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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첫 월드 시리즈가 열리고 난 후 지금까지 117번의 월드 시리즈가 열렸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11회 우승으로 우승 횟수 2위에 올랐는데, 1위팀은 이에 두배를 곱해도 따라잡지 못한다. 그 팀이 바로 뉴욕 양키스이다.

보스턴을 제외한 전 세계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N과 Y가 겹쳐 있는 로고의 야구모자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전세계에서 가장 인지도가 있는 팀 중 하나로, 팀 가치가 가장 높은 스포츠 구단의 리스트의 맨 위쪽에 항상 자리잡고 있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명문팀이다.

약칭 : NYY, NY

연고지 : 뉴욕 주 뉴욕

창단년도 : 1901년

월드 시리즈 우승 27회

('23, '27, '28, '32, '36, '37, '38, '39 '41, '43, '47, '49, '50, '51, '52, '53, '56, '58, '61, '62, '77, '78, '96, '98, '99, '00, '09)

홈구장 : 양키 스타디움

별칭 : 악의 제국(The Evil Empire), 살인타선(Murderer's Row), 브롱스 동물원(Bronx Zoo) 등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소속

통산 성적 10602승 8000패 승률 0.570 (1901년~1902년 볼티모어 오리올스 시절 제외)



창단 초기 (1901년 ~ 1919년)

1904년 잭 체스브로는 41승을 달성했다.

1894년부터 1899년까지 존재했던 마이너 리그인 웨스턴 리그의 회장이었던 밴 존슨은 1900년, 웨스턴 리그의 이름을 아메리칸 리그로 바꾸고 내셔널 리그에게 AL를 메이저 리그로 분류할 것을 요청했다.

이후 1901년에 존슨은 자신의 리그에 공식적 메이저 리그 지위를 선언한다.


뉴욕에 팀을 추가하려는 계획은 뉴욕 자이언츠(현 SF)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래서 1901년에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라는 이름의 팀이 생겨났다. (현재의 동명의 팀과는 관계가 없다)

그러다가 1902년 시즌이 끝난 1903년에 NL와 AL은 분쟁을 해결하고 공존하기로 결정했다.

밴 존슨은 컨퍼런스에서 AL팀이 뉴욕에 있어야 할것을 요청했고, 이를 구단주 16명 중 15명이 찬성해 오리올스의 새 구단주 프랭크 파럴과 빌 데버리가 오리올스를 뉴욕으로 옮기고, 팀명을 뉴욕 하이랜더스로 개명했다. (당시 새 구장인 힐탑 파크가 어퍼 맨해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 때의 하이랜더스는 정말 별 볼일 없는 팀이였다. 그래도 리그 2위는 3번 했었지만,,,

당시에는 양 리그 우승팀만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기에 리그 2등을 해도 가을야구는 꿈도 못꾸었다.

거기에 100패 시즌도 2번 있었고, 안정된 성적보다는 들쑥날쑥한 성적을 내서 강팀과는 살짝 거리가 멀었다.

거기에 당시엔 뉴욕 자이언츠가 우승 1회 포함해 좋은 성적을 내고 있던 지라, 뉴욕 안에서의 입지는 작았다. 그래도 호구팀 브루클린 슈퍼배스(현 LAD)보다야 사정은 나았지만.

1912년 시즌이 끝난 이후 1913년부터는 사정상 하이랜더스라는 이름을 쓰긴 그래서, 공식적으로 뉴욕 양키스라는 이름으로 경기를 했다. 뭐 그래도 극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으며, 1919년 3위를 달성한게 최고 성적이었다.

이 시기의 주요 선수로는 로저 페킨포, 지미 윌리엄스, 키드 엘버펠드, 홈런 베이커, 월리 핍, 잭 체스브로, 레이 콜드웰, 레이 피셔, 러스 포드, 알 오스, 잭 퀸, 잭 워홉이 있다.



