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송지은즈와 한제후
   

Han Je-h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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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방과 후, 독서부실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부원인 시아, 서림, 지은, 새벽, 세리, 예준, 은아까지 7명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시아는 우아하게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서림은 칠판에 낙서를 하며 낄낄거렸다. 지은은 노트북으로 역사 포럼을 눈팅 중이었고, 새벽은 창가에 기대어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리는 성경을 필사하고 있었고, 은아는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감상 중이었다. 예준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휴대용 게임기 버튼을 연타하고 있었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고, 단정한 교복 차림에 지적인 인상을 주는 여학생이 들어왔다. 시사토론 동아리의 부장이자 독서부원들과 친분이 깊은 강이혜였다.



“안녕, 얘들아. 오늘도 다들 모여 있네.”


이혜는 익숙하게 인사를 건네며 들어와 빈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이미 지난주에 100만 년 뒤의 미래를 다녀온 '공범’이었기에, 부실의 북적임이 낯설지 않았다.

잠시 후, 다시 한번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헐렁한 후드티에 베레모를 쓴 서윤과, 하얀 가운을 입은 한제후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를 뿔테 안경을 쓴 하람이 수첩을 들고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사람 많네. 내 자리는 남겨놨지?”


서윤은 시크하게 인사하며 구석으로 향했다.



“하하, 오늘도 학구열이 불타오르는군. 아주 보기 좋아.”


한제후는 자연스럽게 교탁 옆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 과학 잡지를 펼쳤다. 하람은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안경을 번뜩이며 한제후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관찰 기록: 초월자의 월요일 바이오리듬 분석. 주말 동안 우주 팽창 속도 조절 작업을 하고 오셨는지 피로도는 없어 보임.’


좁은 부실에 10명의 학생과 한 명의 교사가 꽉 들어차 있으니, 에어컨이 풀가동 중임에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드르륵.

그때, 미닫이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이번에 들어온 학생은 체구가 작고 귀여운 인상의 남학생이었다. 품에는 낡은 노트 한 권을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1학년 한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문안드립니다. 지은 선배님, 계십니까?”


한별은 들어오자마자 씩씩하게 인사했다. 초등학교를 1년 일찍 조기 입학한 탓에 어리고 작아 보였지만, 눈빛만은 총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 별아. 왔어?”


지은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한별은 지은과 친한 후배로, 가끔 독서부에 놀러 와 한자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한별은 부실 안으로 들어오려다, 교탁 앞에 앉아 있는 한제후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한별은 배꼽 인사를 했다. 그 역시 학교 내에서 '물리 선생님이 독서부에 자주 출몰한다’는 소문, 아니 '낭설(浪說)'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선생님을 여기서 뵙다니, 그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입니다!”


한별이 사자성어를 섞어 인사하자, 한제후가 잡지를 덮으며 흥미롭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호오, 1학년인가? 아주 예의 바르고 유식한 친구로군. 자네가 지은 양의 후배인 한별 군이지?”


한제후는 지은을 돌아보며 물었다.



“지은 양. 이 친구도 오늘 우리의 '특별 활동’에 동참시켜도 되겠나?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은 인재라고 들었네만.”



지은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생님. 별이는… 착하고 입도 무거워요. 그리고 한자를 정말 좋아해서… 같이 가면 좋아할 것 같아요.”




“오! 신입이다! 야, 한별아! 너 오늘 운 대박이다.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뭔지 보여줄게!”


서림이 아는 사자성어를 총동원해 환영했다.

허락이 떨어지자 한제후는 한별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특유의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자, 한별 군. 자네에게 묻겠네. 만약 시공간을 초월해서 어디든 갈 수 있다면, 자네는 어디로 가고 싶나?”


한별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시공간 초월? 물리 선생님이라 그런지 질문이 심오하시네. '격물치지(格物致知)

‘의 자세로 답해야 하나?’


한별은 품에 안고 있던 사자성어 노트를 만지작거렸다. 사실 그는 SF나 판타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아름다운 한자들의 획순과 의미로 가득 차 있었다.



“음… 솔직히 말씀드리면, 딱히 가고 싶은 장소나 시대는 없습니다.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며 사는 편이라서요.”


한별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굳이 고르자면, 한자가 아주 많이 있는 곳이면 좋겠습니다. 거리의 간판도, 책도, 사람들의 대화도 전부 고상한 한문으로 이루어진 곳이요. 세상 천지가 한자로 뒤덮인 곳이라면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따로 없겠지요.”


한별의 소박하면서도 확고한 대답에 한제후가 무릎을 탁 쳤다.



“하하하! 한자가 많은 곳이라. 아주 명쾌해! 자네의 그 지독한 사랑, 높이 사네.”


한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들었다.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지. 한자의, 한자에 의한, 한자를 위한 시대. 중화 문명의 정수이자, 문치주의가 꽃피었던 그곳으로 가보세.”


