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넌스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몽롱해, 제대로 된 생각이 되지 않았다. 머리 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기분은 몽롱했고, 몸을 감싸는 부유감은 현실감이 없었다.


  이대로 조금만 힘을 빼도, 저항할 수 없는 몸이 바닥 없는 밑으로 한없이 추락할 것 같았다. 평소였다면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도 모자랐지만, 페넌스는 기묘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분명 가만히 누워 있는데도 정처 없이 흔들리는 감각은 신기하면서도 재밌었다. 크흐, 하며 페넌스는 웃음 섞인 날숨을 내뱉었다.


  꿈을 꾸고 있다는 자각을 하고 있었지만, 몸은 생각보다 자유롭게 움직였다. 몽롱한 정신에 몸을 가누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자각몽이라는 걸까? 신기한 기분이야. 페넌스는 눈을 감은 채 몸에서 힘을 뺐다. 


  온 몸에 힘을 빼니, 분명히 움직이지 않을 몸이 회전하는 것만 같은 감각이 들었다. 이유 모를 어지러움이 머리 속을 희미하게 돌아다녔지만, 균형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잠에 취해서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페넌스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고작 그렇게 했을 뿐이었는데, 수십 미터는 떨어진 것처럼 몸이 들썩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역시 꿈 속이라 그런가, 감각도 영 현실감이 없었다. 한없이 밑으로 추락할 것 같음에도, 불안하기는 커녕 편안했다.


  하지만,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건 그녀가 잠에 들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페넌스는 자신이 언제 잠에 들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업무를 보다 깜빡 잠들었나? 눈을 감은 채로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떠오르진 않았다. 꿈을 꾸고 있어, 의식마저 희미해진 듯 했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느끼고 있는지 정도는 자각할 수 있었다.


  온 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떨어지고 있다고 끝 없는 부유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정작 페넌스의 몸은 추락하고 있기는 커녕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푹신하게 몸을 감싸는 이불과 침대의 감각이 편안하면서 익숙했다. 최근에 얼마나 바쁘게 지냈으면, 꿈에서 마저 항상 누워서 잠 자는 침대에 누워 있는 건지. 페넌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웃을 때 마다 가슴이 답답했다.


  페넌스는 눈을 떴다. 희미하게 초점이 맞지 않는 시야였지만, 꿈 속의 풍경을 구별하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꿈 속이라 그런가, 뚝뚝 끊기는 시야가 살짝 어지러웠다. 꿈 속이긴 했지만, 눈에 비치는 것은 변함 없는 그녀의 방이었다. 


  반쯤 감은 시야로 주변을 둘러본 페넌스는 답답한 가슴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얼마나 상상력 없는 꿈인지. 자신의 빈약한 상상력에 진심으로 한탄했다.


  꿈이라고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익숙한 광경 밖에 없었다. 


  꿈은 자고 있는 사이 뇌의 일부가 기억이나 정보를 무작위로 나열할 뿐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꿈 속인데 항상 보이는 것 밖에 없으니 페넌스는 실망스러웠다. 정말로 무엇 하나 바뀐 게 없었다. 주변의 풍경은 그녀의 방이었고, 침대 역시 그녀가 항상 누워 자는 침대와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희미한 시야에 비치는 가구와 물건의 배치마저 그대로라, 꿈이라고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유일하게 다른 게 하나 있었다면. 


  눈 앞에, 레온이 누워 있는 것 정도?


  페넌스가 시선을 조금 옆으로 돌리자, 그녀와 함께 누워 있는 레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을테지만, 페넌스는 그러지 않았다. 레온이었으니까.


  레온은 이불도 덮지 않은 채 팔로 베개를 만들어 그녀의 앞에 누워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페넌스의 앞머리를 넘겼다. 자는 사이에 앞머리가 눈을 찌르지 않게 걱정해주는 걸까. 고작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마저 조심스럽다. 그녀가 깨지 않도록 배려하는 듯, 작은 소리조차 내지 않으려고 천천히 움직이는 그의 모습이 귀여웠다. 