그분의 등장, 최고의 팀으로 올라서다 (1920년 ~ 1939년)

월드 시리즈 우승 8회

'살인타선'으로 불리던 당시 양키스의 핵심 타자 루 게릭과 베이브 루스

1920년은 메이저 리그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시즌으로 꼽힌다.

공교롭게도 양키스 소속이었던 대투수 칼 메이스가 던진 스핏볼에 맞은 레이 채프먼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이전 시즌 월드 시리즈에서 벌어졌던 승부조작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른 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점은, 이 해를 기점으로 공인구가 교체되어 극심한 투고타저였던 데드볼 시대가 끝나고 라이브볼 시대가 시작됐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구시대의 종식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린 것이 바로 베이브 루스다.


당시 보스턴 레드삭스의 대투수 베이브 루스는 1916년 1.75라는 평균 자책점에 23승 170탈삼진 8.8의 bWAR를 올린, 당대 최고의 투수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는 타격에도 재능이 있었다.

레드삭스에서 루스가 타격을 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때의 성적이 꽤 차이가 나서, 그리고 그가 타격을 좋아해서 등등의 이유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우익수 해리 후퍼의 추천으로 본격적인 투타겸업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역사에 남을 1918년에는 투수로써 13승, 타자로써 11개의 홈런을 치고 홈런왕에 올랐다. (장타율까지 석권해 2관왕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당시 투수 성적의 기준인 10승에는 실패했지만 타자로써 무려 5관왕에 등극, 대투수에서 대타자로의 변신을 알렸다.


그런데 당시 레드삭스의 구단주는 뮤지컬에 투자한 후 손해을 크게 보았고, 이를 갚기 위해서 루스를 양키스로 현금 트레이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금액은 12만 5천 달러였다.

그리고 루스는 마침 바뀐 공인구의 영향으로 54홈런이라는 엄청난 홈런 행진을 이어갔고, 그렇게 미국 스포츠의 전설이 되었다.

루스가 등장한 1920년에 팀 역사상 두번째로 6할 승률을 돌파(3위)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드디어 AL리그 우승이라는 경사를 맞았다.

첫 리그 우승을 해낸 1921년부터 1923년까지 3년 연속 리그 우승을 해냈으며,

1923년에는 드디어 월드 시리즈에서도 우승을 이루는 쾌거를 이뤄내기도 했다.


1925년에는 잠깐 7등으로 미끄러지는 참사를 겪었지만 26~28년 3년 연속 리그 우승과 27, 28년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다시 올라섰으며, 이후 1932년 우승, 거기다가 1936년부터 39년까지 4년 연속 월드 시리즈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써냈다.

이 시기의 주요 선수로는 베이브 루스, 루 게릭, 토니 라제리, 빌 디키, 얼 콤스, 밥 뮤젤, 벤 채프먼, 레드 롤프, 프랭키 크로세티, 조지 셀커크, 레프티 고메즈, 레드 러핑, 허브 페녹, 웨이트 호이트, 밥 쇼키, 조지 핍그라스, 칼 메이스, 새드 샘 존스, 어반 쇼커가 있다.



올드 그레이트 양키스 (1940년 ~ 1964년)

월드 시리즈 우승 12회

올드 그레이트 양키스는 1940년부터가 아니라, 루스와 게릭의 그 시대부터를 지칭하는 명칭이다.

1950년 팀내 bWAR 3,2,1위를 기록한 조 디마지오, 요기 베라, 필 리주토

루스가 팀을 떠나도 양키스는 강팀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월드 시리즈 4연패의 마지막 시즌인 1939년에는 루 게릭이 병으로 인한 비극적인 은퇴를 하게 됐지만, 게릭이 없어도 무너질 팀이 아니었다.

조 디마지오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빠지게 된 1943년에도 양키스는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뤄냈다.

