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https://arca.live/b/bluearchive/42533509


선생은 잠깐 후우카를 내려보고선 입술을 깨물었다. 비에 젖은 처량하기 그지 없는 후우카는 선생에게 무한한 동정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선생은 후우카의 몰꼴과 급양부를 나왔다는 후우카의 언급을 듣자 굳이 이 뒤를 듣지 않아도 대충 후우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갔다.

"'주리, 만마전, 그리고 하루나. 결국 저질렀구나."

다섯 자리를 넘는 학생이 등교하는 게헨나에서 급식을 담당하는 인원은 단 둘. 그 중 한 명은 냄비에 손을 대기만 해도 멀쩡하던 요리가 순식간에 독극물로 변하는 기적의 연금술을 체득한 괴인, 심심하면 주리가 만든 음식이나 음료를 트집을 잡으면서 예산을 삭감하는 만마전, 그리고 툭하면 식사가 맛이 없다는 이유로 레스토랑이고 급식실이고 뻥뻥 날려버리는 점심병자 테러리스트부. 이 모든 조건은 한때 살인적인 환경에서 근무하던 선생이 봐도 용납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렇기에 선생은 나름 후우카의 환경을 개선하고자 노력은 해봤지만, 별로 신통치 않았다. 아무리 샬레의 선생이 초법규적인 권력을 가졌다곤 하지만, 성질이 우직하기에 정치쪽엔 별로 밝지 않았고, 학원의 자치권을 존중하는 그로선 게헨나에서 급양부의 환경을 개선할 방법이 별로 없었다.

보상은 없는데 의무만 한가득인 급양부에 입부하려는 학생은 없었다. 이 환경을 개선할 책임을 짊어진 만마전은 지금도 급식소가 후우카의 희생을 바탕으로 잘 돌아가는데 돈 아깝게 급양부에 지원을 늘일 생각은 코딱지 만큼도 들지 않았다.

"일단 들어와서 몸을 말리렴. 이야기는 그 뒤에 들으마."

선생은 후우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후우카는 조금 밝아진 얼굴로 선생의 손을 잡았다. 선생은 굳은살과 칼에 베여 생긴 자잘한 흉터가 박힌 후우카의 손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작은 손으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학생들을 먹여 살렸을까.

어째서 학원은 이렇게나 힘들게 봉사하는 학생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단 말인가?

선생은 모든 학생을 사랑하는 자로서 후우카를 지켜주기로 결심했다.

"그럼 실례할게요."

후우카는 선생의 손을 잡자 수줍게 머뭇거리더니 선생을 따라 선생의 집으로 들어갔다.

선생은 보일러를 켜서 온도를 올렸다. 하지만 흠뻑 젖은 후우카의 체온을 올리기엔 너무 약했다.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니까, 일단 샤워를 하렴."

후우카는 선생님의 호의에 감사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곤 화장실로 향했다. 선생은 후우카가 불편하지 않게 자리를 비켰다. 다행히 가방과 봇짐에 싼 후우카의 옷은 비닐에 포장되었기에 후우카가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서로 얼굴을 붉힐 일은 없었다.

샤워를 끝내고 몸을 말린 후우카는 몸이 한결 따듯해지자 기운이 났다. 선생은 부엌에 들어가서는 따듯한 물에 현미녹차 티백을 넣고 가져왔다. 선생은 자신이 식당에서 싸온 음식을 치운 뒤에 자리를 만들었다. 선생과 후우카는 식탁에 마주 앉았다.

"후우카, 네 모습을 보아하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이 가는구나. 하지만 선생으로서 너를 도우려면, 네가 오늘 무슨 일을 겪었는지 자세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단다. 그러니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지 않겠니?"

후우카는 선생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탁하자 오늘 겪은 일을 전부 다 설명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을 끝낸 후우카는, 가슴 안에서 오랫동안 꾹꾹 참아온 애환이 용솟아오르는 걸 참지 못했다.

"선생님... 저... 저는... 이제 급양부에 머무를 자신이 없어요...! 지난 몇 년간 공부하느라 힘들었을 다른 학생들을 위해 요리를 배우고, 식단을 짜고, 밤낮으로 학업을 포기하면서까지 일을 해왔는데... 결국 제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은 이제 와서 보니 선생님밖에 없었어요. 주리는 착한 후배지만 어째서인지 그 애가 손대는 요리는 단순히 맛이 없기라고 하면 다행인,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괴생물체로 변해버리고, 툭하면 하루나 씨가 찾아와서는 맛이 없다고 따지는 걸로도 부족한지 폭탄을 던져대고.. 왜 제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요?"

