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필요없는 일본 최고의 인기 구단이자 뛰어난 성적, 미디어 기업인 모기업의 뛰어난 전파력으로 지금도 일본 야구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이나 찬란한 행적에 가려진 더러운 만행으로 안티도 가장 많은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해 알아보자.


약칭, 통칭: 요미우리(読売. 조롱의 의미로 번체자 讀賣도 쓰임.), 요미(한국에서 가끔 쓰임.), 교진(巨人. 현지, 국내 NPB팬이 부를 때 쿄진이라고도 불림.), 교진군(巨人軍. 언론들이 간혹 씀.)

창단: 1934년

일본 시리즈 우승: 22회('51~'53, '55, '61, '63, '65~'73, '81, '89, '94, '00, '02, '09, '12)

리그 우승: 38회('51~'53, '55~'59, '61, '63, '65~'73, '76~'77, '81, '83, '87, '89, '90, '94, '96, '00, '02, '07~'09, '12~'14, '19~'20)

홈: 도쿄 돔

마스코트: 자빗


양대리그 이후(1950~1964)

(초창기 팀 에이스로 활약한 재일교포 나카가미 히데오. 한국명은 이팔룡이었으며,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이 강했는지 6.25 전쟁 당시 돌던 루머때문에 귀화한 걸 생전에 후회했다고 한다.)


원래는 미국 대표팀과 친선전을 위해 모인 일본 야구 대표팀을 주축으로 창단됐다. 그때 과정까지 쓰면 너무 기니 양대리그 분리 이후부터 썼음을 알림.


양대리그 분리 이후 1962년까지 단 한 번도 4위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었고 우승만 8번이나 했다. 일본 시리즈 우승은 5번 했다.


단일 시즌 최다승인 99승을 거둔 난카이(현 소뱅)를 일본 시리즈에서 승리한 적도 있었지만 반대로 니시테츠(현 세이부)에게 리버스 스윕을 허용하는 등 흑역사도 있었지만 어떤가. 강팀인 게 중요하지.


야만없이긴 하지만 1954년과 1960년에 우승했다면 11년 연속 우승이라는 자민당 수준의 독재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1962년, 창단 최초로 4위로 내려갔지만 폼은 일시적이어도 클라스는 영원하던가, 그 다음해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다만 이 시기 벳쇼 아키라라는 투수를 탬퍼링 시키려는 논란을 터트려 이때부터 슬슬 사고칠 싹수가 좀 보이긴 했다.


이 시기 주요 선수로는 양대리그 이전까지 포함해서 일본의 사이 영 사와무라 에이지, 나카가미 히데오, 쿠로사와 토시오, 빨간 배트 카와카미 테츠하루, 최초의 외노자 빅토르 스타루핀(일본명 스다 히로시), 아오타 노보루, 모리 마사아키 등이 있다.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V9(1965~1977)

(V9 시기 감독 카와카미 테츠하루. 그러나 감독 시절 유구치 토시히코란 유망주 투수가 병원에서 요양 중 사망하자 적반하장식의 태도로 망언을 뱉어 논란이 되었다.)


이 시기 요미우리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존나 쌨다.


성적은 성적대로 좋았고 마침 모기업인 요미우리는 전국지, 지상파 니혼 테레비덕에 선전하기 편했단 점이 합쳐져 일본 국민의 절반 이상을 팬으로 만들었다. 오죽하면 이때 일본 국민의 3분의 2가 요미우리팬이라는 소리도 나올 정도니 말이다.


실력, 인기 두 마리 토끼 다 잡은 요미우리를 막을 팀은 하나도 없었고 1973년까지 브레이크 없이 혼자서 미쳐 날뛰었다.


아까 카와카미가 유구치의 죽음 이후 망언을 뱉었다 했는데, 이때 망언의 파급효과가 커서 요미우리 이미지 타격이 컸고 지명된 선수들은 하나 둘씩 거부를 선언할 만큼 인식이 안 좋아졌다.


그와중에 주니치에게 0게임차로 우승을 빼앗기자 카와카미는 감독에서 물러났고 나가시마 시게오가 감독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나가시마는 카와카미 때문에 부담감이 컸단 걸 고려해도 운영을 ㅈ같이 못했고 결국 감독 첫해만에 창단 첫 최하위로 팀을 처박았다.


