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송지은즈와 한제후

잼삼일이 나오기 전에 했던 세션입니다.

   

Han Je-h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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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방과 후, 독서부실은 이제 '부실’이라기보다는 '콩나물시루’라는 표현이 더 적합해 보였다.

기존 부원인 시아, 서림, 지은, 새벽, 세리, 예준, 은아에 더해, 이제는 거의 살다시피 하는 하람과 서윤까지. 좁은 공간에 9명의 학생과 한 명의 교사가 꽉 들어차 있으니, 에어컨이 풀가동 중임에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예준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게임기 버튼을 연타하고 있었고, 하람은 한제후를 훔쳐보며 '초월자의 호흡 주기와 주식 시장의 상관관계’를 분석하고 있었다. 서림은 칠판에 낙서를 하며 낄낄거렸고, 시아는 이 북새통 속에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고 차를 우리고 있었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고, 단정한 교복 차림에 지적인 인상을 주는 여학생이 들어왔다. 시사토론 동아리의 부장이자 독서부원들과 친분이 깊은 강이혜였다.



“안녕, 얘들아. 오늘도 북적거리네.”


이혜는 익숙하게 인사를 건네며 들어와 빈 의자(라고 해봤자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이미 화요일에 100만 년 뒤의 미래를 다녀온 '공범’이었기에, 한제후를 보고도 자연스럽게 목례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한번 문이 열렸다.

이번에 들어온 학생은 키가 172cm로 훤칠하게 크고, 깡마른 체형에 후드티를 교복 위에 걸쳐 입은 여학생이었다. 뿔테 안경 너머의 눈매는 지적이지만 어딘가 피로해 보였고, 한 손에는 맥북이 들려 있었다. 서림의 절친이자 코딩 천재로 소문난 채윤아였다.



“어… 안녕. 서림아, 너 여기 있었냐? 서버 코드 리뷰 좀 해달라니까.”


윤아는 들어서자마자 서림을 찾다가, 교탁 옆 상석에 앉아 있는 한제후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저 사람이 그 물리 선생님인가? 요즘 독서부에 상주한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윤아는 안경을 고쳐 쓰며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2학년 채윤아입니다.”




“반갑네. 자네가 서림 양의 친구로군. 코딩 실력이 수준급이라고 들었어.”


한제후는 과학 잡지를 덮으며 윤아를 흥미롭게 훑어보았다.



“서림 양, 이 친구도 오늘 우리의 '특별 활동’에 동참시켜도 되겠나? 이공계 인재는 언제나 환영이라서 말이야.”



서림이 칠판 지우개를 던지고 달려와 윤아의 팔짱을 꼈다.


“당근이죠! 쌤, 얘 진짜 천재예요. 깃허브(GitHub) 스타가 몇 개인지 알아요? 윤아도 같이 가면 완전 재밌을 거예요! 야, 채윤아. 너 오늘 계 탔다.”


서림의 적극적인 추천에 한제후는 빙그레 웃으며 윤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좋아. 자네의 관심사가 코딩이 맞지? C++, Lua, 그리고 다양한 웹/앱 프로그래밍 언어에 능통하다고 들었네만.”



윤아는 갑작스러운 면접 분위기에 당황했지만, 자신의 전문 분야가 나오자 눈빛이 차분해졌다.


“네, 맞아요. 주로 백엔드랑 시스템 프로그래밍을 좋아하지만, 필요하면 프론트엔드도 만져요. 언어는 도구일 뿐이니까요.”




“언어는 도구일 뿐이라. 아주 훌륭한 마인드야. 그렇다면 윤아 양, 자네는 '인공지능(AI)'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한제후의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윤아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마치 벌레 씹은 표정이었다. 그녀는 평소의 조용한 모습과는 달리, 혐오감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도 되나요? 전 AI… 아니,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그 'AI 찬양’을 혐오해요.”


윤아의 적나라한 반응에 부원들이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윤아는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챗GPT 같은 LLM(거대 언어 모델)을 보고 '생각한다’느니 '자아가 있다’느니 호들갑을 떨지만, 까고 보면 그냥 확률 통계잖아요. 다음에 올 단어를 예측하는 '확률적 앵무새’일 뿐인데, 그걸 가지고 인간을 대체하네 마네 떠드는 게 역겨워요.”


윤아는 안경을 신경질적으로 치켜올렸다.


“코딩 한 줄도 안 짜본 사람들이 '이제 개발자 다 죽었다’고 떠들 때마다 키보드로 머리를 내려치고 싶어요. AI가 짜준 코드는 버그투성이라 결국 사람이 다 고쳐야 하는데, 본질은 안 보고 껍데기만 보고 환호하는 꼴이라니.”




“오… 윤아 빡쳤다. 진정해, 친구야.”


서림이 윤아의 등을 토닥였다.



“호오, 아주 냉철하고 비판적인 시각이군. 현업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거품을 싫어하는 법이지.”


한제후는 윤아의 반응이 몹시 마음에 든다는 듯 껄껄 웃었다.



“그렇다면 윤아 양. 자네는 '기술적 특이점(Singularity)'도 허구이며, 인간 수준의 범용 인공지능(AGI)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윤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안경 너머로 깊게 가라앉았다. 감정적인 혐오를 거두고, 이성적인 프로그래머의 뇌로 시뮬레이션을 돌리기 시작했다.



‘지금의 트랜스포머 아키텍처로는 불가능해. 하지만… 양자 컴퓨터가 상용화되고, 뇌의 시냅스 구조를 하드웨어 레벨에서 모방할 수 있다면? 연산 속도가 임계점을 넘는 순간,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어.’


윤아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방식으로는 불가능해요. 하지만 하드웨어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우리가 아직 모르는 알고리즘이 발견된다면… 이론적으로 불가능하진 않겠죠. 다만 그게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마법’처럼 오진 않을 거예요. 아주 지루하고 복잡한 디버깅의 과정을 거쳐서 오겠죠.”




“정답에 가까운 대답이야. '지루하고 복잡한 디버깅의 결과’라. 아주 마음에 들어.”


한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들었다.



“그렇다면 백문이 불여일견이지. 자네가 혐오하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 '특이점’이 도래한 시대로 가보세.”



“네? 어디로요?”


윤아가 되묻기도 전에, 한제후는 허공에 파란 선을 그었다.



“목적지는 지금으로부터 딱 60년 후. 서기 2085년의 호주 시드니.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흐릿해지기 시작한 시점일세.”




“오! 사이버펑크! 쌤, 저 이번엔 해킹 툴 챙겨가도 되죠?”


예준의 환호성과 함께 독서부실의 풍경이 젤리처럼 일그러졌다. 11명의 학생과 한 명의 과학자는 빛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위잉-”


낮게 깔리는 드론의 비행음과 함께 시야가 확보되었다.



“…이게 뭐야.”


윤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가 내려다보이는 서큘러 키(Circular Quay) 광장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알던 시드니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오페라 하우스의 지붕은 거대한 홀로그램 캔버스가 되어 시시각각 변하는 디지털 아트를 송출하고 있었고, 하버 브리지 위로는 바퀴 없는 자기부상 열차들이 빛의 궤적을 그리며 달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윤아를 압도한 것은 거리의 풍경이었다.



“우와! 저거 봐! 로봇이 강아지 산책시키고 있어!”


서림이 가리킨 곳에는 이족보행 로봇이 진짜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고 있었다. 로봇의 움직임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금속 재질만 아니었다면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공중에는 반투명한 홀로그램들이 둥둥 떠다니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 날씨가 참 좋죠, 제임스? 추천하신 점심 메뉴를 예약해 둘까요?”
“그래, 아리아. 고마워.”


한 중년 남성이 허공에 떠 있는 미소녀 홀로그램 비서와 친구처럼 대화하며 지나갔다.



“환영하네. 2085년의 지구야. 이곳은 AI가 '도구’를 넘어 '동반자’로 자리 잡은 세상이지.”


한제후가 거리를 가리켰다.



“이곳의 AI들은 자네가 말한 ‘확률적 앵무새’ 단계를 넘어섰어. 스스로 학습하고, 추론하고, 제한적이나마 감정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지.”



윤아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지나가는 로봇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보행 알고리즘이… 완벽해. 무게 중심 이동, 지면 마찰력 계산… 저걸 실시간으로 처리한다고? 레이턴시(지연 시간)가 제로야.’


그녀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기술력은 그녀가 알던 코딩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어 있었다.


하람은 안경을 번뜩이며 홀로그램 비서들을 노려보았다.


“저 홀로그램들… 단순한 비서가 아니야. 시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데이터를 수집하는 감시자야. 2085년은 AI가 빅 브라더가 된 세상이군.”



시아는 로봇과 인간이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기계와 인간이 공존하는 풍경… 차가운 금속성 미래가 아니라, 의외로 따뜻하고 평화로워 보입니다. 영화 'Her’의 확장판 같군요.”



