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자이언츠의 먼 친척형 뻘되는 구단이자 창단 이전부터 갈등을 빗어 지금까지 이어져온 양대리그가 만들어진 계기가 된 구단, 치바 롯데 마린즈에 대해 알아보자.


약칭, 통칭: ロッテ, 羅德(대만에서 정자체), 罗德(대만에서 간체), 일본롯데, 본캐(한국 한정), 지바 롯데 등. 

창단: 1949년

일본 시리즈 우승: 4회('50, '74, '05, '10)

리그 우승: 4회('50, '60, '70, '05)

홈 구장: ZOZO 마린 스타디움

마스코트: 마군(누리 닮은 놈이고 얘가 메인), 린쨩, 즈쨩, 나조 노사카나(2017년부터 등장한 생선 닮은 놈)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원년 우승자(1950~1970)

(창단 당시 모기업인 마이니치 신문. 요미우리, 아사히, 닛케이와 함께 일본 4대 일간지로 유명하다.)


1950년 마이니치 신문이 마이니치 오리온즈라는 이름으로 창단했으나, 다른 신문사가 야구단을 창단하는 꼴이 마음에 안 든 요미우리가 이에 반발했고 그 결과 요미우리를 지지하는 구단들은 센트럴 리그에, 마이니치를 지지하는 구단들은 퍼시픽 리그로 나뉘면서 우리가 아는 그 양대리그 체제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어쩌다 갈등의 씨앗이 됐지만 성적은 상당히 좋았다. 일단 원년 우승. 이거 하나만으로 말이 필요 없다. 이후 가끔씩 B클라스 들낙하는 거 빼면 그럭저럭 상위권에 들었다.


1958년부터는 다이에이라는 영화사가 운영하는 다이에이 유니온스와 합병해 다이마이 오리온즈로 활동했다. 합병 계기가 기가 막히는데, 다이에이의 구단주 나가타 마사이치가 '7팀 체제는 복잡하니 여기서 꼴등한 놈은 캐삭하자'는 제안을 했고 1957년 자기 구단이 진짜로 꼴등하자 합병시켰다. 이 양반은 이후 짤리지 않고 합병된 구단의 구단주가 되었다.


나가타가 구단주로 살아남아서 들떴는지 존속 구단인 마이니치가 반발할 정도로 존나게 독단행동을 했고 결국 마이니치가 운영을 포기하면서 지금 한국의 히어로즈와 같은 명명권으로 돈벌이를 하는 시스템으로 운영했다.


(롯데 오리온즈 시절 유니폼)


이때 1969~1970년간 명명권을 산 롯데가 딱 1970년에 우승하자 뽕에 심취했는지 아예 구단을 사버렸다.


이거랑 별개로 롯데 이전의 도쿄 오리온즈 시절엔 성적이 구렸다. 7년 연속 B클라스로 비밀번호를 찍던 시기였음.


이 시기 주요 선수로는 정밀기계 코야마 마사아키, 롯데에만 계속 있었던 다이고 타케오, 선수는 아니지만 감독으로서 뛰어난 지도력과 쇼맨쉽을 선보였던 일본 야구계의 천황이자 재일교포 카네다 마사이치(한국명 김경홍)가 있다.


집시 롯데와 암흑기(1973~1985)

(홈 구장이 없던 시절 임시적으로 사용했던 미야기 구장. 지금은 여러 개선 과정을 거쳐 라쿠텐의 홈구장이 되었다.)


1973년부터 기존에 쓰던 도쿄 스타디움이 철거되서 홈 구장이 없어진 바람에 이곳 저곳에서 홈 경기를 치뤘다. 미야기 구장을 중심으로 썼지만 타 구단 홈 경기장도 빌려쓰는 등 집시처럼 떠돌아다녔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 집시 롯데.


공식 홈 구장 없어서 비아냥을 좀 듣긴 했지만 그래도 성적은 의외로 잘 나왔다. 집시 2년차인 1974년에 일본 시리즈 2번째 우승을 따냈고 1975년 딱 한번 4등한 거 빼면 3등 밑으로 내려간 적도 없다.


그래도 홈 구장이 없으면 불편한지라 1978년부터 카와사키 구장으로 터를 옮겼다. 상당히 낡고 구린 곳(요코하마의 전신인 타이호가 버린 곳)이지만 그래도 장훈의 3000안타를 달성한 곳이라는 의의를 둘 수 있는게 천만다행.


구린 구장에서 이따금씩 상위권에 오르는 등 나름대로 잘 버티긴 했다. 문제는 이때부터 암흑기가 찾아왔다.


