데 어쩜 이렇게 진한 맛이 나는 걸까.


 “하아…….”


 다시 한 숟갈 더, 다시.


 점차 빨라지는 숟가락은 순식간에 그릇 바닥을 긁었고, 수프 한 그릇을 단 몇 분 만에 싹싹 긁어먹은 도로시는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정말 맛있다…….”


 빵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려는 찰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얻어먹는 주제에 바라는 것도 많다고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이다.


 며칠 전에 여기 온 뒤로 바로 연구실에 틀어박힌지라 도로시는 이곳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었다. 몇 가지 아는 거라곤 사일런스와 조이스(여기선 프틸롭시스라는 코드네임으로 불린다던가)가 여기 소속이고, 이번에 자신의 실험이 불러일으킨 사건에 이 로도스 아일랜드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가 어디건 돈이나 그에 준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수중엔 그다지 값나가는 물건 따윈 없었다. 물론 돈도. 애초에 가난하기도 했고 여기 올 때는 달랑 몸뚱이 하나에 기본적인 실험 도구만 가져온지라 문자 그대로 빈털터리였다.


 “…나가서 조이스나 사일런스 씨부터 찾아야겠어. 바로 떠난다는 소식은 없었으니까, 어쩌면 엘레나도 여기에 있을 거고…….”


 필요한 게 돈이든 정보든 일단 그녀들을 만나야 뭐라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또다시 풍겨오는 어떤 향기가 그녀의 코를 사로잡았다.


 “이 냄새는……?”


 닭고기 수프의 냄새, 같으면서도 조금 다른 냄새. 알싸하면서도 매콤한, 그리고 여러 냄새가 섞인 듯한. 냄새로 노래하는 칸타타(cantata, 짧은 오라토리오 형식의 성악곡)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이 냄새를 알아. 이 향기를. 뭘까? 분명히 아는 음식의 냄샌데.


 그냥 닭고기 수프도 맛있었는데, 여기에 더 추가한 거면 대체 얼마나 맛있는 걸까?


 꿀꺽


 도로시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마악 일어서려는 그녀의 몸에서 스르르 긴장이 풀렸다. 밖으로 나가려던 발걸음엔 망설임이 서렸고, 눈은 자꾸 주방 쪽으로 향했다. 뭉근하게 풍겨오는 향기와 이따금 들려오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마치 그녀를 오라고 유혹하는 듯했다.


 “가, 감사 인사를 하지 않으면.”


 그녀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괜히 들으라는 듯 부러 좀 크게 말했다.


 “얻어먹고 그냥 가기도 좀 그러니까.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조금이라도 도와줘야 마음이라도 편할 테고…….”


 돈이 없으니 노동으로 때운다는 아주 단순한 발상. 물론 자신의 연구 분야인 오리지늄 응용 기술과는 달리 요리엔 전혀 문외한이지만, 적어도 그릇 정리나 설거지 정돈 도울 수 있으리라.


 그러니 절대로 호기심이 들어서 가보는 건 아니다.


 혹시 조금이라도 더 먹을 수 있을까 궁금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응. 정말 아냐.


 주방 쪽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밖을 향했을 때보다 한결 가벼웠다.




***




 “저기…….”


 주방에 들어오고서 도로시를 놀라게 한 점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생각 이상으로 이곳의 주방이 넓다는 것이요, 나머지 하나는 그 넓은 주방에서 이 청년 혼자서 왔다 갔다하며 조리를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네? 어이구, 많이 시장하시죠. 이제 내갑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그게 아니라 뭔가 도울 게 없나 싶어서……. 됐다. 청년이 워낙에 핵심부터 짚고 들어오는지라 도로시는 애써 준비한 변명도 못 꺼낸 채 엉거주춤 주방으로 들어왔다. 냄새에 끌린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대체 이런 먹음직스러운 향기를 내는 음식이 뭔지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기도 했다.


 “미안, 냄새가 너무 좋아서…….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더라. 여기 들어와도 돼?”


 “안될 거 뭐 있겠슴까. 어디……. 좋아, 다 됐슴다. 아가씨, 오신 김에 거기 빵도 좀 같이 들고 와주세요.”


 “응? 아아, 응. 알겠어. 혹시 내가 도울 일 더 없을까? 설거지라도…….”


 “아직 아침 식사도 하기 전인데 무슨 설거짐까. 그런 거 생각 마시고 그냥 맛있게 드셔주십쇼.”


 “하지만 이렇게 계속 얻어먹기만 하는데…….”


 “정 그러심 이거 드시고 감상 좀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어음, 제 입으로 말하긴 부끄러운데 이번 거 꽤 자신작이란 말임다. 근데 오늘 처음 내보이는 거라 좀 떨려서.”


 그렇게 말하고선 청년은 쑥쓰러운 듯 볼을 긁적였다.


 “그 뭐냐, 아가씨는 딱 봐도 기품이 넘치시는 게 좋은 음식 많이 드셔보셨을 거 같고, 이런 거 맛 평가도 능숙하실 거 같단 말임다. 그래서 내놓기 전에 감상평 들려주심 엄청 고마울 것 같슴다.”


 “어…….”


