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헉."


어쩌다 이렇게 된거지? 내가 왜 여기서 이렇게 뛰고있는거지? 머릿속으로는 별의별 의문이 다 들었지만 그래도 다리를 멈출 수 없었다. 그러기엔 추격자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쫒...라. 아직...딘가...있...!"


멀리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그녀들의 목소리가 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왜 나한테...!"


나는 어두운 산길을 헤쳐오르며 현 상황을 돌이켜봤다.


-


"아니 대령님 장난으로도 이런 걸 보내시면 곤란합니다."


나는 그렇게 볼멘소리를 내뱉으며 손에 든 작은 상자를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퍼졌다.


"아무리 자네라도 그런 건 좀 무서운가보지?"


그렇게 말하고 연이어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난처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리 저라도 이런 걸 들키면 곤란한 수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녀들이 저를 어떻게 대하는지 대령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한 나는 상자를 든 손의 엄지로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순백의 반지 하나가 들어있었고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이아몬드는 찬란한 광채를 내뿜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아, 잘 가지고만 있으라니까. 안들키면 되는데 뭐가 걱정이 많어."


"안 들킨다는게 안되니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설사 잘 숨겼다 해도 이걸 어따 써먹습니까."


"그거야, 자네 사정 아니겠는가. 벌써 시간이.... 내가 회의가 있어서 이만 끊겠네. 그럼 다음에 밥이나 한끼 하지."


뭐라 하고픈 말이 굴뚝같았지만 바쁘다는 사람 붙잡고 차마 그럴 순 없었기에 통화를 종료한 나는 그대로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하아, 이 녀석을 어쩐다."


손에 든 반지 상자를 한참을 노려봤지만 딱히 생각나는 대책이 없었다. 하필 주셔도 서약 반지라니. 누가봐도 대놓고 엿먹으라는 소리 아닌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반지의 주인이 결정되었을 때의 시뮬레이션을 머릿 속으로 그려봤지만 결과는 하나같이 파멸 뿐. 지휘관이 아닌 생체 딜도가 되버리는 미래 뿐이었다.


"...절대 들키면 안된다. 들키면 여러모로 끝장이다."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서랍 속에 상자를 넣고 문을 잠궜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뒤이어 벨파스트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홍차와 스콘을 가져왔습니다. 들어가도 괜찮은지요?"


들어오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벨파스트가 트레이를 끌고 들어왔고 자연스럽게 스콘과 홍차를 내 책상 위에 올려주었다.


"고마워, 벨파스트. 오늘도 향이 좋은데?"


"물론입니다. 주인님께 드리는 홍차는 매일매일 신경쓰고 있으니까요."


그 말에 홍차을 들어 향을 음미하고 한 모금 마시자, 입안에 홍차향이 가득 퍼졌다. 머금기만 해도 질 좋은 홍차를 사용했다는 걸 알 수 있는 향이었다.


"역시 벨파스트가 타준 홍차는 맛이 좋네. 벨파스트,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 아닙니다. 별일 아닙니다. 신경쓰지 마시길."


홍차를 마시고 본 벨파스트의 얼굴은 약간 굳어있었고,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나 싶어 물어보자 벨파스트는 조금 늦은 반응을 보이며 말을 했다. 아무래도 오늘 할일을 잠깐 머릿속으로 점검하고 있었나보군.


"쉬엄쉬엄해. 그러다 과로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만약 벨이 쓰러지면 내 홍차는 누가 타줘."


그렇개 우스개소리를 섞어 말하자, 벨파스트는 그제서야 걱정하지 말라며 평소의 미소를 보였다. 아무래도 요새 좀 힘든 듯 한데 휴가를 줘야하나?


*


"그럼 주인님, 남은 시간도 힘내시길."


주인님의 배웅을 받은 나는 서둘러 트레이를 끌고 발걸음을 옮겼다. 방금 전 주인님의 책상 위에서 본 군수물품 목록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는 비상사태니까.


그렇게 탕비실에 트레이를 가져다 놓은 나는 정리정돈도 하지 않고 곧장 폐하께 갔다. 방금 본 충격적인 사실을 전하기 위해.


"...하인이 우리 몰래 서약 반지를 들여왔다고?"


"예 폐하. 방금 전 주인님의 집무실에서 군수 물품목록을 보고오는 길이니 틀림없사옵니다."


