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통 고구려의 국내성은 현재 중국의 지린성 지안시로 비정됨. 국내성 천도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유리왕본기에 적혀있는 국내 위나암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에 따라 유리왕 22년인 서기 3년으로 보는 것이 통설임.


2. 그런데 대무신왕본기에는 서기 28년(대무신왕 11년)에 한나라 요동태수가 쳐들어오자 위나암성으로 대피했는데, 농성기간이 길어지자 을두지가 "적군은 우리의 성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물이 나오는 샘이 없다고 생각하고 저렇게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적군에게 맛좋은 술과 연못에서 잡은 잉어를 가져다주면 저들은 더 있어봤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물러갈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왕이 그 계책을 따라 그대로 하니까 요동태수가 물러갔다는 기록이 있음. 그런데 암석지대에 있으면서 그 안에 샘이 있는 성은 지안 지역에서는 찾을 수 없음. 오히려 묘사와 들어맞는 성은 졸본성으로 비정되는 환런의 오녀산성임.


3. 더불어 고국원왕본기 12년 2월조에는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음. 참고로 환도성의 초축시기는 산상왕 2년인 서기 198년, 환도성으로의 천도시기는 그로부터 11년 후인 서기 209년임. 


4. 평양성도 마찬가진데, 삼국사기 동천왕본기 21년(서기 247년)조에는 동천왕이 환도성이 위나라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자 평양성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있음.


5. 그런데 동천왕 재위기에 우리가 아는 그 평양은 이 당시 낙랑군 땅인데다 이름도 조선현(朝鮮縣)이었음.


위 기록을 근거로 나는 국내성은 서울(수도)를 일컫는 일반명사고, 평양도 문자 그대로 평평한 땅을 뜻하는 일반명사인 것 같다고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