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의 여행]

작은 섬마을이었다. 일주 도로도 없고, 뭍을 오가는 연락선만이 유일한 세상과의 연결고리였던 섬에서도 마을은 북쪽 한 귀퉁이에 동그랗게 웅크려 있었다. 마을이 생긴 건 아주 먼 옛날, 그 내력만큼 크고 오래된 나무가 세 그루 있었다. 두 그루는 팽나무, 나머지 한 그루는 느티나무.


섬이 인근 대도시에 편입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주민들은 그러려니 했다. 그래도 내심 좋았다. 우리도 대도시 시민이 된다니, 이제 좀 널찍한 도로에 사람같이 살겠지. 내 새끼들 새벽밥 먹고 산 너머 학교 다니는 일 없어지겠지…. 그래도 어김없이 철 따라 고기 잡고, 조개 캐고, 텃밭도 일궜다.


대도시의 시계는 빨랐다. 대도시 시민이 되었다 해도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신항만이다 신공항이다 선물 보따리는 연일 밀려들었다. 주민들은 조금씩 불안했다. 선물을 받는 손이 오그라들고, 자꾸 뒷걸음질이 쳐졌다. 누대로 이어 온 삶의 터전을 갈아엎고 신항만을 건설한다고 했다. 누구는 고향을 지키자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옹기종기 모여 살던 살림집은 모두 헐어야 했고, 마을 앞 갯벌에 널린 조개를 캐는 일도 이젠 글렀다. 정든 고샅길, 사철 시원한 샘물과도 이별을 고했다.


섬 순환 도로를 뚫으려고 느티나무는 두고 팽나무 두 그루를 벤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팽나무 한 쌍은 각별했다. “마을을 처음 일군 선조가 심고 대대로 의지하며 살아온 우리네 살림살이의 기둥이고 삶의 역사”였다. 그래서 ‘할배 나무’, ‘할매 나무’라 불렀다. 마을의 오랜 친구가 그냥 쓰러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팽나무 두 그루를 구할 방법을 백방으로 찾았다. 오랜 노력 끝에 도심의 한 백화점 인근 공원에 옮기기로 했다. 벌채를 막은 것만으로도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렇게 가덕도 율리 마을의 팽나무 한 쌍은 대형 바지선에 실려 뱃길 50㎞ 먼 길 따라 부산 해운대 APEC 나루 공원으로 옮겨졌다. 아직은 바람 끝이 찬 2010년 3월 어느 날이었다.


사람들은 옛 마을이 그리울 때마다 팽나무를 생각했다.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던 너른 품이 이제는 도심의 마천루 그늘 아래 잘 쉬고 있을까. 섬마을 사람들의 순박한 이야기와 파도 소리만 듣고 살다가 수많은 인파의 소음과 자동차 경적 소리가 낯설지는 않을까.


그 후 2년, 가지에 새순이 돋기 시작했을 즈음 마을 사람들은 팽나무 한 쌍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뿌리가 새 땅에 안착한 것을 축하하는 행사였다. 밑둥치를 쓸어 보고 고향 마을 흙도 가져가 한 줌씩 흩뿌렸다. 기념사진도 찍어 새로 마련한 임시 마을 회관에 걸어 두었다. 그날 밤 율리 마을, 아니 해운대 팽나무 한 쌍은 어쩌면 고향 마을 어귀로 달려가는 꿈을 꾸었을까.


[밤꿈과 노루목,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가덕도(加德島)’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동은 과거 경상남도 창원군[의창군] 천가면으로 불리다 1989년 부산직할시에 편입되었다. 2009년 8월 가덕 대교가 개통하면서 뭍으로부터의 고립을 면했고, 이듬해인 2010년 12월 거가 대교가 준공되면서 부산과 경상남도 거제시를 연결하는 해양 관문이 되었다. 편입 20년 만의 가시적 성과였다. 그러나 과도한 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와 주민들의 생업 파탄, 마을 공동체 붕괴 등 그 부작용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많다. 가덕도 최초의 철거 마을인 율리 마을과 장항 마을이 대표적인 경우다.


율리 마을은 가덕도동 4통, 장항 마을은 가덕도동 5통이다. 행정동으로는 가덕도동이지만 법정동으로는 성북동에 속한다. 즉 전통적 행정 중심지 성북동의 자연 마을로, 가덕도 서북쪽에 위치한 이곳은 과거 아담한 어촌 마을이었다. 율리(栗里) 마을은 밤나무가 많아서 ‘밤꿈[밤골]’이라 불렀고, 장항(獐項) 마을은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겨 ‘노루목’이라 하였다.


율리 마을은 원래 김해 김씨(金海金氏) 동성 마을로, 임진왜란 이후 형성된 것으로 전한다. 율리 마을 통장 김성진씨의 16대조가 뭍에서 건너와 처음 마을을 일구었는데, 그 입지는 현재의 마을 뒷산 중턱 즈음이었다. 그러다가 점점 해안으로 내려와 착착 마을 꼴을 갖추어 갔다. 몇 해 전 이식을 위해 팽나무를 뽑았더니 그 뿌리에 조개껍데기가 가득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과거 마을 일대가 모두 바다였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해운대로 보낸 팽나무 한 쌍의 수명이 350년 정도로 감정되고, 아직까지 마을 터에 남아 있는 느티나무 수명은 400년, 많게는 600년까지도 보니, 입향조가 마을을 형성할 즈음 심은 것으로 추측된다.


