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온 유럽 문화의 중심지이자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로망을 가지고 있는 도시이다.
유럽의 느낌이 물씬나는 고풍적인 건물들로 가득 찬 파리는 아직도 예술의 도시이자 빛의 도시였다.

그렇다면 파리는 언제나 빛나고 있었을까?







1850년대 중반까지의 파리는 전형적인 중세의 도시로 명백한 개발 계획도 없이 난개발이 성행했다.

가장 넓은 길이라고 해도 고작 어른 발걸음으로 여덟 걸음 밖에 되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저마다 계획 없이 건물을 지어대고 편의에 이해서 이리저리 좁은 길을 내어놓았다.

물론 이는 근대 이전 공통의 도시의 공통점이기는 하지만, 대화재로 모조리 불탄 이후 재건 과정에서 도시계획을 설립한 런던이나

대지진 이후 모든 것이 무로 시작한 리스본과는 다르게 천운이라면 천운이게도 1850년대까지 커다란 화재나 지진 한번 없었다.




또한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악취와 불결의 도시로 이름 높았다.

상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채 성장한 도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버린 오물로 인해 악취가 진동했고

이러한 오물은 비가 오면 파리를 흐르는 센 강으로 흘러들어가 센 강은 언제나 검은 물이 흐르고 그 냄새가 도시 전체에 스며들었다.

파리에는 공동 우물이 몇 개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집에 커다란 물단지를 두고  물장수에게 물을 사먹곤 했는데

아침이면 물장수들이 물사시오 라고 외치는 광경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물은 깨끗한 물이 아니라 센 강에서 떠온 물이었고 덕분에 각종 전염병이 자주 유행했다.



산업화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파리로 몰려들었고 이들은 대부분 도시 빈민이 되었다.

이들은 바늘 꽂을 자리만 있으면 몰려들어 판자집을 짓기 시작했고 좁은 쪽방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살았다.

이들은 불결한 환경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었고 전염병의 온상으로 취급받았다.












1850년대 파리의 모습.

도심지나 일부 골목길은 포장도로였지만, 비가 오면 흙탕물이 올라와서 진창이 되기 일수였으며

더 외곽으로 나가면 그냥 비포장도로로 도로는 울퉁불퉁하고 제대로 된 도로가 거의 없었다.

조르주 외젠 오스만, 그의 아래 파리는 비로소 빛의 도시가 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파리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한건 나폴레옹 3세 시절이었다.

런던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이 다스리는 제국의 위대한 수도가 이런 구질구질한 곳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오스만 남작을 파리 지사로 임명하고 대대적인 재개발 작업을 명한다.



그는 우선 파리 전역의 건물 현황을 지도로 작성하였고 새로 길을 넓히는 작업을 실시하였다.

파리 곳곳에 흩어져 있는 각 지방으로 가는 역들을 잇는 대로를 건설하고, 좁고 더러운 도로를 확장하고 포장했다.


이러한 작업은 우선 토지 주인과의 협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수년간의 지리한 협상이 끝나면 그날로 공사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협상에는 수년이 걸렸지만 공사는 신속하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파리에는 무작정 상경하여 일자리를 찾는 인력이 언제나 넘쳐났고 이들은 밤낮으로 일했다.


파리는 언제나 뚝딱거리는 소리와 흙먼지가 넘쳐나는 건설중인 도시가 되었다.





그 결과 파리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시원한 신작로가 뚫리게 되었다.


이 도로들은 말의 발에 부담이 적은 마카담이라는 일종의 돌가루로 포장되었다. 이 시대 파리를 그린 그림들의 크림빛 도로는 이 때문이다.


사람들은 비만 오면 신발을 망치기 일수라며 마카담 도로를 불평하였지만 새로워진 파리의 모습에 경탄하는 이들도 많았다.


거기다가 인도에는 네모나게 자른 돌을 깔아서 다르게 포장하였다.




도로만 뚫은 것이 아니었다. 오스만은 도로를 뚫으면서 상하수도관과 가스관, 통신관 등등을 지하에 같이 매설하기 시작했다.


위 아래로 파리는 바뀌고 있었고 곧 수백킬로미터의 상하수도관과 가스관이 파리의 지하를 채우게 된다.




파리의 월리스 분수에서 물을 마시는 아이


새롭게 뚫린 수도관에서는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이 구분되어서 흐르게 되었고


파리 주민들은 도시 곳곳에 설치된 새로운 분수에서 깨끗한 물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거리에 가로수를 일정한 간격으로 심은 후 수도관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통하게 함으로써 도심속에 자연을 끌어올 수 있었다.






도심 지하에 매설된 가스관으로는 도로에 수많은 가로등을 설치하여 밤에도 환한 도시를 만들게 되었다.

매일 황혼과 여명이 다가오면 파리 곳곳에 가로등을 켜고 끄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파리는 비로소 빛의 도시라고 할 만큼 빛을 다시 얻게 된다.




또한 오스만은 현대의 건축미야 말로 대량생산과 반복성에 있다고 생각하고

엄격한 장식규제와 도로의 높이에 비례한 건물 높이 규제 등등을 적용하여 건물을 통일성 있는 하나의 양식으로 통일시킨다.

현대 파리에서 볼 수 있는 이런 유럽풍 건물들은 대부분 이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며 사람들은 이전과 다른 반복성의 미학에 놀란다.










과거의 모습을 벗어던진 파리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였다.

몇년만에 넓은 도로가 생겨나고 반짝거리는 새 건물이 들어서는 시대를 보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직감한다.

어제의 도시는 오늘의 도시와 완전히 다르고 아버지의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아들의 시대에는 당연하게 되어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살던 파리가 사라져 간다며 불만을 표하기도 했고, 이 개발의 과정에서 무수한 뒷거래가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파리는 오스만의 손 아래에서 기존과는 전혀 다른 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지금의 파리 중심가의 모습은 대부분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도 도로의 모습과 자동차들만이 다닐 뿐 모습은 거의 그대로이다.





오늘의 삶과 내일의 삶이 다르고 계속해서 새롭고 더 좋은 미래가 기다려지는 이 분위기는 흔히 말하는 '벨 에포크'라는 시대정신으로 나타난다.

변화의 시대와 이 변화가 희망을 불러올 것이라는 믿음은 1900년 파리 엑스포에서 그 절정을 맞게 된다.

1900년 만국박람회에서 켜진 수많은 전등은 빛의 도시 파리가 언제나 번영할 인류의 미래처럼 영롱하게 빛나고 있고 

다가올 20세기는 빛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상징하는 듯 했다. 

곧 다가올 이 시대의 끝을 알지 못한채로...




파리의 변화를 대충 적어보았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은 이지은씨 의 책 '귀족의 시대 탐미의 발견', '부르주아의 시대 근대의 발명'에서 나왔습니다.

현재의 파리가 생긴지 200년도 안된 모습이라는게 정말 놀랍습니다. 

여담으로 항상 드는 생각인데 구한말 선교사나 외국인의 책에서 한양이 엄청 더러운 도시라고 나오고 이를 현대에 조선의 미개함이라면서 까는데 이런걸 보면 서양인들이 개구리 올챙잇적 생각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대 이전 도시의 일반적인 특징일 뿐인데...

사진 출처

- 기타 구글 이미지 검색이나 위키백과의 항목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