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금원이라고 매일같이 사람을 조지진 않는다. 어디까지나 일은 일이고, 일을 하다 보면 가끔은 한가한 날도 있기 마련이다. 이 날 또한 그런 한가한 날이었다. 리타 아르세니코가 선반에서 위스키 잔 하나를 꺼내들 만 했다.


"앗, 안 돼요 언니! 근무 시간, 근무 시간이잖아요!"


쯧, 혀를 차며 아르세니코는 뒤에서 감히 지적을 한 사람을 째려보았다. 긴 흑발을 대강 양갈래로 묶은 소녀가 둥그런 눈으로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언제 손님이 오실지 모르는데 술은 안 되죠! 외근, 아니 출장인가? 아무튼 돈 받으러 나갈 수도 있고요!"


"꼬맹아, 아직은 만기일 넉넉한 사람들밖에 없는데 내가 뭣하러 나가냐? 그리고 새로 돈 빌리러 오는 호구들은 호라이즌 담당이다. 난 내가 맡은 일 아니면 안 해."


그 말에 '꼬맹이'라고 불린 소녀는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풀이 죽은 듯 입을 닫았다. 아르세니코는 한숨을 뱉으며 잔을 다시 선반에 올려놓았다. 표정이 밝아지는 소녀를 보며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알기 쉬워도 너무 쉬운 녀석.


잔을 내려놓고 사무소 의자에 적당히 걸터앉으려니, 소녀도 다른 의자에 앉고는 바퀴를 굴려 그 곁으로 다가왔다. 의자 바퀴는 타는 게 아니라 편하게 끌라고 있는 거라고, 하는 생각을 죽였다. 기운 넘치는 녀석에게 괜한 소리를 해봐야 오히려 기를 빨리기만 할 터이니.


"일거리 없이 있으려니 심심하네요 언니-. 어르신들이 은퇴하고 나서도 굳이 가게를 차리거나 하는 이유를 알 거 같아요. 한참 열심히 일하다가 일거리가 없어지면 얼마나 지루할까요?"


"그래, 네가 얼른 빚 청산을 하고 나가려면 뭐든 일거리가 잔뜩 들어와서 성과를 내야지."


"아, 아하하... 네! 얼른 돈 벌어서 갚아야죠!"


톡 쏘는 말에 머쓱한 듯 웃다가, 이내 빙긋 웃으며 하는 대답. 아르세니코는 눈살을 찌푸렸다. 망할, 또 괜한 소리를 했군. 자신이 대화에 소질이 없다는 건 참 불편할 뿐더러, 짜증나는 점이었다. 대표인 호라이즌이 없었다면 이런 대부업이나마 할 수 있었을지.


자기비하로 구겨진 표정에 겁 먹은듯한 상대를 보며 아르세니코는 어떤 말로 화제를 돌릴지 생각했다.


"썅, 술 한 잔 못 마시니 머리가 안 돌아가네."


"아니에요 언니! 언니는 술 없이도 항상 똑똑하고 명석하신걸요! 대표님도 언니 같은 사람 어디서 못 만날 거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술 없이도 멋지게 살 수 있어요! 제가 옆에서 응원할게요 언니!"


"술 없이 멋지게 살 거라고 그러지 마라 꼬맹아. 인간은 의식주, 옷과 밥과 술 없이는 못 사는 생물이야. 적어도 성인이 되면 말이다."


"주거지라고 주 아니었어요!? 제가 학교는 중퇴했어도 그 정도는 배웠어요!"


농담 따먹기 같지만 한없이 진지한 토의를 하는 와중에, 익숙한 기계음과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소녀가 의자 축을 휙 돌리며 사무소 문을 돌아보았다.


"대표님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역시 대시가 있으니 사무실에 활기가 넘치는군요. 능력이 강철을 변형하는 거라고 강철 같은 여자랑 FL 모델 청소로봇만 있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빈정대는 기계음에 소녀가 히죽 웃는 반면 아르세니코는 팔짱을 끼며 대표, 호라이즌을 마주보았다. 대표가 얼마 전에 마련했다는 청소로봇 기체는 LED 화면으로 멍청해보이는 눈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고속 충전기를 분실하기라도 했나? 대표님께선 팔자가 아주 늘어지시는군."


[혹시 꼬우십니까 휴먼? 분명 난 당신에게 대표를 먼저 권했을텐데요. 사람보단 기계가 더 합리적이니 사채업에 제격이라고 한 건 리타 당신입니다.]


"싸가지 없는 쇳덩이 자식. 서류 작업은 대충 다 끝내서 네 책상에 뒀으니 마무리나 해놔. 나 집에 간다."


"그냥 가도 되는 거에요!? 근무 시간인데 그래도 돼요!?"


당황한 듯 큰 소리를 내는 대시를 흘깃 보면서 수금원은 대꾸했다.


"우리가 무슨 대기업 은행도 아니고, 기껏해야 사채꾼인데 뭘 더 해? 저 깡통이랑도 창업할 때부터 합의한 거야. 할 일 다 하면 집에 간다고. 그만큼 수당에서 까도 상관 없다는 점까지 말이야."


"수당을 까요!?"


엉뚱한 데서 놀라는 소녀와 그 반응에 한숨을 내쉬는 성인을 보며 호라이즌이 빙긋 웃었다.


[수금하러 다니면서 초과수당 요구할 건덕지가 없어지니 서로 편하고 좋습니다. 인건비에 쩨쩨하다고 욕 먹을 일도 없으니까요.]


"아무튼, 나 슬슬 간다. 꼬맹이 잘 데리고 있어."


시덥잖은 설명을 적당히 끊고 밖으로 나서려는 아르세니코를 대표가 [잠깐], 하고 불러세웠다. 문 손잡이를 쥔 채 수금원은 고개만 까딱 돌렸다.


"잠깐은 무슨. 또 뭐야?"


[오늘은 이왕 가는 거 대시랑 같이 퇴근하십시오 휴먼. 대표 지시입니다.]


"저, 저도 퇴근이요? 저 그럼 수당은요? 수당 까는 건 아니죠 대표님?"


"...뜬금없이 뭐?"


호라이즌의 합성 음성에 두 여성은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호라이즌이 특유의 어투로 말을 이었다.


[리타. 어차피 오늘은 여기에 대시가 있어봐야 회삿돈으로 밥값만 나갑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당신 봉급으로 은혜 한 번 베푸는 게 서로 윈윈 아닙니까?]


"윈윈은 얼어죽을, 일방적으로 나만-"


"와, 언니! 저, 저저, 그 건너편 카페에서 티라미수를 먹어보고 싶었어요!"


-귀찮은 일이잖아, 하는 뒷말을 잘린 아르세니코는, 말을 자른 대시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뭐가 신난다고 저렇게 헤벌쭉 웃는 거야, 저 멍청한 꼬맹이가.


담뱃갑을 찾아 주머니를 뒤지면서, 리타 아르세니코는 씹어뱉듯 말했다.


"망할 꼬맹아, 최소한 피자를 먹자고 하라고 이럴 때는."


2편