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양대 도시, 서울과 평양은 각각 한강/청계천과 대동강/보통강은 치수 문제로 골치를 앓던 도시임. 대도시 한폭판에 있는 하천들인데 치수는 굉장히 까다로웠기 때문임. 


조선시대에도 한강과 대동강의 치수에 막대한 예산을 썼고, 이 노력은 조선총독부에서도 계속됨. 특히 평양은 서울에 비해 지대가 낮은 도시라서 범람에 더 치명적인 도시였음. 




치수에 제대로 먼저 나선 건 북한임. 


1946년 5월, 북조선임시위원회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평양 보통강 치수사업을 국가적 규모로 진행하였음. 


1단계는 제방을 높이고 준설 작업을 진행하여 보통강 물줄기 방향을 바꾸고 대동강에 합류하게 하도록 수로를 변경함. 그리고 2단계는 약 2km에 달하는 강의 양쪽을 다진 뒤 강바닥을 깊이 파냈음. 


5,000m, 총토량은 42만㎢에 달했던 이 공사에 연인원 57만 9,328명이 동원됨. 이는 당시 평양 시민이 1인당 평균 2회를 참여할 때 가능한 숫자였음. 


이게 가능했던 건 당시 유상동원과 무상동원을 결합한 형태로 진행했기 때문임. 

무상동원은 1년에 20일로 법적 규제 장치를 마련해 남용을 방지하도록 노력하고, 유상동원 시에는 경제적 보상을 철저히 하여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했음. 이 동원력은 홍수 피해를 막고자하는 주민들의 의지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음. 


그리고 조선총독부가 9년 동안 연인원 300만 명을 동원하고도 완수하지 못했던 보통강 개수공사가 2개월도 채 못 되어 완료됨.







전후에는 대동강과 보통강에 유보도(산책로)를 만들었고, 치수는 물론 도시 미관 개선 및 여가공간 제공이라는 성과까지 얻게 되었음. 


이는 북한 초기, 대내외적으로 성공적인 도시개발 사례로 꼽히기도 함. 






서울은 북한에 비해 이 작업이 조금 더 늦었음.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진행된 한강 개발 계획은 한강의 모습을 완전히 바꿈으로서

서울의 양날의 검이던 한강을 완전한 시민 휴식처로 변모시키는 데에 성공하게 됨. 






한강은 1990년대 초반까지도 가끔 마포구 쪽이 범람으로 침수될 정도로 치수가 만만치 않은 하천이었지. 

지속적인 개발과 방파제 겸 한강공원, 사실상 강을 호수화하여 물을 깊게 만들고, 아예 지형 자체를 바꾸는 대공사로 한강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음. 





이어붙인 한강과 대동강. 


이 강을 시민들이 정복하게 된 건 얼마 안 된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