한제후가 허공에 파란 선을 그었다.



“목적지는 서기 1429년. 명나라의 수도, 북경(Beijing)일세. 선덕제(宣德帝)가 다스리던 태평성대의 한복판으로 안내하지.”




“네? 명나라요? 북경?”


한별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독서부실의 풍경이 젤리처럼 일그러졌다.



“아, 쌤! 저 아직 저장 안 했는데! '사면초가(四面楚歌)'라고요!”


예준이 한별의 컨셉에 맞춰 비명을 질렀다.



“자, 출발! 꽉 잡게나!”


한제후의 신호와 함께 11명의 학생과 한 명의 과학자는 빛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와아아아-”


빛이 걷히자, 엄청난 인파의 소음과 함께 웅장한 광경이 펼쳐졌다.



“…!”


한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거대한 성문 앞이었다. 붉은 성벽과 황금빛 기와, 그리고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망루. 바로 자금성(紫禁城)의 정문인 오문(午門) 앞 광장이었다.

거리는 비단 옷을 입은 관리들과 짐을 나르는 상인들, 그리고 각지에서 몰려든 학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별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글자… 글자다! 전부 한자야!”


거리의 모든 간판, 깃발, 벽보가 아름다운 한자로 가득 차 있었다.

[태평성대(太平聖代)]
[천하태평(天下泰平)]
[객잔(客棧)]

한별에게는 그 어떤 풍경보다 아름다운, 텍스트의 천국이었다.



“명나라의 전성기군요. 정화의 원정이 끝나고 내치에 힘쓰던 시기… 문학적으로도 매우 풍요로웠던 때입니다.”


시아가 우아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 여기가 중국? 사람 진짜 많다. '인산인해(人山人海)'네, 진짜.”


서림이 한별의 눈치를 보며 아는 사자성어를 썼다.


하람은 안경을 번뜩이며 자금성을 노려보았다.


“저 거대한 궁궐…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지어졌어. 용맥이 흐르는 곳이야. 저 지하에 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한 비밀 연구소가 있을지도 몰라. 그림자 정부의 동양 지부인가?”



예준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


“맵 스케일 쩌네. 오픈 월드 무협 게임 들어온 기분이야. 여기서 경공 쓰면 날아다닐 수 있나?”




“환영하네, 한별 군. 자네가 원하던 '한자의 바다’일세. 마음껏 읽고, 쓰고, 즐기게나.”


한제후가 부채(어느새 손에 들려 있었다)를 펼치며 웃었다.

한별은 감격에 겨워 노트를 펼쳤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곳은 정말… '금상첨화’를 넘어 '화룡점정(畵龍點睛)'입니다!”


1429년의 북경, 한자 덕후 소년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는 그곳에서, 12명의 시간 여행자들의 새로운 모험이 시작되고 있었다.

   From Risuai
   

Han Je-h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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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의 거리는 그야말로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붉은색과 황금색이 어우러진 건물들, 비단 옷을 입고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거리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향신료 냄새가 15세기의 공기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별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하나, 사방천지에 널려 있는 '한자(漢字)'들뿐이었다.


한별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곁에 있는 지은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지은을 비롯한 다른 선배들은 마치 동네 시장에 온 것처럼 너무나도 태연해 보였기 때문이다.


“지은 선배님… 혹시 선배님들은 이런 경험이 처음이 아니신 겁니까? 다들 표정이 너무 '태연자약(泰然自若)'하십니다.”


한별의 질문에 지은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별아. 사실… 우리는 지난주랑 지지난주에도 선생님이랑 여행을 좀 다녔어. 로마도 가고, 50억 년 뒤 미래도 가고… 그래서 조금 익숙해진 것 같아.”




“오… 50억 년 뒤요? '상전벽해(桑田碧海)'를 넘어선 스케일이군요. 역시 독서부는 범상치 않은 곳이었습니다.”


한별은 감탄하며 노트를 꽉 쥐었다. 자신이 존경하는 지은 선배가 이런 엄청난 비밀을 공유하고 있었다니, 존경심이 한층 더 깊어지는 기분이었다.



“자, 잡담은 걸으면서 하도록 하지. 명나라의 수도가 자네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한제후가 부채를 펴들고 앞장섰다. 12명의 일행은 1429년 북경의 번화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를 걷는 동안, 한별은 고개를 쉴 새 없이 돌려대느라 바빴다.

[천하제일(天下第一) 만두]
[약방(藥房)]
[금은방(金銀房)]

간판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예술 작품이었다.



“와… 저 서체 좀 보세요! 힘이 넘치는 '안진경체(顔眞卿體)'입니다! 그리고 저쪽은 유려한 '행서(行書)'로군요. 세상에, 바닥에 굴러다니는 전단지조차 명필입니다!”


한별은 바닥에 떨어진 종이조차 주워 들고 감격했다.