이건 선수 은퇴하자마자 1년 뒤 난데없이 너 감독해라는 식으로 앉혔으니 벌어진 참사라 보는 게 맞다. 이후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했으니. 근데 일본 시리즈 땐 한큐(현 오릭스)에게 2년 연속으로 우승을 대줬다.


이 시기 주요 선수로는 일본 전설의 홈런왕 오 사다하루(대만명 왕전즈), 미스터 베이스볼 나가시마 시게오, 악동이자 에이스 호리우치 츠네오, 타카하시 카즈미, 모리 마사아키, 쿠로에 유키노부, 도이 쇼죠, 시바타 이사오, 다케다 시게루,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 니우라 히사오(한국명 김일융) 등이 있다.


추악한 민낯의 서막과 도쿄돔(1978~1992)

(요미우리 외국인 타자 GOAT 워렌 크로마티. 실력은 물론, 쇼맨쉽도 뛰어나 여러 기행들이 많기로 유명했다.)


V9 시절이 일본 역사에 길이남을 개씹사기라 그렇지 여전히 요미우리는 강팀이었다. 1979년 5위를 빼면 늘 3위내엔 들었고 우승도 5번했다.


특히 1981년 니혼햄과 일본 최초의 덕아웃 시리즈(in 고라쿠엔)에서 승리와 1989년 일본 시리즈에서 킨테츠를 상대로 리버스 스윕 우승은 이 시기의 하이라이트.


다만 저거 두 개 빼면 세이부의 호구노릇을 착실히 수행했다. 총 3번 붙었는데 5승 12패. 그나마 1983년 3승 4패로 아쉽게 진 거 빼면 세이부한테 매번 호구잡혔다.


1988년, 너무 낡은 기존의 고라쿠엔 구장을 철거하고 도쿄 돔으로 홈 구장을 이전했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이 시기부터 요미우리의 추악한 만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77년 세이부가 에가와 스구루라는 선수를 1라운더로 입단시키려 했는데, 에가와는 요미우리 아님 졷까란 마인드로 교섭을 거부, 이후 요미우리와 드래프트 번외로 계약을 채결해 입단했다. 사실상 탬퍼링이다.


규정이 7월 31일부터 일본에서 중, 고, 대학 야구에서 뛴 적이 있는자로 제정됐고 계약을 체결한 날은 세이부가 지명을 포기한 11월 20과 드래프트날 11월 22일 사이 21일이기에 요미우리는 문제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세리그 회장인 스즈키 류지는 이러면 바꾼 의미가 없다며 계약을 무효로 간주했고 이에 빡친 요미우리는 아예 드래프트에 불참했다.


(일명 공백의 1일 사건.)

에가와는 한신에 지명됐지만 요미우리가 어떻게든 뻐팅겼고, 결국 한신이 일본야구기구의 지시에 따라 지명권을 주되 요미우리의 코바야시 시게루라는 투수를 받는 조건으로 트레이드됐다. 이후 코바야시와 에가와 둘다 에이스로서 활약해서 윈윈이긴 했다.


아무튼 이 시기 주요 선수로는 워렌 크로마티, 에가와 스구루, 세리그 마지막 퍼펙트 게임 마키하라 히로미, 사이토 마사키, 쿠와타 마스미, 야마무라 카즈히로, 나카히타 키요시, 시노즈카 카즈노리, 현 감독 하라 타츠히로, 코마다 노리히로, 푸른 번개 마츠모토 타다시 등이 있다.


의외로 우여곡절(1991~2006)

(요미우리 시절 일본 최고의 인기스타였던 마쓰이 히데키. 인기만 놓고보면 이치로 그 이상일 정도.)


못해도 3위 이내인 팀이 뭔 우여곡절이냐 싶겠지만 반대로 그런 팀이 감독에 따라 성적이 좌지우지됐으니 나름 우여곡절이라 볼 수 있다.


요미우리는 감독이 되는 과정이 까다로운 만큼 임기도 어느정도 보장해준다. 즉, 일단 감독이 되면 운영을 병신같이 안 하는 이상 4~5년간 집권이 가능하다.


