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은 고요했다. 병실이 비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곳에 앉은 두 사람이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


  침묵 속에서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울렸다. 사과를 깎는 소리다. 


  박사는 의자에 앉아 사과를 깎았다. 한 두번 깎아본 게 아닌 듯, 매우 얇게 깎이는 사과 껍질이 뒤가 비칠 정도로 얇다. 칼 한자루로 사과의 껍질을 벗기고, 황금빛 과실을 잘라 접시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그리곤 자신은 칼 끝으로 대충 잘라낸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씹더니, 나머지 조각은 포크로 집었다.


  그는 이를 제 입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향했다. 


"아~"


  그리고 자연스럽게 들리는, 먹이를 찾는 아기새와 같은 애교 섞인 목소리. 열심히 먹이를 준비해온 어미새처럼, 박사는 예쁘게 깎은 사과를 그라벨의 입에 넣어주었다. 사과를 받아먹은 그라벨은 사과의 맛을 음미하며 작게 콧소리를 냈다.


"응~ 역시 달링이 먹여주니까 수십 배는 맛있는 거 같아."


"영광입니다, 아가씨."


"어머, 어울리지도 않는 집사 흉내야?"


  그라벨은 쿡쿡 웃었다. 그녀는 평소엔 입가를 가리며 웃는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호선을 그린 그녀의 입술이 가려지지 않고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의 입술은 사과의 과즙이 묻어 번들거렸다. 


  그라벨의 양손은 붕대로 묶여 있었다. 아니, 고작 붕대로 끝나지 않았다. 팔은 단단한 석고 깁스로 감싸져 있었고, 손가락은 강철로 된 기구로 고정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그라벨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기적적으로 어깨는 움직여졌지만.


  간단한 일이었다. 로도스의 전투 오퍼레이터였던 그라벨은 이번에도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었고, 박사는 그녀를 간호했다. 이유 역시 단순하고, 당연했다.


  그라벨은, 박사의 연인이다. 박사는 제 연인을 간호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하나 둘, 정갈하게 잘라놓았던 사과는 순식간에 그라벨의 입 속으로 들어가 바닥났다. 박사는 그 다음 과일을 꺼내려는 듯 바구니를 뒤적였다.


"박사."


  그라벨이 박사를 불렀다. 박사가 시선을 옮기자, 그라벨은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내밀었다. 작은 새의 부리처럼 삐죽 내민 입술이 귀여웠다. 


  원하는 것이 너무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박사는 흔쾌히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가벼운 버드 키스 정도로 끝마치려 했지만, 그라벨이 기습적으로 몸을 앞으로 숙여 박사의 입술을 훔쳤다. 두 사람의 입술 사이가 들썩였다. 놀란 박사가 얼굴을 붉히며 얼굴을 뒤로 뺐지만 이미 늦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희미한 실선이 끈적하게 이어졌다, 이내 사라졌다.


"어때?"


"....사과맛이 나네."


"당연하지, 우리의 키스는 그 만큼 달콤하잖아?"


  그라벨은 그렇게 말하며 달콤하게 웃었다. 너는 환자라고, 무리하게 움직이지 마. 라는 의사의 당연한 경고가 박사의 목젖 끝까지 걸렸지만, 그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와의 키스는 달콤했지만, 그는 웃을 수 없었다.


  그는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박사가 표정을 굳혔다.


"...있잖아, 세노미."


  박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라벨은 싱긋 웃으며 박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달콤한 눈동자가 그에 대한 애정을 품고 밝게 빛났다. 그녀는 차분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그가 무슨 말을 할 지 아는 듯.


"우리..."


"헤어지자고?"


 그라벨은 웃었다. 이미 그녀는 그가 해야 할 말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에게 다가올 이별을 알고 있었다. 박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말문을 빼앗긴 것에 대한 불쾌감은 절대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주먹을 꼭 쥐었다. 힘이 너무 들어간 주먹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알고 있었구나."


"당신은 날 간호할 때 마다 언제나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잖아? 싫을 만도 하지, 바보라도 알 수 있을 거야."


"...."


"박사, 당신은 멋지니까 훨씬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래도, 플래티넘은 안 돼. 걔는 박사를 휘어 잡고 살려고 할 거니까. 되도록이면 당신의 뜻에 잘 따라주는 사람 만나."


  이별을 통보 받았지만, 그라벨은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격려하며 자신을 비하했다.


"당신은 앞날이 창창한 의사잖아. 항상 다치기만 하는 내 간호나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기엔...."


".....그게 아니야."


  박사가 그라벨의 말을 끊었다. 박사는 고개를 들었다. 