심지어 1949년부터 1953년에는 조 디마지오, 토미 헨릭, 찰리 켈러 등의 기존 주축 선수가 은퇴하거나 이적하는 등, 라인업에 자잘한 변화가 잦았는데도 무려 5년 연속 월드 시리즈 우승이라는 범접 불가한 역사를 써냈다.

여기서 잠깐 1950년부터 1959년까지의 AL리그 순위를 보면,

1-1-1-1-2-1-1-1-1-3

그야말로 50년대를 지배했으며, 내셔널 리그의 강팀 다저스에게 준우승이라는 고배를 계속 마시게끔 했다.

(1954년에는 인디언스가, 1959년에는 화이트삭스가 리그 우승)

M&M포로 불리운 로저 매리스와 미키 맨틀

1960년대에 접어서도 양키스는 여전했으며, 1960년부터 5년 연속 리그 우승, 61년과 62년에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해냈다.

이 시기에 그 유명한 M&M포(맨틀&매리스)가 리그를 주름잡았으며, 1961년에 로저 매리스가 1927년 루스의 60홈런 기록을 마침내 경신해내기도 했다.

이 시기의 주요 선수로는 미키 맨틀, 요기 베라, 조 디마지오, 필 리주토, 찰리 켈러, 길 맥더갈드, 토미 헨릭, 스너피 스턴와이스, 조 고든, 엘스턴 하워드, 행크 바우어, 로저 매리스, 빌 스코론, 클리트 보이어, 톰 트레시, 화이티 포드, 빅 래스키, 앨리 레이놀즈, 스퍼드 챈들러, 에드 로팟, 타이니 보넘, 랄프 테리가 있다.



암흑기, 부흥 그리고 암흑기 (1965년 ~ 1992년)

제국의 명성을 되찾게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구설수를 낳았던 조지 스타인브레너

1964년에 구단주가 방송국 CBS로 바뀐다. 방송국이 돈을 벌려면 역시 방송 사업으로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CBS는 단기적인 성적에 집착하게 된다. 그 일례가 인수 첫 시즌 월드 시리즈 우승에 실패한 감독 요기 베라를 경질한 것이다.

이 외에도 유망주 수급 문제 등 다른 자잘한 문제들이 겹쳐 양키스의 기나긴 전성기, 올드 그레이트 양키스가 막을 내리고 암흑기에 접어들게 된다.

양키스가 하이랜더스에서 개명을 하고 난 후 지금까지 최하위를 두번 했는데, 그 중 한번이 이 시기의 1966년이다.


이 시기에, 양키스의 역사에서 꼭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다.

지는 것을 극도로, 극도로 싫어하는 스타인브레너의 과감한 투자는 얼마 전 극적으로 타결된 노사협상에 자주 오르내리던 사치세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스타인브레너는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자격정지를 받게 되는데, 이때 단장 게이브 폴이 필사적으로 팜을 재건하고, 트레이드를 벌이고, 선수를 지켜내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스타인브레너가 돌아와 돈을 질러 레지 잭슨, 캣피시 헌터 등의 대선수를 영입하며 다시 2년 연속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다시금 전성기가 열리는 듯 했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스타인브레너는 상당히 괴팍한 사람이었고, 구단 수뇌부, 선수들과 상당한 마찰을 빚었다. 첫 17년 동안 17번 감독을 교체했고, 25년 동안 11번이나 단장을 교체했다.

당연히 팀이 잘 될 리가 없었고, 그 요기 베라가 양키스와 의절하는 데까지 가기도 했다.

심지어 데이브 윈필드의 자선단체 운영의 뒷조사를 하다가 적발, 영구제명을 당하기까지에 이른다.

비록 1993년 복권되지만, 스타인브레너의 폭정 덕에 양키스는 혼란스러웠으며, 사상 최악의 암흑기에 빠진다.

하이랜더스 시절 이후 두번의 최하위 중 나머지 한 시즌이 이 시기의 1990년이다.