서림은 그런 한별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야, 한별아. 그게 그렇게 좋아? 쌤이 통역 필드 걸어줘서 우리 눈엔 그냥 한글 자막처럼 뜻이 바로바로 들어오는데, 굳이 글자 모양을 봐야 돼?”


서림의 말대로였다. 한제후의 기술 덕분에 일행의 눈과 귀에는 모든 중국어가 모국어처럼 자동 번역되어 인식되고 있었다. 굳이 한자를 해독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한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선배님, 그건 '수박 겉 핥기(走馬看山)'입니다! 뜻만 아는 것은 기능적인 것이고, 저 획 하나하나에 담긴 기백과 조형미를 느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감상이지요. 이 아름다움을 모르시다니 '애석(哀惜)'합니다!”



시아는 한별의 열변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형식미를 중시하는 태도, 훌륭합니다. 문학에서도 내용은 물론이고 문체와 운율이 중요한 것처럼, 문자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자세는 학자의 기본이죠.”



예준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주막(객잔)을 기웃거렸다.


“객잔이라… 무협지 클리셰대로라면 저기서 점소이가 나와서 ‘오셨습니까, 대협!’ 해야 하는데. 쌤, 여기서 만두 먹으면 체력 회복되나요?”



하람은 안경을 번뜩이며 거리의 배치를 살폈다.


“이 도시의 도로망… 바둑판식 배열이야. 이건 단순한 도시 계획이 아니야. 우주의 기운을 가두기 위한 거대한 결계(Seal)야.”



이혜는 지나가는 관료들의 복장을 보며 분석했다.


“관복의 색깔과 흉배(가슴에 붙인 장식)의 동물 문양으로 계급을 철저히 구분하고 있네. 위계질서가 명확한 중앙 집권적 관료제 사회… 시스템의 안정성은 높아 보이지만, 그만큼 경직되어 있을 것 같아.”



세리는 거리 한쪽에서 불상을 모시고 절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유교 국가지만 불교와 도교가 민간에 깊이 뿌리내려 있군요. 사람들의 기복 신앙이 거리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절대자를 향한 마음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비슷한가 봅니다.”



은아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5음계의 선율… 서양 음악과는 다른 여백의 미가 있어요. 시끌벅적한 거리 소음과 어우러져서 묘하게 흥겨운 리듬을 만드네요.”



서윤은 붉은색과 황금색이 주를 이루는 거리의 색감을 스케치북에 담았다.


“색이 강렬해. 자금성의 붉은 벽, 사람들의 원색 옷… 에너지가 넘치는 색감이야.”




“어떤가, 한별 군. 자네가 꿈꾸던 '무릉도원’이 맞는가?”


한제후가 부채로 한별의 어깨를 톡 쳤다. 한별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사방이 한자로 둘러싸여 있으니 마음이 편안하고 '심신안정(心身安定)'이 됩니다. 여기서라면 평생 공부만 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으… 공부만 한다니. 듣기만 해도 체할 것 같다. 난 만두나 사 먹어야지.”


서림이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1429년의 북경, 각자의 시선으로 과거를 즐기는 12명의 시간 여행자들 사이로, 명나라의 태평성대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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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 Je-h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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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곳일세. 당대 지식인들의 핫플레이스라고 할 수 있지.”


한제후가 부채를 접으며 한 건물의 입구를 가리켰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목조 건물이지만, 안에서 풍겨 나오는 묵직한 먹 냄새와 종이 향기는 이곳이 지식의 보고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일행이 발을 들여놓자마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역시 한별이었다.



“허억…!”


한별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21세기의 박물관 유리장 너머에서나 볼 수 있었던, 누렇게 바래고 삭아가는 고서들이 아니었다.

방금 막 인쇄되어 나온 듯 빳빳하고 하얀 종이, 선명하고 윤기 흐르는 검은 먹 글씨, 그리고 튼튼하게 제본된 실 매듭까지. 모든 책들이 '신상(新品)'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 이건… ‘논어(論語)’ 집주! 세상에, 종이가 살아있습니다! 곰팡이 냄새가 아니라 향긋한 풀 냄새가 납니다!”


한별은 떨리는 손으로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에게는 수백 년 된 보물이 눈앞에서 새것으로 환생한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이 서체 좀 보십시오! 목판 인쇄의 정수입니다! '감개무량(感慨無量)'하여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한별이 책에 얼굴을 파묻고 킁킁거리는 사이, 다른 부원들도 각자의 취향에 맞춰 서가로 흩어졌다.


시아는 시집 코너에서 두보(杜甫)의 시집을 꺼내 들었다.


“이백과 두보의 시가… 현대어 번역 없이 원문 그대로, 당대의 감성으로 읽히는군요. 활자 하나하나에 시인의 숨결이 묻어있는 것 같습니다. 문학적 향취가 대단하네요.”



