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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4년 포르투갈 선교사들과 탐험가들에 의해 도시가 세워진지 어언 400년이 살짝 더 지났을 때의 상파울루 시는 선조들이 예상했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 비하건대 상전벽해에 가까울 만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발전은 포르투갈의 브라질 식민역사에서 상당히 최근의 일이었던 탓에, 브라질의 중심지로서 그 역사를 기념하는 일은 대게 근대에 집중되어 있기도 하다.

 예컨대 1822년 포르투갈의 왕세자 페드루가 포르투갈을 배반하고 브라질의 독립을 선포했던 이피랑가의 기념비3)는 당시 제정도 아니고 공화정 체제던 1922년에 브라질 독립 100주년을 기하여 지어졌고, 1860년대의 삼국 전쟁 당시 아카라이브 이용자들의 조국 파라과이를 무참히 짓밟고 파괴한 당시 브라질군 야전 사령관이자 군사 영웅 카시야스 공작(Duque do Caxias) 기념비2)는 1960년에나 세워졌다.


 그렇다고 상파울루 시가 비단 과거의 역사만이 아니고 현재의 자신들의 역사를 조명하는 장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상파울루에서 두번째로 높은 건물인 이탈리아 빌딩(Edifício Italia)1)은 커피 농업을 위해 유입되었던 이탈리아계 이민자 사회가 어느덧 사회적 경제적 지위향상을 통해 상파울루 시의 산업, 문화적 족적를 남긴 데에 대한 자긍심의 일환으로서 지어진 곳이고, 이름에 걸맞게 이탈리아계 향우회가 입주한 곳이었다. 또한 일본 풍이 짙은 리베르다지 대로(Avenida da Liberdade)4)는 과거 노예들의 공동묘지였던 곳이었지만 브라질 사회의 소수자였던 일본계 이민자들의 도시 내의 기반이 되어준 곳이다. 이러한 이국적인 정체성은 20세기 중반 새롭게 유입된 한국, 중국 출신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더욱 강화된 바가 있다.


 여하튼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브라질, 더 나아가 남미의 최대 도시 상파울루는 외부의 이민 만이 아닌 브라질 내부의 이촌향도와 맞물려 급격한 도시 팽창의 와중에 있었고, 이러한 수요와 당시 브라질 연방정부를 통치하던 우익 군부정권의 경제 성장 정책에 힘입어 도심의 고층화, 자동차 도로의 확장 등 동시대 여느 개발도상국이 겪던 토건 붐을 맛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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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라이브는 나무위키처럼 각주 못다나?

글씨 옆에다가 숫자 매겨놓으니까 컴퓨터 가지고 애먹는 노교수 된 기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