이 때 레지 잭슨, 빌리 마틴,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잭슨의 계약 기간 5년 동안 항상 개싸움을 벌여서, 브롱스 동물원이란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이 시기의 주요 선수로는 윌리 랜돌프, 그렉 네틀스, 로이 화이트, 서먼 먼슨, 돈 매팅리, 리키 헨더슨, 바비 머서, 데이브 윈필드, 레지 잭슨, 론 기드리, 멜 스토틀마이어, 프리츠 피터슨, 토미 존, 데이브 리게티, 루디 메이, 리치 고시지, 스파키 라일, 알 다우닝이 있다.



악의 제국 (1993 ~ 2009년)

양키스 코어 4로 불린 4명의 전설 앤디 페티트, 데릭 지터, 마리아노 리베라, 호르헤 포사다

갈 데까지 간 스타인브레너가 잠시 제명되고, 그가 잘랐던 감독 출신인 진 마이클이 단장으로 부임한 후, 드래트프에서 데릭 지터를 뽑고, 마리아노 리베라, 앤디 페티트 등을 얻는 등 팜을 재정비하고 중흥기를 열기 시작한다.

폴 오닐 등 외부에서 영입한 선수들도 힘을 보태 다시 강팀으로 떠오른 양키스는 결국 1996년, 18년 만에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예전의 영광을 되찾았다.

이듬해인 1997년 시즌에는 디비전시리즈에서 미끄러졌지만, 1998년부터 2000까지 3년 연속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 이후로 현재까지 월드 시리즈에서 2년 연속으로 우승하는 사례는 나오고 있지 않다.

다만 2001년 월드 시리즈에서 석패한 이후, 2007년까지 계속 포스트시즌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다가 스타인브레너가 건강 문제로 아들 할 스타인브레너에게 자리를 물려준 뒤인 2009년에 다시 우승을 차지했다.


참고로 이 때 양키스의 신나는 돈지랄 덕에 악의 제국이란 간지나는 별명을 얻었다.

이 시기의 주요 선수로는 데릭 지터, 호르헤 포사다, 버니 윌리엄스, 알렉스 로드리게스, 폴 오닐, 제이슨 지암비, 웨이드 보그스, 티노 마르티네스, 자니 데이먼, 마쓰이 히데키, 앤디 페티트, 마이크 무시나, 마리아노 리베라, 로저 클레멘스, 데이비드 콘, 데이비드 웰스, 올랜도 에르난데스, 지미 키, 왕젠민, 라미로 멘도사가 있다.



현재 (2010년 ~ )

지터의 뒤를 이을 양키스의 전설로 기대받고 있는 애런 저지

양키스의 첫 우승인 1923년 이후, 80년대를 제외한 모든 시대에 우승을 했었다. 그리고 2020년대에 접어든 지금, 80년대 말고도 2010년대에도 우승을 한번도 하지 못했다는 결과가 남았다.

다만 80년대의 양키스는 사상 최악의 암흑기였고, 10년대의 양키스는 꾸준히 좋은 성적을 냈지만 00년대 중반의 그때처럼 계속 포스트시즌에서 미끄러졌다는 차이가 있다.

최다 우승에 빛나는 그 팀이 어느덧 마지막 우승으로부터 12년에 달하는 세월이 지났으며, 그 시기 동안 자주 포시에 갔지만 우승을 못하니 팬들과 구단의 입장에선 속이 탈 노릇이다.

참고로 10년대에 가장 성적이 안 나왔던 시즌은 84승의 2014년과 16년. 14년에는 지구 2위였지만 16년에는 지구 4등이었다.

2022년 시즌에는 애런 저지가 1961년의 로저 매리스의 AL 홈런 기록을 경신하며 역사에 남는 시즌을 보냈고, 2023년 시즌에는 도밍고 헤르만이 MLB 역대 24번째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2023년 시즌 현재 양키스는 카를로스 로돈, 지안카를로 스탠튼, 애런 저지를 비롯한 많은 선수들이 부상으로 삐걱거리며 기대치를 보여주지 못하고 힘겹게 와일드카드 자리를 경쟁 중이다.