  딱히 꿈에서까지 그를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페넌스는 심각하리만큼 빈약한 꿈 속의 상상력에 한탄했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페넌스는 조금 더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래봤자 몽롱한 기분에 취해, 겨우 반 정도 뜨는 것이 고작이었다. 


  반쯤 뜬 페넌스의 눈동자와 레온의 눈이 마주쳤다. 이제는 레온 역시 페넌스가 눈을 뜬 것을 알아차렸다. 보름달은 닮은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커지고, 그의 표정이 급격하게 변했다. 평온하게 미소 짓고 있던 그의 얼굴 속 평정이 한번에 무너지고, 새하얗던 그의 얼굴에 순식간에 붉음이 퍼져 나갔다.


  그리곤 당황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레온은 외쳤다.


"...미안!"


  페넌스의 앞에 누워 있었다는 것을 들킨 수치 때문일까, 레온은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도망치듯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다.


  그가 도망치는 것 보다, 페넌스가 그의 옷자락을 잡는 것이 빨랐다. 옷자락을 잡힌 레온은 힘으로 뿌리치려 했지만,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페넌스의 몸이 끌려 침대에서 떨어질 것 같자 그는 움직임을 멈췄다. 도망치지 못한 레온은 얼굴을 붉힌 채 페넌스에게 잡혔다.


"괜찮으니까 누워요."


  페넌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저렇게까지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는데. 


  만약 눈 앞의 그가 진짜 레온이었다면, 페넌스는 떠나는 그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주며 다시 잠에 들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페넌스는 구태여 레온을 잡았다. 갑자기 나타난 레온의 존재 덕분에,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기분 좋게 흔들거리는 시야도 그렇고, 갑자기 자기 방 안에 나타난 레온의 존재가 꿈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됐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레온은 밤 중에 남의 침실에 쳐들어올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평소에도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다. 비록 진짜 그에겐 해줄 수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꿈 속의 그에게라도 말하며 풀고 싶었다.


  그래서 페넌스는 꿈 속의 레온을 잡았다.


". ...오랜만에 같이 잘까요?"


  하지만 기왕 꿈 속에서 만났으니, 좀 더 귀여웠으면 좋았을걸. 평소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은 꿈 속 레온의 모습에 가볍게 실망했지만,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눈 앞의 그를 잡아둔 채, 페넌스는 속삭이듯 말했다. 평소였다면 겨우 들릴까 말까한 작고 조곤조곤한 목소리였지만, 오직 둘 밖에 없는 이 방에서는 그 목소리마저 선명하게 레온의 귓가를 울렸다.


"...괜찮아?"


  꿈 속의 레온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지금의 그와 똑같았다. 좀 더 어렸을 때의 목소리여도 좋았는데. 페넌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옷자락을 잡힌 그는 도망치는 것을 포기한 듯 다시 침대에 걸터 앉았다. 하지만 얼굴은 아직 붉었다. 그가 부끄러워 하는 모습을 보니, 어릴 때의 그를 보는 것 같아 귀여웠다. 페넌스는 레온을 보며 히죽 웃었다.


"그럼요. 우리 사이잖아요."


"....그게 아니라...."


  레온은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소한 손짓 하나마저도 꿈 속의 레온은 놀랍도록 평소의 그와 똑같았다. 꿈은 기억의 재현이라곤 하지만, 이렇게까지 똑같을 필요는 없었는데. 페넌스는 레온의 옷자락을 꼬집듯 만지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온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다시 침대에 누웠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겹쳤다. 레온은 다시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페넌스는 레온의 볼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웠다. 예전에는 자주 이렇게 볼을 쓰다 듬어 주곤 했는데.


  페넌스는 아쉽다는 듯, 작게 미소를 흘렸다. 


"예전에는 자주 이렇게 같이 자곤 했는데 말이에요."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땐 어렸잖아."


  레온은 여전히 시선을 맞춰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꿈 속이니까, 좀 더 어리광을 부려줬으면 좋았을 걸. 페넌스는 그의 볼을 쓰다듬으며 가볍게 투정을 부렸다.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꽤 신선한 기분이었다.


