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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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거운 침묵과 이를 뒤따르는 적막의 분위기가 대회의실 내부를 가득 메웠다. 숨막힐 듯한 지금의 분위기는 평소와는 꽤나 상반된 형태였다. 우선 평소 상황이었으면 자기들 나라가 어쩌고 하면서 자랑질을 일삼고, 그 끝은 서로를 헐뜯고, 비방하면서 막을 내리는 게 일상이었다. 그도 그렇듯이 이곳 진수부는 지휘관이 소속된 국가, 그리고 지휘관의 모국에게 대립하는 국가와 관련된 함선소녀들을 한데 모은 곳이니 온갖 트러블이 발생하는 게 다반사다. 그 중에서도 지휘관의 총애를 얻는 함선소녀가 있는 진영과 파벌은 온갖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하니 오늘의 이 침묵은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지휘관님께서 부임하신 지도 언 반년이 되었죠. 하지만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우리 중에 누군가를 침실로 부르지 않으시다니..."


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고 먼저 입을 연 함선소녀는 아이리스 리브레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리슐리외. 하지만 침울한 얼굴을 하면서 말을 하니 분위기가 바뀔 리가 없다.


"남편... 남편..."


리슐리외 다음으로 말을 한 함선소녀는 이글 유니온 대표인 엔터프라이즈였다. 하지만 적절한 의견 제시가 아닌 무의미한 혼잣말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알렉스가 캐주얼 정장을 입고 찍은 사진으로 프린팅한 다키마쿠라를 얼굴에 파묻으며 펑펑 우는 중이었다.


"내가 첫 번째 서약 상대인데... 왜 요새는 날 바람맞히는 건데? 왜? 왜?? 왜???"


다른 함선소녀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신세한탄하는 척 하면서 맥이는 것도 아니고, 이 무슨 짓거리란 말인가? 그나마도 엔터프라이즈는 정실이라는 포지션 때문에 못해도 보름달이 뜨는 날에는 무조건적으로 지휘관이 그녀의 침실로 가는 편인데도 저런다. 하지만 누구도 엔터프라이즈를 비난하진 않았다. 정실에게도 이리 무심한 지휘관인 알렉스에 대한 원망과 애증 때문이었다.


"우는 소리는 그만하거라. 그나마 서구권 함선소녀들은 사정이 좀 나은 편 아니냐?"


외형은 미취학 아동으로 보이지만 말투는 사극에서나 볼 법한 고어체를 구사하는 소녀의 말에 온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하였다. 중앵의 대표 함선소녀 나가토다.


"너희들은 그래도 겉으로나마 찾아주기라도 하지. 중앵 쪽은 어떤 줄 알기나 하느냐? 지휘관은 우릴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맞아요. 지휘관님은 엄연히 중앵 출신이시고, 심지어..."


"그 이상 말하지 말거라, 아카기."


아카기가 나가토의 말을 거들어줬으나 그녀는 싸늘하게 그런 아카기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지휘관님의 본래 성함이 니우라 히데토란 사실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어요, 나가토 님. 그런데 나라를 바꾸고, 이름까지 바꾼다고 사람 근본이 어디 그리..."


- 와장창!


"꺅!"


"언니...!"


아카기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유리컵 하나가 그녀의 옆쪽 벽에서 그만 운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놀라서 의자에서 자빠져버린 아카. 곧이어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그녀의 동생인 카가가 부축해줘서야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에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따로 있는 법도 모르더냐? 니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 지휘관의 귀에 들리는 순간, 가뜩이나 위태로운 중앵의 발언권이 소멸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안 해봤느냐?"


"......"


나가토가 분기탱천한 얼굴로 씩씩거리자 중앵 측 함선 소녀들은 전부 풀이 죽은 얼굴로 애먼 땅바닥만 쳐다봤다. 악질적이게도 이를 지켜보는 서구권 함선소녀들은 웃음을 머금는 중이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비웃음이다. 가뜩이나 중앵 쪽은 알렉스의 과거와 관련된 문제로 총애를 얻지 못하는 상황인데 오늘의 이 얘기들이 그의 귀로 들어간다면 진풍경이 벌어지리라.


"지휘관은 더 이상 중앵의 니우라 히데토가 아니다. 어리석게도 우리 조국은 과거의 지휘관을 외면했기에 이글 유니온으로 떠났지. 그리고 새 조국에서 새 이름을 얻고, 새 출발을 했건만..."


