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사대문안은 조선시대에도 과밀화되어서 여러 도시문제를 낳고 있었음. 

인구는 과밀했고 환경도 지저분해졌지.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이후에는 저 상태에서 근대 대도시로 성장하며 과포화가 더 심해졌음. 경술국치 당시 인구 20만이었는데 1940년에는 인구 100만 가까이 되는 대도시로 성장했기 때문. 


총독부가 영등포를 편입한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이미 당시 사대문안의 도심 역량을 영등포와 마포, 청량리 등으로 분산해야 할 필요성이 매우 중요한 까닭이었음. 





사대문안이 맥없이 인민군에 복속되고

유일한 관문이었던 한강철교와 한강대교만으로 그 수많은 인구를 피난시키지 못하면서 전후 사대문안의 안보적 문제점이 거론되기 시작함. 


당시 도심을 사대문안에서 부평, 구로, 영등포 등 한강 이남 평지지역으로 옮겨 수도 신도시를 구축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했음. 


그러나 당시 돈이 없던 정부는 그냥 사대문안 단일도심을 유지함. 







그러나 전후 본격적인 이촌향도가 일어나며 1960년대에만 서울의 인구가 250만명 이상이 증가하는 등 너무 급성장을 했음. 


단일도심이었던 사대문안은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과밀화되었고, 

지금 인도 뭄바이마냥 인구는 많고 전혀 정비되지 않는 심각한 후진국형 대도시가 되었음.


이때부터 서울의 3핵도시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함. 

사대문안을 분산하여 3개의 도심 체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이론이었음. 





1960년대 후반, 3핵은 사대문안-여의도-강남으로 정해짐. 


분산을 위해 행정부는 사대문안, 입법부는 여의도, 사법부는 강남으로 이전하여 3핵을 강화하였음. 


특징은 여의도와 강남은 한강 이남이었다는 것임. 

1950년 한국전쟁을 교훈삼아 국가의 수도기능을 분담시키고, 한남대교 등 여러 한강다리를 만들어 시민들이 빠르게 대피할 수 있도록 한 것임. 




그리고 인구 분산을 위해 서울 각지로 인구를 퍼트리고


1980년대에는 경기도에 신도시를 만들어 서울 인구의 분산을 꾀했는데

이게 그 유명한 1기신도시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