예상대로 폐하께선 초조한 기색을 보며 생각에 잠기셨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모항에서 주인님께 연심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므로 주인님께 자신의 마음은 알려주되 티는 내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불가침조약이 암암리에 퍼져있었다.


하지만 서약 반지가 군수품목에서 나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누군가 암묵적인 조약을 깨버렸다는 소리니까. 솔직히 지금까지 이 조약이 깨지지 않은게 신기할 따름이다.


"...벨파스트, 회의를 소집해. 장소는 내 방으로."


"시간은 언제로 할까요?"


"지금 당장."


*


"바쁜 사람을 갑자기 오라가라 하다니. 긍지높은 로열의 품위도 바닥에 떨어졌군."


"그러게 말이에요. 여왕께선 한가할지 몰라도 소첩은 시간이 한가한 사람은 아니온데 말이죠. 별거 아닌 걸로 부르셨다면 빨리 끝내주시겠사와요?"


고까운 나치년과 여우 새끼가 나불거리는 걸 듣고있자니 화가 치밀어 오를 뻔 했지만 그러기엔 사안이 너무나 중대했으므로 꾹 참았다. 안 그랬으면 바로 내 주포맛을 보여주었을 텐데.


"긴급 사안이야. 하인이 우리 몰래 서약 반지 하나를 들여왔어."


내 한마디에 장내 분위기는 180도 돌변했다. 방금 전까지는 대충 비위나 맞춰주자는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기름으로 젖은 화약과 포탄이 가득한 화약고 안에서 성냥불을 들고있는 듯한 분위기가 되었으니까.


"...그 말, 책임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퀸 엘리자베스. 그렇지 않다면 지휘관 동지를 모함한 죄, 가벼이 넘기지 않을 테니까."


"...자세히 들어봐야겠지만 가벼이 넘길 사안은 아니네. 허니가 우리 몰래 서약 반지를 반입하다니, 이제와서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엔 늦은 거 알지?"


빨리 정보를 내놓지 않으면 부셔버리겠다는 살기가 방 안을 가득채우자 나는 조용히 뒤에서 대기하던 벨파스트에게 손짓을 했다.


"우선, 이것을 봐주시길 바랍니다."


내 지시에 벨파스트는 조용히 군수 물품목록 사본을 한장씩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방금 제가 여러분께 나누어 드린건 오늘 들어온 군수 물품목록의 사본입니다. 맨 아랫쪽을 보면 서약 반지가 하나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겁니다. 물론 어제 비서함이었던 제가 군수 물품을 확인 했을때는 서약 반지 따위는 없었지요. 그렇다면 이는 주인님께서 따로 몰래 추가했다는 얘기밖에 안되지요."


벨파스트의 증언에 분위기는 더욱 날카로워졌고 날카로운 분위기 사이로 추기경이 입을 열었다.


"이 사실, 여기 있는 사람 말고 누가 알고있죠?"


"아시다시피 군수 물품은 만쥬들이 들여오고 또 관리 또한 만쥬들이 하기에 제가 따로 만쥬들에게 사본을 달라 지시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있으신 분들 외에는 아는 분들이 없다고 자부할 수 있겠군요."


"그렇군요. 하긴, 이 사실이 공공연하게 퍼졌다면 모항이 이리 조용할리 없을테니 말이죠."


추기경의 말에 긍정하듯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뒤이어 유니온의 블랙 드래곤이 입을 열었다.


"그럼 허니가 서약 반지를 들여왔다는 사실을 우리 밖에 모른다 치고 우리 메이드장은 어떻게 이 사실을 알았을까? 군수 목록 사본은 허니 말고는 따로 구하지 않는 이상 모를텐데 말이지?"


날선 물음에 벨파스트는 하인의 티타임을 보좌하던 중 우연히 보게되었다는 말을 했고 그제야 방 안의 분위기는 조금 누그러들었다.


"어쨋든 가벼이 넘길 사안은 아니네요. 그렇다고 섣불리 판단할 사안도 아니고요. 조금 조사가 필요한 듯 싶은데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사르데나의 허당의 의견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고 결정이 난듯 우리는 하인이 누구에게 반지를 주려하는지 정보를 모아 다시 회의를 하기로 했다.


====================================


예전부터 늘 나오던 소리. '지휘관이 몰래 반지 하나 들여오면 어캄?'

이거 함 대놓고 쓸건데 뒷내용은 알아서 상상하세요~ 하고 끝내면 고로시 각이겠지요?

시간 날때마다 써올테니 천천히 가봅시다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