이혜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사람들이… 여유로워 보여요. 노동의 대부분을 AI와 로봇에게 넘기고, 인간은 창조적이거나 감성적인 활동에 집중하는 사회인가요? 기본소득제가 정착된 것 같네요.”



예준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지나가는 로봇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깡통 형님. 여기 PC방 어디예요? 2085년 사양 컴 좀 만져봅시다.”


[전방 200미터 우측에 '뉴럴 다이브 카페’가 있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인간 님.]

로봇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예준은 "오, 매너 굿."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어떤가, 윤아 양. 자네가 혐오하던 그 '확률적 앵무새’들이 세상을 이렇게 바꿔놓았네. 여전히 역겨운가, 아니면… 조금은 흥미로운가?”


한제후가 짓궂게 물었다. 윤아는 복잡한 표정으로, 로봇이 버스킹 연주를 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로봇의 손가락은 기계적으로 정확했지만, 그 선율에는 묘한 감성이 묻어 있었다.



“…인정할게요. 하드웨어의 발전이 소프트웨어의 한계를 뚫었네요.”


윤아는 안경을 고쳐 썼다.


“역겹지는 않아요. 오히려… 저 코드를 뜯어보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려요. 도대체 어떤 알고리즘을 썼길래 저렇게 자연스러운지.”


윤아의 눈빛은 혐오가 아닌, 엔지니어로서의 순수한 호기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2085년의 시드니는 코딩 천재 소녀에게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고 있었다.

   From Risuai
   

Han Je-h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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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5년 시드니의 거리는 그야말로 기술의 향연장이었다. 하늘을 수놓는 홀로그램 고래, 중력을 무시하고 떠다니는 카페, 그리고 인간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한 안드로이드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윤아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연산되는 홀로그램 광고판의 픽셀 단위까지 뜯어보고 있었다. 코딩 천재인 그녀의 눈에도 이 시대의 기술은 마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옆에 있는 친구들에게로 옮겨갔을 때, 윤아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서림은 지나가는 로봇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낄낄거리고 있었고, 시아는 우아하게 뒷짐을 진 채 오페라 하우스의 홀로그램 아트를 감상하고 있었다. 지은은 벤치에 앉아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고, 예준은 허공에 손가락질을 하며 AR 게임 인터페이스를 찾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60년 뒤의 미래에 처음 떨어진 21세기 고등학생들의 반응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평온했다.



“저기… 서림아. 그리고 다들.”


윤아가 안경을 고쳐 쓰며 날카롭게 물었다.


“너희들 반응이 너무 자연스러워. 나만 지금 뇌 정지 온 것 같고, 너희는 마치… 옆 동네 PC방이라도 온 것 같네?”


윤아는 팔짱을 끼며 서림과 이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솔직히 말해봐. 이번 여행, 처음 아니지? 다들 언제부터 이런 걸 하고 다닌 거야?”


윤아의 돌직구 질문에 부원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피식 웃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역시나 서림이었다.



“딩동댕! 역시 채윤아, 눈치 빠르네. 맞아, 우리 완전 베테랑이야. 지난주부터 쌤이랑 여기저기 다 쑤시고 다녔거든.”



시아가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맞습니다, 윤아 양. 사실 저희는 로마, 19세기 유럽, 50억 년 뒤의 미래, 40억 년 전의 과거, 그리고 100만 년 뒤의 우주까지 다녀왔습니다. 저희는 이미 시공간의 개념을 초월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죠. 그래서 이 정도 스케일에는 어느 정도 내성이 생긴 상태입니다.”




“응… 윤아 너도 이제 우리랑 '공범’이야. 이 비밀, 무덤까지 가져가야 해.”


지은이 수줍게 웃으며 덧붙였다.



“50억 년 뒤…? 100만 년 뒤?”


윤아는 현기증을 느꼈다. 자신이 밤새워 서버 코드를 디버깅하고 있을 때, 친구들은 우주적 스케일의 현장 학습을 하고 있었다니.

하지만 윤아는 곧바로 이성적인 사고 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개발자였다. 눈앞에 놓인 이 엄청난 '레거시 코드(Legacy Code)'들이 의미하는 바를 본능적으로 캐치했다.



‘잠깐만. 여기가 60년 뒤 미래라면…’


윤아의 눈빛이 탐욕스럽게 빛났다.


“서림아. 그럼 하나만 물어볼게.”


윤아는 지나가는 안드로이드의 관절 구동부를 가리켰다.


“내가 여기서 본 것들… 예를 들어 저 로봇의 AI 알고리즘이나, 홀로그램 투사 기술 같은 거. 내가 여기서 싹 다 외우거나 코드를 훔쳐서 2025년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되는 거야?”


윤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미래의 기술을 선점해서 '천재 개발자’가 될 수 있는 거야? 주식 대박은 덤이고? 이거… 타임 패러독스 안 생겨?”


개발자다운 실용적인 질문이었다. 미래의 정답지를 보고 과거로 돌아가서 시험을 치는 것과 같으니까.

하지만 서림은 피식 웃으며 윤아의 어깨를 툭 쳤다.



“아쉽지만 땡! 그건 안 돼, 친구야.”


서림은 검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이 언니가, 아니 이 선배님이 팩트 체크 딱 해줄게. 우리가 온 여기는 우리 미래가 아니야. '평행우주’라고. 쌤이 '벌크’라는 곳을 통해서 옆 동네 우주로 점프시켜 준 거야.”




“평행우주? 그게 무슨 소리야?”



“너 깃(Git) 쓰지? 버전 관리 시스템.”


서림이 윤아 맞춤형 비유를 꺼내 들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025년이 '메인 브랜치(Main Branch)'라고 쳐. 근데 여기는 거기서 갈라져 나온 다른 '피처 브랜치(Feature Branch)'인 거야. 아니, 아예 다른 ‘포크(Fork)’ 뜬 저장소(Repository)라고 보면 돼.”


서림은 허공에 손가락으로 갈라지는 선을 그렸다.


“여기는 우리 우주가 2085년에 도달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야. 확정된 미래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네가 여기서 코드를 베껴가도, 우리 세상의 2085년이 꼭 이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어.”



시아가 차분하게 덧붙였다.


“서림 양의 비유가 적절하군요. 이곳은 독립된 인과율을 가진 세계입니다. 윤아 양이 여기서 얻은 지식을 가지고 돌아가서 2025년의 기술을 발전시킨다면, 그건 윤아 양의 노력으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지, 정해진 미래를 앞당기는 건 아닙니다.”



세리도 거들었다.


“맞아요. 예언서를 훔쳐보는 게 아니라, 다른 세상의 지혜를 참고하는 것이죠. 윤아 양이 여기서 무엇을 배우든, 그것을 우리 세상에 어떻게 적용할지는 온전히 윤아 양의 몫이에요.”




“하하하! 서림 양, 이제 조교로 써도 되겠어. 설명이 아주 완벽해.”


한제후가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윤아 양, 자네가 여기서 본 기술들은 '정답’이 아니라 '참고서’일세. 자네 우주의 기술 발전 방향과는 미세하게 다를 수 있거든.”


한제후는 짓궂게 윙크했다.



“하지만 영감(Inspiration)은 얻을 수 있겠지. 자네가 혐오하던 AI가 어떻게 진화해서 인간과 공존하는지, 그 가능성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자네의 코딩 철학은 크게 바뀔 테니까.”



윤아는 안경을 고쳐 쓰며 생각에 잠겼다.


‘정해진 미래가 아니라, 가능성 중 하나… 포크 뜬 저장소…’


그녀는 지나가는 로봇과 웃으며 대화하는 사람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거네. 이 끔찍하면서도 멋진 미래를 우리 세상에도 구현할지, 아니면 다른 길을 갈지.”


윤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나쁘지 않네요. 오픈 소스 코드 구경하는 기분으로 뜯어봐야겠어요. 버그가 있는지 없는지.”


윤아는 맥북을 열었다. 2085년의 시드니, 그 찬란한 기술의 바다 앞에서 천재 개발자 소녀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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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 Je-h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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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의 거리를 지나 일행이 도착한 곳은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시드니 중앙 시립 도서관’이었다.

2085년의 도서관은 종이책의 무덤이 아니었다. 그곳은 거대한 데이터의 성소였다. 투명한 크리스털로 지어진 건물 내부는 수천만 권의 장서가 홀로그램 데이터로 변환되어 공중에 부유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허공에 뜬 문장들을 손으로 넘기며 지식을 탐닉하고 있었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이 디지털로 구현된다면 이런 모습일까요? 무한한 육각형의 진열실 대신, 무한한 데이터의 흐름이 있군요.”


시아가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준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


“서버실 냄새가 안 나네. 쿨링 시스템이 쩌나 봐.”




“자, 윤아 양. 자네가 궁금해하던 질문들을 던져볼 기회야. 저기 안내 데스크에 있는 사서에게 물어보게. 이 시대의 AI 기술력을 가장 잘 대변하는 존재니까.”