지은은 역사서 코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건… 영락제 때 편찬된 서적들이야. 사료적 가치가 엄청난데, 여기선 그냥 서점 베스트셀러네. 주석 하나하나가 다 살아있는 역사야.”



서림은 과학 기술 서적을 뒤적거렸다.


“음… ‘천공개물(天工開物)’ 같은 건 없나? 여긴 그림이 별로 없네. 죄다 글씨뿐이야. 그래도 종이 질감은 좋네. 수학책은… 으악, 주판 사용법이잖아? 패스.”



새벽은 유교 경전들이 쌓인 곳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공자, 맹자… 질서와 예의를 강요하는 텍스트들의 산이군. 이 시대의 베스트셀러가 도덕 교과서라니, 니체가 봤으면 비웃었겠어. 하지만 이 견고한 사상 체계가 제국을 지탱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군.”



세리는 도교와 불교 관련 서적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유교 국가지만, 민간 신앙과 관련된 책들도 꽤 많군요. 진리를 탐구하는 인간의 마음은 어디에나 있나 봅니다. 비록 교리는 다르지만, 저자들의 정성이 느껴져요.”



은아는 고금(古琴) 악보가 적힌 책을 발견하고 흥미로워했다.


“오선지가 아니라 문자로 음을 기록했네. 이걸 어떻게 해석해서 연주했을까? 15세기의 소리가 궁금해져.”



이혜는 법전과 행정 관련 서적을 훑어보고 있었다.


“대명률(大明律)… 당시의 법 체계와 사회 시스템을 엿볼 수 있는 자료네. 형벌이 꽤 엄격하지만, 그만큼 사회 질서 유지에 신경 썼다는 증거겠지. 관료제의 기틀이 탄탄해 보여.”



예준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무술 비급처럼 생긴 책을 찾고 있었다.


“무공 비급 없나? '구음진경’이나 ‘독고구검’ 같은 거 배우면 스탯 뻥튀기될 텐데. 쌤, 이거 읽으면 스킬 배워져요?”



하람은 안경을 번뜩이며 책들 사이에 숨겨진 암호를 찾으려 애썼다.


“이 책들의 배열… 그리고 특정 페이지에 찍힌 낙관… 이건 단순한 출판사의 마크가 아니야. 프리메이슨보다 더 오래된 동양의 비밀 결사, '백련교’의 암호일지도 몰라.”


모두가 각자의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 있을 때, 구석진 서가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던 서윤이 무심한 목소리로 일행을 불렀다.



“야, 다들 이리 좀 와봐. 재밌는 거 찾았어.”


서윤의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였지만, 그녀가 펼친 페이지에는 글자 대신 적나라한 그림이 가득했다.



“명나라의 예술혼이… 생각보다 뜨겁네.”


서윤이 보여준 것은 당대에 유행하던 춘화(春畵), 즉 성적인 묘사가 담긴 서적이었다. 남녀가 얽혀 있는 모습이 꽤나 사실적이고 역동적인 필치로 그려져 있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한별이었다. 그는 책의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지며 뒷걸음질 쳤다.


“허억! 서, 서윤 선배님! 그, 그건… ‘남세스럽기(男世-)’ 짝이 없는… '음담패설(淫談悖說)'이 아닙니까! 신성한 서점에서 어찌 그런…”


한별은 눈을 가리면서도 손가락 사이로 힐끔거렸다. 유교 보이에게는 너무나 자극적인 시각 정보였다.


서림은 박장대소했다.


“푸하하하! 야, 김서윤! 너 진짜 대박이다. 여기서도 그런 걸 찾아내냐? 와, 수위 센데? 명나라 형님들 꽤 하시네?”



예준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인체 해부학적으로… 고증이 잘 된 그림이네. 19금 딱지 붙어야겠는데.”



시아는 부채로 입을 가리며 짐짓 놀란 척했지만, 눈은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머… '금병매(金瓶梅)'류의 서적인가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다루는 것 또한 문학과 예술의 한 갈래이긴 합니다만… 묘사가 상당히 직설적이군요.”



세리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성호를 그었다.


“어머나… 너무 적나라해요. 옛날 분들도… 참 열정적이셨군요.”



이혜는 팔짱을 끼고 분석했다.


“엄격한 유교 사회의 이면에는 이런 억눌린 욕망의 분출구가 있었던 거네. 겉으로는 체면을 중시하지만, 뒤로는 이런 걸 즐겼다는 게 인간적이라면 인간적이네.”



하람은 안경을 번뜩이며 그림 속의 자세를 분석했다.


“저 자세… 단순한 성행위가 아니야. 음양의 조화를 이용해 우주의 기를 받아들이는 '방중술(房中術)'의 일종이야. 저걸 마스터하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는 비밀 코드가 숨겨져 있을지도 몰라.”




