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조선어학회 표준어 사정 위원회 73명 

 - 경기 출신 37명 (경성 출신이 26명)

 - 경기 외 지방 출신 36명 (각 도별 인구 비례에 따라 배정)


경성과 경기 출신이 과반을 차지한 이유는,

1935년 조선어학회가 ‘표준어는 대체로 현재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을 기준으로 한다’는 대원칙을 세웠기 때문임. 


어떤 낱말을 표준으로 할 지에 대한 결정권은 경기 출신 위원에게만 있었고, 지방 출신 위원이 이의를 제기하면 표결에 붙여 처리했음. 


이러한 독회를 1회 온양온천, 2회 우이동, 3회 인천에서 열어 계속 수정안을 마련함. 


이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주시경 선생의 가르침을 후배들이 계승하여 만들었음. 총독부가 공인하지 않았지만 공표 이후 전 조선에서 지금까지의 표준 기준 중 가장 각광을 받아 널리 쓰였음. 




이후 해방이 되고,

미군정 남조선과 대한민국의 국어정책은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에 직접 참여했던 최현배가 주도하였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기반으로 한 대한민국 표준어와 철자법이 완성됨. 


소련민정 북조선과 북한의 국어정책은 김두봉이 주도하였는데, 그는 한글 맞춤법 통일은 제정 시절 독립운동을 하느라 참여는 못했음. 하지만 최현배와 함께 주시경 선생의 제자였기 때문에 통일안과 거의 비슷한 조선어 신철자법을 제정함. 특히 이미 북한에서도 이미 중류 서울말을 기반으로 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표준어 대우를 받고 있었음. 그래서 여기에 일부 평양 방언 및 북한 지역 몇 개 단어를 섞어서 새로운 표준 규범을 만드니, 이것이 문화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