장항은 300여 년 전 동래에 살고 있던 광주 김씨(光州金氏) 가문 일원이 이곳으로 유배 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이어서 경주 이씨(慶州李氏)가 들어왔고, 이후 김해 김씨와 광산 김씨(光山金氏)가 터전을 잡고 대대로 거주하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둘 다 성북동에 속한 자연 마을이긴 하지만, 원래는 율리 마을보다 이웃한 장항 마을 규모가 더 컸다. 철거 직전인 2007년 8월 현재 장항 마을에는 100가구 192명이, 율리 마을에는 43가구 79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니, 주민 규모로는 장항 마을이 율리 마을의 2배 이상인 셈이다. 장항에는 작은 초등학교[천가초등학교 장항분교]가 있어 두 마을 어린이는 모두 이 학교를 다녔다. 산길로 1.2㎞ 정도의 통학 거리였다.


1970년대 이전까지 두 마을은 경지 면적이 좁고 토양이 척박해 경제적으로 빈촌이었다. 어업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남자들은 포항 등 멀리 동해안으로 나가 고기를 잡았고, 여자들은 산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거나 연안에서 미역·바지락 따위를 채취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피조개 양식은 가난했던 두 어촌 마을을 부촌으로 성장시켰다. 이로 인해 1980년대 후반에는 한때 장항에만 주민 수가 25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큰 마을을 형성하였다. 장항초등학교 전교생 수가 100명에 달하였던 것도 이즈음이었다. 낙동강 하구의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 피조개 먹이가 풍부하여 지리적으로 양식에 유리한 것이 성공 요인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협업으로 양식된 피조개는 전량 일본으로 수출되었고, 이는 신항만 건설 이전까지 두 마을의 가장 큰 수입원이었다.


“주민 소득이 꽤 높은 마을이었죠. 가덕도 전체를 봤을 때, 장항 마을이 부자 마을이었습니다. 피조개 양식을 한 번 하면 1년에 6~7억씩 가져갔어요, 한 가구마다. 얼마나 컸는데…. 봄에 씨앗 뿌려서 가을에 걷는 6개월짜리 계절노동인데, 그걸로 자식들 교육시키고 다했습니다. 그러니까 가덕도에 13개 통이 들어앉아 있는데, 5통이 부자 마을이라 했습니다. 손꼽히는 부자 마을.”


장항 마을 통장 김종상씨가 회고하는 전성기 고향 마을 형편이다. 이에 질세라 율리 마을이 장항 마을보다 훨씬 살기가 좋았노라고 율리 마을 통장 김성진씨가 목소리를 높인다.


“율리는 황금 어장이었습니다. 장항은 태풍이라도 한 번 오면 절단 나지만, 여기는 지형이 만이라서 태풍 한 번 없고 파도도 없어 4계절 어장이란 말입니다. 피조개 말고 새조개도 많이 했는데, 피조개는 종자를 뿌려야 되고 매해 잘되는 게 아니라서 적자 날 때도 많은데, 새조개는 조류 따라 떠내려 오는 거라 상대적으로 훨씬 안정적이고 경제적인 소득원이었습니다. 한때 서른 가구가 집집마다 2억씩 벌었습니다. 한 달 반 작업해서.”


뜨내기 필자의 눈으로는 알 수 없지만, 1㎞ 남짓 거리의 두 마을이 미묘한 지형적 차이가 있긴 한가 보다. 이에 대해 장항 마을 통장의 재반론을 듣지는 못했지만, 주거니 받거니 고향 마을 자랑 경쟁이 듣는 이도 흥겹다.


피조개 양식 외에 그물을 이용한 연근해 어업도 큰 수입원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거의 개인 어장이 있어, 여름에는 도다리·숭어·수조기, 가을에는 낙지를 잡아 용원 공동 어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 수익으로 자식들 교육 다 시키고도 돈이 남았다. 섬에서 제일 가까운 부산 번화가에서도 가덕도 사람들은 알아서 모셨다. 율리 마을 김영수[77세] 옹의 말이다.


“우리가 먹기 싫어서 안 먹을 정도였지. 미역, 소라, 고둥, 해삼, 새조개…. 시골 생활이 되니까 언제나 의복도 험하고 해서 그렇지, 먹고사는 것은 우리만큼 잘 먹고 산 데가 없다. 가덕도 사람들이 술을 한 잔 먹어도 하단 사파이어 호텔이 만나는 장소라. 거기서 가덕도 사람이라면 대환영을 했어요.”


조개 양식과 어장 등 어업이 주업이었다면 농사는 부업이었다. 가덕도는 물이 부족해 논농사는 적합하지 않았고, 예부터 마을 뒷산을 개간하여 보리·밀·콩·고추 등을 경작하는 수준이었는데, 1970년대 들어 양파를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큰 소득을 올렸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가덕도와 부산 간 도선이 사라지면서 수송비가 많이 들어 더 이상 재배하지 않게 되었다. 율리 마을 일부에서는 유자 농사도 지었다. 김영수 옹은 한때 유자로 1년에 순수익만 3,000만 원을 냈다고 말한다.


