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중도동유적(2020) 발굴보고서를 토대로 한 뇌피셜 추정에 불과합니다.



중도동유적에서 신석기시대(기원전 27C-21C)의 유구는 극소수 확인됨. 이후 5-600년 간 공백기가 있음. 청동기시대 조기부터(기원전 15C - 13C)에 제대로 된 흔적이 나타나며, 청동기시대 전기전반(기원전 13C-11C)부터 장방형 주거지와 수혈이 대규모로 등장하였음. 이 시대 이후 전기후반(기원전 10C-9C) 2-300년 간 공백기가 발생하며, 동북아시아 일대에 전체적으로 분포하는 주구묘만이 확인되었음(이 주구묘가 전기후반의 것인지는 확인이 필요함). 이후 청동기시대 중기(기원전 9C-6C)와 후기(기원전 6C-5C)에 중도동유적 서부에 분포하는 환호 및 기타 주거지가 확인되었으며, 중도동유적의 규모가 가장 컸던 시기이기도 함.


청동기시대 환호는 중기와 후기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길이는 121.6m, 너비는 87.2m, 전체 둘레는 403.7m이며 면적은 2,878평임. 후기에 가면 환호가 폐기되고 취락이 최전성기를 맞는 양상을 보임.



이후 중도동유적은 유적지의 동편인 소양강 유역으로 이동하여, 원삼국시대부터 다시 확인되기 시작함. 1단계(2세기경)는 경작지와 관련된 취락이며, 2단계(2세기 후반-3세기 중반)부터 경작지 취락의 유형을 유지하며 취락의 확대가 관찰됨. 3단계(3세기 말엽)부터는 원삼국시대 환호가 조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이 환호는 4-1단계(4세기 전반)에 매몰되고 2차 환호가 재굴착됨. 주거규모가 소형화되고 장단비가 정비례하기 시작하며, 이때 취락의 중심이 이동하였고 제철공방의 조업이 시작됨. 4-2단계는 4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5세기 전반의 5단계에는 환호가 매몰되고 지상식 건물군과 규격화된 육각형 주거지가 집중됨.


원삼국시대의 주거지는 凸/呂자형 주거지가 집중적으로 관찰되며, 하중도 중앙의 철기시대 분묘 3호에서는 '말갈관'에 해당하는 토기와 은제이식이 공반되었음. 이는 주로 연해주 일대에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토기의 형태적 특징으로 볼 때 라즈돌라야강 유역에서 가장 분포 밀도가 높고, 제2송화강-목단강으로 가면서 분포밀도가 낮아진다고 함. 외래 계통의 묘제로 판단되며, 삼국시대에 병행하는 것으로 추정되어 연해주 지역과의 교류가 지속된 증거로 평가할 수 있다고 함.


한편 이 일대 화재폐기의 양상에서 막대한 양의 유물이 확인되던 것과 달리 중도동유적에서는 화재주거를 포함해 유물이 많은 주거가 거의 없다고 함. 이것이 막대한 양의 재화를 가옥폐기에 소비하던 방식에서 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한 변화인지, 단순히 중도동유적 주민의 경제력이 낮았던 것인지 확실치 않으며, 중도동유적에서도 화재폐기가 확인될 때가 있다고 함. 또한 이 역시 예족의 폐기습속으로 이해되고 있다고 함.


화천의 원천리유적의 한성백제식 철기를 공급한 주체가 중도동유적의 제철공방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데, 중도동유적에서 3세기 후반에 성립되는 초대형 주거와 환호는 여타 취락을 압도하는 우월한 양상임은 분명하지만 물질문화에는 백제와의 충돌이나 친연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고 꾸준히 취락이 성장하는 모습만 확인된다고 함. 한성백제기에 한성 양식의 토기는 부재하며, 영서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된 용해주조의 흔적은 더욱 기이한 측면이 있어 앞으로의 과제로 삼는다고 함.




그러면 이랬던 것 아닐까


샘밭 일대에서 발견되는 주구묘들을 보았을 때 청동기시대 전기 이 지역에 일부 기층집단이 존재했고, 이후 동북지방을 주류로 일부 서북지방의 주민들이 유입되어 청동기시대 중기와 후기 문화를 형성했으며, 이후 낙랑과 함께 백제를 지속적으로 공격하던 춘천 지방의 주민들(위말갈로 기록됨)이 고이왕 대에 이르러 백제와 화친하며 중심 취락이 다시 중도로 이동, 철기 유구에서 한성백제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한 것.


그러면 지역의 주류층은 청동기시대 전기의 기층집단에서 동북지방에서 온 예족 계통의 부족으로 전환되며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는 이 당시 한반도 일대의 동북쪽에 있던 말갈 세력이 이동하여 강원도 방향으로 넘어온 것으로 보아 말갈로 기록하였고, 백두대간을 넘어오며 서북지방의 맥족 계통의 부족들이 소수 유입됨. 이후 동북지방과의 교류가 줄고 서북지방과는 지속적으로 소규모 교류가 있었으며, 낙랑과의 관계를 통해 이 일대의 정치체가 맥국으로 이해됨. 한성백제는 이 일대를 세력권에 포함시키지 못하고 화평을 유지하였으며, 이후 고구려가 이 일대를 확보하며 직접 지배는 행사하지 못하고 다만 취락의 규모가 축소되며 일부 고구려식 분묘가 분포하게 된 것.


따라서 강릉의 예국과 춘천의 맥국은 완전히 별도의 정치체인 것은 맞으나, 춘천지방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맥족 계통보다는 예족 계통이 우세했던 것으로 추정됨.



중도동유적의 발굴보고서가 발간된 지 아직 1년뿐이 되지 않았고, 앞으로 10년 간 현재까지 발견된 한반도 최대의 취락 유적인 중도동유적에 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 이에 대한 실마리가 더 풀릴 것으로 추정됨. 중간에 단절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도동유적은 기원전 13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약 2천 년간 대규모의 취락을 형성하였으며, 만주와 한반도, 일본 열도 일대 전반을 시야에 넣고 광범위하게 연구하여 영서지방과 한반도 중부, 성과가 좋을 경우 더 나아가 동북아시아 일대의 고대사에 산적한 수많은 미스터리를 풀어헤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됨.



* 혹시 또 유적 파괴 드립치는 사람이 있을까봐 첨부하는 사진


해당 조사지역 전체 유구현황도



해당 조사지역 유구현황도 위에 구획도를 덧씌운 것.



해당 구획의 용도


중도동유적 발굴보고서를 보면 알겠지만 레고랜드 부지도 한 차례 밀려서 최대한 유적 없는 곳으로 이동하였고, 유적 덮은 지역은 전문가들이 이 일대에 널리고 널린 유적이라 공사를 지속해도 무방하다는 의견을 주었음에 따라 진행되었으며, 또한 유적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복토하고 그 위에 지층을 파괴할 가능성이 없는 공법으로 짓는 것. 참고로 가운데에 널린 저 검정 그물망은 경작유구임.


49층 호텔 드립이 나온 부지는 유구가 없을 것으로 추정되어 발굴조사에서 빠진 지역이며, 파일시공이 금지된 지역에 49층 호텔을 지으려 한다는 것은 거짓임. (애초에 도가 초법단체도 아니고 그런 걸 어떻게 허가함;;) 이거 때문에 저기 발굴조사 한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