이 시기의 주요 선수로는 브렛 가드너, 로빈슨 카노, 커티스 그랜더슨, 마크 테세이라, 게리 산체스, CC 사바시아, 다나카 마사히로, 델린 베탄시스, 데이비드 로버트슨이 있고,

주요 현역 선수들로는 호세 트레비노, 앤서니 리조, 글레이버 토레스, DJ 르메이휴, 조시 도널드슨, 앤서니 볼피, 해리슨 베이더, 아이재아 카이너팔레파, 애런 저지, 지안카를로 스탠튼, 게릿 콜, 카를로스 로돈, 네스터 코르테스, 루이스 세베리노, 도밍고 헤르만, 프랭키 몬타스, 클라크 슈미트, 클레이 홈즈, 완디 페랄타, 루 트리비노, 론 마리나치오, 마이클 킹, 토미 케인리, 키넌 미들턴, 조나단 로아이시가, 지미 코데로, 스캇 에프로스가 있다.



홈구장 변천사

'루스가 지은 집'으로 불렸던 구 양키 스타디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양키스의 홈구장 양키 스타디움

'01~'02 오리올 파크 (볼티모어)

'03~'12 힐탑 파크

'13~'22 폴로 그라운드 IV (뉴욕 자이언츠와 공용)

'23~'73 구 양키 스타디움

'74~'75 셰이 스타디움 (뉴욕 메츠와 공용)

'76~'08 구 양키 스타디움

'09~현재 양키 스타디움


앞서 설명했듯 힐탑 파크의 위치는 하이랜더스의 어원이 되었다. 그밖에 힐탑이라는 이름도, 언덕 위라는 뜻이 있기도 하다.

그러다 1911년에 원래의 폴로 그라운드가 대화재로 소실되었고, 두 달간의 보수 기간 동안 하이랜더스와 자이언츠는 함께 힐탑 파크를 공유했다.

이후 1913년부터 1922년까지 하이랜더스는 자이언츠와 함께 폴로 그라운드를 공유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이랜더스가 언덕 위에서 내려오니 Highlanders라는 팀명은 맞지 않게 되었고, 이후 양키스로 개명한다.


1922년 시즌이 끝난 후, 양키스는 폴로 그라운드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야 원래 집주인 자이언츠가 있는데 갑자기 양키스가 루스의 등장으로 팬들을 다 가져가더니 자신들과 월드 시리즈에서 맞붙기까지 했으니.

그래서 강 건너 브롱스에 새 구장을 지었고, 그게 구 양키 스타디움이다.

구 양키 스타디움이 지어진 배경엔 결국 루스가 있었고, 그래서 이 구장의 별명이 루스가 지은 집(The House that Ruth Built)이다.


70년대 잠깐 메츠와 함께 셰이 스타디움을 공용하게 된 배경에는 역시 스타인브레너가 있었다.

스타인브레너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구 양키 스타디움을 개조하는 것이었다. 구장 환경이 점점 악화되자 양키스는 다른 곳에서 경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메츠는 양키스에게 셰이 스타디움을 개방하는 것을 거부했고, 그래서 뉴저지주에 새 경기장을 짓는 것이 제안되었다.

그런데 양키스가 뉴욕을 떠날 수는 없지 않는가. 1972년 중반에 뉴욕 시장이 개입해, 경기장을 매입한 후, 2년간의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시작했다. 메츠에겐 2년 동안 양키스의 홈구장 공용을 강요했다.


2008년은 유서 깊은 구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마지막 시즌이었다.

양키 스타디움의 마지막 시즌과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올스타전은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9월 21일엔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가 열렸으며, 경기가 끝난 후 데릭 지터는 관중들에게 연설하며 수년간의 성원에 감사를 표했다.