"그쵸. 어른이 된 후엔, 한번도 이렇게 같이 잔 적이 없었죠."


"그거야...."


  레온은 말 끝을 삼켰다. 부끄러움에 붉게 물들었던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의 얼굴을 가득 칠하고 있던 부끄러움은 순식간에 사라진 채, 진지함과 후회가 그의 얼굴을 덮었다. 레온은 결국 자신의 입 속을 맴돌던 말을 끝내 내뱉지 못했다. 결국 레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페넌스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었다.


  나이가 찬 남녀라는 문제를 떠나, 시라쿠사의 판사 라비니아 팔코네는 벨로네 패밀리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그 덕분에 그녀는 여타 판사들에 비하면 훨씬 공명정대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내릴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벨로네의 개'라는 소리를 항상 듣고 살았다. 


  그녀가 벨로네 패밀리의 비호를 받고 있는것만으로도 이런 저런 소리가 나오는데, 만약 그녀가 레온과 같은 곳에서 잠을 잤다는 사실이 단 한번이라도 퍼졌다면? 


  물론 라비니아의 신변에는 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테지만, 판사 라비니아에겐 벨로네의 개 말고도 또 하나의 꼬리표가 붙을 게 틀림 없었다. 레온은 그걸 배려해, 성인이 된 후에는 거리를 벌렸을 지도 '모른다.'


  모른다, 라고 페넌스가 구태여 레온의 생각을 추측하다 만 것은 이 곳이 꿈 속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눈 앞의 그는 꿈 속의 레온이니까, 아무리 그와 똑같이 행동해도 결국 페넌스가 생각하는 레온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물론 꿈 속의 허상이라고 믿기지 않을만큼 평소의 그와 똑같은 그의 행동은 아무리 다시 곱씹어봐도 그다운 행동이었지만, 그렇기에 마음 속 한 켠이 씁쓸했다. 


  별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꿈 속의 그마저도 어른스럽게 보일 정도로, 나는 이미 레온을 어른이라고 생각하는구나. 당연한 그 사실에 기뻐해야 한다는 걸. 훌륭한 어른이 된 레온을 칭찬해야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페넌스는 가슴 한 켠을 차지하는 섭섭함을 감출 수 없었다.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시라쿠사를 떠나 로도스에 온 이후로. ...아니. 그녀가 '판사 라비니아'가 된 이후부터 두 사람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어른이 되어 있었고, 누나와 동생처럼 웃으며 허물 없이 지내던 시간 역시 이미 머나먼 과거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린 레온을, 더 이상 어린아이 취급할 수 없었다. 


"그렇죠. 우린 어른이죠."


  하지만, 페넌스는 레온을 끌어 안았다.


"그래도, 가끔은 누나한테 어리광 부려줄래요?"


"잠..."


  파묻힌 레온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퍼졌다. 그가 버둥거리는 탓에 끌어안기 힘들었다. 하지만, 결국 페넌스의 가슴에 파묻힌 레온은 저항을 포기한 듯 축 늘어졌다. 조심스럽게, 페넌스의 등으로 향하는 손길이 겁을 먹은 것처럼 느렸다.


"......"


  페넌스의 품에 파묻힌 레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내쉬는 숨결이 뜨거웠다. 꿈이라지만, 너무 부끄러운 짓을 했나. 얼굴에 열이 차오르는 것 같아, 페넌스는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포옹을 풀지는 않았다. 자기가 왜 이러고 있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어릴 때의 레온에게도 이렇게까지 장난을 치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현실의 레온에게는 절대로 이렇게 응석을 부릴 수는 없다. 그치만 여기는 꿈 속이니까. 꿈 속이라면, 마음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 여기는 내 꿈 속이니까.


"....라비 누나. ...숨막혀."


"네. 누나랍니다."