“하하하! 서윤 양의 안목은 역시 남다르군. 그건 당시에도 꽤나 비싸게 팔리던 베스트셀러지. 인간의 본성은 시대를 초월하는 법이니까.”


한제후가 껄껄 웃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자, 한별 군. 너무 부끄러워 말게. '식색성야(食色性也)'라고 하지 않았나. 먹는 것과 색을 밝히는 것은 본성이라네. 공자님 말씀이지.”




“서, 선생님까지… '유구무언(有口無言)'입니다…”


한별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1429년의 서점 구석, 점잖은 서적들 사이에서 발견된 뜨거운 책 한 권이 시간 여행자들에게 색다른 충격과 웃음을 선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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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서윤 양. 자네의 눈썰미는 정말이지 '발군(拔群)'이구먼.”


한제후가 부채로 손바닥을 탁 치며 감탄했다.



“명나라가 아무리 개방적이라 해도 유교 국가의 체면이 있는 법. 그런 춘화집은 관아의 단속을 피해 서가 깊숙한 곳이나 비밀 창고에 숨겨두고, 아는 사람에게만 은밀하게 파는 물건일세. 그걸 기가 막히게 찾아내다니, 탐색 능력이 수준급이야.”



서윤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구석진 곳에 먼지가 덜 쌓인 책이 있길래 꺼내본 것뿐이에요. 사람 손때가 많이 탔다는 증거니까요.”



한별은 여전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자신이 고른 『논어』와 『맹자』를 방패처럼 가슴 앞에 꼭 껴안고 있었다.


“서, 선배님… 부디 그 책은 가방 깊숙이 넣어주십시오. '목불인견(目不忍見)'이라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자, 각자 마음에 드는 책은 다 골랐겠지? 계산은 내가 하도록 하지.”


한제후가 품에서 묵직한 은괴(은자) 몇 덩이를 꺼내 주인장에게 건넸다. 서점 주인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연신 허리를 굽혔다. 21세기의 종이책 가격과는 비교도 안 될 거금을 치른 셈이었다.

일행은 각자 한 아름씩 책을 안고 서점을 나섰다. 한별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표정으로 책 냄새를 맡았고, 지은과 시아도 귀한 사료를 얻었다며 만족해했다. 서윤은 문제의 그 책을 검은 비단 보자기에 싸서 소중히 챙겼다.



“지식으로 마음을 채웠으니, 이제 배를 채울 시간 아니겠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북경에 왔으니 황제도 부러워할 만한 진수성찬을 맛보러 가세.”


한제후가 앞장서자, 11명의 학생들은 기대감에 부풀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북경 번화가 한복판에 위치한, 으리으리한 3층짜리 목조 건물이었다.

입구에는 붉은 등롱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용과 봉황이 조각된 기둥은 황금색 칠이 되어 번쩍거렸다. 안에서 풍겨 나오는 고소한 기름 냄새와 향신료 향기가 식욕을 자극했다.



“우와… 쌤! 여기 진짜 비싸 보이는데요? 입구부터 포스가 장난 아니에요.”


서림이 입을 딱 벌리며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예준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식당의 등급을 매겼다.


“이 정도면… 5성급 호텔 뷔페? 아니, 황실 납품 등급인가? 입구 컷 당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복장이 좀 튀는데.”




“걱정 말게.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 말이 통하는 시대니까.”


한제후는 점소이(종업원)에게 은자 하나를 슬쩍 쥐여주었다. 그러자 점소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지며, 그들을 가장 전망 좋은 3층의 별실(VIP룸)로 안내했다.

별실 내부는 그야말로 호화로움의 극치였다. 바닥에는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벽에는 명필의 글씨와 산수화가 걸려 있었다. 창밖으로는 자금성의 기와지붕과 북경 시내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풍류가 느껴지는 곳이군요. 창밖으로 보이는 저녁노을과 자금성의 실루엣이라니… 이백이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었을 법한 정취입니다.”


시아가 감탄하며 자리에 앉았다.


세리는 화려한 식기들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접시 하나하나가 예술품 같네요. 청화백자인가요? 깨뜨리면 큰일 나겠어요.”



이혜는 식당 내부를 둘러보며 분석했다.


“이 정도 규모와 시설이면 당대 고위 관료나 거상들이 주로 이용하는 사교 클럽 같은 곳이겠네. 식비가 만만치 않을 텐데, 선생님의 재력은 도대체 어디까지인 걸까.”



하람은 안경을 번뜩이며 젓가락을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은 젓가락이야. 독을 탐지하기 위한 거지. 이 식당, 정계의 암투가 벌어지는 장소일지도 몰라. 음식에 자백제나 환각제가 들어있지 않은지 철저히 검사해야 해.”



