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극한의 유(柔)로 공격을 감싸안는 것이 홍화구벽의 핵심이다."

"예, 청진 어르신."


장경각의 연구실에서 이루어지는 청진의 무공 전수는 한 시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었다.

중간중간 현정이 끼어들어 그 심득에 관해 따로 첨언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과거에 비하면 그 횟수가 대단히 줄었다.

이제 무각주로서의 청진의 능력이 현정에 비해 그리 크게 뒤지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그럼 이제 끝났구나."

"그렇습니다."

"따라오너라. 보여줄 것이 있느니라."

"예, 장로님."

"소각주, 비공개 서고로 안내해 주게."

"예."

"너희들은 이곳에 남고."

"알겠습니다."


볼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청명의 입을 틀어막은 청문이 말했다.


연구실을 나선 장평이 두 사람과 향한 곳은 장경각의 본당이었다.


본당 내벽의 기둥을 몇 개 건드리고, 바닥을 몇 군데 누르자 이내 바닥이 쩍 열리며 밑으로 향하는 계단이 드러났다.


"제갈세가와 개방의 진법, 그리고 하오문의 기관진식을 조합하여 만들어 낸 장치입니다."


지하로 내려가서 야명주가 박혀있는 통로를 걸어가다 보니 석벽이 하나 나타났다.

거기에 대고 장평이 돌을 몇 개 더 누르니 석벽 또한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진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세상에."


거대한 서고를 가득 채운 비급, 비급, 그리고 또 비급이었다.


'언제 장경각이 이렇게나 큰 것인가!'


청진은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이것이 현 장경각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비공개 서고이다. 외부인은 네가 처음이지."

"첫 외부인은 장로님 아니십니까?"

"이놈아, 내가 이곳 일을 도운 게 몇 년인데 그런 소리를 하느냐!"

"그렇게 따지면 청진 어르신도 외부인은 아니죠."


어투는 가벼웠지만, 세 사람 모두 비공개 서고를 반짝이는 눈으로 둘러보고 있었다.


"장경각 사람들은 이들 중 하나를 골라서 익히는 거군요."

"그렇지. 이들은 오랜 기간 동안 정순한 내력을 쌓아 육체를 무학을 익히기 적합하게 만들고, 무학에 대한 이해도가 쌓이면 그때부터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무공을 찾아서 익힌다고 하더구나."

"그럼 얘도 슬슬 무학을 새로 익힐 때가 된 것 아닙니까?"

"제가 좀 늦은 편이긴 하죠."

"하면 왜 익히지 않는 것이냐?"

"제가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그릇이기 때문이죠."


청진의 물음에, 장평은 좀 멋쩍어하며 말했다.


장경각의 이름인 장경(藏經)은 대장경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흔히 불법을 논하는 서책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정작 불가에서는 장경을 '그릇'이라고 해석한다.


불가에서는 그 그릇에 불법을 담고, 무파에서는 그 그릇에 내력과 무학을 담는다.


그러면 사람이 뛰어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그릇에 무엇을 담아야 가장 완벽하고 조화로울 수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을 연구하는 곳이 장경각이다.


장경각원들은 그 자신이 훌륭한 그릇이 될 수 있도록 내력을 정순하게 유지하며 육체를 단련하는 동시에, 자신이라는 그릇에 무엇을 담아야 가장 어울리는가를 분석한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서고인 것이다.


그리고 그 장경각원들 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그릇'이 바로 장평이므로!


"한마디로 지금 채워 버리기는 너무 아깝다는 거네."

"그렇죠. 여태껏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장속도라 하셨습니다. 물론 청명 어르신이나 당보 어르신한테는 가져다 댈 수도 없겠지만, 내력의 정순함만으로는 제가 확실히 앞섭니다."


장평은 뿌듯하게 말했다.


"뭐......그럼 몇 년 정도 더 늦춰도 될 것 같네. 하지만 조심해라. 그릇의 크기만 키우려다 보면 정작 뭘 담을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어."

"네, 조심할게요."