"세노미. ....오퍼레이터, 그만두면 안 될까?"


  그는 울고 있었다. 박사는 그라벨의 손을 잡을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잘못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쥔다면, 그녀의 손은 문자 그대로 부서질 것 같았다. 그래서, 박사는 갈 곳 잃은 손을 꼭 쥔 채, 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흘렸다.


"여기서 더 다치면, 이젠 두 번 다시 손을 못 쓰게 될 지도 몰라.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제일 잘 알아. 내가 수술했으니까."


  박사는 그 때의 광경을 떠올리면 아직도 구역질이 났다. 모든 것이 현실처럼 생생하게,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악몽이 되었다. 자신의 실수로 뚫린 방어선과 공격해온 적. 휘둘러진 검과, 이를 몸으로 막아선 자신의 연인.



  그녀의 미소가, 저주처럼 기억에 남았다. 그녀의 미소뿐 아니다. 허공에 흩뿌려지는 그녀의 피와 손가락. 그리고, 자신의 앞으로 굴러오던 그녀의 반지가.....


  너무 끔찍했다. 그래서, 박사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녀를 사랑한다. 옆에 그녀가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라벨은 이미 그에게 있어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녀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라벨은 언제나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다. 그녀를 잃을 지도 모른다, 라는 공포는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박사는 그라벨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자신의 곁에 남아 달라고.


"세노미, 부탁이야. ...제발 오퍼레이터를 그만둬 줘. 그게 아니라면, 이젠 헤어질 수 밖에 없어."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떠나겠다고.


  박사는 그라벨이 오퍼레이터를 관둬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 역시 그녀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수많은 죽음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언제나 각오가 되어 있었다. 자신이 다른 이들의 목숨을 거두는 것처럼, 자신 역시 누군가에게 죽을 수 있고,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 있다고. 하지만, 아무리 각오해도 이를 실제로 마주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박사는 견딜 수 없었다.


"...오퍼레이터를 관두겠다고 약속하면, 결혼하자. 너도 항상 이야기했잖아. 빨리 웨딩 드레스를 입어보고 싶다고."


  그래서 그녀를 협박하는 꼴이 되어도 상관 없었다. 이렇게 구질구질하게라도 그녀를 잡고 싶었다.


"박사. 미안해."


  그라벨은 고개를 저었다. 무너져가는 박사의 표정과는 대조적이게, 그라벨의 표정은 결연했다. 박사는 그녀의 표정에서 어렵지 않게 아직 말로 빚어지지 않은 대답을 읽어냈다.


"....관둘 생각 없구나."


  그녀는 오퍼레이터를 관둘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거짓말을 할 생각이 없다는 듯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당신의 그림자이자 기사야. ...주군을 버리고 전장을 떠나는 기사는 없어. 난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박사의 곁에 있을 거야. 그게 나의 의무야."


"....나는 네 목숨을 짊어지고 살아갈 자신이 없어."


  박사는 고개를 떨궜다. 손이 떨렸다. 로도스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분명 계속 전장에 나설 것이고, 끝없이 그녀를 위험에 처하게 할 것이다. 아직은 운이 좋았지만, 언젠가 그 운이 바닥난다면 그 순간에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의 비극적인 결말이 박사의 머리 속에서 끊임 없이 맴돌았다.


"난 우리가 평범한 연인이었으면 해."


"나도 마찬가지야, 박사."


"그럼, 오퍼레이터를 그만 두자. ...그러면 되잖아? 


  그라벨은 고개를 저었다.


"....만약, 내가 오퍼레이터를 관둔다고 하면."


  만약, 이라는 가정을 붙이긴 했지만 그라벨이 그의 제안을 승낙하는 듯한 말을 하자 박사는 그것 만으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의 우는 얼굴 보다는 웃는 얼굴을 보는 게 훨씬 좋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제안을 승낙할 생각은 아니었다. 


"...당신도, 더 이상 전장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될까?"


  박사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걸 보는 건, 역시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라벨도 이것만큼은 물러설 수 없었다. 그녀가 오퍼레이터를 관두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할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의 곁에만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전장에 나서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전장에 나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그는, 전장을 나가는 걸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다. 아직 그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는 절대 포기할 리 없었다.


  그는 모두를 따스하게 비추는 태양이니까. 그래서 그를 사랑했다. 그렇기에 잘 알고 있었다.


"당신은 안 그럴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래서, 난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어."


"....하지만..."


"박사. 왜 내 생각은 안 해?"


"....."