이후 2009년 시즌 초에 구 양키 스타디움에서 북쪽으로 한 블럭 떨어진 곳에 새 양키 스타디움을 개장했다. 참고로 현 양키 스타디움의 별명은 스타인브레너가 지은 집(The House that George Built)이다.



라이벌리


양키스는 뉴욕 뿐만이 아닌 미국 전역에서 엄청난 인기와 두터운 팬 층을 지녔다.

물론 빠가 까를 만든다고, 엄청난 반감과 두터운 안티팬 층도 지녔다.

때문에 직접 교류할 기회가 잦은 AL팀들 팬들 사이에선 반양키스 정서가 많이들 퍼져있지만, 따로 특기할 만한 라이벌리를 소개한다.



양키스 - 레드삭스 라이벌리

미국 프로 스포츠 최대의 라이벌 관계

2003년 ALCS 7차전 끝내기 홈런을 친 애런 분

양키스의 강팀으로써의 역사는 베이브 루스 이적 이후인데, 루스가 어느 팀 출신인가?

레드삭스는 루스와 함께 1916, 18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고, 루스를 판 이후 밤비노의 저주에 빠진다. 양키스의 부상과 레드삭스의 하락이 맞물린 시점이 베이브 루스의 이적이다.

때문에 레드삭스 팬들이 이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루스 팔고 우리는 80년 동안 우승도 못했는데, 쟤네는 루스 사가고 27번이나 우승하지 않았는가?

사실 얘네 둘 사이의 관계는 90년대에 접어들고 팀 레전드 선수인 로저 클레멘스나 웨이드 보그스 같은 선수들이 우승 좀 해보고 싶어서 양키스로 이적하는 일이 생기고, 레드삭스가 포시에 양키스랑 맞붙으면서 감정이 폭발, 그때부터 상당히 유명해진 관계다.

물론 그때부터 주목 받은거지, 그 전에 이런 감정이 아예 없었냐면 그건 아니다. 양키스가 잘 나갈땐 레드삭스가 못했고, 레드삭스가 잘 나갈땐 반대였기 때문에 덜 주목 받은거다.


주요 경기

1904년 리그 타이틀 결정전 (레드삭스 승리)

1949년 리그 타이틀 결정전 (양키스 승리)

1978년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타이브레이커 게임 (양키스 승리)

1999년 ALCS (양키스 승리)

2003년 ALCS (양키스 승리)

2004년 ALCS (레드삭스 승리)

2018년 ALDS (레드삭스 승리)

2021년 ALWC (레드삭스 승리)


통산 정규시즌 전적  NYY 1247 - 14 - 1038 BOS

통산 포스트시즌 전적  NYY 12 - 12 BOS



양키스 - 자이언츠 라이벌리

1962년 월드 시리즈에서 서로 맞붙은 미키 맨틀과 윌리 메이스

양키스의 창단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팀이 있으니, 그게 뉴욕 자이언츠이다.

같은 도시에서 경쟁하던, 아니 더 나아가서 아예 지금의 두산-LG처럼 한 구장을 같이 공용하던 관계다! 다만 그때는 인터리그 같은 제도도 없었고, 올스타전도 생기기 전이었기에 월드 시리즈에서만 서로 맞붙을 수 있었던 관계다.

그렇게만 만날 수 있던 관계인데도, 무려 3년 연속 서로 월드 시리즈에서 맞붙었다.


주요 경기

1921년 월드 시리즈 (자이언츠 승리)

1922년 월드 시리즈 (자이언츠 승리)

1923년 월드 시리즈 (양키스 승리)

1936년 월드 시리즈 (양키스 승리)

1937년 월드 시리즈 (양키스 승리)

1951년 월드 시리즈 (양키스 승리)

1962년 월드 시리즈 (양키스 승리)


통산 정규시즌 전적  NYY 10 - 5 SF

통산 포스트시즌 전적  NYY 23 - 1 - 19 SF



양키스 - 다저스 라이벌리

1977년 월드 시리즈 6차전에서 레지 잭슨은 3연타석 초구 홈런을 쳐냈다.