청진의 진지한 충고에, 장평 또한 진지하게 답했다.


"그런데, 비공개 서고라면서 석벽만으로 막아둬도 되는 겁니까?"

"그건 확실히 문제지. 지금은 이곳에 어떤 무공이 있는지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 없으니 천하의 공적이 되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장경각을 털러 오는 곳이 없지만, 장경각이 지금보다 더 커지면 슬슬 벌레들이 꼬일 거다."

"해결방법은 있습니까?"

"있지. 최근에 북해빙궁과 교류를 터서, 한철로 서고를 만들어서 북해의 특수한 기관진식으로 봉할 예정이다. 한철을 자를 수 있을 정도의 고수가 장경각을 공격한다면 개방에서도 특정하기 쉬울 테니, 더 안전해진다고 볼 수 있지."

"그렇군요. 언제 공사가 시작되는 거죠?"

"으음, 조만간 도착한다고 연통이 오긴 했는데, 아쉽지만 난 완공되는 광경을 못 볼 것 같구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갑작스레 현정의 입에서 언급된 현실에, 청진은 금세 침울해졌다.


"아니지, 내 명이 언제 끝날지는 내가 가장 잘 알아. 화산을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싶었지만 그건 어렵겠지."

"매화는 이곳에서도 피울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화산의 제자가 있는 곳이면 그곳에서도 화산을 찾을 수 있지."


장평은 둘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천하 모든 무학을 연구하느라 한 가지 무학을 깊이 파고든 적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한 문파의 무학을 위하여 평생을 바친 노인과 그 뒤를 따르고자 하는 중년인을 보니, 장경각이 아무리 무학을 연구한다 해도 이들의 삶과 무학의 진의를 모두 이해할 수 있을지 막막해져 왔다.


그렇기에 청진이고, 그렇기에 현정이다. 그렇기에.....


'화산인가.'


장평은 질투심이 살짝 머리를 드는 것을 느꼈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답은 이들의 삶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해가 질 무렵 숙소에 도착하자 현정은 힘이 많이 빠진 듯 계단에 늘어지듯이 앉았다.


이젠 확연히 보였다.

현정의 생명은 빠르게 꺼져가고 있다.


"청진아."

"예."

"노을이 참 멋지지 않느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화산의 상징이지."

".........?"


'저승사자가 보이시나?' 하는 시선으로 현정을 바라보는 장평을 애써 무시한 채, 청진은 다음 말에 집중했다.


"무학의 기본은 기공이지. 그래서 나는 매화보다도 저 노을이 화산의 근본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렇군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럼 이 장경각의 상징은 무엇인 것 같으냐?"

"당연히 그릇 아니겠습니까?"

"저도 장평이와 생각이 같습니다."

"흐음."


즐겁다는 얼굴로 한차례 숨을 고른 현정은 말을 이었다.


"그릇은 이 장경각의 사람들과 장경각의 서고를 말함이겠지. 장경각이라는 문파가 나아가는 방향을 보면 나는 땅거미 같다고 생각한다."

"땅거미요?"

"아느냐?"

"물론이죠. 저것 말하시는 것 아닙니까?"


장평이 숙소 건물 구석을 가리켰다.

노을빛 덕분에 하얀 돌 사이에서도 더욱 두드러지는 여덞 개 다리가 보였다.


"그렇지. 청진이는 알고 있었느냐?"

"여태 시간을 나타내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청진이 떨떠름하게 말하자 현정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래, 그렇게 아는 사람들이 많지."

"땅거미가 특별한 점이 있습니까?"

"그렇고말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들은 보통의 거미처럼 높다란 곳에 자리잡는 것이 아니라, 나무뿌리 같은 낮은 곳에 거미줄을 쳐서 먹이를 잡는단다."

"기본을 중시하는 문파라는 것입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지. 하지만 나는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같은 거대무파에만 신경쓰는 것이 아니라, 저 밑, 누구도 기억할 가치를 찾지 않았던 강호인들의 삶에서 의미를 찾아주려 하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았다."