"만일 당신 말대로 내가 오퍼레이터를 관두고, 당신의 아내가 되어 이 곳에 남는다고 하면? 난 언제나 하염 없이 당신이 돌아오기 만을 기다리며, 해바라기처럼 바깥만 바라볼 거야. ...그러다, 당신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


  박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저 그라벨에 대한 걱정만이 앞서서. 자신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기만 하는 맹목적인 그녀의 사랑과 희생이 부담스러워서. 언젠가 그 희생으로 그녀의 목숨까지 자신에게 내어줄까 봐. 박사는 그게 무서워 그라벨을 전장에서 떨어뜨릴 생각만 했다.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바보 같았다. 그가 그녀를 걱정하는 것만큼, 그녀 역시 그를 걱정하고 있었을 텐데.


"나는 해바라기처럼 평생 태양만 보다 말라 죽고 싶지 않아. ...난, 당신을 지키고 싶어."


  그라벨은 결연하게 말했다. 박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지금 눈 앞의 그녀는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이는 그의 연인이 아니었다. 지금 눈 앞에 있는 그녀는 세노미가 아닌, 기사 그라벨이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기사의 맹세를, 도저히 꺾을 수 없었다.


"...이게 나의, 사랑이야."


  그라벨은 그렇게 말하며,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박사는 그 말에 대답 없이 눈물만 흘렸다. 만약 팔이 멀쩡했다면, 이대로 손을 뻗어 흐르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손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만큼은 이 부상이 원망스러웠다.


  그라벨 역시, 우는 박사를 보는 것이 즐겁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박사.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날 위해, 오직 나만을 위해... 당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의무를 포기할 수 있어?"


"......미안." 


  입장이 반대가 되었다. 분명 그라벨을 설득하기 위해 말을 꺼냈지만, 어느세 설득 당하고 있는 것은 그였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설득은 실패했다는 것.


"봐. 이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지."


  그라벨은 한숨을 내쉬었다. 면목이 없어 박사는 고개를 숙였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은 멍청이였다.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 밖에 몰라 그녀를 구속하려 든 멍청이. 


"하지만 그런 이기적인 당신 역시 사랑스러워."


  하지만 자신의 연인이자 기사는 그런 그 역시 사랑해주었다. 그녀의 헌신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에 그는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그라벨은 그에게 몸을 기댔다. 박사는 그라벨을 끌어 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

.

.


  먼 옛날, 해바라기는 아름다운 요정이었다고 한다. 요정은 오직 달이 떠 있을 때만 밖을 나설 수 있었지만, 요정은 떠오르는 여명 속이 비친 희미한 태양신의 모습에 반해 버렸다. 요정은 태양신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하염 없이 그를 찾았고, 결국 금기를 어겨 감옥에 갇혔다. 앞으로 영원히 태양을 볼 수 없게 된 요정은, 결국 스스로의 몸을 해바라기로 바꾸어, 언제나 태양만을 쫓았다.


  태양은 평생 해바라기를 내려다보지 않았음에도. 해바라기는 평생 태양을 쫓았다.


  나는 그런 바보같은 사랑은 하고 싶지 않아, 박사. 당신만을 바라보며, 당신을 위해 시들고 싶은 나는. 해바라기 같은 사람이지만, 난 태양의 옆에 설 거야.


  설령 내가 불타 죽는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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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全編) 링크 :https://arca.live/b/arknights/73544803


예아 반갑소.



정말 수도 없이 신청받았지만 제대로 쓰지 못했던 독타X그라벨 순애 소설, 드디어 가져왔습니다.





음... 이번에는 어떰? 제대로 쓴 거 같긴 한데, 메인 주제를 제대로 전달했을 지 모르겠네.

세노미의 캐릭터성도 제대로 표현했을지도 모르겠고.


기본적으로 세노미의 캐릭터성은 메가데레이지만, 그 와중에도 기사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사랑하는 사람과 충성을 바칠 주군이 겹치기에 이런 모순적인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뭐 암튼, 기사와 주군. 사랑하는 연인인 두 사람의 양립할 수 없는 사랑 이야기, ...제대로 쓴 거 같음?


뭔가 요즘 글을 쓰는 솜씨가 떨어진게 느껴져. 원래도 잘 쓰는 편은 아닌거 같았지만, 문장의 응집력이 떨어진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그래서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더 나은 글을 위해 언제나 피드백 받음.

그리고 댓글 보는 맛으로 글을 쓰는 파라, 댓글 많이 달아주면 하나하나 다 읽고 쥰내 열심히 글 적음.


댓글 달아줘 어서 

잔뜩 달아줘 당장






그 외에도 일단 단편 신청 받음.

이 글쟁이는 확정은 아니지만 일단 무료로 써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