작지만 넉넉한 어촌 마을, 장항 마을과 율리 마을이 진짜 그랬다. 경제적으로 넉넉할 뿐 아니라, 주민 협업으로 생계를 꾸려가다 보니 인심도 후했다. 마음에도 마을에도 경계가 없었다.


“마을 주업이 피조개 양식이라, 수확 철이 되면 동네에서 잔치를 했지요. 작황이 안 좋을 때는 안 하고, 좋을 때만 하는데 잔치를 2~3일씩 제법 크게 했어요. 돼지도 잡고, 풍물도 하고, 윷놀이도 하고 참 재미있었죠. 기분이 좋으니까 이 집 갔다가 저 집 갔다가, 이 동네 사람도 들여다보러 오고 저 동네 사람도 오고…. 그러다 차츰차츰 없어졌지요.”


장항 마을에서는 가을철에 당산제를 행했는데, 이를 ‘동제’라고 불렀다. 어촌 마을이다 보니 용왕제도 3년마다 한 번씩 행하였다. 그러나 점차 세상이 변해 가면서, 1980년대 중반 이후 사라졌다. 마을 입구의 독뫼산은 정월 대보름에는 달맞이 장소였고, 삼짇날에는 아낙들이 화전놀이도 하는 등 마을 사람들의 세시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동네는 사건·사고도 없고 진짜 온화하고 좋은 마을이었습니다. 동네 주민들이 화합이 잘되어서 누구네 집에 좋은 일이 있으면 같이 놀아 주고, 이런 기억이 많지요. 도시 사람들처럼 결혼식 있으면 부조만 딱 하고 오는 게 아니라, 여기는 마을 사람끼리 모여서 잔치하고 놀고 그랬지요. 없어도 서로 갈라먹고, 고기를 잡아 와도 아제 한 마리 묵으라, 니 한 마리 묵으라…. 참 유대 관계가 좋았지요.”


율리 마을에서는 당산제를 지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절기마다 지내는 풍속은 비슷하였다.


“예전에는 이웃이 많아서 도란도란 모여서 한 집에서 음식을 한 가지씩만 꺼내 와도 열 가지 음식이 되고, 앉아서 잠시 쉬더라도 술이고 음료수고 다 같이 나눠서 먹고, 애들이고 어른이고 같이 놀 수도 있었고, 엄청 좋았던 기억들이 많습니다. 설날에 윷놀이도 하고, 정월 대보름에는 집집마다 밥 내놓는 사람, 나물 내놓는 사람…. 대아에 받아서 다 나눠먹기도 하고, 옛날에는 행사가 있을 때마다 꼬박꼬박 챙겨서 잘 놀았습니다.”


[들썩이는 섬, 흔들리는 사람들]

조용하고 정다웠던 마을은 부산직할시에 편입된 후 1995년 신항만 건설 사업이 본격화되고 주민들에 대한 보상이 논의되면서 진통을 앓기 시작하였다. 먼저 1999~2000년경 어선과 어장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졌고, 2005년부터 부산 신항 남측 컨테이너 부두 배후 부지[신항 남측 배후지] 공사로 어장 철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을의 주택지는 2004~2006년도에 감정하여 2006년 12월경 보상금 수령이 끝났고, 2008년부터는 철거에 돌입하였다. 그 결과 2009년 즈음 마을 철거가 완료되었다. 잿빛과 장밋빛의 전망이 엇갈리던 공론의 과정도 잠시, 일단 괘도에 오르자 사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주민들은 데모도 여러 번 했다.


“말도 못 했어요. 신항 입구 막아 놓고 가덕도 주민 다 모여 갖고 데모도 하고….”


주민들의 분열은 아무래도 뼈아팠다. 그리고 그 결과는 현재 이주 단지의 분리로 나타났다. 이주 단지 선정 과정에서 유불리를 따지며 백출하던 논의가 결국 주민들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다. 율리 마을 통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아무래도 100% 단결은 있을 수 없지요. 우리가 봤을 때는 요렇게 하면 좋은데, 저쪽[신항만] 편을 들어서 하는 사람도 있고. 이주 단지가 갈라진 것도 마찬가집니다. 처음에는 이주 단지가 동선 한 군데만 발표가 났는데, 패가 갈라지는 바람에 일부 주민들이 두문으로 간 거죠. 막판에는 서로 언쟁도 많이 했지요. 평화롭던 마을이 보상 하나 때문에 깨졌죠. 서로 쌍욕까지 해 가면서….”


그렇다면 우여곡절 끝에 어업권을 국가에 반납하고 주택을 수용당한 주민들에 대한 국가의 보상은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을까. 장항 마을 통장은 크게 만족할 수준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평생의 생업을 잃은 데다 주택 역시 작은 어촌 마을이었음을 감안한다면, 호사가들의 돈방석이란 먼 얘기일 뿐이라고 한다.


“그렇게 만족은 못 했죠. 국가 정책으로 하니까, 어장이든 집이든 고시 그대로, 거기서 조금 더 올려 받았습니다. 주택 평당 가격은 남들이 봤을 때는 많이 받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덩어리가 커야 목돈이 되지, 시골집 해봐야 기껏 열다섯 평[49.59㎡]에서 스무 평[66.12㎡] 남짓이니 얼마나 받았겠습니까?”


