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쌓인 하얀 눈에서는 겨울의 냄새가 났다. 차가운 바람은 코 끝에 앉아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전령이 되었다. 안젤리카는 후드의 목을 왼 손으로 지긋이 눌러 바람이 덜 들어오도록 옷을 여며 쥐었다. 움직이는 내내 오른손은 짧은 치마의 끝을 떠나지 못 했다. 아침의 작은 소동이 다시금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안젤리카! 눈...!”


이른 새벽, 벌컥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단장의 정수리에 요르문의 손잡이를 내리꽂아 기절시킨 안젤리카는 속옷 차림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함께 잠자리를 가진 뒤로는 도무지 거리낌이 없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한 손으로 가슴팍을 가리고서 발로 슬슬 밀어 방 밖으로 저 물건을 내보낸 뒤 옷장을 열었다. 늘 입던 여러 벌의 수녀복 중 하나로 손을 옮겼다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조금 더 안쪽에 있는 드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 해 겨울 에다에게서 크리스마스 선물이 도착한 것을 단장에게 보인 것이 화근이었다. 단장이 그 자리에서 곧장 입어 볼 것을 강권하여 마지못해 응한 안젤리카는 겨울 내내 드레스를 다시 벗지 못 했다. 크리스마스도 지나고, 해가 바뀌고, 이제는 겨울이라 하기도 뭣한 풍경이 창 밖에 자리잡을 무렵에 와서도, 안젤리카는 올해 겨울이 되면 다시 입겠노라는 다짐을 해 준 후에야 원래의 수녀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때, 단장은 겨울의 시작을 첫 눈이 오는 날로 정하자고 했다.


드레스는 아름다웠다. 예쁘게 염색된 빨간 망토, 눈처럼 새하얀 숄과 드레스는 안젤리카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치마 끄트머리에 머물렀다가, 가느다란 허리 부분을 지나 가슴을 채 가리다 말아버린 반대쪽 끝에 도달했다. 하지만, 역시 노출이 너무 많다. 지난 겨울 몇 달을 한 몸처럼 지낸 옷이지만 쏟아지는 시선에는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던 것이 다시 떠올랐다.


그럼에도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안젤리카는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고, 뱉은 말을 없었던 것처럼 무시할 만큼 얼굴이 두꺼운 사람은 못 되었다. 다만 그녀는 드레스를 언제까지 입을 지에 대해서는 이야기 한 바 없으니 오늘 하루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단장이 어떤 말을 해도 지지 말자 마음 먹으며. 지난 해에는 수녀복으로 갈아입으려 할 때 마다 드레스를 벗으면 당장 목을 맬 사람처럼 텅 빈 눈으로 맞춰오는 시선에 이겨내지 못한 터였다. 정 기분이 안 풀린다면 며칠 간 밤이라도 함께 보낼 각오까지 하고서 안젤리카는 드레스를 꺼낸 것이다.


생각의 끝에서, 앞서 가던 단장의 발길이 멈추었다.


“결투장 진입에 앞서 알릴 게 있어. 브라운랜드에 새 용병이 몇 도착했다는 군. 밤세계에서 옥토를 지배하던 자들이라던데, 레비아는 아는 게 있나?”


지목을 당한 레비아는 입을 앙다물고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단장은 잠깐의 공백 뒤에 고개를 끄덕거리고서 각자 잘 대처하라는 말을 건네ㅡ고 남은 길을 마저 걸었다. 안젤리카는 슬쩍 엿본 레비아의 표정으로부터 아는 것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했지만, 더 이상의 생각은 거두기로 했다. 단장이 레비아를 배려해 준 것에는 이유가 있을 터이다. 그 다정함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


몇 차례의 전투를 순조롭게 승리로 장식하고서 잠깐 휴식을 취했다. 안젤리카는 지난 전투 결과를 돌아보고 있는 단장 곁에 가 슬그머니 자리를 잡았다. 이른 아침 그렇게 부산을 떨었는데 어째선지 옷을 보고도 아무런 말이 없다.


