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글] 키보토스.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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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 본업이 문과도 아니고 현생 때문에 언제 다음 편이 올라올지도 모르는데... 이런 글도 읽어줘서 너무 고맙다.


[와아~ 동료 <선생님>이 밀레니엄에 등장했습니다!]

"아, 아리스구나. 그동안 잘 지냈니?"

선생은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사실 선생은 작전을 짜면서 밀레니엄 타워에서 아리스를 만난다는 상황을 완전히 배제했었다. 게임개발부는 학교에 있는 시간 중 95% 이상을 부실에서만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고, 특히 아리스는 부실을 벗어날 일 자체가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그런 아리스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걸까. 혼란과 의문이 순간적으로 선생의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이내 한시라도 빨리 아리스를 떼어놓고 당장 세미나 부실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다잡으려던 찰나였다.

[선생님, 무슨 일이 있나요? 왠지 고민이 많아 보이는 표정입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순수한 아리스의 한마디. 선생 딴에는 태연한 척을 해봤지만, 아리스의 고성능 시각 센서를 피하지는 못한 것이었다.

"아아, 아냐 아냐. 그것보다 아리스, 미안하지만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괜찮을까?

[오오, 선생님의 퀘스트인가요!]

"그런가? 하하. 조금 이따 게임개발부 부실에 잠시 갈 거 같은데, 빈 손으로 가긴 그래서 내 카드로 요 밑에 편의점에서 과자랑 음료수를 좀 사가줄 수 있을까? 나도 금방 갈게."

[에엑, 배달인가요.... 그래도, 선생님의 부탁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으응, 정말 고마워. 그럼 부탁할게!"


사실, 게임개발부에 갈 시간 따위는 없었다.

선생은 착잡한 마음으로 멀어지는 아리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 할 자신이 학생에게 거짓말을 하다니, 역시 자신은 선생이라기엔 한참 모자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오랜 고민이 또다시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하지만 지금 선생이 해야 할 일은 그렇게 해서라도 해결해야 하는 일이었다. 정확히는, 그럴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선생은 가까스로 다시 발걸음을 떼어 세미나 부실로 향했다.


다행히 부실까지 가는 길에는 선생을 알아보는 학생이 많지 않아 별다른 저항 없이 문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세미나 부실의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잠시 웅성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이내 가라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쾌한 발걸음이 다가오더니 부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어라, 선생님?"

키보토스에서 흔치 않은 실체를 지닌 듯한 원형의 헤일로를 가진 소녀가 밀레니엄에서 흔치 않은 단정한 교복 차림으로 선생을 맞이했다. 선생은 자신을 맞아준 학생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살짝 안도했다. 이 학생이라면 이야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 선생님, 그러니까 제가 이해한 게 맞다면 말이죠... 지금 선생님은 저희 학교에 다니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이름도 소속도 모르는 학생을 찾으려고 세미나의 정보자산을 사용하겠단 건가요?"

"그렇긴 한데, 너무 조목조목 지적하니 되게 아픈걸."

선생은 이야기가 수월할 거라고 좋아하던 3분 전의 자신을 한 대 치고라도 싶은 마음이었다.

물론 선생도 이 부탁이 정말 터무니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밀레니엄 자치구와 그 인근에 사는 학생만 해도 수만 명에 달하는데, 아무런 단서도 없이 그 중 한 명을 찾아내겠다는 건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어떤 삽질을 해서라도 이 학생을 찾아내야 한다면 유일한 방법은 세미나의 정보력을 빌리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이 학생이라면 샬레의 업무라는 위계와 선생으로서의 품평을 통해 어떻게든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게다가 선생님도 아시죠? 아무리 샬레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사유도 안 밝히고 학생회에 지원 요청을 거는 건 규정 위반이라고요."

선생이 자신의 품평은 의견이 분분한 요소란 것을 뒤늦게 깨달은 찰나에 또다시 정곡을 찌르는 발언. 밀레니엄의 학생회다운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그 말대로, 지금 선생의 부탁은 공식적으론 샬레로부터의 지원 요청이었다. 도움을 받고 싶다면 그 이유를 밝혀야 한다는 건 규정에 쓰여 있기 이전에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이었다. 밀레니엄 전산 마비 사태 당시 난리통 속에서도 세미나는 나름 열심히 사유를 정리해 샬레에 업무 지원을 요청했었다는 전례도 있는 만큼, 세미나가 이런 부당한 지시를 그냥 받아들일 리는 없었다.

그 사실을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사유를 말할 수 없는 이유까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선생은 결국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이번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될 리가 없다고는 예상했지만, 이 일은 끝내지 못하면 뒤따르는 모든 계획을 시작조차 못하게 되는 상황. 결국 선생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는 동안, 세미나 부실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 미안해."

