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왕십리동 지도를 보면서 가끔 생각했다.

왜 요만한 땅도 법정동이라고 설정을 해놨을까...

그래서 알아보기로 하였다.


조선시대 때 한성부 산하에는 5부(동, 서, 남, 북, 중)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방(坊)과 계(契)가 있었다.

도성 내에서 방은 현재의 동 만한 크기로, 계는 통 만한 크기로 구획되었고, 도성 밖에서 방은 현재의 구 만한 크기로, 계는 동을 2~3개 합친 것 만한 크기로 설정하였고 그 아래에 리(里) 혹은 동(洞)을 두었다.


그 중 왕십리는 당시 한성부 동부 인창방에 속하던 왕십리계로서, 현대의 신당동, 황학동, 상왕십리, 하왕십리는 모두 이 왕십리계에 속했고, 보통 당시에 왕십리라고 하면 이 왕십리계를 뜻하였는데, 이 당시의 왕십리는 신당동 일대, 그 중 하왕십리라고 일컫는 것이 지금 상왕십리역 일대라고 보면 된다. 그 일례로 왕십리 가구거리가 현재 중구 황학동에 있고, 왕십리곱창이 신당동 쪽에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 왕십리계의 영역은 한양 성곽에서 왕십리오거리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이었는데(을지로7가도 포함됨), 이렇다보니 DDP에서부터 상왕십리역까지는 상왕십리, 상왕십리역에서 왕십리오거리까지는 하왕십리라고 불렀다. 즉, 지금은 DDP 지나서 좀 가야 왕십리가 나온다는 인식이 있지만 당시에는 광희문 밖으로 나가자마자 바로 왕십리였던 것이다.


이 둘은 1911년에는 면까지 갈라져서 상왕십리는 동대문구와 같은 인창면으로 들어가고, 하왕십리는 두모면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3년 후 같은 인창면(당시 성동구 북부의 왕십리, 마장, 사근동은 인창면 소속이었음)으로 개편되었다.


해방 이후부터는 계라는 행정구역이 사라지고 모두 동으로 바뀌면서 왕십리의 영역은 축소되기 시작한다.

비록 왕십리계는 사라지고 신당동과 왕십리동이 분리되어 버렸지만 왕십리동의 영역만 해도 지금의 중부소방서(신당역) 인근의 무학동과 황학동, 신당5동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해방 이후 상왕십리동에서는 행정동으로 현 황학동 서부에 현인동을, 현 황학동 동부와 현 상왕십리동에 인창동을 두어 관할했고,

하왕십리동에서는 홍익동과 도선동, 그리고 청계벽산아파트 쪽에서 왕십리뉴타운 동부 영역을 당현동으로, 왕십리로 남쪽을 무학동으로 두어 관할했다.


즉, 하왕십리동의 영역만 해도 중부소방서부터 성동구청 앞까지였고 상왕십리동의 영역도 그닥 작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1975년에 신설동역에서 금호동을 잇는 난계로가 개통되면서 그 서쪽에 있는 영역이 싹둑 다 잘려나갔다.


그 결과



요만하게 줄어든 것이다

난계로 서쪽에 있던 현인동은 전역이 황학동으로 넘어갔고, 인창동마저도 중간이 싹둑 살려서 서쪽은 황학동으로 넘어갔다. 위 지도에서 남은 지역이 바로 구 인창동의 동부 지역인 것이다.


하왕십리동도 무학동 영역 중 무학봉 서쪽에 있는 지역을 그대로 신당동으로 편입시켰다.




지금도 중구에는 무학동이 남아있다.

그런데, 왕십리와 떨어져도 한참 떨어진 곳에 덩그러니 있는데 원래 신당역에서 상왕십리역까지를 관할하는 지금의 신당5동 영역은 원래 무학동과 문화동의 관할 구역이었고, 현재는 대부분 영역을 신당동에게 빼앗겨 잃고 중부소방서와 그 주변만 관할하는 작은 동이 되었다.

여기까지가 하왕십리동이었던 것이다.


이렇다보니 왕십리의 범위는 사실상 옛 하왕십리만을 이르게 되었고, 왕십리라고 하면 전풍호텔이 있던 도선동 일대로 바뀌게 된 것이었다.


그러다가 왕십리역 민자역사가 완공되면서 왕십리 상권이 완전히 그리로 넘어갔고, 근 10년 들어서부터는 왕십리라고 하면 왕십리역을 이르게 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왕십리역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왕십리의 영역이 아니었던 행당동 관할 지역에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