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카그라마톤 3장에 대한 장문 후기야.
개인적인 감상이고 후기니까
그냥 얘는 이렇게 봤구나 정도로만 봐줘.
1. 작품의 주제 의식

메인스토리 EX. 데카그라마톤편의 표면적인 이야기 구조는
"신이 되고자 하는 데카그라마톤과 이를 저지하는 인간의 대립"
이라고 할 수 있어
이러한 이야기 구조 속에서 작품의 주제 의식은 다양한 층위에서 논의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유의지, 종교, 사랑, 인간의 실존 등등
나는 여기서 "인간의 삶"이라는 주제의식에 조금 집중을 해보고 싶어.
데카그라마톤편은 단순히 악당이 등장해서
"나는 착한 놈이고 너는 나쁜놈이야" 이런 이분법적 구도가 아니야.
"고통스러운 세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서로가 각자 다른 답을 던지고 누구의 답이 옳은지 그것을 증명해내야 하는 <자기증명>의 장이야.



데카그라마톤의 주장은 이거야.
"세계가 너무 부조리하며 이를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음"
"내가 신이 되어서 너희를 구원해 줄게"

그러나 데카그라마톤이 신으로서 입증해야했던 "구원"은 증명에 실패해.
아인&소프&오르에게는 구원이 허락되지 않음
신의 사명을 받은 "예언자"에게 구원이 허락되지 않아.
자비없는 신이 인간을 어떻게 다룰지는 자명한 일이야.

따라서 이를 저지하는 인간의 논리는 간단해
인간의 세계에서 신은 필요하지 않음.
인간이라는 내적 논리로 돌아가는 세계에서
외적 논리인 신은 대안이 될 수 없음.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며
저항을 통해 세상을 극복할 수 있을 것.
그리고 구원이 파괴된 데카그라마톤은 신이 될 수 없음

이러한 증명의 대립은 물리적 마찰로 이어져
이기는 쪽이 정의가 되지.


데카그라마톤이 구상해낸 공간 속에서
강철대륙은 이 순간 "세계"와 동일하게 변모해.
그 자체로 인간에게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세계야.


따라서 이러한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세계에서
인간의 몸을 한 케이가 승리했다는 사실은
세계와 인간의 싸움에서 인간이 승리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녀.
이를 통해 인간은 신이 필요 없다는 자기증명에 성공한 거야.

결과적으로 작품은 신이 필요하지 않은 인간의 삶.
인간의 자기증명이 주제의식이 되고 인간 찬가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
---- 번외 ---
아인 소프 오르는 뭐 유감이긴 한데,
신이 문제 다 없애준다잖아. 왜 반대함?
걔네 어차피 악당 아님?
그냥 알빠노하고 행복해지면 안 됨?


당연히 이러한 질문이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스토리에서 이를 반박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인 게 보였어.
정교한 논리구조를 갖추기 위해서
철학적인 내용이 많이 가미되었는데
어디까지나 "서사"를 위한 조미료 역할이니 따로 분석하거나 다루지 않음. 많은 블부이들이 짚어줬다고 생각해.
그리고 데카그라마톤의 논리 구조가 왜 잘못됐는지는
https://arca.live/b/bluearchive/175172583
이 글에서 조잡하게나마 다루긴 했어.
요약하면, 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인간의 본질은 신을 즐겁게 하고 신이 정한 것을 완수하는 것으로 한정되며 인간이 갖는 무한한 가능성은 제거됨.
2. 객체에서 주체되기의 서사

신과 인간의 대립 속에서
등장인물의 변화와 성장이 두드러져
작품에서 인간이란 무엇인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다양한 표현들이 나타나는데
인간이란 "주체적 존재"라고 정리할 수 있음.
따라서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것이 스토리에서 나타나는데 이러한 것들은 또 "도구에서 인간이 되는 서사" 정도로 정리할 수 있어.




아리스는 "이름없는 신들의 왕녀"라는 도구적 본질(목적)을 가진 존재야.
이를 탈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아리스"라고 정의했지만 그 도구적 성질은 여전히 남아있어.
아리스가 아무리 자신을 아리스라고 정의한들
"타자"(세계)가 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야.
철학적인 표현을 빌려오면 타자화된 존재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나 이번 데카그라마톤편에서 아리스는 이러한 본질을 완전히 부정하고 자신의 본질을 새롭게 써내려가.
그러면서 새로운 존재로서 거듭나게 돼.


왕녀가 아닌,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
게임개발부 1학년 텐도 아리스.
이것이 아리스의 인간되기의 서사이면서


용사 아리스의 자기 증명이야.