일단 1993년부터 2001년까지 나가시마가 집권 2기에 들어섰는데, 처음 감독할 때랑 달리 1997년을 뺀 모든 해에 A클라스에 올랐고 리그 우승 3번에 일본 시리즈 우승 2번을 이루며 대박이라 볼 수 있다.


특히 2000년, 현역시절 ON포로 인기를 몰았던 다이에(현 소뱅)의 감독 오 사다하루와 맞붙어 승리한 일본 시리즈는 이 둘이 감독이란 이유만으로 큰 흥행을 불러왔다.


나가시마가 지도자 은퇴하며 물러난 2002년부터 하라가 2003년까지 일본 시리즈 우승 1번(2002)하며 순조롭게 이끌어갔다.


문제는 하라의 후임으로 온 호리우치 츠네오였다. 2004년, 구단이 어마어마하게 돈지랄을 해댄 덕에 단일 시즌 최다 팀 홈런인 259개로 절륜한 타선을 갖고도 3위딱에 그쳤고 2005년, 80패라는 구단 최다 패를 경신하며 경질됐다. 한가지 웃긴 건 이 양반 에이스 투수 출신인데 2년간 팀 평자가 4.5, 4.8이었다. 타고투저인 당시 상황을 감안해도 높았다.


(키요하라 카즈히로와 쿠와타 마스미. 왼쪽이 키요하라다. 요미우리 시절 파벌을 조직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걸까? 호리우치가 개판이니 선수단도 개판으로 변했다. 막 사고쳤단 건 아니고, 세이부에서 온 키요하라 카즈히로가 선수단 몇몇과 파벌을 조직해 타선수 괴롭히기, 코치나 감독을 대놓고 개기거나 말 씹는 등 사실상 모든 게 막장이었다.


흥행 ㅈ망한다고 짜른 하라가 선녀인 걸 안 프런트는 2006년, 다시 하라를 데려왔지만 호리우치가 싼 똥이 너무 커 1년동안 제대로된 운영은 커녕 호리우치 똥치우기에만 집중해 5위로 떨어졌다.


이 시기 주요 선수로는 우에하라 고지, 마쓰이 히데키, 쿠도 키미야스, 고쿠보 히로키, 이승엽, 아베 신노스케, 타카하시 요시노부, 로베르토 페타지니, 밤비노 갈베스, 니시 토시히사, 쿠와타 마스미 등이 있다.


세리그 여포 이후 퇴물(2007~현재)

(요미우리의 마지막 우승인 2012년. 니혼햄을 4승 2패로 이기고 우승했다. MVP는 우츠미 테츠야.)


이 시기 세리그 내에선 여포긴 했다. 16년동안 절반인 8번 우승했고 이중 2017년과 2022년을 빼면 매번 가을야구에 갔으니.


다만 가을야구에선 2008~9, 2012~13, 2018~19년을 빼면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게다가 이때부터 요미우리의 이미지가 사회적으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옛날엔 돈지랄로 욕먹었다면 지금은 사건사고나 망언으로 더 욕을 처먹었다.



2008년, 니오카 도모히로가 아나운서 야마모토 모나와의 불륜과 팀 동료를 괴롭혔다(수위가 너무 쌔서 안 씀.)는 의혹까지 더해져 니혼햄으로 쫓겨나듯 트레이드됐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터질 때 프로야구 개막을 강행해야한다는 개소리를 구단주가 지껄여 한창 힘들어하는 일본 대중들에게 악당으로 찍혔다. 결국 요미우리가 항복하며 개막이 미뤄졌지만

올스타전에서 11구단 팬들이 뒈져라 요미우리를 열창했고 요미우리 응원가가 나오면 단체로 야유를 퍼부었다.


2021년, 후배 폭행사건으로 욕을 먹던 나카타 쇼를 무상 트레이드로 데려오고 사설도박으로 자격정지된 타카기 코스케를 재영입하며 그렇게 추구하던 신사 이미지를 스스로 망쳤고


얼마 안 가 2022년, 사카모토 하야토의 성추문이 폭로되며 신사 이미지는 사실상 ㅈ망했다.


