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새만금 건설 당시에는 농민들이 간척농지를 기피하는 경향이 강했음.


갯벌을 간척해서 만든 농지는 십수년이 지나도 염분을 완전히 빼내기가 힘들어서, 


밭은 고사하고 논도 수리시설을 굉장히 잘 조성해서 염기가 올라오지 않게 지속적으로 물을 갈아줘야 했는데.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수리시설과 기술이 허접해서 이게 보통 사치가 아니었음.


20년 전까지만 해도 '문전옥답'이라고 해서 집 가까이 있는 논, 밭을 최고로 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한 '집안'이 30마지기, 그러니까 6000~9000평의 논을 경작하면 엄청난 대농취급 받았음.



그런데 2~30년 사이에 기술이 역변해서, 간척농지에 대한 선호가 완전히 바뀌어버림.


수도작(벼 포함)작물 경작의 기계화율이 96%까지 올라서 이제 부부가 200마지기(4만 평)를 너끈히 경작하는 시대가 도래했고,


97년까지 그래도 도-농 소득격차가 1:0.9 는 따라가던게 이젠 절반도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수준까지 떨어져서 인건비 이슈가 농가 경영의 핵심이 됨.


그래서 간척농지가 수리시설이 좋아져서 물 대는게 껌씹듯이 쉬워지고, 직각직각하게 잘 정리된 덕에 기계를 투입하기 최적이 되면서 농민들의 간척농지 선호도가 떡상함.


반대로 옛날에 알짜로 불리던 문전옥답들은 모양이 이상하거나 기계를 투입하기 어려워서 경작해야 인건비도 안나와서 이젠 줘도 안쓰는 땅이 되어버렸고, 


농민들은 간척지 분양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신청하는 시대가 왔음.


새만금 간척지를 초기안대로 상당수 농지로 썼어도,

2010년대 들어오면 분양은 거의 다 됐을거임.


그럼 대규모 경작 농가들이 쌀 가격을 끌어내려서 한계농지 다수를 경작포기하게 만들었을거고, 

결과적으로 전국 수도작 농지 총면적은 별로 차이 없었을거임.


오히려 수입자유화에도 원가경쟁력을 확보할 농가를 다수 양산할 수 있었을지도 모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