어쨌든 이주 보상에 관한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고 마을을 떠날 일만 남았다. 이제 매해 해 오던 동제나 마을 잔치도 한 순간 한 순간 마지막으로 기억되었다. 정답던 이웃들이 하나둘 떠나던 날, 장항 마을 통장은 그 순간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아무래도 기분이 씁쓸했지요. 정든 사람들이 서로 헤어지니까. 서로 울고불고….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 게, 그때 우리 동네 촬영이라도 해서 보관했으면 좋았을 텐데, 옛날에 우리 장항 마을이 이렇게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사진이라도 찍어 놓고 했어야 했는데…. 당시 경황이 없어서, 후회가 됩니다.”


율리 마을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제주도 여행을 갔다. 2006년 초, 2박 3일 일정이었다. ‘이게 이제 마지막 관광이다’ 생각하고 마을에서 젊은 사람이나 나이 든 사람 모두 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다 갔는데, 인원이 총 40~50명 되었다. 동네 앞으로 되어 있는 돈도 그 자리에서 서로 나누고, 마지막으로 회포를 풀었다. 지붕은 달라도 같은 둥지 안에 서로 이웃사촌이라 생각하고 살았던 이들 앞에 이제 각자 다른 길이 놓였다. 서로의 앞날에 웃으며 덕담을 건넸지만, 이별 앞에서 왠지 헛헛하고, 또 불안했다.


[망향, 그 후]

고향 마을을 떠난 사람들은 아들네 집으로, 전셋집으로 각자 흩어졌다. 인근 용원으로 간 사람도 많고, 가덕도 내 다른 마을에서 달세를 사는 이도 있다고 한다. 멀게는 기장에도 있고, 마산 등 각지로 갔다. 잘 지내는지 안부가 궁금하지만 모든 이의 삶을 다 파악할 수는 없다. 서로 연락이 닿는 이도 있고 두절된 이도 있다. 이렇게 저렇게 고향을 떠난 이들의 현재 상태는 통장들 말에 따르면 “완전히 최악의 상태”다.


“먼저 이주 단지를 조성하고 이주를 시킨 게 아니고, 일단은 철거를 하고 다른 데서 살다가 이주 단지 택지를 받아서 들어가 살기로 되어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돈 보고 돈 안 쓸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시골집에 보상해 봤자 열다섯 평[49.59㎡]에서 스무 평[66.12㎡]에 2~3억 원인데, 이거 갖고 농·수협에 돈 잡힌 거 다 갚고 나니까 실제 자기가 소유하게 되는 돈은 얼마 안 된다고예. 그러다 보니까 지금은 거의 영세민 수준에 와 있습니다. 여기서 외부에 나간 사람들은, 한 100명을 잡으면 90프로는 영세민 수준이라는 겁니다.”


먼저 철거를 하고 나중에 이주 단지가 마련되면 들어와 살게 하는 방식은 주민들에게 큰 악재가 되었다. 이주 단지가 마련되길 기다리는 시간은 얼마간 받은 보상금을 까먹는 시간이었다. 특히 살날이 한창인 자식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데 나 몰라라 할 부모가 어디 있을까. 큰놈 도와주면 작은 놈이 또 신경 쓰이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결국 생활비다, 빚 청산이다, 자식들 사업 자금이다 해서 있는 돈 다 날리고, 이주 단지에 들어가고 싶어도 그 땅값을 대지 못해 영원한 망향객의 길로 접어든 이가 대부분이다. 도시에서는 노인들의 돈벌이가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노력만 하면 여기[바다]에서 많은 수익이 났다고요. 그런데 그 생업의 터전이 다 없어져 버렸는데, 바닷가 사람들이 고기 잡아먹고 조개 잡아먹고 하던 사람들이 도시에 가서 할 게 없잖아요. 아무것도 할 게 없다고. 그렇다고 나이 들어 가지고 공장에 갈 수도 없고, 경비라도 마음대로 써 주는 것도 아니고….”


철거된 고향 마을 내의 잔여 택지도 문제였다. 신항만이 들어오면서 기존 집터만 수용했고, 농사짓는 땅은 회수하지 않았다. 신항만 배후지 공사 범위 내에 집터 부분은 모두 포함되었지만, 농지 등은 그 범위 외에 있었던 것이다. 외부 땅은 당연히 보상의 대상이 아니었다. 현재도 마을의 일부 잔여 가구는 이러한 농지를 대지로 변경하여 새집을 짓고 살고 있다. 이렇게 퇴거 대신 잔류를 선택해서 농지 가까이에 눌러앉은 이들은 차라리 형편이 낫다. 마을을 떠난 이들은 얼마 안 되는 이들 농지 때문에 다시 옛 마을로 출퇴근을 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차라리 일괄 회수를 했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텐데, 농지가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객지에 있다가 할 게 없어서 농사지으러 다시 들어오는 거 아닙니까. 어마어마한 불편을 감수하고. 만약 외부에 나가 있고, 지금 이거 때문에 다시 들어올 수도 없는 입장이잖아요. 그럼 이것도 농사를 안 지으면 구청에서 가만 놔두질 않습니다. 벌금을 때린다고. 그러니까 여러 가지로 애로사항이 있는 거죠.”