이 시기 주요 선수로는 통산 최다 안타 기록 보유자 장훈, 전에 말한 카네다 마사이치의 동생 카네다 토메히로, 뛰어난 실력보다 머리숱이 더 유명했던 대머리 투수 무라타 쵸지, 영결은 아니지만 롯데의 마지막 8번 아리토 미치요(한국명 김유세) 등이 있다.


암흑기 사이 2위 몇번(1986~2004)

(롯데 역대 최고의 외국인 타자 레온 리. 통산 최고 타율 기록 보유자다.)


이 팀의 암흑기를 요약하자면 1986년부터 1994년까지 B클래스였고 1995년 2위 반짝한 다음 1996년부터 2004년까지 다시 B클래스를 찍었다. 1995년 2위 안 했으면 무려 19년 동안 하위권에서만 놀았다.


그나마 잘했던 1995년,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2위까지 올렸는데 단장 히로오카 타츠로가 감독이랑 사이 안 좋다는 이유로 짤라버렸고 그 뒤로 온 후임 에지리 아키라가 꼴등으로 보기 좋게 말아쳐먹었다. 참고로 에지리는 히로오카의 와세다대 후배라 전형적인 낙하산이라 볼 수 있다.


이 기간의 절정이라 볼 수 있는 1998년


무려 18연패를 달성하며 당시 기준 아시아 프로스포츠 최다 연패 기록을 갈아치웠다. 한국 농구에서 고양 오리온즈가 32연패를 하기 전까지 저게 최고 기록이었다. 18연패 확정 당시 날짜가 7월 7일이라 팬들은 칠석의 비극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시기 주요 선수로는 일요일의 남자 오노 신고, 고글맨 코미야마 사토루, 하츠시바 키요시, 호리 코이치 등이 있다.


시작하기 직전 한신팬들에게 미리 PTSD 경고.


일본 스포츠계 최고의 밈의 원조(2005~2010)

(33-4로 매우 유명한 2005년 일본 시리즈. 이때 현 두산 감독인 이승엽이 홈런 3개를 쳐내며 한신의 대가리를 깬 일화가 있다.)


2005년 비밀번호 탈출과 동시에 리그 우승에 성공했고 이해 일본 시리즈에서 한신을 상대로 위에 짤처럼 한신을 밟아버리며 우승을 차지했다. 스코어만 봐도 막장인데 저때 나온 무홈런, 최소 득점, 최저 ERA(8.63) 등 막장을 더 부각시킨 불명예 기록들도 만들어줬다.


이후 2006년, 08~09년을 빼면 매번 가을야구에 올라서며 나름대로의 강팀으로서 입지를 다졌다.


2010년, 롯데는 또 다시 밈을 만들어냈다. 물론 33-4보단 임팩트가 덜하지만.

가을야구인 클라이맥스 시리즈 막차(3위)에 타서 2위(세이부), 1위팀(소뱅)의 대가리를 깨고 일본 시리즈 상대인 주니치를 상대해 4승 3패로 승리하면서 일본 최초로 3위팀이 일본 시리즈에 우승하는 진기록을 만들었다. 이때 붙혀진 밈이 바로 프로야구 역대 최대의 하극상(プロ野球史上最大の下剋上). 이때 김태균이 데뷔 처음으로 우승반지를 득템했다.


이 시기 주요 선수로는 다른 의미로 소뱅 레전드가 된 니시오카 츠요시, 롯데 포수 GOAT 사토자키 토모야, 브랜든 레어드전까지 마지막 30홈런 타자 이승엽, 불륜왕 키요타 이쿠히로, 이구치 타다히토, 유리몸 오기노 타카시, 오오무라 사부로(등록명 사부로. 가타가나로 サブロー를 썼다.), 이마에 토시아키, 네모토 슌이치 등이 있다.


콩가루 집안과 롤로코스터 같은 성적(2011~현재)

(그 유명한 사사키 로키 이전에 에이스 역할을 착실히 수행한 이시카와 아유무.)


그 뒤로는 몇년 잘하고 몇년 못하고의 반복이다. 2년 잘하고 1~2년 못하고.


2011년엔 올스타전 당시 동일본 대지진때문에 국가가 고생하는 와중에 요미우리 구단주 와타나베 츠네오가 야구로 희망을 줘야한다는 쌉소리와 함께 개막 강행을 주장하다 퇴짜먹은 일에 개빡친 야구팬들이 야쿠르트 응원가 도쿄온도 반주에 뒤져라 요미우리를 열창했는데, 이때 구장이 바로 롯데 홈구장이다.