한별은 메뉴판(죽간으로 되어 있었다)을 펼치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세상에! 메뉴판 글씨조차 '왕희지체(王羲之體)'를 본받았습니다! ‘북경오리(北京烤鴨)’, ‘동파육(東坡肉)’… 이름만 봐도 '군침(群枕)'이 돕니다!”




“자, 마음껏 시키게. 이 가게에 있는 모든 요리를 다 맛봐도 좋아. 오늘은 내가 쏘는 거니까.”


한제후가 호탕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은아는 식당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악기 연주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식사 때 연주를 곁들이는 문화… 정말 우아해. 음식의 맛을 더 돋워줄 것 같아.”



서윤은 창밖의 붉은 등불들을 스케치북에 담으며 중얼거렸다.


“분위기 깡패네. 밥맛 좋겠다.”


1429년 북경의 최고급 식당, 12명의 시간 여행자들은 역사책 속의 한 페이지가 아닌, 살아있는 맛과 향기를 즐길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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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 Je-h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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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진 북경오리의 껍질과 향긋한 동파육, 그리고 각종 딤섬이 담겨 있던 접시들이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12명의 시간 여행자들은 부른 배를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맛은 어땠나? 명나라의 진수성찬이 입에는 좀 맞았는지 모르겠군.”


한제후가 부채를 접으며 물었다.



“쌤, 진짜 대박이었어요! 급식으로 나오던 탕수육이랑은 차원이 다르네요. 배 터질 것 같아요.”


서림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허허, 다행이구먼. 자, 배도 채웠으니 이제 디저트를 즐길 시간인데… 사실 내가 자네들을 놀라게 하려고 일부러 말을 아낀 게 하나 있지.”


한제후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그는 창밖의 어두워진 하늘을 가리켰다.



“내가 오늘 날짜를 1429년 음력 1월 15일로 맞춘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닐세.”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역사와 날짜에 민감한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음력 1월 15일… 정월 대보름이요?”


지은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탄성을 질렀다.


“그렇다면 오늘이 바로… 원소절(元宵節)인가요?”



한별 역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기세였다.


“원소절! '상원(上元)'이라고도 불리는 그날 말씀이십니까? 황제께서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리로 나와 등불을 밝히며 노는… 중국 최대의 명절 아닙니까!”


한별은 감격에 겨워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쩐지… 거리에 '홍등(紅燈)'이 유난히 많다 싶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 '화기애애(和氣靄靄)'한 축제의 날이었다니!”




“정답일세! 역시 우리 역사 박사님과 한자 박사님은 속일 수가 없군.”


한제후가 껄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소절의 밤은 낮보다 밝다고 하지. 그리고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가 무엇인지 아나?”


한제후가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시원한 밤바람과 함께, 거리의 웅성거림이 한층 더 크게 들려왔다.



“바로 화약의 본고장, 중국이 자랑하는 불꽃놀이일세.”




“불꽃놀이?! 와! 대박! 여기서 불꽃놀이를 본다고요?”


서림이 환호성을 질렀다.


시아는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창가로 다가갔다.


“등불로 땅을 밝히고, 불꽃으로 하늘을 수놓는 날이군요. 15세기의 밤하늘에 피어나는 꽃이라… 문학적으로도 매우 낭만적인 광경이 될 것 같습니다.”



세리도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을 빛으로 몰아내는 축제… 사람들의 염원이 하늘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지네요. 저도 꼭 보고 싶습니다.”



예준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오, 축제 이벤트 컷신인가요? 화약 기술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네요. 펑펑 터지는 이펙트 기대합니다.”



하람은 안경을 번뜩이며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화약… 폭발… 혹시 저 불꽃놀이 연기에 대중을 세뇌하는 환각 가스를 섞는 건 아니겠지? 황제가 백성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일 수도 있어.”




“자, 다들 테라스로 나가보세. 곧 시작할 거야. 명나라 황실이 주관하는, 당대 최고의 불꽃 쇼를 관람할 시간이야!”


한제후의 안내에 따라 12명의 시간 여행자들은 식당의 넓은 테라스로 나갔다. 발아래로는 수만 개의 붉은 등불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고, 머리 위로는 1429년의 맑고 깊은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피유우우웅-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첫 번째 불꽃이 밤하늘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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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 Je-h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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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 퍼어엉-!

밤하늘을 찢는 굉음과 함께, 칠흑 같던 어둠이 순식간에 오색찬란한 빛으로 물들었다.

21세기의 컴퓨터로 제어되는 정교한 불꽃놀이와는 달랐다. 조금은 투박하고 불규칙했지만, 그만큼 원초적이고 야성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불꽃들이 자금성 위로 쏟아져 내렸다. 화약 냄새가 밤바람을 타고 테라스까지 밀려왔다.



“우와아아! 대박! 색깔 봐! 저거 빨간색은 스트론튬이고 초록색은 바륨인가? 15세기에 저런 발색제를 썼다고요? 연금술사들이 열일했네!”