"그렇군요."


청진은 저 멀리 보이는 장명관을 향해 눈을 돌렸다.


장평과 처음 만났을 때 제압당해 있었던 흑창귀 진궁.

만약 장평이 그를 제압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얼마 안 가 당보의 비도에 급소가 꿰뚫린 채 절명했을 것이고, 한 달 뒤부터는 누구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초식 하나는 장경각의 공개 서고에 얇은 책자로 박혀 있으며, 장명록의 말단에 진궁의 이름이 쓰여 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고, 그의 초식을 익히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

그도 기뻐하고 있지 않을까?


귓가에 이십 년 전 관아에서 형장의 이슬이 된 누군가가 삿대질하면서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청진은 자연스럽게 귓등으로 흘렸다.


"매화나무의 근본은 그 뿌리요, 그 뿌리에 집을 짓고 사는 땅거미 하나가 있으니........."


현정의 시선은 이제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매화나무(華)는 외롭지 않을 것이고, 거미(蛛)는 그 삶을 이어갈 수 있지 않겠느냐?"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화산과 장경각의 정경을 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 거미는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거미줄 안에 품을 것입니다."

"매화나무의 뿌리는 더 깊어지겠지요."


장평과 청진이 조용히 답했다.


"그래, 그래야지......."


숨을 고른 현정은 나직하게 말했다.


"이제 갈 때가 된 것 같구나. 내게 화산을 보여주지 않겠느냐?"

"예, 장로님."


청진이 일어나 검을 잡고 어느새 다가와 있던 청문과 청명을 향해 말없이 눈짓하자, 둘은 곧바로 검을 뽑고 청진의 좌우에 섰다.


곧이어 청진의 검에서 매화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매화점점부터 시작하여 이십사수매화검법이 펼쳐진다.

그 소담스러우면서도 장엄한 검기에 모여든 장경각원들이 나직이 감탄했다.


두 초식쯤 펼쳐졌을 때, 청명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매화토염, 이십사수매화검법 중에서도 요사스럽기로는 수위를 다투는 초식이 청명의 손에서 펼쳐지자 이내 매화가 폭발적으로 피어오르며 장경각 전체를 감쌌다.


'이럴 수가.'

'이게.....매화검존.'


사람의 눈을 현혹하는 그 초식과, 상상을 초월하는 천하삼대검수의 힘을 목격한 장경각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잠시 후 청문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매화검존의 검은 그 기세를 반절로 줄였다.


청명의 검처럼 환상적이지는 않지만, 사람들의 눈을 이끈 것은 다른 것이었다.

노을색인 청진과 청명의 검기와는 달리, 선명한 자줏빛으로 빛나는 검기가 청문의 검에서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자하신공!'

'과연.'


화산의 장문인만 익힐 수 있다는 독문기공.

하나, 다음 대 화산 장문인이 될 것이 확실시된 대현검이기에 특별히 일찍부터 익히는 것이 허락되었던 기공.

소림의 역근세수경에 결코 뒤지지 않는 화산제일의 기공으로 빚어낸 검기는 노을빛으로 물들었던 장원을 자주색으로 덧입혔다.


모두가 매화검존의 화려함과 자하신공의 장대함에 전율했다.


하지만.


단 두 사람은 화산의 심득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보고 있었고,

청진에겐 그걸로 충분했다.


이윽고 매화만리향을 마지막으로 세 사람의 검무가 끝났을 때, 현정은 그 누구보다도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화산파 십대 제자 현정, 향년 백십삼 세.


인생의 팔 할은 한 무학의 끝을 보는 데 바치고,

나머지 이 할은 무(武)의 세계를 하나로 이어 만류귀종(萬流歸終)의 종착점을 찾는 데 바쳤던 강호의 대종사는 그렇게 등선했다.














비축분 25화까지 써놨고 25화로 2부 일대제자편 완결난 기념으로 19화 여기다가 올림

3부 장로편(대마교전편) 쓰면서 고지 넘기면 여기다가 하나 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