후우카는 눈물을 흘리면서 히끅거였다. 선생은 말없이 후우카의 어깨를 토닥였다.

"선생님... 전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미안하구나. 그건 내가 대답해줄 수 없는 질문이란다."

선생은 자신에게 질문하는 후우카에게 질문으로 답했다.

"후우카, 너는 어떻게 하고 싶니?"

"전... 이제... 급양부에서...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급양부를 그만둘까 했지만... 너무 오랫동안 급양부에서만 일하다 보니, 급양부에서 요리하는 거 외엔 제 인생에 남은 게 없는 것 같아요."

"....."

"선생님은 어른이니까 혼란스러운 제 상황에 답을 주실 줄 알았는데, 어째서 그러시지 않는 건가요?"

"그건... 어른이라고 해서 어린이와 다르게 답을 항상 가지고 있는게 아니니까 그렇단다."

선생은 씁쓸한 얼굴로 후우카를 보면서 그리 답했다. 선생은 키보토스의 학생들과 게마트리아의 괴인들이 자신을 보고 남긴 평가를 떠올리면서 살짝 조소했다.

어른.

성장의 끝에서 완성된 존재.

책임을 지는 자.

듣기만 해도 듣는 자신이 부끄러워서 쥐구멍에 숨고 싶어질 정도의 평가에,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선생은 계속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잊어버리고 도망치고 싶어했다.

선생은 귀찮은 의무를 짊어지고 싶지 않아했다.

선생이 지금까지 계속 키보토스에서 버텨온 이유는 단 하나.

더러운 어른들이 아이들을 착취하는 현실이 싫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진정 완성된 어른 따윈 존재하지 않고, 우리 모두 다 아이에 불과하다고.

그렇기에 선생은 가슴 속에 희망을 품고, 학생을 믿으면서 불확실한 현실을 계속 해쳐나갔다.

"난 그저... 너희들만이라도 세상의 풍파에 덜 찌들었으면 했을 뿐이야."

"그러면 전...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몰?루?"

선생은 심각하던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짓더니 후우카에게 제안을 했다.

"일단 지금 당장 너에게 필요한 건 휴식과 안정인 것 같구나. 내가 일중독에 걸려서 다 죽어갈때, 치나츠와 세리나가 권한 것처럼."

"쉬라고 하셔도... 쉴때는 뭘 해야 할까요....?"

"... 취미생활?"

슬프게도 급양부 일에 치여 살던 후우카는 변변한 취미생활도 즐기지 못했다. 일에 찌든 어른처럼 구는 후우카를 보니 선생은 속이 타들어갔다.

"시간이 늦었구나. 일단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내일 다시 이야기 하자. 후우카는 어디서 사니? 기숙사? 집? 밤은 위험하니까 운전해주마."

"... 기숙사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돌아가봤자... 보나마나 왜 급식을 준비 안 했냐고 다른 얘들이 바가지를 긁을게 뻔하니까요."

후우카는 머뭇거리더니 선생에게 애원했다.

"선생님... 잠시만... 제가 마음을 정할 때까지라도 좋으니까... 선생님의 집에서 머무르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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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우리가 학식을 준비해야 해?"

"우린 미식가지, 조리사가 아니라고!"

"어쩔 수 없지요. 저희가 급식실을 폭파한 탓에, 후우카 씨가 급양부를 그만뒀으니까요. 주리 씨 혼자서는 시간 내로 급식을 준비할 수 없잖아요?"

"폭탄을 던진 건 우리가 아니라 너 혼자잖아! 그때 우린 널 말리려고 했었고! 왜 우리한테 니 잘못을 슬그머니 떠넘기는 건데!"

"동태도 생으로 먹으면 맛있을까?"

"이즈미, 그만두세요. 동태는 생으로 먹으라고 있는 게 아니에요."

투덜거리면서 동태를 해동하고 손질하던 준코가 태연하게 자기 잘못을 부 전체에게 넘기는 하루나에게 시비를 따졌다. 하루나, 아카리, 준코, 그리고 이즈미는 평소라면 꿈나라에 있을 시간부터 일어나 게헨나 학생이 먹을 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이즈미는 동태를 만지작 거리다가 진짜로 한 입 먹으려고 했기에 아카리가 말려야 했다.

후우카가 급양부를 떠나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자 주리는 게헨나의 행정을 통괄하는 만마전에 이 사건을 보고했다. 이건 도무지 주리가 혼자서 커버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보고를 받자 만마전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판결을 내렸다.

후우카는 당장 급양부로 복귀할 것. 복귀하지 않을 시 처벌하겠음. 후우카가 복귀하지 않으면 그 공백은 후우카가 복귀할 때까지 미식연구회가 메꾸도록.