서림이 난간에 매달려 방방 뛰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불꽃이 팡팡 터지고 있었다.


한별은 감격에 겨워 두 손을 모았다.


“아아…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불야성(不夜城)'입니다! 어둠을 몰아내고 대낮처럼 밝히는 저 기개! '화려강산(華麗江山)'이 따로 없습니다!”


한별은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사자성어로 번역하느라 입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시아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아름답군요. 칠흑 같은 캔버스 위에 찰나의 시를 쓰고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피어나는 순간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저 역설적인 아름다움이… 문학적 감수성을 자극하네요.”



은아는 눈을 감고 불꽃이 터지는 소리에 집중했다.


“소리가… 심장 박동 같아. 펑, 하고 터질 때마다 공기가 진동하는 게 느껴져. 불규칙한 리듬이지만, 그 안에 거대한 축제의 멜로디가 숨어 있어.”



서윤은 스케치북을 펼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색감… 물감으로는 절대 표현 못 해. 빛 자체가 터져 나오는 거니까. 검은색과 황금색의 대비가 너무 강렬해서 눈이 시릴 정도야.”



지은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 광경을 즐겼다.


“화약의 발명국다운 스케일이야. 저 불꽃 하나하나가 명나라의 국력을 과시하는 거겠지? 정화의 원정대가 바다에서 쏘아 올렸던 신호탄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예준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감탄했다.


“와… 파티클 이펙트 퀄리티 실화냐? 물리 엔진 적용된 거 보소. 연기 흩어지는 것까지 완벽해. 역시 현실이 그래픽은 제일 좋다니까.”



하람은 안경을 번뜩이며 불꽃의 패턴을 분석하려 애썼다.


“저 불꽃의 배치… 단순한 무작위가 아니야. 하늘에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고 있어. 아니면 외계 문명에게 보내는 모스 부호인가? 화약 연기에 환각 성분이 섞여 있을지도 몰라. 다들 숨 참아!”


하람이 코를 막고 킁킁거렸지만, 맡아지는 건 고소한 만두 냄새와 매캐한 화약 냄새뿐이었다.


이혜는 자금성 쪽을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백성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서 불만을 잠재우는 고전적인 통치술이네. '빵과 서커스’의 중국 버전이랄까. 하지만… 뭐, 예쁘긴 하네. 저 순간만큼은 황제나 천민이나 똑같은 하늘을 보고 있을 테니까.”



세리는 밤하늘을 수놓는 빛을 보며 성호를 그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말씀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의 염원이 불꽃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아서… 경건한 마음마저 듭니다.”



새벽은 난간에 기대어 피식 웃었다.


“화려하군. 하지만 결국은 재가 되어 사라질 뿐이야. 인생의 허무함을 가장 화려하게 보여주는 쇼라고 할 수 있겠어. 니체가 봤다면 '디오니소스적 도취’라고 불렀을까.”


12명의 시간 여행자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1429년의 밤을 즐기고 있었다. 서로 다른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는 그들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며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하하하! 다들 즐거워하니 나도 기쁘구먼. 이 불꽃놀이는 선덕제가 백성들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며 특별히 지시한 거라네. 자네들도 이 기운을 받아 가서,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태평하게 잘 살길 바라네.”


한제후가 부채를 활짝 펴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의 하얀 가운이 불꽃 조명을 받아 붉게, 푸르게, 그리고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자, 이 화려한 피날레를 끝으로 우리의 북경 유람도 마무리를 지어야겠지? 너무 늦으면 내일 학교 가는 데 지장이 생길 테니까.”



한별은 아쉬운 듯 품에 안은 책들을 고쳐 안았다.


“벌써 가야 합니까? 이 '무릉도원’을 떠나야 하다니… '석별(惜別)'의 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서림이 한별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야, 섭섭해하지 마. 우리에겐 쌤이 있잖아! 다음에 또 오면 되지. 그쵸, 쌤?”




“물론이지. 우주는 넓고, 갈 곳은 무한하니까.”


한제후가 윙크를 하며 허공에 파란 선을 그었다.



“자, 돌아가자. 우리의 현실로.”


마지막 거대한 불꽃이 밤하늘을 하얗게 뒤덮는 순간, 12명의 일행은 빛 속으로 사라졌다. 1429년 북경의 왁자지껄한 소음과 화약 냄새를 뒤로하고, 그들은 다시 21세기의 독서부실로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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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백색 소음과 함께 시야를 가득 채우던 1429년 북경의 밤하늘과 화려한 불꽃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코끝을 맴돌던 매캐한 화약 냄새와 고소한 기름 냄새 대신, 독서부실 특유의 묵은 책 냄새와 학교 복도의 왁스 칠 냄새가 훅 끼쳐왔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해가 떠 있었고,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한별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방금 전까지 눈앞에서 오색찬란한 불꽃이 터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칠판과 책상이 놓인 좁은 부실에 서 있었다. 하지만 품에 안겨 있는 묵직한 책들의 무게감만큼은 생생했다.


