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3년 수도를 개경에서 충청도 연산현 계룡산 아래로 이전하는 것이 확정되었음.   
현재 충남 계룡시 계룡대가 있는 지역임.    


그러나 개국공신 하륜이 ‘계룡은 나라의 남쪽에 치우쳐 있고 금강이 나라의 기를 꺽는다’하여 공사 9개월차에 천도가 중단됨. 




계룡 대신 당시 남경(南京)이라 불리며 부수도 역할을 담당했던 경기도 한양부가 수도로 낙점되었음.   

문제는 한양 내에서 어디를 수도로 해야 할지에 대한 논쟁이 발발하였음.  



당시 후보로 오른 곳은 무악과 북악임.   

무악은 현 신촌 일대, 북악은 현 종로구 일대임.    

무학대사와 정도전은 무악산에 올라 말하기를 이곳은 도읍으로 적절치 못하다 하였음.  

그렇게 도읍은 북악으로 정해짐.


만약 무악이 수도가 되었다면 궁궐 위치는 현 연세대 신촌캠퍼스가 부지가 될 예정이었음.   




그러나 이번에는 북악 내 궁궐의 위치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다투게 됨.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여 낙산과 인왕산이 양쪽을 지키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음.   
반면 무학대사는 낙산은 기가 너무 약하니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북악산과 남산이 양쪽을 지키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음.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면 경복궁은 동향이 되어 버린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고, 개국공신 정도전의 의견에 무게감이 더 실리면서 정도전의 의견이 결국 받아들여졌음.    


그렇게 한양부는 한성부로 이름이 바뀌고, 현대의 서울특별시까지 이어지는 서울의 중앙인 현 사대문안이 만들어졌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