  꿈 속의 레온은 착실하게 그녀의 바람대로 움직였다. 체념한 것 같은 목소리긴 했지만, 레온은 예전처럼 그녀를 누나라고 불렀다. 옛날 생각이 나, 페넌스는 품 속에 안긴 레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품 속의 그는 예전 추억 속의 그 모습보다 훨씬 컸다. 가장 기억에 남는 레온은 자기가 무릎을 굽혀야 겨우 눈높이가 맞았는데, 지금은 그녀가 훨씬 작아 지금도 그를 껴안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 안겨 있는 것 같았다. 품 속에 안긴 그의 몸은 단단했고, 어릴 때의 모습과는 달리 떡 벌어져 남자다웠다. 


  꿈 속이라서... 아니, 평소에도 알고 있었다. 지금의 레온은 이렇게나 멋진 어른이 되었고, 어른이 되어버린 그를 어느센가 페넌스는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페넌스는 한번도 이를 밖으로 티 낸 적이 없었다. 훌쩍 커버린 그가 멋있다고 생각했고, 그를 이성으로 바라봐버린 순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페넌스는 끝까지 레온의 곁에서 누나로 남고자 했다.


  그녀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건, 레온은 끝까지 그녀를 누나로 취급할테니까. 그가 더 이상 가족에게 실망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니, 이렇게 꿈 속에서라도 해소하는 수 밖에.


"정말. 레온도 훌륭하게 자라줬네요. 어느세 훌쩍 자라선, 이렇게나 훌륭한 어른이 되고..."


"언제까지고 어린애 취급 하지 마."


  레온은 불만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강제로 끌어 안겨진 터라, 시선은 페넌스가 좀 더 위였다. 시선의 방향은 분명 기억 속의 레온과 같았지만, 눈에 비치는 모습은 전혀 달랐다. 생각해보면, 어른이 된 이후로 레온의 얼굴을 이렇게 자세히 본 적은 없었다.


  제대로 눈이 마주치자, 페넌스는 가슴이 뛰었다. 언제까지고 어릴 때의 모습일거라 생각했던 그의 얼굴은 페넌스의 기억 속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 레온은 언제나 어린아이였다. 그가 어릴 때 처음 만날 때도, 패밀리의 후계자가 된 후에도, 그리고 시라쿠사에서 벌어진 일들로 이런저런 논쟁을 벌일 때도. 그녀는 분명 레온을 어릴 때의 그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 보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밖에 보지 않으려 했다.


  지금의 그를 억지로라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가끔씩, 자기보다 커버린 그를 바라볼 때면 페넌스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그렇구나. 나는....


"싫어요."


  페넌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 사이 포옹이 약해지자 레온은 페넌스의 품을 탈출해 그녀의 옆에 앉았다. 페넌스 역시 몸을 일으켜 그의 옆에 앉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평소에 입던 잠옷이 아니라 항상 입던 정장차림이었다. 이래서 가슴이 답답했구나. 페넌스는 억지로 자신의 가슴을 억누르고 있던 와이셔츠를 잡아 뜯었다. 거칠게 뜯겨나간 와이셔츠의 단추가 침대와 바닥에 사정 없이 튀었다.


"무...무슨 짓이야!"


  페넌스가 이제야 숨쉬기가 편해져 깊게 날숨을 내쉬고 있자, 얼굴을 붉힌 레온이 황급히 그녀의 뜯어진 와이셔츠를 다시 여맸다. 하지만 단추가 전부 뜯껴 나간 와이셔츠가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허망하게 다시 벌어진 틈 사이로, 검은 속옷으로 겨우 가려진 페넌스의 큰 가슴이 드러났다. 레온은 양 눈을 가렸다.


  그 반응이 귀여워 페넌스는 쿡쿡 웃었다. 


"뭐 어때요."


"무슨 헛소리야. 역시 누나 오늘 엄청 취...."


  페넌스는 양 손을 침대에 짚고, 다리를 쭉 펴고 침대 위에 편하게 앉았다. 그리곤 고개를 저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차피 레온은 절 누나로 밖에 안 보잖아요. 누나가 동생 앞에서 옷 대충 입고 있을 수도 있죠."