나가토는 눈을 질끈 감으며 순수하고, 꿈 많던 시절의 알렉스 캐시디... 아니, 니우라 히데토였던 지휘관의 모습을 떠올렸다. 비록 모닝 글로리인 아버지와 중앵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라는 태생적인 문제가 있었지만 그때의 그는 큐브에 대한 지식으로 반드시 조국 중앵을 이롭게 하겠다는 선량한 소년이었다.


[조센징 주제에 건방지긴.]


[영광스러운 중앵 해군에 더러운 혼혈이 와도 자리가 없는 법.]


[혹시 또 몰라? 모닝 글로리에게 몰래 국가 기밀을 팔아먹을 지도 몰라!]


그의 꿈을 짓밟고, 그의 날개를 부러트린 것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중앵의 사람들이었다. 스물도 안 된 소년이 그런 가혹한 대우를 받으리라 그 누가 예상했겠는가? 누군가는 순수한 중앵인들이 혼혈에게 밀리는 것을 고까워했고, 누군가는 그의 나이를 문제삼았다. 또 누군가는 그저 근거없는 의심을 내세우며 음해했다.


[결국 떠나려는 것이냐?]


[네, 나가토 님. 나가토 님이 그 작자들에게 이 말만 해주세요. 아니! 내 조국이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나요? 의심할 거면 처음부터 뽑질 말던가, 뽑았으면 의심하질 말던가! 왜 나한테 그렇게 모질게 굴 수 있냐고요?]


[미안... 하구나...]


나가토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리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자신이 중앵 해군의 고위 관계자들에게 니우라 히데토를 추천해줬으니 이런 결과에 대한 책임도 그녀에게 있었던 것.


그래서 니우라 히데토의 큐브 연구는 중앵에게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이글 유니온으로 향하였다. 이글 유니온에 돌아온 그는 자신을 무시하고, 깎아내리기만 했던 중앵을 증오하면서 성도, 이름도 다 이글 유니온식으로 갈아버리고 새로운 조국을 선택했다.


'삶이란 참 아이러니하구나, 히데토. 아니, 알렉스...'


나가토가 그와 재회하게 된 것은 대(對) 세이렌을 위한 세계 각국의 함선소녀들을 차출하여 괌으로 집결시켰을 때였다. 하지만 다시 만난 그는 놀라울 정도로 달라졌다. 더 이상 순수한 소년이 아니었다. 냉혹한 권력욕의 화신이 되고 만 것이다.


[오랜만이네, 나가토?]


[히데토... 너...]


[히데토? 아, 그런 이름을 썼던 시절도 있었지. 이제는 알렉스 캐시디야. 다시 그딴 이름으로 날 부르면 경을 칠 테니 그리 알아.]


중앵에 있었을 때는 항상 공손했던 그는 오만해졌고, 더 이상 나가토에게 존대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진수부의 지휘관이니 계급상으로는 나가토보다 위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극적인 변화였다.


'그 변화의 과정이 너무나 뼈저린 고통으로 이루어졌다는 건 뻔한 일일 테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그 소년의 성공은 그를 지켜보던 나가토에게 있어서 기쁨이었다. 허나 더는 예전과 같지 않은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가토는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니? 지휘관님께서 오늘은 벨파스트의 침실에서 묵겠다고 하셨어."


그런 나가토의 생각을 끊게 한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의 동생인 무츠의 말이었다. 이제 나가토는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이 불여시 같은 하녀 년이..."


"그년은 맨날 지휘관님의 시중을 드는 척 하면서 은근슬쩍 눈웃음 치던데?"


"정말? 그 씨발년 안 되겠네?"


무츠가 전해준 소식이 서구권 함선소녀들도 알게 되었는지, 그녀들은 입을 모아서 벨파스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물론 로열 네이비 쪽은 축제가 따로 없었다. 지휘관과 몸을 섞은 함선소녀야말로 총애의 상징이다. 당연히 지휘관의 관심이 그 함선소녀의 진영에게 향하면 일반적으로는 나쁜 일이 아니다.


"가자, 얘들아. 우린 오늘도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깐 말이다."


"네."


이 수라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가토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중앵의 함선소녀들이 전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중앵 소속 함선소녀들이 사라진 대회의실은 벨파스트와 로열 네이비를 비난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끼리 저급한 말다툼만 메아리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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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언제 복각하냐? 그때까지 숨 참을란다...


않이~ 왜 내가 뉴비일 때 그게 나와야만 하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