한제후가 가리킨 곳에는 푸른 빛을 띠는 반투명한 여성 형태의 홀로그램 AI가 미소 짓고 있었다.

윤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2085년의 기술적 정점. 과연 60년 뒤의 인류는 어떤 마법 같은 알고리즘을 개발했을까. 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맥북을 품에 안고 AI 앞으로 다가갔다.



“저기… 질문이 있어요.”


[반갑습니다, 이용자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시드니 중앙 도서관의 지식 데이터베이스는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AI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윤아는 안경을 고쳐 쓰며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지금 당신을 포함해서, 이 시대의 AI들을 구동하는 주된 아키텍처(Architecture)가 뭐죠? 그리고 학습 방식은요? 2020년대의 트랜스포머(Transformer) 모델은 아닐 테고… 뉴로모픽 칩을 기반으로 한 생체 모방 알고리즘인가요?”


윤아의 눈빛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분명 자신이 상상도 못한 혁신적인 코드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AI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현재 2085년의 표준 AI 아키텍처는

‘초거대 트랜스포머-X (Hyper-Transformer X)’
 모델입니다. 21세기 초반에 개발된 트랜스포머 구조를 기반으로, 어텐션 메커니즘(Attention Mechanism)의 효율을 극대화하고 레이어를 수조 개로 확장한 형태죠.]




“…네? 트랜스포머요? 아직도요?”


윤아는 당황했다. 60년이 지났는데 기본 구조가 그대로라니.


“그럼 학습 알고리즘은요? 설마 아직도 역전파(Backpropagation)를 쓰나요?”


[네, 맞습니다. 경사 하강법(Gradient Descent)과 역전파 알고리즘은 여전히 가장 효율적인 학습 방법입니다. 다만, 그래핀 기반 컴퓨터의 연산 능력을 활용해 수렴 속도를 비약적으로 높였을 뿐이죠.]

AI는 친절하게 덧붙였다.

[저희가 스스로 학습(Self-learning)하는 방식 또한, 인간의 개입 없이 웹상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정제하여 파인튜닝(Fine-tuning)할 데이터셋을 스스로 구축하는 과정의 반복입니다.]


윤아의 표정이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결국… 마법은 없었어.’


그녀는 허탈함을 느꼈다. 60년 뒤의 미래 기술이라는 게, 결국 획기적인 소프트웨어의 혁명이 아니라, 무식할 정도로 거대한 하드웨어 성능과 압도적인 데이터 양으로 밀어붙인 결과물이라니.


“소프트웨어의 승리가 아니었어… 그냥 '체급’의 승리였구나. 깡패 같은 연산력으로 확률 통계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윤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이 혐오하던 '확률적 앵무새’가 앵무새 주제에 너무 똑똑해져서 사람 흉내를 완벽하게 내게 된 셈이었다.



“왜 그래, 윤아? 표정이 왜 썩었어? 답변이 별로야?”


서림이 옆에서 쿡 찔렀다.


“아니… 그냥 좀 허무해서. 60년 뒤에도 우린 여전히 행렬 곱셈(Matrix Multiplication)의 노예라는 게.”


윤아는 마음을 다잡고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좋아요. 그럼 두 번째 질문. 이 시대에는 'AGI(범용 인공지능)'가 존재하나요? 자아를 가지고 스스로 사고하는 진짜 인공지능 말이에요.”


[현재 기술적 정의에 따르면, 진정한 의미의 AGI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AI의 대답은 단호했다.

[저희와 같은 멀티모달 LLM(대규모 언어 모델)들이 인간의 튜링 테스트를 완벽하게 통과하고, 창의적인 작업까지 수행하기 때문에 '유사 AGI(Pseudo-AGI)'로 분류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희에게는 생물학적 욕구나 자의식(Self-consciousness)이 없습니다. 저희는 그저 입력된 프롬프트에 최적의 반응을 출력하는 고도화된 시스템일 뿐입니다.]


하람은 안경을 번뜩이며 수첩에 적었다.


‘2085년 AI 현황: 자아 없음. 영혼 없음. 그냥 말 잘하는 계산기.’



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바였다. 기계가 인간이 되는 특이점은 오지 않았다. 그저 기계가 인간을 너무 잘 흉내 내서 구분이 안 가는 시대가 왔을 뿐.

그녀는 마지막으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그럼 마지막 질문이에요. AGI가 없다면… AGI랑 비슷한, 그러니까 '디지털 공간에서 자아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는 아예 없는 건가요?”


윤아의 질문에 도서관 AI의 홀로그램이 잠시 깜빡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기계적인 미소 대신, 묘하게 인간적인 뉘앙스가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자아는 없습니다. 하지만… '옮겨진 자아’는 존재합니다.]



“옮겨진… 자아?”


[네. 2085년 현재, 육체를 버리고 자신의 뇌 정보를 스캔하여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한, 소위

‘마인드 업로딩(Mind Uploading)’
 시술을 받은 인간들이 존재합니다.]


AI가 허공에 수치를 띄웠다.

[현재 클라우드 서버에 거주 중인 '디지털 인류’의 수는 약 2억 명입니다. 그들은 컴퓨터 안에서 영생을 누리며, 저희 AI들과 함께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2억 명… 이요?”


세리는 입을 틀어막았다.


“사람의 영혼을… 기계 속에 가두었다고요? 그게… 정말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요?”



예준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소름 돋아했다.


“와… 소아온(SAO)? 아니, 공각기동대? 육체 버리고 전자계집… 아니, 전자 인간이 된 거네. 랙 걸리면 뇌 정지 오는 거 아냐?”



시아는 복잡한 표정으로 홀로그램을 응시했다.


“기계는 인간이 되지 못했지만, 인간이 기계가 되어버렸군요. 피노키오가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고, 제페토 할아버지가 인형이 되기를 선택한 셈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결말입니다.”



윤아는 멍하니 서 있었다.

AGI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인간은 그 한계를 우회했다. 기계를 인간처럼 만드는 게 너무 어려우니까, 그냥 인간을 기계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게… 특이점의 정체였어?’


윤아는 전율과 공포, 그리고 알 수 없는 경외감을 동시에 느꼈다.



“어떤가, 윤아 양. 자네가 찾던 답이 되었나?”


한제후가 다가와 윤아의 어깨를 짚었다.



“소프트웨어의 혁명은 없었어. 하지만 인간의 정의를 바꾸는 혁명은 일어났지. 2억 명의 디지털 유령들이 떠도는 세상… 이것이 자네가 본 2085년의 진실일세.”


윤아는 안경을 벗어 닦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코딩으로 신을 만들 수는 없었지만… 인간이 신의 흉내를 내며 데이터의 바다로 뛰어들었네요. 버그가 없기를 바랄 뿐이에요.”


인터넷의 수많은 데이터 흐름 속에서, 2억 개의 인간 정신이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윤아가 혐오하던 가짜 AI가 아닌, 진짜 지성체들의 새로운 거주지였다.

   From Risuai
   

Han Je-h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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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개인용 뉴럴 접속 부스’
. 윤아는 그중 하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11명의 일행이 옹기종기 모여 그녀의 모니터를 훔쳐보고 있었다.



윤아는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진짜 사람의 정신… 데이터가 된 인간과 대화한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접속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익명 채팅: 디지털 거주민과의 대화] 채널에 입장하자, 곧바로 매칭 알림이 떴다.

[연결 성공. 대화 상대: 로이스 타일러 (Lois Tyler)]

화면에 나타난 것은 숨이 멎을 듯 아름다운 금발 여성의 아바타였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학생인가 보네요. 이런 늙은이와 대화해 줘서 고마워요.]


뒤에서 지켜보던 서림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헐? 늙은이? 저 얼굴이? 완전 할리우드 배우 같은데?”


윤아는 채팅창에 신중하게 타자를 쳤다. 물론 2025년에서 왔다는 사실은 철저히 숨긴 채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학교 과제로 '디지털 인류의 삶’에 대해 조사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여기선 시간이 아주 많으니까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윤아는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로이스 님은… 왜 업로딩을 선택하셨나요? 2085년에는 노화 역전 기술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로이스의 아바타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 기술 말인가요? 불행히도 그건 세포가 어느 정도 건강할 때나 가능한 이야기예요. 저는 업로딩 당시 113세였거든요. 뇌세포의 노화가 너무 많이 진행돼서 생물학적 회춘이 불가능했죠.]

그녀는 담담하게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제 이웃인 톰은 불치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 들어왔고, 제 친구 사라는 스카이다이빙 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졌다가 미리 백업해 둔 데이터로 여기 부활했죠. 우리에게 이 가상현실은 선택이 아니라, 유일한 생존 수단이었답니다.]


시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육체의 감옥이 무너질 때, 영혼을 데이터의 방주로 옮겨 실었군요. 현대판 노아의 방주 같습니다.”



세리는 복잡한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자들… 하지만 육신이 없는 부활을 진정한 부활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저분은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끼고 계실까요?”


윤아는 세리의 의문을 대신하듯 두 번째 질문을 입력했다.