“안젤리카, 새로 만나 본 용병들은 어땠어?”


가만히 있자니 단장이 말을 꺼냈다.

물끄러미 그 옆얼굴을 바라보던 안젤리카는 태연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총 셋을 만났어요. 단적으로 얘기하면, 까다롭지만 공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 용병단에 필요해 보이는 녀석은 있었어?”

“벨페른이라면 아이가 할 수 없는 일 몇 가지를 해낼 수 있을 거에요. 아스모드가 있다면 상대 진영을 무너트리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겠네요.”

“죄다 느끼하게 생긴 녀석들이군. 성격은 어떨 것 같아?”

“벨페른은 어째선지 어린아이 몸을 하고 있는 것이 좀 께름칙하고, 아스모드는… 베나카 말로는 눈이 마주쳤을 때 혀로 핥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대요.”

“마모니르는?”

“착한 사람인 것 같았어요. 검을 맞대고 있는 와중에 문어발 하나를 내밀고는 잘라가서 먹으라고 하던데요. 금새 자란다며.”

“가슴은?”

“네?”

“크냐고.”

“네…엄청.”

“일단 하나. 총 넷이 들어왔다고 했으니 하나가 남았는데… 음, 마침 딱 만났군.”


다음 전투 상대가 정해진 모양이다. 슬그머니 자신의 가슴을 가리던 안젤리카가 준비를 위해 일어설 때, 단장이 한 마디 덧붙였다.


“발제라는 친구인데, 낫질이 매섭대. 어떤지 잘 지켜보고 알려달라구.”


그녀의 첫 인상은 강렬했다. 풍성한 보랏빛 머리칼은 엉덩이 아래까지 닿아서 몸을 껴안고 있었고 한 쪽만 드러낸 눈 속에는 평생을 지배자로서 군림해온 야수와, 언동 하나하나에서 매력을 뿜어내는 뇌쇄적인 여인이 함께 자리했다. 기괴한 문양이 그려진 낫은 그녀가 가진 힘이 어떠한 것인지를 대변해주는 듯 했다. 그러나 안젤리카는 그녀의 망토 아래에 머무른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옷이라는 것이 몸을 가리는 용도만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입는다라는 표현을 쓰려면 저래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저것은 기존의 모든 이분법을 해체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 식의 패션인가? 나는 안입음을 입고 있다 뭐 그런 것인가? 그녀가 좌우로 몸짓할 때 마다 흔들리는 둥그런 열매가 탐스럽다. 안젤리카는 저도 모르게 눈이 그 움직임을 좇고 있는 것을 느끼고 세차게 머리를 휘둘러 다가올 전투에 집중하고자 했다.


전투의 개시가 선언되고, 늘 그랬듯 케일런이 상대 진영 한가운데를 노려 다음 공격을 받아낼 준비를 했다. 그 곁에서 다음 공격을 준비하던 안젤리카는 케일런을 향한 거대한 낫이 자신에게도 미침을 보았다. 다가선 발제의 모습은 더욱 고혹적이었고, 파괴력이 있었다. 단장이 저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다면 틀림 없이 반하겠지,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자신에게 둘러진 테미스의 가호와 요르문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저주보호막으로도 그 낫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정신을 놓고 말았다.


-


안젤리카가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것은 익숙한 자신의 방 천장이었다.


“벨리아스에게 나중에 인사해둬. 해골병사가 널 옮겨다 줬으니까.”


침대 옆 테이블에서 말을 건네온 건 와인을 홀짝이던 단장이었다.


“전투는…?”

“완패. 낫질 한번에 둘, 셋씩 쓱쓱 나가떨어지는데, 그걸 봤다면 처음 당한 게 자신이라는 걸 감사해야 할거야.”

“어째서 테미스의 능력이 미치질 않는 거죠?”

“그녀의 낫에 깃든 가호라더군. 빅터의 검이나, 일라이자의 채찍과 비슷한 능력이 있나봐.”

“앞으로 힘들어 지겠네요.”