이쯤 되면 마을을 떠난 이들이 후회할 만하겠다.


“지금은 거의 다 후회를 하지. 명절에 산소를 오시는 분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 보고 ‘느그들은 진짜 안 나가길 잘했다’고 말씀들 하십니다. 저도 얘길 들어 보면 그걸 피부로 느끼거든요. 조합원 육농회 등 모임 하면 기장에서 오시는 분도 있고 각지에서 오시지만, 다들 살기는 참 힘들다고…. 옛날 여기 살 때가 그립다고 말씀을 하시지요.”


이야기를 이어 가는 장항 마을 통장 눈에 언뜻 물빛이 어린다. 가만히 듣고 있던 필자도 자꾸만 목이 멘다. 한평생 바다와 더불어 살다, 이제 몸 뉘일 고향땅에서조차 밀려난 노인들의 처지가 해운대의 늙은 팽나무와 겹친다. 아니, 해운대 팽나무 한 쌍은 새 땅에 뿌리를 내리고 새순이 돋았다 하니, 어쩌면 그 편이 행복한지도 모르겠다.


[바다만 바라보고 한숨짓다]

마을의 잔여 가구는 일단 보상금을 써 버리지 않고 고향에 남아 새집이라도 한 채 마련했다는 점에서 적어도 마을을 떠난 사람들보다는 사정이 나아 보인다. 그러나 이들 역시 형편이 녹록지 않다. 2013년 4월 현재 율리 마을과 장항 마을 잔여 가구는 둘 다 12가구, 20~30명 정도로 비슷하다.


현재 잔여 가구가 겪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환경 문제, 바로 깔따구 떼의 습격이다. 모기처럼 생긴 해충인 깔따구는 진흙이나 웅덩이 등 물이 고인 곳에서 서식하는데, 신항 배후지 조성을 위해 바다에서 퍼 올린 준설토를 투기장인 장항 마을·율리 마을 앞바다에 쏟아 넣으면서 여기서 유충들이 무더기로 부화한 것이다. 기온이 높아지고 밤이 되면 더 극성인데, 얼마나 심각한지 문을 열지 못할 정도고, 다음 날 아침 빗자루로 수북이 쓸어 내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여름이면 파리에다 깔따구에다, 특히 깔따구가 어마어마하게 끓습니다. 지금도 내가 보건소나 신항만에 전화해 가지고 방역 작업을 계속 실시하는데도, 이게 유충이 조금만 살아 있어도 벌떼같이 일어나니까 상당히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빨리 유류 기지도 들어오고, 빨리 매립해서 정리가 되면 모든 게 마무리가 될 텐데, 이거 뭐 공사 찔끔해 놓고 돈이 없어서 못 한다고 하니까 ….”


장항 마을과 율리 마을은 현재의 준설토 투기장 용도가 끝나면 매립해서 원래 목적인 신항 배후지로 사용할 계획인데, 신항 측에서는 그 시점을 2015년께로 잡고 있다. 아무리 방역에 최선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그때까지는 현재의 고통이 되풀이될 것으로 예측된다. 게다가 계속되는 방역 작업으로 채소 등을 통한 2차 피해도 우려되는 실정이다.


마을을 떠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잔여 가구도 경제적 어려움이 크다. 밭농사라야 텃밭에 고추·고구마 등을 재배하는 정도여서 자가 소비용일 뿐 판매용의 대량 생산은 아니다. 율리 마을 김영수 옹도 25~30년째 지어 오던 유자 농사를 요즘에는 거의 짓지 않는다. 한창 때는 500주 가까이 되었던 유자나무를 100주 정도 남기고 다 뽑아 버렸다. 토지 수용 후 얼마 남지 않은 농토에 비료나 농약 등 유지비가 많이 들고, 게다가 손도 많이 가서 객지의 자식들까지 다 동원해야 될 정도이니, 노인의 노동력으로는 너무 고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농업은 과거 어디까지나 부업일 뿐, 주업이었던 어업을 못하게 된 데서 경제난은 기인한다.


“그나마 어업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몰라. 어업권도 국가에 반납해서 다 회수를 해 버렸잖아요. 지금은 우리가 조업을 나가고 싶어도 불법으로 해야 되는 거라, 잡히면 벌금 내야 되니까 무서워서 못하는 기라. 고기 댓 마리 잡을라다가 벌금 내야 되는 입장이니까.”


어부와 어부의 아내로 한평생을 살아온 마을의 노인들은 오늘도 과거 황금 어장만 바라보고 한숨짓는다.


[이주 단지에 이주민이 없네]

마을을 떠난 사람과 마을에 남은 사람 모두 현실적 문제와 삶의 무게로 망향의 슬픔에 빠져 있을 때, 뒤늦게 마련된 이주 단지의 형편은 어떨까. 고향을 떠났다가 이주 단지로 되돌아온 이들은 얼마나 될까. 또 그들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을까.여러 가지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통장들을 통해 듣기로는 안타깝게도 이 경우 역시 부정적이다.