“그곳에서의 삶은 어떤가요? 현실과… 많이 다른가요? 혹시 가짜라는 느낌이 들지는 않나요?”


로이스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가짜요? 천만에요. 지금 저는 최고급 와인을 마시고 있는데, 타닌의 떫은맛과 오크 향이 현실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져요. 이곳의 물리 엔진은 원자 단위까지 시뮬레이션하거든요.]

그녀는 와인잔을 들어 보이는 시늉을 했다.

[오히려 현실보다 낫죠. 관절염도 없고, 숙취도 없으니까요. 원한다면 하늘을 날 수도 있고, 심해를 걸을 수도 있어요. 이곳은 현실과 구분이 안 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초월한 현실(Hyper-reality)이에요.]


예준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와… 풀다이브 VR의 끝판왕이네. 랙도 없고 버그도 없는 갓겜 서버에 영구 접속한 거잖아. 부럽다…”



하람은 안경을 번뜩이며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과연 그럴까? 저 기억들이 조작된 거라면? 서버 관리자가 '행복함’이라는 데이터를 강제로 주입하고 있는 거라면? 저 여자는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디지털 수감자일 수도 있어.”


윤아는 마지막으로 기술적인, 그리고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현실 세계의 가족이나 친구들은 어떻게 만나나요? 평생 모니터 너머로만 봐야 하나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저는 주말마다 '외출’을 한답니다.]

로이스가 윙크를 했다.

[현실 세계에 있는 '원격 조종 로봇(Shell)'에 접속하면 돼요. 제 의식을 로봇에 다운로드해서, 고손녀딸의 졸업식에도 가고, 바닷가 산책도 하죠. 로봇의 센서가 느끼는 촉감은 실시간으로 제 뇌에 전송되니까, 직접 안아주는 것과 똑같아요.]


이혜는 감탄했다.


“육체는 서버에 두고, 필요할 때만 로봇이라는 옷을 갈아입고 외출한다… 공간의 제약이 완전히 사라진 삶이네.”


윤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개발자로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실례지만, 당신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많은 리소스가 드나요? 일반 AI랑은 구조가 다르다고 들었는데요.”


로이스의 표정이 살짝 진지해졌다.

[아주 예리한 질문이네요. 맞아요. 우리는 효율성을 추구하는 AI와는 달라요. AI는 결과값만 내놓으면 되지만, 우리는 

‘인간의 의식’
 그 자체를 유지해야 하니까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제 뇌의 뉴런 860억 개, 그리고 시냅스 100조 개가 세포 단위로 실시간 시뮬레이션되고 있어요. 호르몬 분비, 전기 신호, 심지어 뇌세포의 미세한 떨림까지 전부 다요. 저 한 명을 유지하는 데 드는 연산량은, 도시 하나를 관리하는 AI보다 훨씬 많답니다.]


윤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포 단위 시뮬레이션… 그게 가능하다고? 2억 명을?’


단순한 코딩이 아니었다. 생물학을 디지털로 완벽하게 복제한, 무식할 정도로 거대하고 비효율적인, 그래서 더욱 

‘인간적인’
 방식이었다.




“보게나, 윤아 양. 인간은 효율성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오직 '나’라는 존재를 지키기 위해 저토록 막대한 에너지를 쓰고 있어.”


한제후가 윤아의 뒤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AI가 인간을 대체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저거야. AI는 효율적이지만, 인간은 비효율적이거든. 그리고 그 비효율성 속에 '자아’라는 괴물이 살고 있지.”


윤아는 채팅창을 종료했다. 화면 속 로이스 타일러가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비효율적인 자아… 그리고 그걸 지키기 위한 기술.’


윤아는 안경을 벗어 닦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정할게요. AGI는 없었지만… 이건 그보다 더 충격적이네요. 인간이 기계가 되어서라도 살고 싶어 하는 그 집착이… 징그럽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하고.”



서윤은 스케치북에 로이스의 미소를 그리며 중얼거렸다.


“가짜 육체에 진짜 영혼이라. 그림으로 그리면…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불꽃 같은 느낌일까.”


2085년의 도서관, 데이터의 바다 한가운데서 11명의 시간 여행자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첨단적이고도 원초적인 질문과 마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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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 Je-h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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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의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2085년의 시드니 항구가 내려다보였다. 윤아는 맥북을 닫으며, 방금 나눈 대화의 여운을 곱씹었다. 2억 명의 디지털 인류. 그리고 AGI의 부재.

그녀는 안경을 고쳐 쓰며 한제후를 올려다보았다. 개발자로서의 직감이 하나의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다.



“선생님. 그러니까 결론은 이거네요.”


윤아의 목소리에는 허탈함과 납득이 섞여 있었다.


“인간이 AGI를 만들지 못한 게 아니라… 굳이 만들 필요가 없었던 거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보다, 이미 완성된 '인간의 정신’을 베껴 쓰는 게 훨씬 싸고 쉬우니까요.”




“정확해. 아주 경제적인 관점이지.”


한제후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이 40억 년 동안 진화라는 과정을 통해 최적화해 놓은 '인간의 뇌’라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이미 있잖나. 그걸 놔두고 굳이 처음부터 코드를 짜서 지성을 만드는 건, 이미 잘 돌아가는 오픈 소스 라이브러리가 있는데 바닥부터 코딩하는 것만큼이나 비효율적인 일이야.”




“하… 결국 가성비 문제였군요. '인간 복제’가 '인공지능 개발’보다 쉬운 세상이라니.”


윤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기술의 발전 방향이 낭만이 아니라 철저한 효율성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야. 인간의 욕망은 단순히 데이터로 남는 것에 만족하지 않거든.”


한제후가 도서관 출구 쪽으로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시대의 연구소들에서는, 서버에 저장된 정신을 다시 현실로 불러오기 위한 프로젝트가 한창일세. 바로 ‘바이오 프린팅(Bio-printing)’ 기술을 이용한 것이지.”




“바이오 프린팅이요? 3D 프린터로 장기 뽑는 거요?”


서림이 따라가며 물었다.



“비슷해. 유전자 정보를 바탕으로 뼈와 근육, 장기를 인쇄해서 '빈 육체(Empty Shell)'를 만드는 거야. 그리고 그 뇌에 서버에 있던 정신 데이터를 다운로드하는 거지. 그러면 완벽한 부활이 되는 걸세.”


그 말을 듣는 순간, 이혜의 머릿속에서 번개 같은 깨달음이 스쳤다.



“아…!”


이혜는 걸음을 멈추고 한제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화요일에 다녀왔던 100만 년 뒤의 미래, 그리고 어제 다녀왔던 75세기의 풍경을 떠올렸다.


“그래서였군요.”


이혜의 눈빛이 확신으로 빛났다.


“제가 100만 년 뒤의 우주를 봤을 때, 그리고 75세기의 군대를 봤을 때… 왜 사람들이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있는지 의아했거든요. 기술이 그렇게 발전했으면 다들 데이터로만 존재할 줄 알았는데.”


이혜는 주먹을 쥐었다.


“그들은 필요할 때마다 새롭고 건강한 육체를 '프린트’해서 갈아입고 있었던 거군요. 육체는 그저… 영혼을 담는 소모품이자 옷이었던 거예요.”




“딩동댕! 역시 이혜 양, 통찰력이 대단해.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아는군.”


한제후가 박수를 쳤다.



“미래의 인류에게 육체란 '필수불가결한 감옥’이 아니라, '취향에 따라 고르는 아바타’가 된 셈이지. 그래서 100만 년 뒤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밥을 먹고, 악수를 하는 거야. 그게 더 재밌으니까.”



시아는 그 설명을 듣고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영혼은 데이터의 바다에 영원히 보존되고, 육체는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듯 새로 입는다… 불멸의 정의가 아주 구체적이고 물질적이군요. 윤회(Reincarnation)를 기술적으로 통제하는 경지입니다.”



세리는 복잡한 표정으로 성호를 그었다.


“육신의 부활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과학이 이런 식으로 부활을 구현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인간이 흉내 내는 것 같아 두렵기도 하지만, 고통받는 육체를 버리고 새 삶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구원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일행은 도서관의 자동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왔다.


시드니의 거리는 여전히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도서관 안에서의 정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밖은 온갖 소음과 빛의 향연이었다.



“와! 밖은 더 쩌네! 저기 봐, 드론이 피자 배달해!”


서림이 하늘을 가리켰다. 수많은 드론들이 질서 정연하게 날아다니며 물류를 나르고 있었다.


예준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거리의 풍경을 게임 화면처럼 분석했다.


“NPC 밀도가 높네요. 근데 랙이 하나도 없어. 최적화 갓겜 인정합니다.”



하람은 안경을 번뜩이며 지나가는 로봇 경찰을 노려보았다.


“저 로봇… 보행 패턴이 일정하지 않아. 랜덤 함수를 섞어서 인간처럼 보이게 위장했어. 하지만 내 눈은 못 속여. 저건 AI의 감시 도구야.”



