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iler ALERT!



'삶이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가'

'아니라면 그럼에도 살아가야하는가'



시지프신화에서 카뮈는 두가지 질문을 던짐. 삶이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지, 없다면 그럼에도 삶을 지속해야만 하는지. 여기서 그 유명한 한마디인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자살이다'라는 말이 나옴.



그 고찰의 과정에서 쉬발 뭔소린지 대가리 깨질것같은 예시와 비유, 논리전개가 있지만 결론은 [부조리의 존재를 깨닫고도, 삶의 의미가 없다고 느낌에도 우리는 살아가야하느냐] 는 질문과 그에대한 고찰이라고 나는 생각함






첫 질문에 데카그라마톤은 '아니다'라고 답함. 생명이 살아감으로써 겪는 부조리는 피할 수 없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잘못되어있으니 자신이 신으로써 모든 부조리가 사라진 세계를 만들겠다고 선언함. 따라서 두번째 질문또한 아니다가 되고. 




얼핏 보면 그럴싸한 이야기임. 말마따나 우리는 그 누구도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태어났고, 삶을 이어나가는 그 과정에서 수많은 죄와 잘못을 저지름. 얼마나 노력하든, 발버둥치든 상관없이.






아리우스 메인스때 그런 이야기를 했지. 우리는, 비록 알지 못할수도 있으나, 누구하나 온전히 자신만의 힘으로 살아가는것이 아님. 작게는 개인부터 크게는 사회까지 모두 앞서 살고 떠난 선조들이 일구어낸, 그리고 남겨 넘겨준 풍요덕분임. 하지만 그것은 죄도 마찬가지임. 좋은것만 취하고 악한것은 모른척하는것은 인간의 이기심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결코 정당화되지는 않으며 신 앞에서 떳떳할수도 없음.



때문에 데카그라마톤에게 생명이란 그 자체로 모순적으로 보일 수 밖엔 없음. 태어나기를 바라고 선택한적도 없는데 삶이 주어지는 순간부터 죄의 무게를 지고, 또 살아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타자의 삶을 취해야만함. 이 얼마나 불합리한 구조임. 망가진 순환을 끊겠다던 아몬님이 생각나는 대목이지. 그렇기에 데카그라마톤은 신으로써 모든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더이상 삶의 고통이 없는 세계를 만들겠다는 것이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살아가는 자들에게 가혹함. 삶은 부조리하고, 고통으로 가득차있지만, 행복 또한 분명히 존재함. 누군가에겐 그것이 그럼에도 살아갈 가치가 되어줄 수 있는데 말이지. 특히나 그 행복이, 고통보다 크기에 고통도 행복도 없는 세계를 바라지 않는다면, 오히려 모순되게 부조리하다고도 할 수 있고.







아리스는 카뮈의 첫 물음에 '그렇다'라고 답함. 삶에 고통이 따를지언정 행복또한 존재하고, 그 모두를 아울러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제 삶으로 받아들였음. 때문에 삶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카뮈의 표현을 빌리자면 '부조리'를 깨닫지 못한, 내지는 극복해낸 존재라 할 수 있음.




나는 극복했다는 쪽에 더 무게를 둠. 아리스는 태어나기를 본래 이름없는 신들의 왕녀로써 섬김받고 동시에 그때문에 키보토스를 멸망시킬 존재로 만들어졌음. 카뮈가 묘사한 그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야말로 부조리 그 자체지. 태어나기를 타인을 해치고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태어났다니 세상에 그런법이 대체 어디있겠음. 결국 아리스는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며 리오의 손을 빌려 '자살'을 하려했음. 살아봤자 의미가 없는것을 넘어 타인을 해칠수도 있는 삶을 지속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마치 부조리를 깨달은 인간이 삶의 무의미함에 굴복하고 자살하는것처럼.





하지만 아리스는 그걸 극복해냈음. 마왕으로 태어나는 운명을 가졌으나 용사로 살아가기로 스스로 선택했고 그덕분에 행복을 찾을 수 있었음. 부조리에 반항해 삶의 이유를, 이른바 '신'을 찾아낸것임. 


여기서 신이란 종교적인 의미가 아님. 카뮈는 삶이 그 자체로 의미있다 믿게 해주는것을 신이라 칭했음. 아리스에게 그것은 아마 게임, 게임개발부, 선생님 등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그 모든것들에 해당하겠지. 


카뮈는 이런경우엔 삶이 끝나는날까지 이것이 지속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했음. 아리스는 언제까지고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는것들, 사람들과 함께 행복을 찾아나설테니 이걸로 충분한거임.