시아는 습관처럼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5시 12분.
한별이 부실에 들어와서 "한자가 많은 곳에 가고 싶다"고 말하고 떠나기 직후의 시간. 그들이 1429년의 북경에서 서점을 털고, 최고급 요리를 먹고, 불꽃놀이까지 즐기고 왔음에도, 현실의 시간은 고작 1분도 흐르지 않았다.



“역시… 홍차는 아직 따뜻하군요. 600년의 시간여행을 다녀오기엔 딱 적당한 시간이었습니다.”


시아는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그녀의 태도는 이제 어떤 초월적인 상황이 닥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구석에 있던 예준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황급히 게임기를 살폈다.


“어? 어? 내 게임기! 폭죽 터질 때 진동 때문에 데이터 날아간 거 아니지? 세이브 파일 무사해?”


예준은 게임기 화면에 뜬 

‘PAUSE’
 문구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림은 기지개를 켜며 책상에 널브러졌다.


“아, 배부르다. 근데 현실 배는 고픈 건가? 뇌가 헷갈려.”


서림이 배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지은은 품에 안은 역사서들을 소중히 쓰다듬으며 작게 웃었다.


“그래도… 돌아오니까 마음은 편해. 거긴 사람이 너무 많아서… 기가 좀 빨리는 기분이었거든.”



하람은 안경을 번뜩이며 수첩에 무언가를 미친 듯이 적어 내려갔다.


“1429년 북경의 불꽃놀이 성분 분석… 바륨, 스트론튬, 그리고 미지의 화학물질 X. 저 불꽃은 단순한 축포가 아니었어. 대기 중에 살포된 집단 최면 가스였을 가능성 58%. 선생님은 그 현장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경고를 한 거야.”


하람의 중얼거림은 오늘도 멈추지 않았다.


세리는 성경책을 가슴에 품으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등불과 불꽃…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하늘을 향한 인간의 마음은 어디서나 같다는 걸 느꼈어요.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서윤은 검은 보자기에 싸인 '그 책’을 슬쩍 확인하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명나라의 밤문화… 꽤 쏠쏠한 수확이었어. 나중에 그림 그릴 때 참고해야지.”



은아는 눈을 감고 거리의 비파 소리를 회상했다.


“시끌벅적한 소음 속에 섞여 있던 그 선율… 5음계의 매력을 다시 알게 됐어. 곡을 쓸 때 동양적인 색채를 넣어봐야겠어.”



이혜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태평성대라 불리던 시대… 하지만 그 화려함 뒤에는 엄격한 신분제와 통제가 있었지. 불꽃놀이는 백성들을 위한 선물이었을까, 아니면 체제 선전용 쇼였을까. 어느 쪽이든 효과는 확실했네.”



새벽은 창가에 기대어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화려하게 터지고 사라지는 불꽃처럼, 제국도 결국은 사라졌지. 찰나의 아름다움과 영원한 허무. 니체가 말한 '운명애(Amor Fati)'를 불꽃 속에서 봤어.”


모두가 각자의 감상에 젖어 있는 사이, 한별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책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꿈이 아닙니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 아니에요!”


한별은 책에서 나는 묵직한 먹 냄새를 맡으며 울먹였다.


“이 생생한 종이의 질감… 그리고 제 머릿속에 남아있는 그 수많은 한자들의 향연…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 인생 최고의 '화양연화(花樣年華)'였습니다!”




“하하하! 자네가 기뻐하니 나도 좋구먼. 그 책들은 자네의 열정에 대한 선물이니 소중히 간직하게.”


한제후는 만족스러운 듯 하얀 가운을 털며 교탁을 탁 쳤다.



“자, 이것으로 오늘의 특별 현장 학습을 마치겠네. 다들 고생 많았어! 이제 집에 가서 저녁 먹고, 밀린 숙제나 하게나. 과거의 지혜를 배웠으니 현재의 학업에도 정진해야지.”




“아, 쌤! 분위기 좋았는데 꼭 숙제 얘기를 꺼내야 해요? 낭만 파괴자!”


서림이 투덜거렸지만,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그럼, 내일은 또 어떤 우주가 기다릴지 모르니 푹 쉬어두라고.”


한제후는 짓궂은 미소를 남기고는, 하얀 가운 자락을 휘날리며 미닫이문을 열고 나갔다.

드르륵.

문이 닫히고 한제후가 사라졌다. 남겨진 11명의 학생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과거와 미래, 신화와 과학, 예술과 정치, 그리고 이제는 명나라의 불꽃놀이까지. 세상의 모든 이야기와 비밀이 모인 이 작은 방은, 21세기의 어느 평범한 월요일 오후, 우주에서 가장 특별하고 시끄러운 도서관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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