오랜 침묵 끝에 선생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역시 무리한 부탁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방법밖에는 없다고 멋대로 착각했었나봐. 원칙은 지켜야 하니 원칙인 건데, 선생님이 돼서 모범을 보여주진 못할망정 면목 없는 짓을 했네."

"...."

다소의 고민 끝에 선생이 내린 결론은, 본인이 무리해서라도 정정당당한 방법을 쓰자는 것이었다. 아로나의 힘으로 크래킹을 해서라도 계획을 진행시킬까 하는 생각도 잠시나마 했지만, 아로나가 그런 부탁을 들어줄지 이전에 그런 짓은 학생들의 신뢰를 스스로 져버리는 미친짓에 불과했기에 일말의 지체 없이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학생들과의 신뢰가 없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선생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과 달리 총탄 한 발에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나약한 선생을 학생들이 믿고 따르는 이유는 순전히 지금까지 선생이 쌓아올렸던 신뢰 덕분. 그런 신뢰를 스스로 져버렸다가는 결국 비참한 결말만이 남을 게 뻔했다. 

"그래도 아리스와 한 약속은 지킬 수 있게 됐으니 다행인 건가. 후...."

무엇보다, 아까 전에도 아리스에게 거짓말을 한 자신이 더이상 신뢰를 무너뜨리는 짓을 했다가는 도저히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반대로 지금이라도 약속한 대로 게임개발부로 향한다면 신뢰를 되돌리기엔 늦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아리스와 약속이라니, 혹시 이번 일은 아리스와 관련 있는 사항인가요?"

"어? 아냐, 그런 게 아냐. 이번 일과는 정말로 상관 없는 말이었어. 진짜로."

"아, 그래요?"

눈앞의 학생이 또다시 미심쩍은 눈빛으로 선생을 지긋이 바라보자, 선생은 이어질 질문 공세에 어떻게 대처할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뭐, 그러면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는데, 도움을 못 드려서 죄송해요."

말투와 표정의 분위기가 놀라울 정도로 달라진 탓에 선생은 적잖이 당황했다.

"아 그건... 아? 어, 그, 그래.... 아냐, 고생은 네가 했지. 내가 막무가내로 구는 바람에."

"하하, 그건 또 아시나보네요. 그럼 이만 나갈까요? 문 앞까진 배웅해드릴게요."

그렇게, 아직도 얼떨떨해하는 선생과 싱글생글 웃고 있는 소녀라는 어색한 조합의 발걸음이 세미나 부실에 울려퍼졌다. 부실의 문이 열리자, 거기서부턴 선생만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럼, 다음엔 좀 더 소소한 일로 오세요! 아니지, 다음엔 제가 더 소소한 일로 샬레에 가면 되겠다!"

"그건 꽤나 신선한 발상인데. 그래도 고마워.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노력해볼게."

"하하, 무리는 하지 마시고요. 선생님은 그럴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요."

선생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딘가 울컥하는 듯했다. 학생들은 선생을 믿는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로 자신을 믿고 있는데, 그 믿음을 스스로 박살내려 했던 자신이 또다시 너무나도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래, 고마워 노아. 그럼 다음에 또 보자!"

그렇기에, 선생은 믿음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 흰 머리 소녀에게 진심어린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인사했다.


"와아, 선생님! 어서 와!"

"어서 오세요 선생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하, 다들 안녕. 저번엔 아리스랑 유즈를 데려가버려서 미안했어."

[아니요! 아리스도, 게임개발부도 선생님이 미안해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 맞아요... 저희 생각에도 그때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다행이네. 정말 고마워. 대신이라기엔 뭣하지만... 아리스, 혹시 부탁했던 간식들은 어디에 있어?"

[아, 간식이라면....]

"서, 선생님이 시키신 거였어요? 아리스가 어디선가 과자를 잔뜩 들고 오더니 제, 제 캐비닛을 다 채워버리는 바람에...."

"그러고 보니, 유즈가 웬일로 이 시간에 캐비닛 밖에 나와 있었... 아니, 캐비닛을 다 채웠다고?!"

원래 유즈가 들어 있어야 할 캐비닛에는 온갖 과자가 문도 안 닫힐 정도로 쏟아져나와 있었다.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결제금액을 확인한 선생은 경악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망부석이 되어 버렸고, 아리스를 제외한 게임개발부원들은 패닉에 빠져 과자를 한아름씩 안아들고 환불하기 위해 편의점으로 달려나갔다.


[어라...? 다들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제가 뭔가 잘못한 건가요?]

"아냐... 넌 아무 잘못도 없어...."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