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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시각, 조피아 저택.


 “카메라 몇 대 더 가져 와. 나중에 교보재로 쓸 거니까, 제대로 찍어 두고.”


 “네, 아가씨.”


 “제이는? 또 주방에 있다니?”


 “아, 잠깐 가게에 볼일이 생겨서 다녀오신다고……. 그래도 결투 전까진 돌아오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래? 알겠어. 일 봐. 세팅 다 되면 말해주고.”


 불벼락이 떨어질 줄 알고 잔뜩 움츠려 있던 하인의 얼굴이 어리벙벙해졌다. 예상했던 불벼락은커녕 태도가 너무 평온해서, 이게 제가 모시는 조피아 아가씨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뭐 잘못 드신 건가, 아니면 하룻밤 새에 심신에 대격변이라도 일어나신 건가…….


 “…네, 아가씨. 필요한 거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그런 생각이 안 든 것도 아니지만, 이미 그 생각이 들 때쯤 하인은 몸을 뒤로 빼고 있었다. 호기심은 호기심이고 일단 살고 봐야 했다. 그는 방금 지옥불 구덩이에 머릴 디밀었다가 나왔다는 걸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


 그런 하인의 등을 보며 조피아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정확히는 시선만 그쪽을 향해 있지, 정신은 온통 딴 데로 옮겨 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제 머릿속에 떠오른 그 바보같이 얼룩덜룩한 얼굴을 짓뭉개며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넌 진짜 마지막까지 내 말을 듣는 법이 없구나.”


 내쉬는 한숨 사이로 새어 나오는 마음속 생각. 물론 당사자는 앞에 없고, 듣는 이도 없었다. 하지만 그러기에 답답한 속내를 내뱉을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언제고 결판은 내야 했어. 그게 오늘이 됐을 뿐이고.”


 뱉어놓고 보니 스스로가 들어 봐도 변명 같았지만, 그녀는 애써 무시했다. 사실 당장 달려가서 그놈의 멱살이라도 잡고 끌고 오고 싶은 생각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아무리 제이 녀석의 행동이 못마땅하다 쳐도, 어쨌든 녀석도 반 사람 몫이긴 하나 경기 기사지 않던가.


 “…난 널 제 컨디션 하나 조절 못 하는 녀석으로 가르친 적 없어, 제이.”


 그러니 다그치지 않는다. 컨디션 관리의 중요성은 그동안 누누이 말해왔다. 오늘처럼 중요한 날에 그걸 제멋대로 어기면, 그 녀석은 고작 거기까지밖에 안 되는 그릇이란 뜻이었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제이가 결투 시간에 늦기라도 하면 조피아는 아예 저택 문을 닫아 잠가버릴 셈이었다.


 “…….”


 뭐 하는 거람, 진짜.


 조피아는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평정심을 유지한다고 하긴 했는데, 오히려 컨디션 하나 조절하지 못하는 건 자신 쪽인 모양이었다. 가뜩이나 심란하던 기분이 더 심란해진 건 덤이었다.


 재대결. 못다 끝낸 그때의 결투.


 [뽑으십쇼! 아직 안 끝났슴다! 아직 안 끝났다고!]


 피칠갑이 된 채 울부짖던 제이의 모습이 눈이 선했다. 그게 본인의 능력을 넘어서는 신념을 가진 사람의 말로였다. 그게 한 번만 그러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늘 이길 수 있을 리는 없다. 그건 카시미어의 그 어떤 경기 기사를 데려다 놔도 불가능한 일이다.


 곧으면 언젠가 휘어지고, 단단하면 언젠가 부서진다. 그게 세상의 이치였다. 그녀는 제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능력이 뛰어난, 어쩌면 조금 독특한 부류의 싸움꾼일 뿐이었다.


 그 역시 언젠가 반드시 패배할 터.


 그리고 상대가 항상 친절하란 법은 없었다. 시합에서 패배한 기사를 내버려 두는 건 어디까지나 자비라는 이름의 쇼맨십에 불과했다. 가령 ‘녹슨 구리의 기사’ 같은 잔혹한 놈은 그런 상대를 철저하게 짓이기는 걸 즐기는 인간 말종 같은 부류였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항전하다가 피투성이로 짓이겨지는 제이의 모습을 그리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승리, 명예, 재물, 그리고 인기.


 이유가 뭐가 됐든, 경기장엔 사람을 홀리는 어둠이 있었다. 없는 힘을 짜내서 칼을 휘두르게 하고, 점잖은 기사도 악귀나찰처럼 변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그 혼돈의 구렁텅이 속에서 제이의 모습은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이기만 했다.


 카시미어의 기사 경기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그 모든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거나, 어느 정도 어둠과 타협하거나. 전자는 멀리 갈 것도 없이 ‘빛의 기사’ 마가렛 니어라는 좋은 예가 있었고, 후자는……. 그것 역시 멀리 갈 필요 없이 대부분의 경기 기사들이 그 예시일 터였다.


 “…마가렛. 이럴 때 넌 대체 어디 있는 거니?”


 그 빛을 동경한 적이 있었다. 동경했기에 그녀와 같은 무대에 서고 싶었다. 비록 자신의 힘이 그녀에게 미치지 못할지라도, 그저 동경하는 이와 같은 무대에서, 같은 풍경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조피아는 지금보다도 젊고 열정이 넘쳤고, 제 신념을 믿었고…….