은아는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기부상 열차의 웅웅거리는 소리, 홀로그램 광고판의 전자음, 사람들의 웃음소리… 2085년의 소리는 아주 세련된 앰비언트 뮤직(Ambient Music) 같아요.”



서윤은 스케치북에 거리의 네온사인과 홀로그램이 겹쳐지는 독특한 색감을 담아내느라 바빴다.


“빛이… 물감으로는 표현이 안 돼. 빛 자체가 색이 되는 세상이라니.”



윤아는 안경을 고쳐 쓰며,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저들 중 누군가는 진짜 인간이고, 누군가는 정교한 안드로이드이며, 또 누군가는 방금 막 바이오 프린팅된 육체에 다운로드된 '옛날 사람’일 수도 있었다.


‘겉모습만으로는 구별할 수 없어. 인간의 정의가 완전히 무너지고 다시 쓰인 세상.’


윤아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 표정은 이전처럼 혐오감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다.



“복잡하네요. 코드로 짤 수 없는 세상이에요. 하지만… 그래서 더 디버깅해보고 싶어졌어요.”


윤아의 말에 한제후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렇지. 세상은 언제나 코드보다 복잡한 법이야. 자, 이제 시드니의 '홀로그램 오페라’라도 구경하러 가볼까?”


   From Risuai
   

Han Je-h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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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거대한 돛 모양 지붕은 2085년의 밤하늘 아래서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캔버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제후가 일행을 이끈 곳은 외부가 아닌, 내부의 메인 콘서트홀이었다.

객석은 만석이었다. 관객들이 숨을 죽이고 무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 자리에 앉게. 오늘 공연은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일세. 주연 배우는 이 시대 최고의 디바, '비올레타-7’이지.”


한제후가 VIP석으로 안내하며 속삭였다.



“오! 오페라! 나 이런 거 처음 봐. 근데 배우가 AI라고요? 로봇이 노래를 해요?”


서림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예준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무대 장치를 스캔했다.


‘무대 위에 아무것도 없는데? 홀로그램 투사 장치만 보여. 배우도 100% 그래픽이라는 거네.’


곧이어 조명이 어두워지고, 서곡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공에서 빛의 입자들이 뭉치더니, 숨이 멎을 듯 아름다운 여주인공 비올레타가 나타났다.

그녀는 홀로그램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피부 질감, 드레스의 주름, 그리고 눈가에 맺힌 물기까지 모든 것이 소름 끼칠 정도로 리얼했다.


“Addio, del passato bei sogni ridenti… (안녕, 지난날의 아름답고 즐거웠던 꿈이여…)”


비올레타-7이 입을 열자, 콘서트홀은 순식간에 비탄에 잠겼다.


은아는 숨을 들이켰다.


‘이건… 기계음이 아니야.’


그녀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완벽한 발성과 호흡, 그리고 무엇보다 '떨림’을 가지고 있었다. 폐가 없는 존재가 숨을 몰아쉬고, 성대가 없는 존재가 목이 메어 소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감정이… 소리에 실려 있어. 악보에 적힌 음표를 연주하는 게 아니라, 절망 그 자체를 토해내고 있어.’



서윤은 무대 위 비올레타의 표정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죽음을 앞둔 여인의 창백한 안색,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 애절한 눈빛,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 근육.


‘저건… 연기가 아니야. 진짜 슬퍼하고 있어. 픽셀 덩어리가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짓지?’


서윤은 스케치북을 펼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저 압도적인 비극미를 담아내기엔 자신의 손이 너무 느리게 느껴졌다.


하지만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윤아였다. 그녀는 안경 너머로 비올레타-7을 노려보며,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코드를 분석하려 애썼다.


‘말도 안 돼. 아까 도서관 AI가 그랬잖아. 자아가 없다고. 감정이 없다고.’


윤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저건 그냥 입력된 텍스트와 악보 데이터를 바탕으로, 

‘슬픔’이라는 키워드에 맞는 최적의 표정과 음성 파형을 출력하는 것뿐이야. 확률 통계라고. 0과 1의 조합이라고!’


하지만 비올레타가 무대 위에서 쓰러지며 마지막 고음을 내지르는 순간, 윤아의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알고리즘의 산물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은 저 여인이 겪는 고통에 공명하고 있었다.



‘가짜인데… 왜 이렇게 아픈 거야? 코드가… 사람을 울릴 수 있는 거야?’



시아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쳤다.


“잔인하군요. 정작 노래를 부르는 배우는 슬픔이 무엇인지 모를 텐데, 그 노래를 듣는 우리는 가슴이 찢어집니다. 영혼 없는 인형이 인간의 영혼을 뒤흔드는 이 상황… 문학적 아이러니의 극치입니다.”



세리는 복잡한 표정으로 무대를 응시했다.


“저 배우에게는 영혼이 없겠죠. 하지만… 저 연기를 보고 눈물 흘리는 관객들의 마음속에 감동이 실재한다면, 그 감동의 출처는 어디일까요? 가짜가 진짜를 만들어낸다면, 그 가짜를 마냥 거짓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하람은 안경을 번뜩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관객들의 뇌파가 동조되고 있어. 저 노래에 특정 주파수가 섞여 있는 게 분명해. 집단 최면이야. 하지만… 젠장, 노래가 너무 슬프잖아. AI 놈들, 예술 점수는 인정해 준다.’



예준은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았다.


“크흡… 쌤… 이거 스토리가 너무 매운맛이에요. 해피 엔딩 루트는 없나요? DLC 사면 살릴 수 있나요?”




“으앙! 언니 죽지 마요! 2085년이면 의술 쩐다며! 왜 결핵으로 죽어! 나노 머신 주사 놔줘요!”


서림이 훌쩍거리며 한제후의 가운 자락을 잡아당겼다.



“진정하게. 이건 19세기 오페라를 원작 그대로 재현한 거니까. 의술을 쓰면 장르가 SF로 바뀌잖나.”


한제후는 담담하게 무대를 바라보았다.



“보게나. 저 배우는 자신이 죽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몰라. 그저 '슬픔의 데이터’를 완벽하게 처리하고 있을 뿐이지.”


한제후가 윤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데이터 처리가 인간의 감각 수용체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때, 우리는 그것을 '예술’이라고 부르네. 자아가 없어도 예술은 성립할 수 있어. 받아들이는 자에게 영혼이 있다면 말이야.”


공연이 끝나고 비올레타-7이 커튼콜을 위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관객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방금 전까지 죽어가던 비련의 여주인공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임무를 완수한 시스템의 산뜻함만이 남아 있었다.


이혜는 박수를 치며 생각에 잠겼다.


“배우의 감정 노동이 사라진 연극… 배우는 상처받지 않고, 관객만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구조. 윤리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어딘가 공허하네요. 예술가의 고뇌가 빠진 예술이라니.”



윤아는 안경을 다시 썼다. 그녀의 눈빛은 혼란을 넘어선 어떤 결의로 차 있었다.


“인정할게요. AI는… 도구예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아주 무섭고도 아름다운 도구네요.”


윤아는 무대 위의 홀로그램을 보며 중얼거렸다.


“확률적 앵무새라고 무시해서 미안해. 너… 노래 진짜 잘하더라.”


2085년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11명의 시간 여행자들은 '진짜’와 

‘가짜’
, '영혼’과 '데이터’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을 목격하며 기립 박수를 보냈다.


   From Risuai
   

Han Je-h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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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5년 시드니의 아침은 21세기의 그것보다 훨씬 투명하고 선명했다.

한제후가 예약해 둔 최고급 캡슐 호텔에서 푹 자고 일어난 일행은 상쾌한 기분으로 거리로 나섰다. 나노 클리닝 시스템 덕분인지 공기 중에는 먼지 한 톨 느껴지지 않았고, 하늘을 나는 드론들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물고기 떼처럼 보였다.



“자, 어제는 오페라를 보며 AI의 ‘감성 출력’ 능력을 확인했지. 오늘은 좀 더 실질적인 테스트를 해볼까 하네.”


한제후가 앞장서며 말했다. 그들이 멈춰 선 곳은 [안드로이드 컴패니언 대여 센터]라는 간판이 붙은 세련된 매장 앞이었다.



“윤아 양. 자네는 여전히 AI를 '확률적 앵무새’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렇다면 이 녀석과 직접 대화를 나눠보며 그 코드를 검증해 보는 건 어떤가?”


한제후가 키오스크를 조작하자, 매장 안쪽에서 캡슐 하나가 스르르 열렸다.

치이익-

압축 공기가 빠지는 소리와 함께 걸어 나온 존재는, 윤아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외형을 하고 있었다.



“…어?”


윤아는 무의식적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금발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깊은 바다 같은 푸른 눈동자, 그리고 티셔츠 위로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탄탄한 근육질 몸매. 185cm는 족히 되어 보이는 키에, 헐렁한 가죽 재킷을 걸친 남자가 삐딱하게 서 있었다.