이웃한 동선 마을과 두문 마을로 나뉜 이주 단지는 각각 2009년, 2010년부터 조성공사에 돌입했지만, 아직 준공이 되지 않아 입주가 미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동선 지구는 3만 4224.79㎡[1만 353평], 두문 지구는 이보다 조금 더 작은 3만 2429.75㎡[9,810평]이다. 동선 지구는 바닷가 갈대밭을 매립해서 마련하였고, 두문 지구는 산을 깎아 만들었다. 처음 계획은 9만 9173.55㎡[3만 평]에 두 마을 97가구 모두 동선 지구로 들어가기로 했으나,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장항 일부 가구가 두문행을 택하여, 최종적으로 동선 지구에 56가구, 두문 지구에 41가구가 들어가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이주 단지를 구획해 놓아도 들어올 사람이 없는 형편이다. 먼저 마을부터 철거하고 다른 곳에 살다가 이주 단지로 다시 들어오게 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주 단지에 이주민이 없게 된 역설이다.


“이주 단지에 들어온 사람은 몇 사람 안 됩니다. 두문은 한 가구 집 짓고 있고, 동선은 세 가구 정도. 앞으로도 거의 못 들어온다고 봐야지. 가구당 100평[330.58㎡]씩 구획을 했는데, 그 땅에다 집을 지으려면 고시 가격을 내고 들어와야지요. 땅 사는 데 1억, 집 짓는데 1~2억 들어가는데 이거 해 낼 사람 거의 없지.”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주 보상금을 받고 마을을 떠났던 사람들은 이주 단지 조성을 기다리는 동안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돈을 이미 많이 써 버렸고, 토지 구매에 건축비까지 애초에 받은 보상금에 웃돈까지 얹어야 이주 단지 입주를 감당할 수 없다. 그런데 사업 시행자인 강서구청 입장에서는 이주민을 위해 조성한 이주 단지가 본래 목적에 충당되지 못하고 버려진 땅이 되는 상황을 좌시할 수 없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고민 끝에 마을 사람들은 분양받은 이주 단지 토지를 전매(轉賣)하고자 하였다. 강서구청에서는 처음에 반대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승낙을 얻어 현재 동선 지구와 두문 지구 모두 80%는 전매가 된 상태다. 최종적으로 동선 지구는 56가구 가운데 약 15가구, 적어도 10가구는 넘게 입주할 것 같고, 두문 지구는 거의 완전 전매가 될 것으로 율리 마을 통장은 전망한다. 그렇다면 현재 이주 단지에 입주한 이들의 삶의 만족도는 얼마나 될까.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것보다 그래도 조금 살기가 나을 때 집이라도 지어서 살자는 거지. 한 가구당 100평[330.58㎡]을 줬으니까, 집을 조그맣게 짓고 나머지 땅에는 농사를 지어도 됩니다. 그래도 옛날만큼의 삶의 만족도는 없어. 기존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있으니까, 아직 마을로서 아무 것도 인정이 안 돼요. 어디서 굴러 온 집시 취급을 합니다.”


기존 동선 마을과 두문 마을에 이주 지구를 설정했기 때문에 독립적인 마을로 인정이 되지 않고, 그렇다고 기존 마을에 쉽게 동화될 수도 없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주민들의 소외감은 주민 협업으로 생활을 꾸려 가는 배타적 어촌의 특성, 그리고 이주 단지에 대한 기존 마을 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 등에 따른 것이다.


[인생 항로 수정,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고향 마을을 떠났든 남았든, 혹은 되돌아왔든 망향은 순박한 어촌 사람들에게 이렇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노인들의 노후도 문제지만, 생업을 잃은 마을의 청년과 장년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장항 마을 통장 김종상[54세] 씨는 현재 마을에서 가장 젊다. 가덕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주에서 금융업에 종사하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2002년경 귀향하였다. 홀로 남겨진 아버지께서 가덕도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마을에 젊은이가 없는 까닭에 통장은 2007년부터 현재까지 6년째 맡아 하고 있다. 현재 경영하고 있는 식당은 원래 다른 곳에서 하던 것을 마을을 철거할 때 인부들이 마땅히 주위에 식사할 데도 없고 해서 옮겨 온 것이다. 공사 중에는 그럭저럭 생계가 유지됐는데, 지금은 어쩌다가 일주일에 손님이 한 명 올까말까, 한마디로 개점휴업 상태다. 그냥 개인 사무실 겸 경로당, 마을 회관 등의 용도로 쓰고 있다.


“어쩔 수 없으니까 이러고 사는 거지, 나 역시 도시에 나가서는 쪽박을 찰 입장입니다. 고구마라도 심고 수확을 해서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 나가는 거지.”


율리 마을 통장 김성진[42세]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대 후에도 가덕도에서 어업에 종사하였다. 한때는 부산 일식집에서 한 3년 일하면서 초밥 요리를 배우기도 했는데, 고향에서 어업을 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기 때문에 남 밑에서 월급 몇 푼 받으며 일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꼭 이루고픈 꿈이 있었기에 빨리 기술을 배워야 된다는 일념으로 버텼다. 힘들게 고기 잡아서 용원 도매상에 헐값에 넘기면 그곳에서 비싸게 팔아 차익을 남기는 것을 보고, 내 손으로 내 고기 잡아서 횟집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경매를 거치면 만 원 받을 거 내가 잡아서 팔면 3만 원은 받겠지.’ 김성진씨는 가덕도에 다리만 놓이면 횟집 하나 내리라 벼르고 또 별렀다. 그런데 신항 건설로 이러한 인생 계획이 180도 달라졌다.