"....아니라고 하면?"


"네?"


"....누나는.... 아니, 라비니아 당신은 언제나 내 동경이자, 첫사랑이었다고 하면?"


  레온의 얼굴은 진지했다. 붉게 물든 그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 상기됐고, 계속해서 내려가려던 솔직한 시선은 체면을 방패 삼아 계속 위로 올라갔다. 결국 레온은 페넌스와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의 목소리는 한 없이 진지했다.


  웃음기도, 그리고 예전의 어린 모습도 완전히 사라진 진지한 레온의 모습은 성숙한 남성의 매력을 내뿜었다. 목소리, 엄청 낮아졌네요. 페넌스는 제 어깨를 붙잡은 레온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마. 사람이 기껏 진지하게 말하는데...."


  웃음을 터트린 페넌스의 모습에 레온이 짜증을 섞여 화를 냈지만 페넌스는 계속해서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웃었는지, 눈가에 작게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페넌스는 자조하듯 쓰게 웃었다.

  

"아무리 꿈 속이라지만, 너무 멋있어 진거 아닌가요."


  레온의 고백은 기뻤다. 페넌스가 더 이상 레온을 어릴 때의 그 모습으로 볼 수 없게 되었으니 레온 역시 마찬가지였으면 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녀가 레온을 열렬하게 사랑하게 된 것도 아니었고, 그저 남자다워진 그의 모습에 가끔씩 설렘을 느낄 뿐이었다. 


  레온이 그녀를 사랑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의 고백 역시 꿈 속에서 일어난 기분 좋은 일이 불과할 뿐. 그걸 깨달아 페넌스는 웃음을 터트리며 기뻐하고, 아쉬워했다.


"....꿈?"


  레온이 그렇게 되물었다. 아차, 페넌스는 입술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꿈 속의 존재들에게 이 곳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건 안된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는데... 페넌스는 조심스럽게 레온의 눈치를 살폈다.


"하아...."


  하지만 꿈이 깨거나, 갑자기 풍경이 무너지는 꿈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레온은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꿈이란 말이지..."


  어이가 없다는 듯 이죽거리는 미소를 짓던 레온은 이내 페넌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곤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꿈 속의 내가 한 고백에 대한 대답은?"


  페넌스는 잠시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굳이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평소의 그에게는 절대로 할 생각이 없는 말이었지만, 페넌스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꿈 속이니까. 


  그녀는 양 팔을 벌렸다. 그리곤, 레온을 향해 속옷 밖에 입지 않은 자신의 품을 활짝 연 채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일단 안아 줄래요? 레온이 얼마나 어른이 되었는지 알고 싶은데."


  레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페넌스에게 다가갔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페넌스의 몸은 침대에 쓰려졌고, 두 사람은 입술을 겹치며 손을 맞잡았다.


"...라비 누나."


  희미하게 귓가를 맴도는 레온의 목소리가 달콤했다. 페넌스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페넌스는 눈을 떴다. 따사롭게 비치는 아침 햇살이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아침을 선사한다.

  귓가를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소리에 꿈은 신기할 정도로 순식간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고작 몸을 일으키는 그 짧은 시간에 거의 사라져버린 꿈은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찝찝한 잔향만을 남겼다. ...무슨 꿈을 꿨더라?


  무슨 꿈을 꾸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순식간에 날아가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기분 좋은 꿈이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덕에 페넌스는 기묘하게 아침이 개운했다. 속이 지나칠 정도로 허하긴 했지만, 평소에도 과식하는 편은 아니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양팔을 쭉 피며 기지개를 피웠다. 평소에는 채 가시지 않은 피로를 억지로 풀어내려고 기지개를 폈지만 오늘은 달랐다. 어재서인지 피로감은 없었다. 꽤 깊은 잠을 잔 듯했다. 그 탓에, 눈을 뜬 직후에는 평소보다 더 머리가 맑았다.