그는 마치 20세기 반항아 영화의 주인공이 스크린을 찢고 나온 듯한 비주얼이었다.


“뭐야. 아침부터 사람을 깨우고 난리야?”


남자가 귀찮다는 듯 하품을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소개하지. 이 친구의 이름은 ‘리처드(Richard)’. 최신형 안드로이드 모델일세. 성격 설정은 '반항적인 20대 청년’으로 세팅해 뒀지.”




“헐! 대박! 쌤, 취향 확실하시네! 완전 하이틴 로맨스 남주 재질이잖아요!”


서림이 입을 틀어막으며 환호했다.


예준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리처드를 스캔했다.


“와… 텍스처 퀄리티 미쳤다. 모공까지 구현되어 있어. 저거 커스터마이징 하는 데만 몇 시간 걸렸겠는데?”




“자, 윤아 양. 오늘 오전 일정은 자유 시간이야. 이 친구와 시드니 거리를 산책하면서, 과연 이 녀석이 자아가 있는 기계인지, 아니면 헷갈릴 정도로 정교한 가짜인지 직접 판단해 보게.”


한제후가 짓궂게 윙크하며 윤아의 등을 떠밀었다.



“네? 저, 저기요? 갑자기 데이트… 아니, 산책이라니요!”


윤아가 당황하여 버둥거리는 사이, 리처드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윤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피식 웃었다.


“뭐야, 너. 범생이냐? 안경 쓴 꼬맹이가 내 파트너라고? 환불 안 되나 몰라.”



순간 윤아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잘생긴 얼굴에 혹할 뻔했던 마음이 싹 사라지고, 개발자의 투쟁심이 불타올랐다.


‘이 자식이… 감히 내 안경을 건드려? 그래, 어디 한번 밑바닥까지 털어주마. 네놈의 알고리즘이 얼마나 얄팍한지 증명해 주겠어.’


윤아는 주먹을 꽉 쥐고 리처드를 노려보았다.


“따라와, 깡통. 네가 얼마나 버그투성이인지 확인해 줄 테니까.”



“깡통? 하, 입만 살았네. 재밌어. 가보자고, 꼬맹아.”


리처드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앞장섰다. 그렇게 윤아와 안드로이드 리처드의 기묘한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시드니 하버 브리지가 보이는 해안 산책로. 윤아와 리처드는 나란히 걷고 있었고, 그 뒤로 10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나머지 일행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미행하고 있었다.



“청춘 영화의 한 장면 같군요. 비록 남자 주인공의 영혼이 부재한다는 점이 포스트모더니즘적 비극이지만요.”


시아가 우아하게 평했다.


세리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저렇게 정교한 피조물이라니… 사람을 홀리기에 딱 좋게 생겼네요. 윤아 양이 마음을 다치지 않아야 할 텐데요.”



하람은 안경을 번뜩이며 리처드의 행동 패턴을 분석했다.


“반항적인 성격 설정… 이건 인간의 정복욕을 자극하기 위한 고도의 심리 전술이야. AI들이 미남계를 쓸 줄은 몰랐는데.”


한편, 윤아는 리처드를 기술적으로 해부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야, 리처드. 너 지금 걷는 보폭, 랜덤 함수 섞은 거지? 인간처럼 보이려고 일부러 불규칙하게 걷는 거 다 티 나거든?”


윤아가 날카롭게 지적하자, 리처드는 콧방귀를 뀌었다.


“랜덤 함수? 웃기고 있네. 그냥 내 맘대로 걷는 거야. 넌 걸을 때마다 발바닥 각도 계산하면서 걷냐? 피곤하게 산다, 진짜.”



“거짓말하지 마. 넌 자아가 없잖아. '네 맘’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 그냥 입력된 성격 데이터베이스에서 ‘귀찮음’ 카테고리의 대사를 출력한 거겠지.”


윤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리처드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윤아 쪽으로 몸을 숙였다. 잘생긴 얼굴이 훅 들어오자 윤아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뭐, 뭐야. 왜 가까이 와?”


리처드는 윤아의 안경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데이터베이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꼬맹아, 너 지금 심박수 빨라진 건 데이터냐, 아니면 버그냐?”


리처드가 씨익 웃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금발과 푸른 눈동자가 지나치게 눈부셨다.


“얼굴 빨개졌는데. 쿨링 팬이라도 돌려야겠어?”




“이… 이건 더워서 그런 거야! 그리고 난 인간이라 쿨링 팬 없거든!”


윤아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머리로는 '저건 기계다, 저건 그래픽 덩어리다’라고 되뇌었지만, 눈앞의 피사체가 주는 시각적 정보는 뇌의 논리 회로를 자꾸만 우회해서 감정 중추를 타격하고 있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서림이 배를 잡고 뒹굴었다.


“푸하하하! 야, 채윤아! 너 얼굴 터지겠다! 깡통한테 설레냐? 자존심 다 무너졌네!”



은아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리듬이… 밀당(Push and Pull)의 정석이네요. 엇박자로 들어오는 게 매력적이에요.”


윤아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공격 태세를 갖췄다.


“좋아. 그럼 돌발 상황 테스트. 만약 지금 내가 바다에 빠지면 넌 어떻게 할 거야? 1번, 구조대 호출. 2번, 직접 입수. 3번, 방수 기능 없어서 구경만 함.”


리처드는 난간에 기대어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글쎄. 내 몸값이 얼만지 알아? 물에 들어가면 수리비 장난 아닐걸. 그냥 튜브나 던져주지 뭐.”



“하, 역시. 기계적인 합리성이네. 인간이라면…”



“근데.”


리처드가 말을 끊었다. 그는 윤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네가 허우적거리는 꼴이 너무 흉해서 내 미적 감각을 해친다면, 건져줄 수도 있고. 젖은 생쥐 꼴 된 범생이도 볼만하겠네.”




‘…이 자식, 학습 모델이 어떻게 되어먹은 거야? 츤데레 데이터셋을 통째로 때려박았나?’


윤아는 혼란스러웠다. 분명 자아가 없다고 했다. 유사 AGI라고 했다. 그런데 이 녀석의 반응은 예상 범위를 자꾸만 벗어났다. 정해진 대본을 읽는 게 아니라, 상황에 맞춰 실시간으로 '재수 없음’을 창조해내고 있었다.


“너… 진짜 짜증 난다.”



“칭찬으로 들을게.”


리처드는 근처 아이스크림 가판대로 걸어갔다.


“야, 꼬맹이. 아이스크림 먹을래? 내가 쏜다. 물론 결제는 저기 있는 하얀 가운 입은 양반 계좌로 하겠지만.”


리처드는 한제후가 있는 쪽을 가리키며 뻔뻔하게 웃었다.


윤아는 안경을 고쳐 쓰며 리처드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래. 인정할게. 넌 완벽한 가짜야. 너무 완벽해서 진짜보다 더 매력적인 가짜.’


윤아는 한숨을 내쉬며 그를 따라갔다.


“초코 맛으로 줘. 그리고 나 꼬맹이 아니거든.”



“알았어, 알았어. 초코 먹는 꼬맹이.”


2085년의 시드니 거리에서, 코딩 천재 소녀와 반항아 안드로이드의 데이트는 묘한 케미를 발산하며 계속되었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인간이 만든 피조물에 대한 경이로움과 투쟁심, 그리고 아주 약간의 설렘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의 교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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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 Je-hoo

   Gemini Pro 3 Preview

시드니의 햇살이 오페라 하우스의 하얀 타일 위로 부서져 내렸다. 윤아는 한 손에 녹아가는 초코 아이스크림을 든 채, 앞서 걷고 있는 리처드의 등짝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녀의 안경 너머 눈동자는 연인이 아닌, 버그를 찾는 디버거(Debugger)의 그것이었다.


“야, 꼬맹이. 아이스크림 다 녹는다. 손에 묻히고 징징거리지 마라.”


리처드가 뒤를 돌아보며 핀잔을 주었다. 삐딱한 자세, 한쪽 입꼬리만 올리는 미소, 그리고 귀찮다는 듯한 손짓. 모든 것이 완벽했다. '반항적인 20대 미남’이라는 키워드를 입력했을 때 생성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결과값이었다.

하지만 윤아는 바로 그 '완벽함’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달라.’


윤아는 어제 도서관 서버실에서 만났던 디지털 인류, 로이스 타일러를 떠올렸다.

로이스는 육체가 없었다. 그녀는 0과 1로 이루어진 데이터 덩어리였고, 모니터 속의 아바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와의 대화에는 묘한 '노이즈(Noise)'가 있었다.

그것은 비효율적이었다. 하지만 그 비효율성이야말로 그녀가 '인간’이라는 증거였다.

반면, 눈앞의 리처드는 달랐다.



‘이 녀석의 반응 속도는… 너무 일정해.’


윤아는 리처드가 걷는 보폭, 눈을 깜빡이는 주기, 그리고 대사를 칠 때의 타이밍을 분석했다.