“나는 거의 안 하는 게 없죠. 고물상도 하고, 부동산 소개도 하고, 중고차도 팔고, 건축일도 하고, 신문 기자도 하고…. 하여튼 돈 되는 일은 다합니다. 그래도 본업은 농업이지요.”


본업이 어업에서 농업으로 바뀌었다. 물론 텃밭에서의 소규모 채소 농사 정도다. 소득은 전과 비교했을 때 ‘택도 없다’. 그러나 워낙 긍정적인 성격의 김성진씨는 맨날 신항만 쳐다보고 욕만 하면서 살기는 싫다.


“예전 어장할 때보다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불편한 것은 많은데, 다만 세상하고 같이 살아간다는 느낌도 있고, 세상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은 좋은 거 같아요. 다들 비슷하게 삽니다. 타지에 잡일 하러 다니고, 항만 쪽 일이 있으면 불려 가거나 그러고 살지요.”


바다라는 안정적 온실에서 정글과 같은 세상으로 나온 김성진씨는 생존의 법칙을 하나씩 터득해 가는 중이다. 그래도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에 대한 힘겨움은 어쩔 수 없다.


“애들 촌에서 못 키웁니다. 인근 용원에라도 데리고 나가야지. 용원에는 전세고, 나는 동네 일 때문에 여기 살아야지, 어장 못해 먹지, 돈은 벌러 다녀야지…. 사람 환장합니다. 이주 단지라도 조성이 되면 한 군데라도 합쳐 가지고 여기서 살든지 저기서 살든지 구분이라도 할 낀데, 이주 단지는 이주 단지대로 아직도 분양도 안 되고 있제….”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잔여 가구가 다시 마을을 형성했지만, 예전 정답던 마을 공동체는 파괴된 지 오래다. 마을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힘들게 되어 버린 이주 단지보다 비록 일부지만 옛 이웃들이 있어 망향객들에게 마음의 안식처는 되겠지만, 예전 마을 그대로의 재현은 불가능하다. 이는 율리 마을의 주민 구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현재 마을의 12가구 중 외지 사람 집도 더러 있다. 총 30명에 못 미치는 인구에 토박이가 열 댓 명, 나머지 12~13명은 외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과거 마을 공동체의 유대 관계는 찾아보기 힘들다. 아래는 장항 마을의 형편이다.


“노인회는 한 마을당 회원이 25~30명인가 되어야 형성이 될 수 있거든요. 그게 안 되다 보니까 노인회는 지금 없고 통장, 새마을 지도자, 개발 위원장, 부녀 회장 등 직책은 현재 네 개 있습니다. 이런 건 동네가 작든 말든 구청에서 구성하도록 지시를 하니까 동네마다 웬만하면 다 있습니다. 부녀회도 있긴 한데 활동은 못 하죠. 부녀 회장이 하는 일이라 해 봐야 주민들 연락 사항, 예를 들어 농협에서 나온 감자씨 배급하는 일 정도….”


당제는 진즉에 없어지고, 정월 대보름 달집태우기도 할 형편이 못 되어 몇 년째 중단하였다.


“어버이날 행사밖에는 하는 게 없어요. 제 윗대 살아 계시는 분들, 거의 70 이상이거든요. 1년에 한 번씩 어버이날이니까 마을 잔치는 해 드립니다. 5월 8일 당일, 딱히 프로그램은 없고 그냥 모시고 앉아서 놀고, 술 묵고, 윷놀이 한 번 하고….”


그 외에는 마을에서 주최하는 것은 아니지만 ‘농어업인의 날’ 행사도 큰 이벤트다. 농협에서 주최하여 진해 웅동 공설 운동장에서 열리는 체육 대회인데,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매일 마을에 갇혀 지내다가 대처에서 스트레스를 푸니까 좋아한다고.


율리 마을 사정은 그래도 조금 낫다. 어버이날이나 체육 대회뿐 아니라, 정월 대보름 행사도 아직은 치를 여력이 된다.


“안 할 수가 없는 게, 그런 것도 하고 문을 열어 놔야 외지 나갔던 사람들이 한 번씩 와 볼 수도 있고, 돈도 들고 오고 음식도 들고 오고 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과거만 그리워하고 살 수는 없는 것. 바뀐 마을의 현실에 대해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경제적인 부분은 당연히 불만스럽겠고, 깔따구 등 환경 문제도 심각하지만, 적어도 생활의 편의는 향상되었을 텐데 이를 얼마나 긍정적으로 생각할까. 맞은편 신항의 휘황찬란한 불야성은 가히 상전벽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소외감을 들게끔 한다.


“바깥사람이 여기 와서 구경할 만한 게 없잖아요. 아무것도 없어요. 신항이 들어오면서 여기 발굴을 해 가지고 8,000점인가 문화재가 나왔잖아요. 이것도 박물관을 짓느니 어쩌니 하더니 감감 무소식이고.”