  침대를 벗어나 아침잠을 쫓을 겸, 샤워실에 들어가 옷을 벗은 페넌스는 문득 항상 입고 있던 잠옷이 아닌 다른 옷을 입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돌아가는 세탁기를 보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페넌스는 알몸으로 샤워실에 들어가 물을 틀었다. 따뜻한 온수가 곧바로 쏟아졌다. 


  물을 맞기 시작한 페넌스는 갑작스럽게 온 몸을 때리는 고통에 작게 몸을 움츠렸다. 온 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뻐근했다. 허리와 등이 아팠고, 어깨도 아팠다. 하지만 가장 뻐근하고 쑤시는 감각이 드는 것은 허벅지, 그리고 좀 더 정확히는 허벅지 안 쪽이었다.


  최근에는 전투에도 잘 나가지 않았는데... 잠을 잘못 잤나? 전혀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에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정말 깔끔하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결국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포기한 페넌스는 마저 샤워를 했다. 중간에, 손목에 희미하게 멍이 든 것 까지 볼 수 있었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기분 좋은 아침이라고 하기엔, 희미한 고통이 마이너스긴 했지만. 그래도 페넌스는 기분 좋게 출근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어제 일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오늘 뭘 해야 할 지는 확실했다. 페넌스는 자신이 항상 근무하는 로도스의 사무실로 출근했다. 


  복도를 지나며, 얼굴을 익힌 직원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가끔은 짧은 안부를 주고 받으며 페넌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허벅지 안 쪽이 쑤셨다. 걷지도 못할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지만, 걸을 때 마다 희미하게 점등하는 고통은 역시 거슬렸다. 그래서 시계를 확인하니 다행히 여유롭게 걸어도 늦지는 않을 것 같았다.


"여, 페넌스."


  그러다 사무실 앞에서, 페넌스는 의외의 인물을 마주했다. 그 인물은 페넌스를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희미한 술냄세가 풍겼다.


  검은 머리카락, 그녀보다 더 큰 키, 그리고 탄탄한 근육이 들어찬 몸과 그녀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뾰족한 검은 고양이 귀. 블레이즈였다. 


"아, 블레이즈씨. 안녕하세요."


  그녀가 어깨를 감싸오자, 뜨거운 열이 근처에 풍겼다. 술냄새와 뒤섞인 알콜향이 그리 달갑지는 않아, 페넌스는 멋쩍게 웃으며 


"어제는 잘 들어갔어?"


"예....? 어제요?"


  페넌스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제 일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평소에 자신은 블레이즈와 접점이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전투를 나갈 때나 마주치는 정도인데 최근엔 전투를 나가는 일도 없었다. 그럼... 무슨 일이 있었지? 또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역시 헛수고였다.


"응? 기억 안 나? 어제 우리 회식했잖아. 너 완전 꽐라가 될 때까지 마시던데."


  페넌스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숙취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 술에 취해도 숙취는 거의 없는 체질이라 그런가...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어제 일이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저녁에 가볍게 식사를 마치곤 분명...


  .....바에서 다같이 회식을...


"아!"


  이제야 기억이 떠오른 페넌스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블레이즈를 가리켰다. 그리곤 이내 블레이즈를 향했던 손가락은 꽉 쥐어진 주먹이 되어 분노를 담아 떨렸다.


"당신...."


"하하 미안 미안. 설마 진짜 그걸 다 마실줄은 몰랐어."


  이제야 기억났다. 회식에 처음 참가한 그녀를 위해 만든 블레이즈의 특제 폭탄주 한 잔을 마신 뒤의 기억이 전부 사라져 있었다. 평소엔 취할때까지 마시지도 않는데, 왜 기억이 나지 않나 했더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필름이 끊겨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원흉은 당연하게도, 폭탄주를 만든 블레이즈였다.


"그치만 나도 몰랐는걸. 나야 항상 놓여 있는 보드카인줄 알고 때려박았는데, 그... 스피리터...스?인가 뭔가 하는 술일줄은 몰랐지!"