다저스를 월드 시리즈 최다 준우승 팀으로 만든 원흉이 바로 양키스다. 얘네 둘끼리 11번이나 만났으며, 그중 8번이나 양키스가 승리했다.

그리고 사실 다저스도 뉴욕에 있던 구단이다. 다저스가 로스앤젤레스로 떠난 이후에는 월드 시리즈에서 4번 대결 했으며, 서로 2승 2패을 주고 받았다.


주요 경기

1941년 월드 시리즈 (양키스 승리)

1947년 월드 시리즈 (양키스 승리)

1949년 월드 시리즈 (양키스 승리)

1952년 월드 시리즈 (양키스 승리)

1953년 월드 시리즈 (양키스 승리)

1955년 월드 시리즈 (다저스 승리)

1956년 월드 시리즈 (양키스 승리)

1963년 월드 시리즈 (다저스 승리)

1977년 월드 시리즈 (양키스 승리)

1978년 월드 시리즈 (양키스 승리)

1981년 월드 시리즈 (다저스 승리)


통산 정규시즌 전적  NYY 8 - 8 LAD

통산 포스트시즌 전적  NYY 37 - 29 LAD



양키스 - 메츠 라이벌리

마이크 피아자의 부러진 배트. 이 장면 이후 로저 클레멘스가 부러진 배트를 피아자에게 던진다.

서로의 홈구장이 뉴욕 지하철로 연결되어 있어, 서브웨이 시리즈라는 별칭이 붙었다. 다만 이 쪽은 메츠 쪽이 양키스를 라이벌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두 팀 간의 경기에 별칭을 붙여 인터리그로 운영하는게 수익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주요 경기

2000년 월드 시리즈 (양키스 승리)


통산 정규시즌 전적  NYY 78 - 60 NYM

통산 포스트시즌 전적  NYY 4 -1 NYM



양키스 - 로열스 라이벌리

1977년 ALCS 5차전에서 벌어진 조지 브렛과 그렉 네틀스 간의 난투극.

로열스가 창단 초 맞이한 전성기 때, 포스트 시즌에서 항상 로열스를 가로 막았던 팀이 양키스다. 무려 3년 연속이나 AL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맞붙었다.

때문에 난투극을 종종 벌이기도 했고, 그 유명한 조지 브렛의 파인타르 사건도 두 팀간의 경기에서 벌어진 일이다.

다만 그 시절이 지나고 로열스가 기나긴 암흑기에 빠지고, 로열스가 잠깐 중흥기에 접어 들었을때는 양키스와 포스트 시즌에서 만나지는 않았다. 때문에 현재에 이르러선 올드팬들이나 기억하고 있는 라이벌리다.


주요 경기

1976년 ALCS (양키스 승리)

1977년 ALCS (양키스 승리)

1978년 ALCS (양키스 승리)

1980년 ALCS (로열스 승리)


통산 정규시즌 전적  NYY 310 - 202 KC

통산 포스트시즌 전적  NYY 9 - 8 KC



한국인 선수

박찬호는 양키스 소속으로 빅 리그 무대를 밟은 첫번째 한국인이다.

박찬호가 2010년 시즌에 한 시즌 뛰기도 했다. 추신수와 맞대결을 하기도 했으며, 설사 인터뷰도 이 때 나왔다.

최지만이 2017년 시즌에 한 시즌 뛰었다. 이 시기 최지만은 전형적인 AAAA리거였기 때문에 활약은 미미했다.

박효준이,,, 2021년에 한 경기를 뛰긴 했다. 이후 파이러츠로 트레이드되서 잠-깐 반짝했다.



그 외


양키스에는 독특한 규정이 있는데, 바로 두발과 용모 규정이다.

