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고도성장기. 매년 수출은 역대 최고를 갱신하며 고공행진을 이루고 대한민국 경제는 유래없는 고성장 시대에 접어든다.


하지만 일반 서민들의 삶은 그렇게 나아지지 않았고 빈부격차 문제나 급격한 도시화로 인한 주택문제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지만 정부는 이런 현실에는 신경쓰지 않은 채 오직 지표상의 경제에만 집중했고... 이 사건은 그 시대의 한 페이지이다.








박흥숙 씨의 사진.

박흥숙씨는 1954년생으로 전남 영광군 출생이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쩍 아버지와 큰형이 연달아 사망하자 생계를 위해 초등학교만 졸업한채로 바로 생업에 뛰어든다.

광주 시내에서 열쇠공 일부터 시작하여 철공업에 종사하던 무등산 자락에 움막집을 짓고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살았다. 그는 머리가 꽤나 좋았다고 하는데,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패스한 그는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당시 무등산 자락에는 약 20여 가구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마을 주민들은 그가 평소에 주변 사람들을 돕는 등 선한 행동을 했다고 한다. 이 무등산 자락에서 박흥숙의 어머니는 무당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등 생계를 이어나가려 노력했고, 박흥숙씨도 법관이 되어 행복하게 가족과 사는 꿈을 꾸면서 주경야독했다.

또 박흥숙 씨는 평소 몸이 허약하였는데, 과거 동학군 사이에서 퍼져있던 무술서인 '정도술'이 가문에 내려온다는 사실을 알고 건강을 위해 운동 삼아 무술을 수련했다고 한다. 이 무술을 그는 '와장창'(실제 판결문에 나온 이름)으로 불렀다. 그는 무술을 수련하고 몸이 탄탄하여 '무등산타잔'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무등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이 마을에 철거 계고장이 내려왔다. 마을 주민들 중 떠날 수 있는 이들은 또 다른 판자촌으로 떠나고 남은 가구는 여력이 안되는 가구들 뿐이었다. 박흥숙씨 가족도 철거일까지는 버텨보자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었다.

마침내 예고한 당일이 되었다. 박흥숙 씨의 집에 광주시 동구청 공무원과 함께 철거반원 7명이 찾아왔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 박흥숙씨는 집이 철거되어도 공부를 이어나가기 위해 임시로 구덩이까지 파 놓은 상태였다. 

그는 처음에는 철거에 순순히 응하여 가재도구를 옮기는 것까지 나서서 하였다. 하지만 상황은 철거반원들이 박흥숙씨의 집에 불을 지르며 달라졌다. 박흥숙씨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집의 지붕에 어머니가 열심히 모아둔 30만원(현재 가치로 약 200만원)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전재산을 잃은 박흥숙씨는 철거반원들에게 항의하기 시작한다.

한편 일설에는 박흥숙씨가 이웃집을 가르키며 '저 집은 병든 노부부가 사는 집이니 철거를 잠깐만 미루어달라'고 하여 공무원들이 알겠다고 했는데, 잠시후 그 집에서 불이 올라오는 것을 보자 격분하였다는 설도 있다.

박흥숙씨가 철거반장 오씨에게 항의하자 그는 '어린 놈이 지랄한다'며 그를 무시하였다. 그에 격분한 박흥숙 씨는 자신이 제작한 사제 공기총으로 오씨를 위협하였다. 당시 그는 철공소 일을 하면서 습득한 지식으로 사제 총기를 제작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산짐승을 내쫒는데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는 오씨를 인질로 잡고 철거반원들을 제압하여(그의 여동생이 포박하였다고 한다) 자신이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넣고 자신의 집을 불태운 건에 대하여 사과를 요구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그는 그들을 포박해두고 직접 광주시장에게 가서 항의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 와중 한 철거반원이 헐거워진 포박을 풀고 저항하자 그는 들고 있던 망치를 휘둘러 4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그는 사건 직후 놀라서 도주하였고, 여수로 가서 1박을 지낸 후 서울로 올라가 자수하였다. 그는 살인을 인정하고 죄를 뉘우친다면서 어떤 극형도 달게 받겠다고 말하였다. 그의 사정을 알던 주변 사람들의 증언으로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지만 결국 죄를 저지른 것은 저지른 것. 그는 1980년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사건 이후 언론은 그를 무술을 수련한 무법자로 매도하며 여러 왜곡된 보도를 한다. 반면 반대측에서도 그를 빈민운동의 투사로 곡해하는 등 그를 이용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잔혹한 무법자도, 빈민운동의 투사도 아니었다. 그저 가난한 환경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려다가 삶을 잃어버린 한명의 사람 '박흥숙'일 뿐이었다.








박흥숙 사건을 최근에 책을 보다가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적어 봅니다. 저도 그가 범죄를 저지른 사람임은 맞지만, 그의 모습에 대해서는 당시 도시빈민의 처지를 잘 보여주는... 대한민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게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