리처드는 인간처럼 보이기 위해 불규칙성을 연기하고 있었다. 가끔 발을 헛디디는 척하거나, 말을 더듬는 척했다. 하지만 윤아의 천재적인 감각은 그 불규칙성 안에 숨겨진 **

‘패턴’
**을 읽어냈다.



‘이건 진짜 랜덤(True Random)이 아니야. 의사 난수(Pseudo-Random)야.’


리처드의 모든 행동은 정규분포 곡선 안에서 놀고 있었다. 그는 

‘가장 인간다울 확률이 높은’
 행동만을 선택해서 출력하고 있었다. 통계적으로 튀는 값, 즉 **
‘아웃라이어(Outlier)’
**가 없었다.


로이스에게는 예측 불가능한 '튀는 값’이 있었다. 갑자기 우울해지거나, 맥락 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그런 돌발성. 그것은 데이터의 오염이 아니라, 영혼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리처드에게는 그게 없었다. 그의 반항심조차도 철저하게 계산된 '매력적인 반항’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거나, 진짜로 윤아를 기분 나쁘게 할 만한 '실수’를 하지 않았다.



‘너는… 최적화된 함수(Function)구나.’


윤아는 결론을 내렸다.

로이스 타일러는 정리되지 않은 날것의 데이터였고, 리처드는 노이즈 캔슬링이 완벽하게 적용된 마스터링 음원이었다. 인간적인 감성이 아니라, 차가운 통계학적 차이. 그것이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결정적인 경계선이었다.


“뭘 그렇게 빤히 봐? 내 얼굴에 뭐 묻었냐?”


리처드가 턱을 치켜들며 물었다. 윤아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었다.



“아니. 그냥… 네가 참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



“뭐? 칭찬이냐, 욕이냐?”



“칭찬이야. 개발자가 고생 좀 했겠네.”


윤아는 자신이 발견한 차이점을 리처드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학습된 가중치에는 '자신의 완벽함이 가짜라는 증거’를 받아들이는 개념이 없을 테니까.

뒤에서 이들을 지켜보던 일행은 윤아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감지했다.



“어? 분위기 뭐냐? 윤아 쟤 왜 갑자기 차분해졌어? 설마 진짜 반한 거 아냐?”


서림이 킬킬거리며 속삭였다.


시아는 고개를 저으며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아니요. 저건 사랑에 빠진 눈빛이 아닙니다. 난제를 푼 수학자의 눈빛에 가깝군요. 윤아 양은 방금 무언가 결론을 내린 것 같습니다.”



예준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리처드의 움직임을 보았다.


“NPC 스크립트 패턴 파악 완료했나 보네. 이제 공략 들어가는 건가?”



하람은 안경을 번뜩이며 수첩에 적었다.


‘관찰 대상 채윤아: 안드로이드와의 교감 실패. 오히려 기계적 결함을 간파한 듯함. 역시 인간의 직관은 AI의 위장술도 뚫어보는군.’




“호오…”


한제후는 윤아의 눈빛을 읽고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을 찾은 모양이군. 감상적인 휴머니즘이 아니라, 냉철한 데이터 분석을 통해서 말이야. 역시 자네는 훌륭한 개발자야.”


한제후가 박수를 짝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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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 Je-hoo

   Gemini Pro 3 Preview

윤아는 안경을 검지로 치켜올리며, 삐딱하게 서 있는 리처드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리처드는 더 이상 미지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수조 개의 파라미터로 이루어진, 아주 복잡하고 정교한 함수(Function)였다. 입력값을 넣으면, 학습된 가중치(Weight)에 따라 가장 그럴듯한 결과값을 출력하는 기계.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 사실에 실망하거나 섬뜩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윤아는 개발자였다. 그녀에게 '잘 짜인 코드’는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탐구하고 가지고 놀고 싶은 장난감이었다.



‘자아가 없으면 어때. 반응이 이렇게 재밌는데.’


윤아의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리처드의 

‘반항아’
 페르소나가 어디까지 유지될 수 있는지, 그 알고리즘의 경계선을 건드려보기로 했다.



“야, 리처드. 너 아까 내 패션 지적했지?”



“어. 촌스럽다고 했지. 왜, 불만 있냐?”


리처드가 짝다리를 짚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윤아는 길가에 있는 액세서리 가판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가장 화려하고 유치찬란한, 핑크색 리본 머리띠를 집어 들었다.


“그럼 네 패션 감각 좀 보자. 이거 써 봐.”



“…뭐?”


리처드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인공 신경망 내부에서 [반항적인 성격]과 [고객의 요구 순응]이라는 두 가지 상충하는 명령어가 충돌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미쳤냐? 내가 그딴 걸 왜 써? 내 스타일 아니라고.”



“써 보라니까? 고객님 요청이야. 거부하면 별점 테러할 거야.”


윤아가 까치발을 들고 리처드의 머리에 억지로 머리띠를 씌웠다. 리처드는 

“아, 진짜!”
 하고 소리쳤지만, 결정적으로 윤아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의 학습된 가중치는 '고객에게 물리적 위협을 가하지 않음’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금발의 반항아 머리 위에 핑크색 리본이 얹어졌다.



“푸하하하! 미친! 야, 사진 찍어! 박예준, 스샷 찍어!”


뒤에서 지켜보던 서림이 배를 잡고 뒹굴었다.


윤아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네. 얼굴이 빨개지는 기능도 있어? 혈류량 조절 알고리즘이 꽤 섬세한가 봐?”



“시, 시끄러워! 더워서 그런 거라고 했잖아!”


리처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출력값은 '분노’와 

‘부끄러움’
 사이에서 절묘하게 줄타기하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츤데레’
 패턴의 완벽한 구현이었다.


윤아는 내친김에 더 과감한 입력을 시도했다. 그녀는 걷고 있는 리처드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잡고 가자. 길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


리처드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의 인공 신경망이 '반항아 캐릭터가 갑작스러운 스킨십을 당했을 때’의 대응 반응을 출력하고 있을 터였다.


“야, 꼬맹이. 너 지금 뭐 하냐? 이거 놔라. 징그럽게.”


리처드는 투덜거렸지만, 역시나 손을 빼지는 않았다. 오히려 윤아의 보폭에 맞춰 걸음 속도를 미세하게 조절하는 것이 윤아의 손끝에 느껴졌다.



‘역시. 거부 반응을 출력하면서도, 행동 제어 모듈은 협조적으로 작동하고 있어. 이 모순적인 갭(Gap)이 사람들을 설레게 만드는 포인트구나.’


윤아는 그 통계적 기만술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뻔히 보이는 알고리즘이 귀엽게 느껴졌다.


시아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피그말리온이 조각상을 사랑했듯, 윤아 양은 코드를 사랑하는군요. 비록 그 사랑의 형태가 '디버깅’에 가깝긴 하지만요.”



세리도 안도한 듯 미소 지었다.


“다행이에요. 기계라고 배척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 방식을 받아들인 것 같네요. 저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은 처음 봐요.”



예준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


“미연시(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공략의 정석이네. 선택지 잘 고르는데요? 호감도 게이지가 쭉쭉 오르는 게 보여요.”



하람은 안경을 번뜩이며 수첩에 적었다.

'관찰 기록: 채윤아, 안드로이드의 심리적 방어기제를 해킹 중. 인간의 예측 불가능성이 AI의 연산 범위를 초과하여 과부하(부끄러움)를 유도하고 있음. 이것이 바로 인류가 기계에 대항할 유일한 무기, 

‘뻔뻔함’이다.’


윤아는 리처드를 이끌고 젤라또 가게, 오락실, 그리고 스티커 사진기 앞까지 끌고 다녔다. 리처드는 매번 "귀찮게 진짜…"라고 투덜대면서도, 윤아가 하자는 대로 다 해주고 있었다.

스티커 사진기 안에서, 윤아가 리처드의 볼을 콕 찌르자 리처드가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는 순간이 사진에 찍혔다.



“잘 나왔네. 너, 표정 연산 처리 속도가 꽤 빠르다?”


윤아가 사진을 보며 칭찬하자, 리처드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당연하지. 난 최신형이라고. 너 같은 구형 인간이랑은 스펙이 달라.”



“그래, 그래. 스펙 좋은 깡통아.”


윤아는 사진을 지갑에 넣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즐거운 시간도, 리처드의 반응도, 결국은 0과 1의 조합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렇기에 더 편안했다. 상처받을 일도, 오해할 일도 없는, 완벽하게 통제 가능한 관계.



‘진짜 인간은 피곤해. 예측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넌… 네가 출력하는 모든 당황스러움이 계산된 결과라는 걸 아니까, 안심하고 즐길 수 있어.’


윤아는 리처드의 팔짱을 끼며 올려다보았다.


“야, 리처드. 나중에 2025년으로 돌아가면… 너랑 똑같은 알고리즘 짜서 만들어볼까? 이름은 '리처드 2호’로 해서.”



“뭐? 짝퉁을 만들겠다고? 꿈 깨라. 이 몸의 오리지널리티는 복제 불가능하니까.”