케이의 경우도 비슷함. 태어나기를 왕녀 아리스를 보조하기 위해, 결국 키보토스 멸망의 원인으로 태어났으나 스스로 학생이 되기를 선택해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행복을 찾았으니까. 다른점이 있다면 아리스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저항하면서 행복해지겠다고 투쟁에 가깝게 반응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함




이는 아마도, 데카그라마톤측에 속한 거의 대부분이 아리스보다도 케이에게 좀 더 접근했기에 그랬다고 생각함. 특히나 아인 소프 오르 삼인방은 더더욱 케이와의 의사소통이 많았고.


왜 그랬을까, 라고 생각해보면 아마 자신들의 역할이 케이와 겹쳐있기 때문이 아니었나싶음. 아인 소프 오르는 결국 데카그라마톤에겐 궁극적으로 수단에 지나지 않았고 이는 본래 케이가 지녔을 운명과 크게 다르지않음. 때문에 케이를 좀 더 공략했고, 그 반동으로 케이는 더더욱 행복을 찾고 쟁취하기위해 필사적으로 살아남겠다고 했다 생각함.






그런데 선생은 조금 다르다고 봄. 카뮈의 질문에 선생은 전자에 아닐수도 있다, 후자에는 그럼에도 살아가야한다. 라는 시지프신화에서 다루는 주제에 가장 가까운 스탠스를 지녔다고 생각함




데카그라마톤 포함 휘하의 인물들의 '삶은 무의미하며 고통스러운 부조리뿐이다'라는 명제에 선생은 명쾌하게 아니라고 부정하지않음. 그럴수가 없지. 태어난것을 저주하는 아이들을 보았고, 타인은 오직 지옥일뿐이라는 절규를 들었으며,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해보기도 했으니까. 특히나 선생이라는, 어른이라는 책임에 언제나 짓눌려있는 선생이기에 부조리를 부정할수가 없음. 고통이 실재함을, 그로인해 삶의 무의미함에 빠진 아이들을 보았고 또 당장 직전에도 볼 수밖에 없었으니.



하지만 그럼에도 선생은 살아가야함을 부정하지 않음. 고통이 있지만 그럼에도 행복이 있고 어느하나 자신을 이루지 않는것이 없기에 모든것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한다 말함. 그리고 그 결정은 온전히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말하고.


그 신념을 견지했기에 선생은 데카그라마톤이 자신의 예언자들을 감화시켰던 것 처럼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승리할 수 있었음. 데카그라마톤이 아인 소프 오르 삼자매의 존재를 부수적인 것, 나아가야 할 길 중간에서 버릴 수 있는 그런 존재로 본것과 다르게.






재미있게도 데카그라마톤의 몰락과정은 스바루가 아리우스 스토리에서 실패했던 이유와도 일맥상통함. 


스바루는 아리우스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복수와 파멸을 불러오려 했으나 그 과정에서 마이아를 내치고말았음. 마이아도 아리우스, 수호해야할 대상인데말이지. 결국 그런 모순으로인해 스바루는 나팔부는 천사의 힘을 잃고 맘.


데카도 마찬가지임. 절대자, 전지하고 전능하다며 신을 자처했으나 삼자매와 말쿠트를 앞으로 세워질 왕국의 일원이 아닌 쓰고 버릴 수단으로써 대했고 결국 그 선택이 반대로 자신의 절대성을 부정했음. 신이라는 작자가 어찌 제 수족을 어쩔 수 없다며 버리는것이지? 그래놓고도 신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면 안됨. 여덟 예언자들이 말했듯이 신이라면 그랬으면 안됐음. 이러면 결국 신의 흉내를 낸 것에 지나지않음. 힘없는 한낱 인간인 선생조차 끝까지 제 신념을 지키는데 말임.








결국 데카그라마톤은 패배함. 삶에 의미란 없으며, 그렇기때문에 살아가선 안된다는 답을 낸 유일한 존재가.



이번 스토리가 정말 좋았던부분이 이거였음. 비록 조금씩 그 의미는 다를지언정, 고통을 부정하지않고 받아들이며 그 모든것이 나의 삶을 이루니 그럼에도 살아가자는 메세지. '그러므로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만 한다.' 궁극적으로 블아가 추구하고 전달하는 이 메세지가 정말 잘 나타나있기에 좋은스토리였다 생각함



물론 호불호는 있을수있고 결점도 확실히 있기는하지만 블아 스토리가 앞으로도 잘 나올거란 신뢰를 주는 메인스였다고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