 기품이 넘쳐? 내가?


 좋은 음식도 많이 먹어봤을 거 같다고?


 글쎄, 겉모습만 보면 그럴 수도 있다. 본인이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도로시의 외모나 차림새만 본다면 아주 저명하고 젊고 아름답기까지 한 미녀 과학자였으니 말이다. 청년이 그리 착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지 않던가.


 제 외모가 귀족 아가씨와 비슷한지 아닌지는 제쳐두고, 라인 랩의 주임이라는 높은 위치가 무색하게 그녀는 늘 생활고에 시달리는 생활을 했다. 주임으로서 급여가 결코 적은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을 남을 위해 쓰는 터라 그녀 수중에 남는 돈은 몇 푼 되지 않았다.


 당연히 고급스러운 음식을 자주 먹었을 리 없었다. 기껏해야 편의점 도시락이나 레토르트 식품 정도려나.


 그러나 도로시는 기대에 찬 눈으로 자길 바라보는 청년을 무시할 수 없었다. 뭔가 발을 빼기도 그랬고, 무엇보다 솔직히 말해 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로 괜찮다면 얼마든지.”


 그래서 그녀는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고급 음식……. 뭐 가끔 있던 라인 랩 주최 연회에서 안 먹어본 것도 아니니 괜찮을 거라며 애써 속으로 변명하면서 말이다. 청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자자, 음식 식겠슴다. 어서 나가서 먹죠. 빵 먼저 들고 가주세요. 제가 한그릇 듬뿍 떠서 가지고 가겠슴다.”


 “으응.”


 결국 도로시는 그의 말대로 빵이 가득 담긴 바구니 하나 들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에이, 기왕 엎질러진 물. 얼굴에 철판 좀 깔고 가만히 앉아 있자니 곧 청년이 쟁반에 그릇 두 개를 들고 와서 그녀 앞에 앉았다.


 “아, 카레구나.”


 도로시는 반갑다는 듯 말했다. 이 정도면 먹어본 적 있지. 그런데 그녀가 알고 있는 카레와는 좀 많이 다른 모양새였다.


 “그런데 국물이 좀 많네? 그다지 걸쭉하지도 않고……. 게다가 색도 진해. 이게 뭐야?”


 “약선 카레 수프라는 검다. 아까 드셨던 닭고기 스프를 베이스로 해서, 강황 가루랑 여러 향신료를 넣어 푹 끓인 수프에요. 야채며 고기도 듬뿍 넣어서 푹 삶은 터라 국물이 아주 진할 겁니다.”


 “와아…….”


 그녀는 감탄하는 눈빛으로 제 앞에 있는 그릇을 내려다봤다.


 우선 큼직한 닭다리 하나. 거기에 국물에 녹아든 연근과 죽순, 동글동글한 완자에 고명으로 얹은 숙주며 셀러리까지. 겉으로 보기에도 그 정돈데 속에는 얼마나 많은 건더기가 있을지 기대까지 될 정도였다. 보통 이렇게 진하고 복합적인 냄새를 풍긴다면 가까이서 거부감이 들 법도 한데, 신기하게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깔끔했다.


 “취향 따라 고수도 얹어 드시면 됨다. 빵 찍어드셔도 되구요. 빵도 강황 가루 넣어서 만든 거라 잘 어울릴 거 같긴 한데…….”


 “그럼 일단은 그냥 먹어보고, 다음에 고수 얹어 먹어보고, 그 다음에 빵 찍어먹어봐도 될까?”


 도로시는 그냥 해본 말이었지만 청년은 감탄하는 눈빛이었다.


 “역시 배우신 분은 뭔가 달라도 다르네요. 감동임다, 그렇게 세세하게 순서도 정해서 평가해주신다니. 전 그냥 먹을 생각밖에 안 했는데.”


 “아, 아하하……. 뭐 이 정도쯤이야.”


 거짓말은 눈덩이와 같아서 하면 할수록 커진다고 하던가. 도로시는 진실이 이제 저만치 손에 닿을 수 없는 거리까지 가버린 것 같아 서글펐다. 그러면서도 이 약선 수프 카레라는 음식에 호기심이 동해 숟가락을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잘 먹을게.”


 “예에, 부디.”


 참으로 묘한 일 아닌가. 온 지 며칠도 채 되지 않은 곳에서 배고파서 쓰러져 있다가, 이름도 모르는 청년에게 구조(?)되서 밥 한 끼 얻어먹고 있다니. 심지어 어떻게 하다 보니 뭔가 관계가 역전돼서 이쪽이 음식 평가를 내려주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배만 좀 덜 고팠어도 분명 도로시는 웃음을 터뜨렸으리라.


 뭐부터 먹을까, 그래. 우선은 계속 신경 쓰이던 완자부터 먹어봐야지.


 그녀는 완자와 함께 국물을 듬뿍 떠서 입가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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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는 에미야 가의 오늘의 밥상

제이기사 쓰다가 대가리와 함께 멘탈도 터져서 한번 써봅니다

도로시는 약선 카레 수프로 시작

소소하게 음식 먹으면서 힐링?하는 그런 에피소드 단편?이 될 듯합니다?

저도 몰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