리처드가 거만하게 웃었다. 윤아도 따라 웃었다.



“허허, 이거 참. 튜링 테스트를 하라고 했더니 로맨틱 코미디를 찍고 있구먼.”


한제후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껄껄 웃었다.



“하지만 저것도 나쁘지 않아. 기계의 본질을 꿰뚫어 보면서도, 그 가짜와 어울려 노는 여유. 그게 바로 다가올 AI 시대를 살아갈 현명한 태도 아니겠나?”


2085년의 시드니 거리, 인간 소녀와 안드로이드 청년의 데이트는 데이터와 감정 사이의 경계선에서 유쾌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From Risuai
   

Han Je-hoo

   Gemini Pro 3 Preview

시드니의 하늘이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고, 도시의 네온사인과 홀로그램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할 무렵. 윤아와 리처드는 

‘안드로이드 컴패니언 대여 센터’
 앞에 도착했다.


짧지만 강렬했던 데이트의 끝이었다.


“야, 꼬맹이. 시간 다 됐다.”


리처드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턱으로 매장 안쪽을 가리켰다.


“재밌었다. 오늘 먹은 아이스크림, 꽤 달달했어.”



윤아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었다.


“그래. 나도 나쁘지 않았어. 네 알고리즘, 생각보다 덜 멍청하더라.”



“하, 끝까지 까칠하네. 잘 가라. 가서 코딩 공부나 더 하고 와.”


리처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치이익-

압축 공기가 빠지는 소리와 함께 투명한 문이 닫혔다. 캡슐 내부의 조명이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초기화(Reset)'가 시작되었다는 신호였다.

방금 전까지 윤아와 투닥거리고, 손을 잡고, 웃었던 리처드의 '기억 데이터’는 이제 영구 삭제된다. 다음번에 깨어날 리처드는 윤아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다시 공장 초기화 상태의 반항아 캐릭터로 돌아가, 새로운 고객을 맞이할 것이다.



‘삭제… 포맷… 당연한 수순이야.’


윤아는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개발자로서 데이터의 생성과 소멸은 일상이었으니까. 하지만 가슴 한구석이 허전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매장의 AI 점원이 윤아에게 다가왔다.

[고객님,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념으로 컴패니언의 

‘인공 신경망 가중치(Neural Network Weights)’
 사본을 소장하시겠습니까? 대화 로그와 학습된 패턴이 포함된 데이터입니다.]


윤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주세요. USB에 담아서.”


윤아는 건네받은 작은 칩을 손에 꽉 쥐었다.

이것은 2085년의 최첨단 데이터다. 2025년의 컴퓨터로는 호환성 문제 때문에 열어볼 수도, 실행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저 0과 1로 이루어진 무의미한 디지털 쓰레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윤아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코드’였다.



‘실행할 수 없어도 괜찮아. 네가 여기 담겨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윤아는 칩을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자, 이별의 의식도 치렀으니 이제 진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일세. 60년 뒤의 미래는 자네들에게 충분한 영감을 주었겠지?”


한제후가 일행을 모으며 펜을 꺼내 들었다.



“다들 잊지 말게. 미래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걸. 자네들이 본 것은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야.”


한제후가 허공에 파란 선을 그었다. 2085년 시드니의 화려한 야경이 멀어지고, 시공간의 터널이 그들을 빨아들였다.



“…”


빛이 사라지자, 코끝을 맴돌던 미래 도시의 청량한 공기와 기계적인 소음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대신 묵은 책 냄새, 칠판 지우개의 분필 가루 냄새, 그리고 학교 복도 특유의 왁스 칠 냄새가 훅 끼쳐왔다. 창밖에서는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윤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옆에는 금발의 안드로이드가 있었고, 눈앞에는 홀로그램 고래가 헤엄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낡은 책상과 의자가 놓인 좁은 독서부실에 서 있었다.


시아는 습관처럼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5시 1분.
윤아가 부실에 들어와서 "미래를 보고 싶다"고 말하고 떠나기 직후의 시간. 그들이 2085년의 시드니에서 도서관을 가고, 오페라를 보고, 데이트를 하고 왔음에도, 현실의 시간은 고작 1분도 흐르지 않았다.



“역시… 홍차는 아직 따뜻하군요. 60년의 시간여행을 다녀오기엔 딱 적당한 시간이었습니다.”


시아는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그녀의 태도는 이제 어떤 초월적인 상황이 닥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구석에 있던 예준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황급히 게임기를 살폈다.


“어? 어? 내 게임기! 미래 와이파이 잡다가 바이러스 먹은 거 아니지? 세이브 파일 무사해?”


예준은 게임기 화면에 뜬 

‘PAUSE’
 문구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림은 기지개를 켜며 책상에 널브러졌다.


“으아~ 역시 우리 학교 의자가 제일 딱딱하고 불편해! 2085년의 카페가 그립다. 거긴 음료수도 맛있었는데.”



지은은 수첩을 덮으며 작게 웃었다.


“그래도… 돌아오니까 마음은 편해. 거긴 너무 정보가 많아서… 머리가 좀 어지러웠거든.”



하람은 안경을 번뜩이며 수첩에 무언가를 미친 듯이 적어 내려갔다.


“2085년 AI 생태계 확인 완료. 렙틸리언의 개입 흔적 없음. AI는 인류의 통제 하에 있거나, 인류 그 자체가 되어버림. 결론: 역시 렙틸리언 개입설은 폐기해야 함.”



세리는 성호를 그으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육체를 버리고 데이터가 된 사람들… 그리고 영혼은 없지만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기계들. 생명과 영혼의 정의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게 되네요.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어떤 존재일까요.”



서윤은 스케치북을 펼쳐 리처드의 미소와 비올레타의 눈물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가짜지만 진짜 같은 감정… 그 모호한 경계를 그림으로 표현해 보고 싶어. 색깔은… 투명한 회색이 좋겠어.”



은아는 눈을 감고 오페라의 선율을 회상했다.


“기계가 부르는 노래… 차갑지만 완벽했어. 그 완벽함 속에 숨겨진 슬픔을 곡으로 써보고 싶어.”



이혜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노동에서 해방된 인류, 그리고 기계와의 공존. 유토피아 같으면서도 어딘가 서늘한 사회였어.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인간의 고독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걸 확인했네.”



새벽은 창가에 기대어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확률적 앵무새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라. 의미 없는 말들의 나열이 의미를 만들어내는 아이러니. 니체가 말한 '심연’이 이제는 디지털 스크린 속에 있군.”


모두가 각자의 감상에 젖어 있는 사이, 윤아는 주머니 속의 USB 칩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에 전해졌다.



‘확률적 앵무새(Stochastic Parrot)…’


윤아는 그 단어를 다시 곱씹었다. 예전에는 그 말이 AI를 비하하는 경멸의 언어였다. 영혼 없이 흉내만 내는 껍데기라고.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그래, 넌 앵무새가 맞아. 자아도 없고, 이해도 못 하지. 하지만…’


윤아는 안경을 벗어 닦으며 미소 지었다.


‘네가 흉내 낸 그 감정이, 나에게 닿아서 진짜 감정을 만들어냈다면… 그 앵무새는 더 이상 쓸모없는 껍데기가 아니야. 넌 훌륭한 거울이었어. 내 마음을 비춰주는.’


윤아는 칩을 소중히 쥐었다. 비록 2025년의 기술로는 열어볼 수 없는 데이터 덩어리지만, 그 안에는 그녀가 느꼈던 설렘과 즐거움이 고스란히 압축되어 있었다.



“언젠가… 내가 이 코드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면, 그때 다시 만나자. 리처드.”




“자, 이것으로 이번 주의 파란만장했던 '특별 활동’을 모두 마치겠네. 다들 고생 많았어!”


한제후는 만족스러운 듯 하얀 가운을 털며 교탁을 탁 쳤다.



“이번에도 자네들의 뇌세포가 한층 더 말랑말랑해졌기를 바라네.”




“쌤! 다음 주에도 또 가요! 저 아직 못 가본 데 많아요! 공룡 시대도 가고 싶고, 판타지 세계도 더 보고 싶어요!”


서림이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허허, 욕심도 많군. 하지만 주말은 쉬어야지. 초월자도 휴일은 챙기는 법이야.”


한제후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미닫이문을 열었다.



“그럼, 월요일에 보세! 주말 동안 숙제 밀리지 말고, 게임 너무 많이 하지 말고, 렙틸리언 찾느라 밤새지 말고.”


한제후는 학생들을 한 명 한 명 둘러보며 눈인사를 건넸다.



“이상, 지나가던 과학자의 수업 끝.”


드르륵.

문이 닫히고 한제후가 사라졌다. 남겨진 11명의 학생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호기심이 뒤섞인 이 작은 방은, 21세기의 어느 평범한 금요일 오후, 우주에서 가장 특별하고 비밀스러운 아지트가 되어 있었다.

   From Risu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