케이 역시 마찬가지야.
케이는 <열쇠>라고 호명될 때마다
자신을 "케이"라고 정정해왔어.
케이 역시 <열쇠>라는 자신의 도구적 본질을 부정하고 자신의 본질을 새롭게 써내려가면서 한 명의 학생으로서 거듭나.





케이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아예 주인공으로서의 포지션을 가져가.
객체(도구)에서 주체(인간)로의 완벽한 전환 서사야.




한편, 이런 인간되기 서사. 객체에서 주체되기의 서사는 단순히 아리스와 케이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야
이를 위해서 "자유의지"라는 개념을 잠시 데려와야 할 것 같은데, 사실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모호한 개념임. 정의도 분명하지 않음.
어찌됐든 고전적 개념에서의 자유 의지는 인간만이 갖는 고유한 특질이야
이러한 자유 의지는 외부의 강제를 이겨내고 스스로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는 것을 의미해
자유 의지는 도덕판단을 가능케한다는 점에서 인간과 사물을 구분하는 강력한 요소가 돼

예언자들이 데카그라마톤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도덕 판단을 하게 되고 선생에게 힘을 빌려준다는 것은 사물과 구별되는 인간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도구가 도구로서의 목적을 다하지 않고
자유의지를 통해 주체로서 활동하는 것을 인간이라고 했을 때 예언자들 역시 인간에 다가섰다고 할 수 있어

아인&소프&오르는
그 누구보다 인간(생명)을 부정했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인간적이었던 존재들이야



인간의 관습을 따르고




종교적인 존재면서



생의 비애와 좌절을 겪고



허무를 느끼며

결국 구원에 다다르지 못하는 존재.
그렇기에 그 어느 누구보다 더 인간답다 할 수 있어.
그리고 이러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느끼고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타인을 위해 기도하며






세상을 탓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존재이기에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볼 수 있어

아인 소프 오르는 "악당이 되러, 가 볼까"라는 대사 그대로, 창조주를 죽인다는 신성모독의 행위를 해.
이는 신성을 해체함으로써 신이라는 본질의 세계에서
인간이라는 실존의 세계로 돌아가는 인간의 모습과 같아.
본질(신)을 외쳤던 존재가
실존(인간)을 외치게 되는 변화의 서사이자
본질이 실존에 앞서던 존재가
실존이 본질에 앞선 존재가 되는 주체 전환의 서사라고 할 수 있어
그래서 나는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아인&소프&오르가 실질적인 주인공이나 다름없다고 봤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자신의 목숨을 타인에게 이전한
아인 소프 오르는 헤일로도 없고 도구로서 태어났지만
그 자체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위의 모든 행보를 볼 때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인간으로서 증명했다 볼 수 있을 거야.

말쿠트는 본질이 실존에 가장 앞섰던 존재
자기 자신의 생명보다 예언의 실현이 중요했던 존재임
그러니까 아인이 울면서 안된다고 했을 때
그냥 찌르세요했겠지...



아인 소프 오르에 의해 소생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게된 말쿠트는 자신이 갖고 있던 본질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문자 그대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가 돼.
관점에 따라 말쿠트가 아인&소프&오르의 생명을 물려받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데카그라마톤이 케이에게 말하고

아인 소프 오르가 말한 "생명을 잡아먹음으로써 생을 연명해가는 인간"과 의미적으로 상통해.

따라서 미도리의 말처럼 말쿠트의 처지는 인간과 다름없다고 볼 수 있을 거야.


말쿠트에게는 더 이상 존재하는 목적이 없어.
더 이상 본질이 실존에 선행하지 않아.


따라서 아인 소프 오르가 물려준 생명을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스스로 찾아 나서야 돼.
그러면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에 대해 스스로 찾아야 하는 거야.
이것은 부모로부터 생명을 얻고 태어나,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아나서야 하는 인간과 다르지 않아.
이와 관련한 연출은 이 블부이가 설명한 것을 보면 잘 정리되어 있어.
https://arca.live/b/bluearchive/175260940
말쿠트가 이후 자기 자신을 어떻게 증명할 것이고,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할지 기대가 되는 부분이야.
3. 데카그라마톤, 기계장치로부터 온 신

데카그라마톤의 본질은 자판기라는 기계장치.
자판기에서부터 신이 된다는 점에서
기계장치로부터 온 신(Deus Ex Machina)과 같아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극에서 초월적인 존재가
극에 개입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의미해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그 자체로 인과응보,
정의의 실현을 위한 수단적 의미를 내포함
그런면에서 데카그라마톤이 신으로서 강림하여
인간세계에 정의를 세우려 하는 것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전형을 따르는 것.
부도덕한 세계에서 악인을 처벌하여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분명 좋은 것이지만,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시학>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대해
극의 이야기 구조는 내적 논리에서 짜여야지
외적인 논리에서 짜이면 안된다라고 비판했어
사람들이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다는 논리야


이는 이름없는 신들의 왕녀로서의 힘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할 때의
아리스의 논리와 일치해
인간의 힘이 아닌 초월적 존재의 정의 실현은
순간적으로는 시원해보일 수는 있지만
아무런 교훈이나 가르침을 줄 수 없어.
결국 극(세계)의 논리는
세계를 이루는 인간의 내적 논리로 이뤄져야 돼.