지금에서야 이런 규칙이 있는 팀은 양키스 하나 뿐이지만, 1973년 시행 이전인 1967년부터 1999년까지 신시내티 레즈가 이런 규칙이 있었다.

첫 시행 년도를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이런 규정을 만든건 스타인브레너다.



영구 결번

1
빌리 마틴
2
데릭 지터
3
베이브 루스
4
루 게릭
5
조 디마지오
6
조 토레
7
미키 맨틀
8
빌 디키
8
요기 베라
9
로저 매리스
10
필 리주토
15
서먼 먼슨
16
화이티 포드
20
호르헤 포사다
21
폴 오닐
23
돈 매팅리
32
엘스턴 하워드
37
케이시 스텡겔
42
마리아노 리베라
44
레지 잭슨
46
앤디 페티트
49
론 기드리
51
버니 윌리엄스

폴 오닐이 영구결번 된 이후에 너무 영구결번이 후하고, 현역 선수들이 달 번호가 없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모뉴먼트 파크에 헌액된 인물들

선수로서 헌액
루 게릭베이브 루스조 디마지오미키 맨틀서먼 먼슨엘스턴 하워드
로저 매리스필 리주토레프티 고메즈화이티 포드빌 디키요기 베라
앨리 레이놀즈돈 매탱리레지 잭슨론 기드리레드 러핑재키 로빈슨
마리아노 리베라티노 마르티네스리치 고시지폴 오닐버니 윌리엄스윌리 랜돌프
멜 스토틀마이어호르헤 포사다앤디 페티트데릭 지터

감독으로서 헌액
밀러 허긴스조 맥카시케이시 스텡겔빌리 마틴조 토레


양키스 소속으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인물들

투표로 입성
베이브 루스
1936년
95.13% (1회)
루 게릭
1939년
무투표 (1회)
윌리 킬러
1939년
75.55% (4회)
허브 페녹
1948년
77.69% (8회)
빌 디키
1954년
80.16% (9회)
조 디마지오
1955년
88.84% (4회)
레드 러핑
1967년
86.93% (15회)
요기 베라
1972년
85.61% (2회)
미키 맨틀
1974년
88.22% (1회)
화이티 포드
1974년
77.81% (2회)
데이브 윈필드
2001년
84.47 (1회)
리치 고시지
2008년
85.82 (9회)
마리아노 리베라
2019년
100% (1회)
데릭 지터
2020년
99.70% (1회)

베테랑 위원회로 입성
잭 체스브로
1946년
웨이트 호이트
1969년
얼 콤스
1970년
레프티 고메즈
1972년
토니 라제리
1991년
필 리주토
1994년
조 고든
2009년

감독으로 입성
조 맥카시
1957년
밀러 허긴스
1964년
케이시 스텡겔
1966년
조 토레
2014년
구단 관계자로 입성
에드 배로
1953년
조지 와이스
1971년
제이콥 루퍼트
2013년


개인 수상 이력

MVP
'23
베이브 루스
'27, '36
루 게릭
'39, '41, '47
조 디마지오
'42
조 고든
'43
스퍼드 챈들러
'50
필 리주토
'51, '54, '55
요기 베라
'56, '57, '62
미키 맨틀
'60, '61
로저 매리스
'63
엘스턴 하워드
'76
서먼 먼슨
'85
돈 매팅리
'05, '07
알렉스 로드리게스
'22
애런 저지

사이 영 상
'58
밥 털리
'61
화이티 포드
'77
스파키 라일
'78
론 기드리
'01
로저 클레멘스
올해의 감독상
'94
벅 쇼월터
'96, '98
조 토레
올해의 신인상
'51
길 맥더갈드
'54
밥 그림
'57
토니 커벡
'62
톰 트레시
'68
스탠 반슨
'70
서먼 먼슨
'81
데이브 리게티
'96
데릭 지터
'17
애런 저지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
'84
론 기드리
'85
돈 베일러
'09
데릭 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