“힘들다 수준이 아냐. 우리가 용병단이 아니라 물건 팔아먹는 장사꾼이었다면 당장 폐업해야 할 포식자의 등장이지. 마치 노린 것처럼 내가 데리고 있는 용병들 모두에게 치명적이더군. 케일런의 카운터펀치에 완전 면역인데다, 그 낫으로는 어떤 지원이든 걷어내며, 세이르의 회복도 마비 시켜버려. 완전 뜯어고쳐야 할 것 같아.”


그 말을 듣는 동안 안젤리카는 용병단 초창기 나날을 다시금 떠올렸다. 모든 상대가 아르칸을 앞에 세우는 바람에 누구도 그녀를 찾지 않던 와중에, 자신에게 찾아와 선뜻 손을 내밀던 단장의 눈이 아직도 선하다. 재정의 대부분이 자신에게 쓰일 스킬북과 룬 확보에 투자되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못 내던 그 시절. 주위의 단장 모두가 알렉을 고용하지 않고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며 타박을 주어도 들은 체도 하지 않으며 언제나 용병단의 주축으로 자신을 내세우기를 주저하지 않던 사내. 힘든 시간을 겪고서 좋은 동료들을 만난 덕에 지금에 이르렀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미욱함이 단장과 그의 용병단을 한계 짓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를 떨치지 못한 채였다.


“단장. 그녀와의 계약을 노릴 건가요?”

“물론. 그렇게 예쁜 사람이 나를 모르고 살아가게 한다는 건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지.”

“계약에 성공하면, 재정에 좀 무리가 가더라도 제 스킬북을 가져가도록 하세요.”


버림받는 것은 무섭다. 차라리 스스로 떠나는 길을 택하는 것이 모두에게 올바를 것이다. 안젤리카는 그렇게 믿고 무거운 말을 꺼냈다. 단장은 한참을 말이 없이 있었다. 안젤리카가 몇 마디 더 붙이려는 찰나 단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한대 맞고 뻗더니, 아직 꿈 속에 있나 보군.”


그가 침대에 걸터 앉은 안젤리카를 눕히며 입을 맞추자 처음엔 주저하던 그녀도 이윽고 그의 손에 몸을 내주었고, 서로 정신 없이 상대의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겨울의 밤은 뜨거운 마음으로 가득 채워졌다. 한참 후에 함께 침대에 누워있던 단장이 시선을 맞추고는 안젤리카에게 물어왔다.


“안젤리카, 몇 달을 매달려서 너에게 마지막 스킬북을 선물하며 했던 말을 기억해?”

“영원히 함께라고 했었죠.”

“내 말을 못 믿었군.”

“…”


어느 새 일어나 옷매무새를 점검한 단장은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꺼냈다.


“마음을 준다는 건 심장에 한 자리를 내어주는 거라고 하더라. 마음을 준 사람을 잊으려면 내주었던 그 자리를 도려내야 하는 거겠지. 난 그런 아프고 힘든 일은 안 하련다.”


안젤리카는 필시 단장의 얼굴이 폭발 직전일 거라 생각했다. 능청스러운 면은 있었지만 저런 낯뜨거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줄이야. 적어도 얼굴은 빨개져야 사람답지 않은가.


“그래도 한 명만 허락한다고는 차마 못 하겠어. 난 심장이 무지막지하게 넓은 대인이거든.”

“피차일반이네요.”


푸훗 하며 말을 받은 안젤리카는 여전히 등만 보여주고 있는 단장을 따스하게 응시했다.


“오늘 드레스, 정말 예뻤어. 약속을 기억해준 것도 고맙고. 그런데 나 때문에 억지로 입을 필요는 없으니까, 앞으로는. 간다.”


말을 마치고 밖으로 가려는 단장이 문고리를 잡고 한 번 더 입을 떼었다.


“아, 안젤리카, 나는 네가 뭘 하든 좋지만... 안경만은 안 돼.”


안젤리카는 참았던 웃음을 기분 좋게 터뜨리며 멀어지는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누가 그딴 걸 일부러 써요-!”


ㅡ FIN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