장항 마을 통장의 탄식에 비해 율리 마을 통장은 의외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물론 통장의 소회가 마을 사람 전체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 성향의 차이일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개발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이 여전히 미묘하게 교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신항만 배후지 공사에 대해서는 만족하지 않아도 새집 지어서 살고 있는 것은 만족해요. 지금 생활 여건은 좋습니다. 교통편도 좋고, 길도 좋고, 옛날보다 좋아졌습니다. 다 신축 주택에다 화장실도 수세식이고, 집집마다 차가 다 올라갑니다. 그리고 야경이 정말 좋아요. 나는 외지인에게 권하기도 합니다. 우리 마을에 들어와 살라고.”


그러나 마을의 미래에 대해서는 한 목소리다. 현재 공사가 지연되고 있는 앞바다를 빨리 매립해서 마을을 둘러싼 상황이 정리되고 삶이 안정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끝까지 고향을 지키고 싶다는 것이다.


“지금도 가끔 와서 후회를 하시는 분들도 있거든요. ‘동생, 니라도 마을에 남아 줘서 정말 고맙다.’ 나도 객지 생활도 해 봤고 산전수전 다 겪어 봤지만, 고향을 지키고 싶습니다. 지키고 싶은데…. 지금 요 밑에 낚시꾼들이 주말에는 70~80명이 들어온단 말입니다. 이게 빨리 정리가 되고 마무리가 되어야 우리 동네, 내 집에 오는 손님도 편하게 맞을 수 있지요.”


[통장들의 꿈]

고향을 지키고 싶은 통장들의 바람은 나아가 출향한 이들과의 네트워크 구성을 통해 옛 인연을 유지하는 데에까지 이어진다. 아직은 미약한 상태지만, 장항 마을 통장은 꼭 해 보고 싶다고 강조한다.


“마을 회관도 아직까지 뚜렷하게 없는 상태라 명절에 산소에 오시면 저희 집을 찾아오시기도 하고, 차도 한 잔 대접하기도 하는데…. 출향한 사람들도 함께 하는 모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모임도 하고 해서 우리 동네에서 문화재가 발굴되고 했으니까, 우리가 살았던 동네니까, 구경 한 번 해 보시라고 동네 소식도 전하고, 그게 제 꿈입니다.”


아직은 몇 명 연락이 닿는 이들과의 소규모 모임일 뿐이지만, 한 번 보자고 하면 몇 차례 건너서 골고루 소식을 전할 만한 연락 체계는 갖추고 있다. 일정한 모임 날짜는 없고, 일단은 동네에 상이 난다든지 할 때 소주나 한잔하는 정도의 걸음마 단계다. 그리고 출향한 이들 중에서도 상이 났다 하면 꼭 찾아가 뵙는다.


율리 마을 통장 역시 아직 일정한 커뮤니티가 조직된 것은 아니고, 개인적 친분에 따른 연락의 단계에 불과하다면서 보다 현실적인 진단을 한다.


“나중에 이주 단지에 횟집을 하나 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곳을 거점삼아 네트워크를 구축할 생각이 있습니다. 친구들하고 일부 형님들하고. 아버지 가구나 옛 마을의 완전한 복원은 불가능하겠지요, 아무래도.”


마을의 미래와 통장들의 꿈을 이야기하면서, 나아가 가덕도의 미래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한가운데에 핫이슈 신공항 문제가 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신공항도 유치하고 해서 가덕도가 더 많이 발전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던데, 바로 그게 문젭니다. 여기 보상이 거론될 때도 다들 50~60년씩 된 허름한 집들이라, 그때 나 역시도 ‘아이고 깨끗하게 털고 나가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막상 털어 보니 그게 아니니까 후회를 합니다.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신공항 들어오는 거 반대합니다. 일단 기존의 사업도 마무리가 안 돼서 주민들을 이렇게 힘들게 만드는데, 이거 정리가 다 된 상태에서 새로운 일을 하든가 해야지, 윗사람들은 말만 내세우지 주민들만 우롱하는 겁니다.”


신공항 자체에 대한 반대라기보다 장항 마을·율리 마을과 같은 사업 방식, 현 상태에서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 등을 장항 마을 통장은 토로한다. 반면, 율리 마을 통장은 이 문제에 관한 한 주관이 뚜렷하다.


“신공항은 들어와야 합니다. 개발 역시 계속 추진해야 합니다. 가덕도도 통영처럼 케이블카를 설치하든가 모노레일을 깔든가 해서 외부로부터 수입을 창출해야 합니다. 단, 친환경 개발이어야 하고, 개발로 인한 수익을 주민들과 함께 나누는 공정한 프로젝트여야 합니다.”


천성항 국가 어항 지정, 두문 간이 조선소…. 가덕도는 여전히 들끓고, 주민들은 흔들리고 있다. 두 마을 통장에게서 불안과 희망의 전망이 교차하는 것처럼 그 종착지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다. 율리 마을과 장항 마을이 그 포문이었는데, 두 마을의 상처를 교훈 삼아 앞으로 개발을 추진하더라도 주민들에게 상처 주지 않는 사업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출처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19110 부산역사문화대전 배병욱 율리·장항 주민들의 망향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