다행인지 불행인지 후우카는 이런 터무니 없는 폭거를 듣기도 전에 제 발로 게헨나를 나갔기에 이 판결이 후우카에게 가지 않았다. 아무도 후우카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고, 찾지도 못했다.

그리고 미식연구회는 이번에 또 도주했다간 급식을 못 받아 굶주린 게헨나의 모든 학생에게 시달릴 게 뻔했기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급양부에 임시 취직했다.

그리고 주리는 미식연구회의 도움을 받아 후우카가 빠진 첫 급식을 완성해냈다.

".... 우리가 만들던 요리... 동태찌개 아니었나요?"

"네 맞아요!"

주리의 상큼한 대답에 아카리는 씰룩거리는 얼굴을 거대한 냄비 위로 들이댔다. 냄비 안에서 느긋하게 헤엄치던 무언가가 수면 위로 뛰어오르더니 다시 잠수했다. 살점이 뜨거운 육수에서 문들어져 뼈만 남은 동태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동태찌개 안에서 살아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식단표엔 오늘 아침은 샌드위치와 시저 샐러드, 그리고 오랜지 주스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즈미는 그제야 식단표에 적힌 요리가 자기가 준비하던 요리가 완전히 다른 요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 식단표는 후우카 선배가 짠 거예요. 하지만 저는 후우카 선배가 아니기도 하고... 옛날부터 후우카 선배의 식단과는 다른 나만의 식단표를 짜보고 싶었거든요."

주리는 국자를 휘저으면서 그리 답했다.

"... 먹어도 되긴 할까?"

준코는 붉은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찌개와 그 안에서 해엄치는 동태 뼈를 보면서 울고 싶어졌다.

"헤헤~ 우리가 열심히 만들었으니까, 먼저 맛 볼 권리도 있는 거지?"

이즈미는 피치 공주가 끌려간 쿠파성에서 기르는 용암 피쉬본 찌개를 보고 침을 흘리더니 누가 말리기도 전에 국자를 넣어서 한 입 마셨다.

"으음~ 매워~ 하지만 맛있어~ 뱃속이 불타는 것 같은 이 느낌...! 이맛이야!"

"에에엑? 정말로? 에라 모르겠다! 뱃가죽이 등짝에 달라붙을 것 같아!"

준코는 이즈미가 찌개를 맛있게 처먹자 고민하더니 본인도 찌개에 국자를 넣었다. 꼭두새벽부터 밥도 못 먹고 몇 시간동안 학식을 요리하다 보니 준코의 공복은 한계에 달했다. 지금 준코는 일단 배만 채울 수 있다면 돌맹이를 씹어먹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준코는 이즈미가 맛있다고 치약과 샴푸를 처먹는 놈이라는 걸 떠올리자 눈물이 났다.

"!!!!!!!!!!!!!!!!!!!!!!!!!!!!!!!!!!!!!!!!!!!!!!!!!!"

찌개를 한 입 넣은 준코는 입을 벌리더니 개그성 묘사가 아니라, 진짜로 입에서 불을 내뿜었다. 미식사에서 조리사로, 그리고 조리사에서 요가 수행자으로 전직한 준코의 화염은 철로 만든 조리기구조차 녹일 정도였다.

"켁!"

그리고 준코는 기절하더니 하루 종일 일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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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선생은 멀리서 들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내가 왜 마루에서 자고 있지?"

잠에서 깬 선생에게 든 의문은 왜 자신이 마루에 둔 소파 위에서 자고 있느냐였다. 침대에 뭔 문제가 있었나? 어제 내가 술이라도 마신 뒤에 개처럼 굴기라도 했나? 선생은 막 일어났을 땐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타입이었기에 잠깐 멍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앗, 죄송해요, 선생님. 저 때문에 깨셨나요?"

"후우카가 왜 내 집에서....?"

멍하니 부엌쪽을 보던 선생은 그제서야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 떠올렸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선생님. 아침식사 준비가 거의 끝났으니까."

부엌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헤어넷을 뒤집어쓴 후우카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면서 선생에게 부탁했다.

"세수하신 뒤에 식탁에 앉아 주세요~"

급양부 부장으로서의 의무를 전부 다 내려놓은 후우카는, 선생의 눈에 완벽한 새댁으로 보였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이상적인 새댁이 여기 있다!"

선생은 잠깐 동안 후우카가 자기 학생이라는 걸 잊고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게헨나의 아침에는 진정한 불지옥이 열렸다.

그리고 선생의 아침에는 천국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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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키신 대로 더 써왔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쓰고 엑스컴 하러 가도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