아무튼 여러모로 쓰레기같은 짓을 저질러도 성적은 그럭저럭 잘 나왔다. 그러나 2021년 이후 세대교체 실패의 여파가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 띄게 늘어나 가을야구도 힘들어하는 중이다.


이 시기 주요 선수로는 우츠미 테츠야, 스가노 도모유키, 아베 신노스케, 초노 히사요시, 스기우치 토시야, 사카모토 하야토, 오카모토 카즈마, 야마구치 테츠야, 스캇 매티슨, 타구치 가즈토,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마츠모토 테츠야, 마루 요시히로, 요시카와 나오키, 타이세이(본명 오타 타이세이), 티아고 비에이라 등이 있다.


홈구장

도쿄돔

일본 최초의 돔 경기장이다.

기압 유지를 위해 일부러 상승기류를 일으키는데, 이거때메 홈런이 존나 잘 나온다.

일본 전국 사회인 야구대회가 여기서 열린다.


가수들 공연장으로도 자주 쓰이는데, 여기서 공연좀 해본 가수라면 일본내에서 나름 인기있는 축에 속한다.


라이벌리

한신과 라이벌리를 형성 중이며 전통의 일전이라 불린다. 관서 vs 관동 지방팀의 대결로, 일본 최대의 라이벌 구도다.


야쿠르트

같은 도쿄팀이라는 명분으로 라이벌리를 형성 중이나 한신보단 열기가 덜한 편. 도쿄 시리즈라 불린다.


한국인 선수(사고친 조성민이나 교포는 최대한 배제)

(오 사다하루의 756호 홈런에 기뻐하며 점프하는 장훈.)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이 1976년부터 1979년까지 뛰었다. 당시 나가시마와 함께 OH포로 활약한 뒤 롯데로 이적.


정민철이 2000년부터 2001년까지 뛰었다.

당시 요미우리 투수 경쟁이 외국인이나 토종 가릴 것 없이 쟁쟁한데다 개인적으로 기복이 심했고 무엇보다 구속이 너무 안 나와 얼마 못뛰고 방출됐다.

결과적으로 무지와 안일한 생각에 구단과 선수 둘 다 피본 케이스.


정민태가 2001년부터 2002년까지 뛰었다.

그러나 정민철처럼 당시 경쟁이 쟁쟁했고, 기복이 있었지만 평타라도 칠줄 안 정민철과는 달리 그거마저 못친 정민태라 금방 방출됐다.


이승엽이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뛰었다.

롯데에서 준수한 활약을 해줬지만 수비 보장에 관한 의견차로 인해 요미우리로 이적했고 붙박이 1루수로 2년간 맹활약했다. 그러나 3년차 때 부상 이후 부진이 지속되더니 2010년 결국 방출됐다.

그거랑 별개로 한신 하나는 존나 잘패기로 유명했다.


그 외

7회 때 부르는 응원가 투혼을 담아를 안티팬들이 요미우리를 풍자하는 가사로 개사해 부르는 상혼을 담아가 유명하다. 가사는 다 쓰기엔 너무 길지만 하이라이트만 놓고보자면

유케유케 소레유케(가자가자 그래 가자)를 개사해

시네시네 쿠타바레(죽어죽어 뒈져버려)로 말하기 전 오오키나 코에데(큰 목소리로)를 말하고 저걸 열창한다.


(야쿠르트 시절 수염을 길렀지만, 요미우리와서 수염을 깎은 알렉스 라미레스.)


구단 자체가 보수적이고 신사여야한다는 규율로 인해 품위 유지 조항이 있으며 상당히 깐깐하다. 그나마 최근들어 많이 완화됐지만 여전히 엄격한 편. 몇개만 적자면

드레드, 스킨헤드, 염색 금지: 단, 흑인들이나 탈모가 심한 선수 등 건강 사유나 흰머리 검게하는 정도는 가능


문신 금지: 테임즈가 예외지만 테임즈는 워낙 문신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허용된 케이스.


등록명은 무조건 본명: 한자 이름은 무조건 한자로 써야하고 그나마 오타 타이세이가 오타 류란 선수와 혼동 우려로 타이세이란 등록명을 쓰면서 유일하게 허용.

정도 있다.


구단 역사가 하도 방대하니까 존나 길어졌네

다음은 히로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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