  진짜 미안해. 하지만 벌써 박사랑 라파엘라한테 잔뜩 혼났단 말이야. 블레이즈는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면서 그렇게 변명을 덧붙였다. 실제로 블레이즈가 페넌스를 골탕먹이기 위해 폭탄주에 섞었던 술은 박사와 라파엘라가 고생해서 얻어낸 희귀한 술이었던 지라. 그 직후 블레이즈는 필름이 끊겨 쓰러진 페넌스를 뒤로 한 채 두사람에게 먼지가 되도록 털렸다.


"...그래서. 절 방까지 데려다주셨나요?"


  페넌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녀가 눈을 뜬 곳은 회식 장소였던 구내식당이 아니라 그녀의 방이었으니 최소한 누군가가 데려다 준 모양이긴 했다. 블레이즈가 친 장난이 괘씸하긴 했지만, 책임지고 방까지 데려다준 모양이니 그래도 장난으로 넘길 수 있을 정도였다. ...필름이 끊길 정도의 폭탄주를 두 번 다시 만들지 않는다면.


"응? 아니. 내가 아니라, 비질이...."


  블레이즈가 면목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함과 동시에, 블레이즈가 말을 하다 말았다. 그리고 동시에.


"자, 커피."


  향긋한 에스프레소의 향이 코끝을 스쳤다. 작은 잔에 담긴 에스프레소가 아직 따뜻함을 잃지 않은 채 김을 냈고, 그 따뜻한 유리잔을 잡은 손은 그녀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남은 손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귓가에, 다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잘 잤어? 라비 누나."


  비질, 레온은 커피잔을 든 채 싱긋 웃었다. 그는 꺼리낌 없이 페넌스의 어깨에 턱을 기댄 채, 그녀에게 달라 붙었다. 다정하게 속삭이는 그 목소리는, 꿈 속의 레온과 똑같았다. 


  페넌스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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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全編) 링크 :https://arca.live/b/arknights/73544803


예아 반갑소.

 

대강 1만 2천자. 이번에도 더럽게 길게 써졌네.

정말 갑작스럽게 삘이 꽂혀 시작한 비질X페넌스 단편, '자각몽'. 

내용은 정말 별 거 없다. 그저 꽐라가 된 페넌스가 꿈이라 착각해서 벌어진 해프닝 정도.


두 사람이 야스 했을까? 사실 나도 몰....루?


언제나 좀 더 짧으면서도 짜임새 있는 문장을 썼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이번 것도 너무 긴 거 같어. 이렇게까지 길게 늘어질만한 내용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아무튼 이걸로, 쓰려고 계획한건 전부 끝.

그런 의미에서, 신청 새로 받는다. 


일단 받아놓고 쓰기로 확정낸 소재는 하나.

텍사스 피폐물.

피폐물 연습 해보고 싶어서, 일단 이거 열심히 조사중. 피폐랑 얀데레가 다르다고 가정하고 쓰면... 될 거 같다?는 느낌.


일단 신청 받은 것 중에 끌리는 거 있으면 그거 쓰고, 아니면 계속해서 준비중인 라플란드 장편 슬슬 시동 걸 생각.

다른 것들은... 일단 잠정적 중단이라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다시 이번 이야기로 돌아와서, 사소한 TMI.


1) 블레이즈가 말아줬다는 술에 잘못 들어간 술인 스피리터스는 일단 도수 95도 정도 되거나 그보다 더 높은 사실상 순수 알콜.

2) 비질이 일어난 페넌스에게 커피를 타준 이유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숙취해소로 커피를 마신다고 하네...?


그리고 시ㅣㅣㅣ바 힐리드 폭사했다.

일단 조만간 월급 받고 다시 보자 가증스러운 도마뱀 자식아....





아무튼 그래서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더 나은 글을 위해 언제나 피드백 받음.

그리고 댓글 보는 맛으로 글을 쓰는 파라, 댓글 많이 달아주면 하나하나 다 읽고 쥰내 열심히 글 적음.


댓글 달아줘 어서 

잔뜩 달아줘 당장






그 외에도 일단 단편 신청 받음.

이 글쟁이는 확정은 아니지만 일단 무료로 써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