 그렇기에 패배했다.


 밝게 타올랐다가 스러지는 촛불의 빛과도 같은, 찬란한 패배.


 누군가는 아쉽다고 했고, 누군가는 적당할 때 솜씨 좋게 은퇴한다고 했다. 그녀의 부상마저도 잘 짜인 연극이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나돌았다. 그 어떤 관심과 조롱에도 그녀는 침묵했다.


 분했으니까.


 스스로에게 화가 났으니까.


 한번 꺾였다고 해서 주저앉아버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고, 마리아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미안했다. 


 실력이 제 신념을 따라가지 못하면 꺾이고 만다. 그녀는 그걸 몸소 체득했다. 몸에 새겨진 교훈은 지금까지도 아플 정도로 절절하게 남아 있었다.


 제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녀는 두려웠다.


 그 착한 청년이 카시미어에 실망할까 봐, 이 도시의 어둠에 삼켜질까 봐.


 …자신과 똑같은 꼴을 당할까 봐, 두려웠다.


 “…차라리 어제 냉큼 그 기사단에 입단하겠다고 했으면 마음이라도 편했겠네.”


 에슈베리아 기사단 같은 대규모 기사단에 들어가면 적어도 목숨이 위태롭거나 어디 하나 크게 다칠 경기 따윈 맞닥뜨리지 않을 터였다. 기사단에 입단한 순간부터 녀석은 기업의 소중한 전광판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결국 기사도 뒷배가 든든해야 안전을 보장받는 법이었다.


 만약 에슈베리아 기사단에 들어간다면 경기장 대신 주방 같은 곳에 서겠지, 아마. 한 손에 커다란 생선을 들고 카메라를 향해 그 특유의 수줍은 미소를 지을 거다. 어쩌면 쇼핑하는 날에 녀석의 홍보하는 어묵탕 밀키트 따위를 볼 수도 있을 거고.


 그런 걸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사실 녀석의 요리 솜씨는 수준급이다. 굳이 경기 기사라는 험한 길을 택하지 않더라도, 돈을 버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차라리 음식점을 차리는 게 나을 정도로. 아니 잠깐만. 나쁘지 않은데? 솔직히 꽤 괜찮은 투자처잖아. 초기에 바짝 투자하고 나중에 회수한다면 순이익이 꽤…….


 특유의 투자 기질이 발동한 건지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빠릿하게 돌아간다. 녀석의 전망도 나쁘지 않고 흐름도 타고 있는 상태다. 뭐, 인정하긴 싫지만 묘하게 매력적인 부분이 있기도 하고. 여기서 기사단에 들어가 작호까지 받게 된다면 그야말로 제트 추진기라도 단 것처럼 무지막지한 속도로 성장하겠지. 


 “…풋.”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도, 조피아는 이내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안 된다.


 역시,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


 그런 장면을 상상하는 건 쉬운데, 왜 정작 마지막에 떠오르는 건 피투성이가 된 채로도 꿋꿋하게 서 있는 그 녀석의 모습인 걸까.


 “…하아.”


 그래, 이게 문제였다. 조피아는 없던 두통까지 생긴 것만 같아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녀는 제이가 기사로 자신을 증명하길 바랐다. 동시에 그가 기사 따윈 때려치고 다른 길을 찾기도 원했다. 전자는 그를 가르친 교관으로서의 마음이요, 후자는 그녀 개인으로서의 마음이었다. 양립할 수 없는 두 마음은 그냥 헝클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박사.


 로도스 아일랜드의 지휘관이라는 사람. 제약회사인지 민간군사기업인지 얘기만 들으면 대체 뭘 하는 곳에서 뭘 하는 인물인지 도통 감이 안 잡히는 사람. 그리고 제이라는 청년을 밑도 끝도 없이 여기 카시미어로 보낸 사람.


 대체 그가 뭐길래 제이는 이렇게까지 위험한 곳에 발을 들이미는 걸까.


 조피아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마리아와 마가렛을 위해서라면 자기도 목숨을 걸 각오 정돈 있지만, 적어도 그들은 피와 인연으로 이어진 가족이지 않던가. 그에 비해 제이와 박사의 관계는 잘 쳐줘야 상관과 부하 정도였다. 굳이 덧붙여봤자 신뢰할 수 있는 동료였고. 한마디로 타지에서 목숨을 걸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적어도 조피아의 생각으론 그랬다.


 아주 고약한 사기꾼, 그렇지 않으면 정말 이 테라에서 보기 흔치 않은 성인군자. 제이의 후자에 가깝게 묘사하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조피아가 느끼는 건 전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것도 아주 질이 나쁜 종류의.


 그는 얼굴도 모습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와 제이 사이에 있어 늘 풀리지 않는 앙금처럼 남아 있었다.


 그것 역시 그 ‘박사’라는 사람의 의도라면. 일부러 저를 나쁘게 보이려고 제이에게 많은 정보도 알려주지 않은 채 무작정 보낸 거라면.


 “…설마.”


 “뭐가 설마야?”


 “!”


 혼자만의 세계가 너무 과했던 걸까,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도 까맣게 잊을 정도라니. 


 “혹시 오빠가 제시간에 안 올까 봐 걱정하는 거야?”


 마리아.


 작업복 차림의 그녀의 손엔 검과 갑옷이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