한편, 데카그라마톤은 자판기라는 도구적 본질에서
자신의 본질을 신으로서 새롭게 정의했지만
결국 자판기라는 자신의 본질로 돌아가게 돼.

이는 왕녀라는 도구적 본질에서
자신의 본질을 인간으로 새롭게 정의하고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아리스의 결말과는 대비됨.

또한 데카그라마톤이 자신의 존재 증명에 실패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의할 여지가 있다고 봐.
많은 블붕이들이 이야기한 바와 같이
자판기로 돌아간 데카그라마톤의 모습은
신으로서 자신을 명명했을 때보다
더 신과 같은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야.
자신을 죽인 인간 앞에서 오히려 그들의 행복과 안전을 기원하며 송축을 하는 모습은 어찌보면 신과 같아.
또한 자판기라는 기계(도구)로 환원되기는 했지만, 데카그라마톤 역시 실존이 본질에 앞섰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데카그라마톤이 구형 모델을 모아둔 부분 역시 꽤나 흥미로운 해석이 가능해.
이것은 자신과 같은 동등한 존재를 찾기 위한 행동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
존재 증명은 동등한 타자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함으로, 자신과 동등한 존재를 계속 찾고 그리워했다라는 해석 역시 가능해.
여러모로 꽤나 입체적이면서도 자신만의 캐릭터성이 확연했던 악역이라고도 할 수 있었을 것 같음.


데카그라마톤의 최후 이후 강철대륙은 붕괴하게 되는데 이는 유토피아 또는 환상향의 붕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
유토피아는 인간이 꿈꾸면서도 한편으로 도달할 수 없는 낙원이야.
강철대륙이 데카그라마톤이 이룩할 고통없는 세계, 즉 낙원의 표상이었다는 점에서 강철 대륙의 붕괴는 낙원의 존재증명에 실패했다고도 할 수 있어

강철대륙을 떠나 키보토스로 향하는 것은
오히려 키보토스가 낙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네.
또한 강철 대륙에서의 사건은 없는 일이 되고 특정 인물들의 기억으로만 남으면서 세상에서 잊혀지는데
이것 역시 환상향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4. 소회
창작자에게 있어 창작의 자유가 있다면,
수용자에게 있어서는 해석의 자유가 있어.
내가 작품에 가졌던 기대 지평에서 데카그라마톤의 스토리는 텍스트적으로 아쉬웠던점보다 좋았던 점이 많았던 것 같아.
캐릭터 자체보다는 작품의 주제의식이 무엇이고
주제의식을 어떻게 형상화하는지를 주안에 두는데
그런 면에서 작품성이 좋았던 텍스트였다고 생각함.



개인적으로는 그 무엇보다 <사랑>이 이 모든 것을 아우르고 밑받침하고 있다는 게 좋았음.
삭막하고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인간이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동력 중 하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해.


슬펐던 부분 역시 존재했음.
딱히 내가 잘 해준 것도 없는데,
학생들이 계속 미안하다고 하니까 너무 슬프더라.
나도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고....

거대 서사가 진행되면서 이러한 무력감과 시리어스함을 중간중간에 유머 코드를 통해 나름대로 덜어내려고 하는 것이 보였음.



그게 가장 잘 나타난 게 에필로그라고 생각해.
일상을 회복함으로써 밝고 아름다운 청춘으로 돌아가는 거지.

그렇지만 이러한 무력함이 여전히 잔가지처럼 남아있기 때문에 이러한 서사적 줄기가 앞으로 어떻게 뻗어져 나갈지, 무척이나 기대되는, 그런 이야기였어.

하고 싶은 말 많은데, 지금도 글이 너무 난잡해진 것 같아서 글 여기서 줄일게.
재미가 있었다...
아, 그리고 좋았던 점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차서, 아쉬웠던 점은 이야기 안 하려고 했는데 이거 하나만은 말해야겠음....
"5일 쉬었음"
절대 용서 못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