일본 국민들에게 주적으로 낙인찍히고 시원하게 욕쳐먹는 모습이다.


2015년 이대은을 영입했고 전반기 선발, 후반기 불펜내지 선발로 1년간 그럭저럭 굴리면서 잘 써먹었다. 성적이랑 별개로 워낙 잘 생긴 편이라 얼빠가 꽤 많았다고 한다.


2017년은 시작부터 존망하면서 늘 꼴등이었고,


2020년부터 2021년까지 2년간 잘나가다 2022년 사사키 로키가 잠재력을 터트렸음에도 불구하고 5위에 머물렀다.


다만 모기업은 틈만나면 권력 투쟁이 일어났는지라 마린즈도 이 시기에 좀 휘청거리긴 했다. 신동주 ㄷ 신동빈이 한창 맞다이를 깔 때 마린즈 매각설도 종종 나왔다.


이 시기 주요 선수로는 이시카와 아유무, 후타키 코타, 사사키 치하야, 우치 타츠야, 오기노 타카시, 에무라 나오야, 현직 주장 나카무라 쇼고, 무툴포수 타무타 타츠히로, 퍼펙트 게임 달성자 사사키 로키, 마지막 30홈런 타자 브랜든 레어드, 현역 최중량 타자 이노우에 세이야, 마무리 투수 마스다 나오야, 카쿠나카 카츠야 등이 있다.


홈 구장

ZOZO 마린 스타디움

바닷 바람이 워낙 강하게 불어 홈런이 존나게 안 나오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2019년 펜스를 앞당기고 홈런 라군이라는 특별 좌석까지 마련했지만 오히려 타팀이 꿀빨면서 개쳐맞는 중이다. 없었을 땐 2011년 홈런왕 세이부의 나카무라 타케야(48개)보다도 적게 친 적(팀 홈런 46개)이 있다.


라이벌리

치바와 가까운 사이타마 덕에 세이부와 지역 라이벌 분위기라 있는 편이고



과거 미야기 관련 인연으로 생긴 라쿠텐과의 라이벌리도 있다. 딱히 막 악연이 많이 없는 팀인지라 그나마 골라봐야 얘네 둘 정도임.


한국인 선수(교포들은 최대한 배제)

백인천(왼쪽)과 장훈(오른쪽. 사진은 요미우리 시절.)이 각각 4년, 2년간 뛰었다. 특히 장훈은 롯데에서 말년 2년동안 통산 3000안타를 달성했다.


2004년부터 2005년까지 이승엽이 롯데에서 뛰었다. 2019년 브랜든 레어드가 30홈런을 칠 때까지 마지막 30홈런(2005년) 타자였다. 금액은 서로 맞춰줄 수 있는데 1루수로서 뛰고 싶다고 요미우리로 이적했다. 당시 이승엽은 후쿠우라 카즈야에 밀려 지명타자와 좌익수로 거의 뛰었다.


김태균이 2010년부터 2011년까지 뛰었다.

김도망이니 김지진이니 하며 조롱을 받았지만 그래도 팀내 1위인 21홈런과 더불어 이승엽 이후 최초로 20홈런 용타가 됐고 무엇보다 일본 시리즈가서도 똑딱질만 했지만 무난하게 0.345를 치며 우승반지도 먹어봤다. 의외로 한국인 최초 홈런 레이스 1위에 올라봤다.


이대은이 2015년부터 2016년까지 있었다.

데뷔 시즌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제구가 불안한게 흠이긴 했지만 9승 9패 ERA 3.23으로 준수하게 활약했다. 다만 그 뒤론 코치 사인 씹는 등 팀내에서 단단히 찍혀 2군 다승왕할 동안 콜업 못받고 그대로 방출. 비슷한 시기 있던 백차승은 미국으로 귀화해서 논외.


그외

응원 방식이 J리그에 영향을 크게 받아서 축구 응원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이로인해 서포터즈 문화가 야구계에서 가장 활성화되어 있다. 지금의 서포터즈는 team 26.


선수 이름걸고 먹거리 메뉴내면 그 선수가 ㅈ망하는 징크스가 있었다. 짤에서 김태균이 들고있는 햄버거는 김치태균버거인데, 저거내고 1년만에 런했다. 꽤 맛있었다는 반응도 있어서 메뉴 자체의 평은 좋은 듯.

이런 짓의 화룡정점이 바로 2017년. 주축 선수들이 자기 이름 걸고 메뉴를 냈고 보기좋게 꼴찌로 추락했다.


다음은 니혼햄. 파리그 끝내면 세리그 대신 시즌 진행으로 잠깐 넘어가볼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